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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병운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장편소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등이 있음.

byungwound@naver.com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1

 

아침 강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가 부엌과 화장실을 잇는 길목에 앉아서 머리를 칠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엄마는 일을 나가기 시작한 그해부터 집에서 직접 염색을 했는데, 경력이 거의 25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정수리 부분이나 귀 뒤쪽은 대충일 때가 많았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른 해치우자 싶어 바짝 붙어 앉자,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등 뒤로 비닐장갑과 솔을 넘겼다. 커트보를 두르지 않은 탓에 목덜미 주변으로 가루가 달라붙어 있었고 장갑이 땀으로 축축했다. 염색방에 가면 만오천원이라는데 왜 사서 고생일까, 그 돈을 아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걸까 생각하며 솔질을 하는데, 이런 내 생각이 빤했는지 엄마가 밖에서 쓰는 약은 두피 건강에 좋지 않다며 지금 쓰는 인도산 천연 헤나를 예찬했다. 그러고는 수순처럼 내게 염색을 권했다. 그렇게 새치가 많으면 사람이 추잡스러워 보인다고도 했고, 이제 너도 적은 나이가 아니니 관리를 해야 한다고도 했다.

남의 눈을 신경 쓰는 듯 말했지만 사실 엄마는 해를 거듭할수록 내 얼굴에서 점점 더 아빠의 모습이 선명해지는 게 못마땅한 것이었는데, 아빠처럼 일찍 세어버린 머리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요즘 들어 부쩍 염색 얘기를 꺼냈다.

말 나온 김에 너도 지금 할래?

……

응? 보이는 데만이라도 해. 내가 해줄게.

……

나는 싫다는 뜻이 분명히 전해지도록 엄마의 머리 각도를 힘주어 재조정하고는 빗질로 넘어갔다. 엄마가 먼저 칠해놓은 자리마다 염료가 떡져 있었다.

말은 또 안 하는 거야?

엄마가 잠시간 이어지던 정적을 끊으며 물었고,

어, 안 하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생각만 했다.

얼추 마무리된 듯하여 장갑을 벗었을 때 식탁 위에 올려둔 엄마의 전화기가 울렸다. 급하면 또 걸겠지 하고 안 받았더니 일이분쯤 뒤에 한번 더 울렸고, 확인해보니 홍주였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엄마의 귓가에 전화기를 가져다댔다. 염색약이 묻지 않게 전화기를 살짝 떨어뜨렸더니 홍주의 말소리와 숨소리가 내게도 잘 들렸다.

응, 홍주야. 무슨 일이야.

쉬는 날 죄송해요.

홍주는 방금 원기를 등원시키고 출근하는 길이라며 사정을 설명했다. 갑자기 회사에 일이 터져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됐다고, 최대한 노력을 하겠지만 퇴근 역시 많이 늦어질 것 같다고. 노동절부터 어린이날 대체휴일까지 내리 엿새를 쉬어보겠다는 홍주의 야심 찬 계획은 이로써 실패하게 됐는데, 그 말인즉슨 엄마의 연휴도 홍주의 연휴처럼 졸지에 중단되었다는 뜻이었다.

엄마는 홍주가 우리와 다시 한동네에 살게 된 재작년부터 원기를 돌봤는데, 홍주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원기의 등하원을 시키고 식사를 챙기고 그밖의 필요한 집안일을 돕는 게 엄마가 요즘 하는 일이었다. 엄마에 따르면 홍주는 이전에 엄마가 일했던 그 어떤 집들보다도 일당을 후하게 쳐주는 편이었다.

너무 급하게 말씀드렸죠?

그러네, 좀 급하다.

아, 오늘 어려우세요?

아니, 어려운 건 아니고. 원기 우리 집에 있어도 되려나?

그럼요, 되고말고요.

엄마가 동의를 구하듯 나를 힐끗 쳐다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같이 밥을 먹고 연도를 바치는 게 전부일 테니 거기에 원기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염색 도구를 마저 정리하고 걸레질을 하는데 홍주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엄마의 전화기가 아닌 내 전화기였고, 통화가 아닌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아줌마 말이야. 무슨 일 있으셔? 요새 원기 때문에 힘들다고 하시지?]

[응? 원기가 왜?]

