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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대흠 李戴欠
1967년 전남 장흥 출생.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상처가 나를 살린다』 『물 속의 불』 『귀가 서럽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코끼리가 쏟아진다』 등이 있음.
e-siin@hanmail.net
Z
어떻게 해야 불행해질 수 있을까?
너는 묻는다
아침에 비 내리더니 그쳤다
비보다는 빗소리가 더 좋은 나는
비를 피하고
빗소리 듣는다
빗소리에는 먼 허공의 한숨 소리가 뭉쳐 있다
내가 푸아 큰 숨을 내뱉으면
밀려난 허공이 조금씩 조금씩 다른 허공을 밀겠지
달이 자라는 정원이 있다면 좋겠다
너는 말한다
보이는 달은 달 나무의 그루터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세상에서
달을 심는다는 건 너의 미소를 나의 표정에 접목하는 것
달이 커다랗게 자라길 기다리는 동안, 동안이 생긴다는 게 좋은 거지
사물로 바꿀 수 없는 감정은
언제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아프지 마
다치지 마
죽지 마
불행이 왔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은 재생된다
너는 국수를 먹고
나는 수박을 먹으면서
아그배나무꽃이 피었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쌀을 안칠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삶이란 건 펼쳐놓으면 누더기 같아
그래도 정들었으니 입어보는 거지
이런 누더기를 견딜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지?
누더기를 걸친 채 걸어간다
발끝에 닿는 민들레꽃 향기도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내 삶이라고
민들레의 삶을 해칠 수는 없다
그것만은 지키자!
손을 줘봐
수국이 피었습니다
어제는 집이었는데
오늘은 공터다
무너지는 건 쉽다
재활용하지 않을 때는
부, 순, 다
고장 난 의자를 분해한다
이거 비싼 의자네
뒤로 젖힐 수도 있어
튼튼해
앉은 자리를 떼어내고
합판을 얹는다
의자에 앉은 너는 흔들거린다
너의 부재를 상상하면
공터가 떠올랐다
떨어진 한장 장미 꽃잎으로라도
있었으면,
있었으면 싶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헤어짐이 아니라
사라짐
집이 있던 자리엔
옆집 에어컨 실외기만 남아 있다
실외기 전선 그림자는 자전거가 되었다
그림자 자전거는 빵꾸 나지 않는다
가자
내겐 돛이었는데
네겐 덫이었다니
멈추자는 너
돛, 닻, 덫으로 모음을 바꾸는 동안
모음이 편견의 원천이라 생각했다
너는 합판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저물어도 좋겠다
는 생각에
수국이 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