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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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범 韓在範

2000년 광주 출생. 2019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가 있음.

just_blank00@naver.com

 

 

 

저스틴이다

 

 

나는 저스틴이다 저스틴은 비버다 비버는 무리생활을 하고 야행성이라고 내가 읽은 책에 쓰여 있다 하지만 비버는 비버다 비버는 저스틴이다 저스틴은 인간의 이름이지만 여기선 비버의 이름이다 저스틴은 나다 그런데 쟤도

 

저스틴이다 저스틴은 나와 다른 생물이다 쟤는 비버라는 말도 모르니까 자신을 부르는지도 모르는 비버인데

저스틴이다 하필이면 비버는 무리생활을 하고

 

저스틴은 댐을 짓는다

망치 같은 꼬리로

나는 댐을 부순다 흐르던 강이 흐르지 않는다 내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댐 강을 잠근다 한때는 나무였던 것이다 나는 두드린다 이대로 두면 여기는 온통 습지가 될 거야 두드릴수록 조금씩 무너져가는 댐 이것이 나의 노동이다 점차 분해되며 댐에서 다시 나무가 되는 파편들 가라앉지 않는다

떠오르기 쉬운 소재다

 

저스틴이 가져왔겠지

여기도 한때는 울창한 숲이었으니

여기저기 흩어진 나무토막 사이로 저스틴이 떠다닌다 물에 불은 책의 한 페이지 같다 읽을 수 없다 저스틴의 낮잠 시간이다 나는 그렇게 읽는다 비버는 야행성이고 숲이나 강에서 산다고 내가 읽은 책에 쓰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너 왜 여기 있니

더이상 숲도 강도 아닌데

나는 저스틴이다 저스틴은 비버이지만 나는 저스틴과 다른 생물이다 이곳은 숲이자 강이 있던 곳이고 지금은 나무였던 것만이 가라앉지 않고 떠다닌다 아까까진

저스틴이었는데

 

저스틴은 숲에서 누군가 부르던 이름이다 애타게 찾던 이름이다 저스틴은 비버의 이름이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아닌가 나는 그렇게 읽었는데 이 책이 아니었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기에는 비버가 없다

저스틴인 줄 알았던

 

저스틴이다 나는 책을 덮는다 숲을 닫고 숲을 빠져나간다 내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책더미 한때는 숲이었던 것이다 이곳을 지키라고 나는 고용되었는데 나의 것은 아니다 모두 저스틴의 책이다 저스틴은 나다 저스틴이 나를 부르는데 흐르던 강은 흐르던 강이다 여기에 나 혼자다 가끔 내가 있다는 것을 잊은 채 밖에서 문을 잠근다

 

 

 

그 말 취소해

 

 

응 알았어

바로 취소

할게 그럼 이제

돌아갈 수 있나 우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럴 수 있지 너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너는 침대에 누워 있다 떨어져 있어 사이가 좋다 마주 보는 두 창을 열어둬 환기가 잘된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우리 집의 소파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

너에게 해준 적은 없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을 다 알고 계셨다 이 집에 살지도 않으면서

 

여기야 내가 말했던 데가

그렇게 네가 날

끌고 온 여기

 

소파 같은 건 없다 너는 무인호텔이라고 하고

나는 싸구려 모텔이라고 한다 24시 무한 대실이다 소파에 누우면 내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는데

지난 일이다 우리 여기 온 적 있지 않나?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아니다 그런 적이 내게도 있을 수 있지만

누가 버린 건 쓰는 게 아니야 할머니에게 길러지면서 수도 없이 들은 얘기 어쩌면 할머니보다 오래됐을

 

소파를 밟고 동동

뛰는 아이를 보곤 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집에 혼자 남아

 

나의 오래된 친구다 나는 네가 가족이 없는 줄 알았어 가족 얘기를 한번도 안 하길래 네가 말한 적 있는데

너는 말하지 않는다 소파가 없는 곳을 보면 소파가 떠오른다 나는 네가 네 얘기를 안 해서 좋았는데

네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없던 것처럼 소파는 사라져 있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는데 한번은 집에 들러야 할 일이 꼭 생긴다 유품을 정리해야 한다든가 내 남은 짐들을 다 버리든 갖고 가든 해야 하는 일이 내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나는 아무 짐도 챙기지 않아서

그대로 몸만 빠져나간다 누군가 있어야 할 곳에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바람 한점 없는 한적한 거리

누구도 이곳을 통과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유령을 보는 건 아직 이 세상에 속하지 못해서래 네가 말했는데

너는 말하지 않는다 가끔 영혼 없이 웃는다

 

몸을 침대 위에 남겨두고서 전화가 울린다 대실 시간 곧 끝납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너는 전화를 끊는다 우린 돌아갈 수 없어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잠시 소파에 누워 있다 터무니없이 낮은 천장 아래 나를 남겨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