[말을 잘 안 듣거든. 근데 아줌마가 못 도와주시면 나 정말 곤란해져.]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응, 무슨 일 없고, 원기는 말을 안 들어도 너무 예쁘고, 그냥 오늘은…… 아빠 기일.]

 

*

 

오늘 선산행은 두시간하고도 십오분이 걸렸다. 행정 구역상 경기도이지만 버스를 두번이나 갈아타고도 삼십분쯤 더 걸어 올라야 하는 외가의 선산. 아빠 장례를 치렀을 때만 해도 이쪽으로는 버스도 다니지 않았는데, 그사이 인근에 리조트가 들어서고 캠핑장이 생기더니 이제는 터널을 뚫을 예정이라고 했다. 십수년 전부터 개발이 되네 마네 말이 많더니만 결국은 되는 모양이었고, 올해가 가기 전에 선산 전체를 이장하는 게 이씨네 장손들의 숙제였다.

아빠의 자리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무덤으로부터 오십보 정도 떨어진 수풀 안에 있다. 듬성듬성 심긴 소나무 가운데 유독 둥치가 가늘고 가지가 굽어 있는 게 우리가 아빠로 삼은 나무이고, 이 나무 밑동에 소주 두병을 고루 붓는 게 내가 엄마를 대신해 하는 일이다. 엄마는 무릎 연골판이 파열된 이후로 산행이 어려워졌고, 나는 마침 아빠의 10주기이기도 했던 그해를 기점으로 다시 이곳을 찾게 됐다. 한때는 이쪽으로는 머리도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였는데, 그 다짐을 번복하는 미래는 절대로 없을 거라고 자신했던 나였는데……

아빠의 유골을 이곳에 뿌리게 된 데는 내게도 적지 않은 지분이 있다. 그 시절 나는 아빠를 ‘아빠’ 대신 ‘그 사람’이라고 부르거나 아예 부르지 않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엄마는 내게 짐이 될지도 모를 일은 애초에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무덤이나 봉안당을 마련해두고 방치할 바에는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고, 당시 장례 전반을 진두지휘했던 큰외삼촌의 제안에 따라 외가의 선산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말이 좋아 자연으로의 회귀지 실제로는 아빠를 밖에다 내다버리는 것 같아서 내심 찝찝했다는 엄마에게 양친이 묻힌 선산은 그나마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덜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평생 소원했던 처가 사람들과 죽어서까지 이웃하는 건 아빠에게 다소 잔인한 처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데, 그때는 아빠의 입장을 헤아릴 경황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선택지를 찾아보려는 의지 또한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 나무를 아빠로 삼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한 의문은 엄마와 나 사이에 늘 있었다. 뼛가루를 뿌리는 산골 작업이 이루어지던 그 순간에 정작 엄마와 나는 수풀 밖에 있었으니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달리 아직 화기가 채 가시지 않은 골분함에 손을 넣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공포스러웠는데, 결국 우리는 한두번 시늉만 하고는 뒤로 물러섰고, 그 일까지 대신 맡아준 큰외삼촌의 뒷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했다.

여길 또 올 수 있을까. 이제 선산은 더는 선산이 아니게 된다는데 과연 그전에 다시 오는 수고를 할까. 물론 마음만 먹으면 그사이 한번이 아니라 두번 세번도 더 올 수 있을 테지만, 그런 마음은 기일이 아니면 좀처럼 먹어지지 않는 법이니까.

나는 돌아가기 전 엄마가 부탁했던 나무 사진을 여러장 찍어 보내고는 눈앞의 풍경을 찬찬히 바라봤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만 같았고, 젖은 흙냄새와 나무껍질 틈새로 새어나온 송진 냄새, 그리고 햇볕에 말라가는 바늘잎 냄새를 폐 속까지 한껏 들이마셨다. 수관과 수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고, 멀리서 이름 모를 새소리와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자리를 정리하고 무덤이 있는 양지쪽으로 나오자 홍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엄마에게 보낸 줄 알았던 나무 사진이 홍주와의 대화창에 버젓이 남아 있었다.

[벌써 거기까지 간 거야? 아저씨한테 내 안부도 전해주도록.]

 

*

 

홍주와는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부터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까지 6년 반을 한집에서 살았다. 아빠의 퇴직으로 생활비가 끊긴 엄마는 돈이 나올 구멍을 궁리하던 끝에 광채에 달린 문간방을 세놓았는데, 거기에 살게 된 사람이 홍주와 홍주네 할머니였다. 홍주네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는 오래전 미제 보따리장사를 함께한 인연이 있었다.

홍주네 방은 애초에 방이 아니라 창고였기에 수리를 해도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절했다. 취사용 싱크대가 있기는 하나 방바닥이 허리 높이까지 올라와서 흡사 다락 같았고, 창문이 길가로 나 있는데다 불이 잘 들지 않아 추위에 취약했다. 이따금 낯선 어른들이 홍주네 아빠 이름을 들먹이며 찾아와서 그 방을 들여다봤는데, 그들 중 다시 찾아온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고 언젠가 홍주는 말했다.

홍주와 나는 집 안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어울렸으나 집 밖에서는 아니었다. 우리가 살던 그 골목을 벗어나면 거의 아는 체를 안 했고, 특히나 학교에서는 더더욱 서로를 의식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 우리가 한집에 산다는 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본의 아니게 알게 된 서로의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잘 봐, 나는 너를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것처럼 너의 비밀도 모르는 척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의 비밀은 안전해. 눈이 마주치거나 마주치지 않은 채로 교실에서,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스쳐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 시절 홍주의 비밀이 남의 집 창고에 더불어 살아야 하는 지독한 형편이었다면 내 비밀은 아빠의 장애였다. 아니, 알코올중독이었던가. 둘 중 무엇이 더 창피했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갔다. 아빠는 술을 마셔야만 말을 할 수 있었고, 말을 하기 위해서 자꾸 술을 마셨으니까. 그건 선천적 청각장애가 있으면서도 철저히 청인의 사회에서만 생활해온 아빠가 구어와 필담을 거쳐 선택한 소통방식이었고, 유년의 나는 가장으로서의 지위와 성인 남성으로서의 힘을 앞세워 나를 자기 방식에 복속시키고자 했던 아빠에게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아빠는 아주 많이 취했을 때도 엄마나 내게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에 닿는 집기를 부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거의 포효에 가까운 괴성을 내질렀고, 그간 세상이 아빠에게 음성언어를 강요해왔던 것에 대한 복수처럼 우리에게 뭉개진 발성과 부정확한 발음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데프보이스를 경청하도록 강제했다. 그리고 그 대화 아닌 대화는 밤새 이어질 때가 많았다. 제발 좀 자고 싶은데도 끝나지를 않아서, 잠들면 깨우고 다시 잠들면 깨우는 방식으로 집요하게 이어져서 차라리 맞아도 좋으니 그냥 빨리 끝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빠에게 그렇게 붙들리는 사람은 언제나 엄마였으나 가끔은 내가 되기도 했다. 내가 아빠를 양말에 난 구멍처럼 부끄러워한다는 걸 미처 숨기지 못했던 날. 아빠를 잘못 말린 빨래에서 나는 냄새처럼 힘들어한다는 걸 감추지 않았던 날. 아빠를 외부인, 침입자, 그림자, 없는 사람 취급했던 날. 그런 날이면 엄마는 나를 광채로 피신시켰고, 홍주와 홍주네 할머니는 내게 기꺼이 누울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안채에서 큰 소리가 나는 날에는 광채에서도 쉬이 잠들 수가 없었는데, 그때 홍주는 보물처럼 애지중지하는 워크맨과 이어폰을 내 앞으로 밀어놓고는 먼저 벽 쪽으로 돌아누웠고, 그래도 내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면 자기 이불을 통째로 넘겨주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어느덧 학교에 갈 시간이었고, 우리는 안방이나 마루 한편에 물에 흠뻑 젖은 솜이불마냥 구겨져 있는 아빠를 못 본 체하며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안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차례로 씻었고, 홍주네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었으며, 어제 부려놓았던 가방을 그대로 챙겨 들고는 대문 밖으로 나섰다. 물론 서로 다른 집에 사는 것처럼 약간의 시차를 두면서.

 

 

2

 

서울로 돌아와서는 K를 만났다. 버스와 지하철을 연이어 코앞에서 놓치는 바람에 조금 늦었더니, 먼저 도착한 K가 막걸리와 도토리묵 무침을 시켜놓고는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테이블 아래로 숨기듯 내려놓은 화면에 정신이 팔려서는 내가 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눈을 들었다.

어, 빨리 왔네? 더 걸릴 줄 알았는데.

……

배고프지? 감자전이랑 두부김치 어때? 괜찮다면 끄덕여주시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나무 발로 가려놓은 천장과 황토벽을 한번 둘러봤다. K와 헤어지고는 처음 와보는 것이었는데, 메뉴판에 덧붙여놓은 가격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주문과 요리, 서빙, 계산까지 모두 한분이 도맡고 있어서 K가 추가 주문을 위해 주방 앞으로 갔다. 주방 안에서 얼핏 보이는 얼굴이 언젠가 우리를 부자관계로 오해했던 그 이모님인 듯했다.

다른 날 봐도 되는데. 진작 말했으면 날짜를 바꿨지.

다시 자리로 돌아온 K가 혹시 하는 표정으로 술을 권하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금언과 금주가 아빠의 기일마다 반복하는 내 나름의 의식이라는 것을 K는 알았고, 그걸 알아도 우리가 기일에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왠지 좀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K는 오늘 선산은 어땠느냐고 묻더니, 어제 내린 비로 흙이 좀 미끄러웠을 것 같다는 둥, 하지만 날이 흐려서 그렇게 고생스럽진 않았을 것 같다는 둥 혼자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저 얘기를 들은 게 전부이기는 해도 가끔가다 너희 아버지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고 했다. 뉴스 화면 하단에 수어 통역사가 등장할 때나 시장 초입에서 공갈빵을 팔며 수어로 대화하는 청각장애인 부부 앞을 지날 때 문득 내가 토막토막 꺼내놓았던 아버지 얘기가 떠오른다고.

그러니까 장애는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할머니의 양육방식과 그 방식을 내재화하여 줄곧 농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려 했던 아빠의 역사. 아빠는 구화 교육을 받느라 수어는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고, 수어를 쓰는 사람은 짐승처럼 보인다며 애써 그들과 거리를 두려 했다. 그게 자신의 언어를 잃고 소통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청인의 삶에 동화되려고만 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어도 K에게는 아빠 얘기를 곧잘 하곤 했다. K가 함께 사는 자기 아버지 얘기를 할 때마다 나도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자꾸 털어놓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K의 어떤 면면에서 나는 아빠를 겹쳐볼 때가 있었다. 청각장애인이지만 자신을 농인으로 정체화할 수 없었던 아빠와, 남성과 섹스를 하는 남성이면서도 자신을 ‘이쪽’으로 눙칠 뿐 게이로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K. 농인 커뮤니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왔으면서도 그 안으로 진입하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던 아빠와, 휴게텔이나 DVD방처럼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도 낙인찍힌 공간에서만 사람을 만나왔던 K.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가 했던 아빠의 얘기 대부분은 결국 농인 문화와 청인 문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아빠가 스스로를 어떻게 해쳤는지, 지속되는 자기혐오로 주변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로 귀결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K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난감한 표정으로 골똘해지곤 했다.

아, 맞다. 까먹기 전에.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모든 메뉴를 한입씩 맛보았을 때 K가 옆자리에 두었던 쇼핑백을 내게 건넸다. 1리터짜리 유리병 두개에 가득 담긴 아로니아 원액이었고, 여성 건강식품이니 어머니에게 꼭 드리라며 효능 몇가지를 나열했다. 그러고는 드셔보시고 좋다고 하면 말만 하라고, 매달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K는 두해 전 치매를 앓는 아버지와 함께 고모네 일가가 터를 잡은 단양으로 내려갔다. 자꾸만 사라지는 아버지를 홀로 돌보기가 더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고, 처음 1년은 고모네 식구의 도움을 받다가 다음 해부터는 인근의 요양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병원비와 간병비, 생활비 부담에 주중에는 조경 자재를 운반하고 주말에는 고모부가 운영하는 아로니아 농장에서 일손을 돕는 게 요즘 K의 일상이라고 하는데, 그사이 탈모도 더 심해지고 멀쩡하던 위 어금니도 빠졌지만 그래도 서울에 살 때보다는 훨씬 낫다며 K는 웃었다.

잠시 후 K가 뭐 하나만 봐줄 수 있겠느냐고 묻더니 주저하듯 전화기를 내밀었다. 데이팅 앱에 걸어둔 자기 사진이었고, 입었지만 다 입은 건 아니어서 괜히 주변을 한번 살피게 됐다. 사진 속 K는 아래쪽을 쳐다보는 바람에 턱살이 약간 접힌 채로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는데, 살짝 처진 가슴과 점처럼 작게 박힌 젖꼭지, 힘을 과도하게 준듯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배까지 모두 내가 기억하는 K의 몸 그대로였다. 이런 앱에다 얼굴 사진 몸 사진 거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고, 이렇게 사는 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이토록 당당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고 거북해하던 사람이 바로 K였는데……

내릴까? 별로지?

……

왜 말 거는 사람이 없을까?

K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고,

그래도 거울은 좀 닦고 찍지.

나는 생각하며 화면 하단의 탭을 끌어올렸다. K의 프로필에는 비교적 얼굴이 잘 드러난 사진이 한장 더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단체 사진에서 자기 얼굴 부분만 확대해 캡처해둔 것이었고 그마저도 찍은 지 20년은 더 되어 보였다. 그리고 자기소개란에 적어둔 문구는 ‘죄송합니다. 자주 지웠다 깔았다 합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일단 사과부터 하는 습관은 여전한 것 같았다.

나는 곧장 내 전화기에 깔려 있는 데이팅 앱을 열었다. 그리고 거리가 ‘0미터’로 표시되는 K와의 대화창을 활성화시켰다.

[안녕하세요. 어떤 사람 찾으시나요?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이윽고 내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K가 피식 웃더니 답장했다.

[사진보단 실물이 더 낫다고들 하네요.]

[확실한가요?]

[그럼요. 만나서 확인해보시죠.]

[아, 제가 일틱하진 않은데…… 감당 가능하신지?]

[끼 없는 게이는 저한테 별 매력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저는 비선호를 비선호한답니다.]

[아하, 네에. 어련하시겠어요.]

나는 이쪽 세계의 문법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K의 새로운 면모에 헛웃음이 났고, 이 얼마나 장족의 발전인가 싶어서 K를 넌지시 건너다보게 됐다. 짝을 찾고 있음에도 그리 외로워 보이지 않았고, 자존감이 낮아질 법한 상황임에도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런 K가 낯설게 느껴지면서 조금 서운해졌는데, 그건 이제 K에게는 내가 필요치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감정이기도 했다. 내가 아니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K나 철저하게 혼자인 것만 같은 K는 이제 더는 없구나 싶었고, 진작 멀어졌음에도 그보다 더 멀어진 듯한 기분에 잠시 아득해졌다.

아니, 너한테만 괜찮으면 뭐 하냐고.

그때 K가 전화기를 뒤집어놓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 늙어서 쌤통이다 싶지? 배가 불러서 아주 천치 짓을 하더니만 당해도 싸다 싶지?

……

표정과 말투, 어조는 농담처럼 가벼웠으나 내용은 아니었고, 나는 K의 자책과 자조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멋쩍은 웃음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어때? 만나는 사람은 있고?

……

있다면 끄덕여주시고.

……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K의 반응을 주시했다. 심상한 표정이었으나 오른쪽 뺨에만 패는 보조개까지 감추진 못했고, 그게 내게는 일말의 여지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거기에 그런 의미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K는 점점 닫힌 얼굴이 되었다. 허공에 시선을 걸어둔 채로 어떤 장면을 그려보는 것 같았고, 그러다 미끄러지듯 아래로 향하던 눈길을 잠시간 내 머리에 두기도 했다.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무성해진 새치를 의식하며 보란 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우리가 만났던 그 시절에 내가 한살이라도 더 많아 보이고 싶어했다는 걸 K는 알고 있을까.

이제는 말이야. 너도 괜찮은 사람을 좀 만나봐.

그 순간 K가 다정한 미소와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막아서며 말했다.

나 같은 사람들 말고. 아빠 같은 사람들 말고.

……

더 늦기 전에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진짜 사랑을 해보라고. 너는 그래도 돼.

 

*

 

퇴근 시간을 피했는데도 버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배차 간격이 이십분에 달하는 지선버스였고, 내가 탄 이후로도 하차객보다는 승차객이 더 많아서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가방을 앞으로 둘러메고 등받이를 손잡이 삼아 움켜쥐는데, 내 앞에 나란히 앉은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우와, 하면서 창밖을 내다봤다.

차창 너머의 하늘은 짙은 황금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저무는 태양이 서서히 흐르는 구름 뒤에서 나타났고, 낙조에 물든 빌딩과 가로수가 광택을 입은 것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나는 버스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빛이 아이들의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간혹 교복 차림으로 무리지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비척대며 기어나오는 생각에 감은 눈 속에서만 펼쳐지는 그 장면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학원 친구들과 인근의 분식집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십분. 그사이에 컵 떡볶이와 순대꼬치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남은 수업을 들으러 교실로 돌아가는 것이 해 질 무렵의 내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홀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냐하면 분식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문방구 앞에 아빠가 쓰러져 있었으니까. 그즈음 아빠는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동네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기 일쑤였는데, 집 근처 구멍가게에서 아빠에게 더는 술을 팔지 않기로 하면서 큰길까지 내려오는 일이 잦았다. 그 길은 우리 집이 자리한 언덕으로 이어지는 입구와 다름없었고, 마을버스 정류장과 식자재 직판장이 있는 길이기도 해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누군가 길바닥에 누워 있다는 걸 인지했을 때부터 그게 아빠임을 직감했다. 내게는 진저리가 날 만큼 익숙하고 식상한 광경이었으니까. 다만 이런 상황에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건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학원 친구일 뿐만 아니라 학교 친구이기도 한 그 아이들이 이 광경의 목격자라는 건 조금도 식상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뭔가 재미난 일이 일어났기를 기대하는 듯 아빠 쪽으로 몰려갔다. 이윽고 그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뭐야, 죽었어? 죽은 거야? 아니야, 안 죽었어. 움직이잖아.

그리고 홍주. 거기엔 홍주도 있었다. 아빠로부터 서너걸음쯤 떨어진 자리에서, 구경꾼들과 자신을 분리해놓은 듯한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짜증스레 쏘아보고 있었다.

홍주의 시선이 내게 닿은 건 잠시 뒤였다. 그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어지지도 못한 채 누군가 내 영혼을 반으로 찢는 것 같은 고통에 휩싸였을 때. 누군가 나를 세상에서 감쪽같이 지워버렸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됐을 때. 나를 보는 홍주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원망과 슬픔이 느껴져 눈물이 터져나오려는데, 홍주가 고개를 저었다. 나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하지만 나는 꼭 알아봐야 한다는 듯이 분명하게. 나는 그 고갯짓의 의미를 알았고 그 눈빛의 의미 또한 알았다. 오지 마. 그냥 가. 빨리 가라고.

나는 나를 단숨에 밀어내는 듯한 진동에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물속을 걷는 것 같은 무게감과 저항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내 발이 점점 더 다급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대로 돌아서면 오래도록 후회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돌아섰고, 여기서 달아나면 영영 죄스러우리라는 걸 알면서도 달아났다. 그렇게 나는, 도망쳤다.

 

*

 

몇해 전 내 생일에 엄마는 하필 산달이 한여름이어서 무척 고생스러웠다는 얘기를 하다 말고 뜻밖의 기억을 꺼냈다. 그 시절 아빠는 내가 들리지 않는 아이로 태어나기를 바랐다고. 그런 말을 했을 때도 역시 취중이었기에 그게 과연 진담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빠는 이 집에 청인이 하나 더 늘어난다면 아마도 자신은 이전보다 더 많이 외롭고 어려워질 것 같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행여나 장애가 대물림될까봐 결혼 후 10년이 지날 때까지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던 아빠. 하지만 막상 어렵사리 아이가 생겼을 때는 그 아이와 멀어지지 않을 수 있는 미래를 그려보았던 아빠. 나는 엄마가 전해주었던 아빠의 속마음에 적잖이 놀랐는데, 내가 태어난다는 게 아빠에게는 어떤 의미였고 또 변화였을지, 그때 아빠의 입장과 처지는 어땠을지 이제껏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스무해 가까이 한집에 살았으면서도 아빠의 관점으로 서술된 이야기는 생경했고, 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따갑게 느껴지는 아빠의 그 바람을, 이해해보고 소화해보려 해도 자꾸만 명치께에 걸리는 듯한 그 마음을 오래 곱씹어야 했다.

그리고 요즘도 나는 아빠를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아빠는 결국 당신의 예상대로 내가 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더욱 막막해졌을까. 엄마와 내가 청인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교류와 유대가 아빠를 더욱 고립시킨 걸까. 만약 내가 아빠의 바람대로 들리지 않는 아이로 태어났다면, 그래서 아빠처럼 감각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나는 아빠를 덜 미워하고 덜 원망했을까. 장애가 있는 아빠를 미워해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고 원망해도 죄책감은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너무 초라해서 화가 나는 일 같은 건 경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아빠가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했던 말들이 있다. 큰 소리로 말하면 어렴풋이 들린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작게 중얼거렸던 말들. 입 모양을 보면 감지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애써 다른 곳을 보거나 웃는 얼굴로 기만하며 했던 말들.

그 말들을 나는 들었다. 아빠는 듣지 못했지만 나는 모두 들었고, 그렇게 내게만 들린 말들은 여전히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봉분처럼 쌓여 있다. 밑바닥에서 썩어가는 시체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어쩌다 그 말들이 악취를 풍기며 혈관을 타고 돌아다닐 때면 나는 내가 했던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워 담고 싶다고 생각한다. 왜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빠가 아니라 나인지 생각하고, 이러한 조건이 내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듣고 또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3

 

현관을 열자 원기가 거의 뛰어나오다시피 하며 나를 반겼다. 이런 적극적인 환영은 내가 아는 원기의 스타일은 아니어서 순간 멈칫하게 됐는데, 역시나 원기에게는 용건이 있었다.

이거랑 이거 바꾸면 안 돼요?

원기가 내밀어 보인 건 사진 한장과 그림 한장. 사진은 홍주와 내가 열한살 때 마루에서 함께 수박 먹는 모습을 엄마가 찍어준 것이었고, 그림은 원기가 사진 속 우리를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따라 그린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성장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해두었는데 간직만 할 뿐 거의 꺼내보는 일이 없는 줄 알았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원기와 함께 앨범을 넘겨본 듯했다.

원기가 홍주 어렸을 때 사진을 처음 본다고 달라는 거야.

엄마가 상을 차리다 말고 상황 설명을 했다.

얼마 전에 유치원에서 가족 신문을 만들 때 부모님 어린 시절 사진을 가져온 애가 있었는데 그게 많이 부러웠다나. 근데 이건 우리도 하나뿐이니까.

엄마가 순순히 사진을 내어주지 않자, 원기는 누구한테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앞으로 몇년만 지나면 자기 그림이 이 사진보다 훨씬 더 비싸질 거라며 곧장 그림을 그려 물물교환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설득을 해봐도 원기가 물러서지 않자 결국 엄마는 내게 공을 넘긴 모양이었다. 필름이 없어도 스캔과 출력이 가능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아직 모르는 것 같았고, 나는 메모장 앱을 열어 내일 사진관에 가서 한장 더 뽑아 오겠다고, 사진값은 이 그림으로 받겠다고 썼다.

근데요, 뭐가 미안한 거예요?

잠시 후 손을 씻고 나왔더니 원기가 물었고,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듯이 원기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삼촌이 오늘 말을 안 하는 게 할아버지한테 미안해서라고, 할머니가 그랬거든요. 근데 뭐가 미안한지는 모르겠대요. 그래서 오면 물어보라고……

나는 애한테 별소리를 다 한다 싶어 엄마를 쳐다봤으나, 엄마는 듣고 있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가스불과 냉장고를 바삐 오가며 딴청이었다.

글쎄, 왜 미안할까. 나는 생각했고, 가장 먼저 떠오른 대답은 살 만해서,였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뛰어내리고 싶다거나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112에 전화를 걸어 우리 엄마 좀 도와달라고 사정하거나 잇새에 적의나 체념을 문 채로 잠드는 건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고, 요즘도 나는 이따금 아빠의 부재로 인한 평온을 행복처럼 여기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런 말을 원기에게 할 수는 없었고, 다행히 그런 말 말고 다른 말 또한 할 수가 없어서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

 

저녁을 먹고 나서는 거실에 모여 앉아 연도를 바쳤다. 엄마가 아빠의 영정을 티브이 옆에 세워두었고, 원기가 가톨릭 기도서에서 위령 기도를 찾아주었다. 아빠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그 시기에, 엄마는 무슨 수완을 어떻게 발휘한 건지 일평생 성당이라고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아빠에게 세례를 받게 했는데, 덕분에 아빠의 장례식장에는 연령회에 소속된 교인들의 기도 소리가 끊어질 듯 끊이지 않았다.

오늘 연도는 유난히 궁금한 게 많은 원기 때문에 다소 산만했다. 나 대신 소리 내 기도문을 읽게 된 원기는 파수꾼, 허물, 구렁, 입시울처럼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 뜻을 알고 싶어했고,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해 보이는데도 일단 엄마의 대답을 들어야만 다음으로 넘어가주었다. 연도를 바치는 동안에는 그래도 아빠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어째 원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고,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 엄마가 슬쩍 몸을 기울이더니 이따 자기 전에 연도를 다시 바치자고 했다.

그리고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영정 앞에 켜둔 촛불 두개를 후후 불어 끄고 돌아섰을 때 원기가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게 속삭이듯 전했다.

삼촌, 이제 말해도 된대요.

 

*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 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주간 쌓아둔 스포츠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

 

*

 

홍주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원기를 데리러 왔다. 팀원들과 저녁만 먹고 헤어진다는 게 파트장 욕을 하다보니 이 시간이 됐다며 엄마에게 사과했고, 서둘러 왔는지 얼굴에 빨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기도 하고 우리 집에서 홍주네 집으로 가는 길이 밤에는 좀 음침하기도 해서 함께 따라나서려는데, 원기가 그럼 할머니만 집에 혼자 남게 되는 거 아니냐며 엄마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급조된 한밤의 산책단. 엄마와 원기가 꼭 잡은 손을 흔들며 앞서 걸었고, 홍주와 내가 앞선 두 사람을 풍경처럼 감상하며 뒤따라 걸었다.

먼 훗날 원기에게는 오늘 밤이 어떻게 기억될까. 엄마와 나는 원기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을까. 어째서인지 그런 걸 궁금해하며 노면의 분홍색 유도선을 따라 걷는 원기의 씩씩한 발을 눈으로 좇는데, 홍주가 내 손에 들린 쇼핑백을 가볍게 건드렸다.

이건 뭐야? 설마 나 주는 거야?

어, 설마 너 주는 거야.

진짜?

나는 쇼핑백을 홍주에게 건넸다. K에게서 받은 아로니아 원액 두병 중 한병이었고, 농장에서 소량만 제작해 직판하는 백 퍼센트 착즙임을 강조했다. 홍주는 묵직한 유리병을 꺼내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거 완전 찐인 것 같다고, 어디서 이렇게 귀한 걸 구했느냐고 좋아했다.

야, 우리 밤마다 이런 공병 주우러 다녔던 거 기억나?

잠시 후 홍주가 쇼핑백을 다른 손으로 고쳐 쥐며 물었다.

4학년 땐가, 5학년 땐가.

5학년이었을걸.

그래, 훼미리주스 병. 그게 제일 무겁고 돈도 많이 쳐줬잖아. 너네 집에서 물병으로 쓰던 것까지 내다 팔았다가 아줌마한테 혼나고.

홍주가 두 눈에 웃음기를 담은 채 나를 쳐다봤고, 나도 그때가 생각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른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몰래 대문 밖으로 빠져나갔던 날들의 열기와 생기가 밤공기에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홍주는 우리가 공병을 팔아 한푼 두푼 돈을 모았던 건 기억해도 그 돈으로 일기장을 샀던 건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홍주는 이제껏 그 돈을 자기 할머니에게 줬다고 생각해왔으나 나는 아니었고, 내게는 같이 모은 돈은 같이 써야 한다며 홍주가 나를 핫트랙스로 데려갔던 날이 생생했다.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는 자물쇠가 달린 비밀일기장이 유행이었는데, 홍주와 나 둘 중 누가 먼저 시작하자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거기에 교환일기를 썼다.

자물쇠도 불안했는지 노란색 사꾸라 볼펜으로 거의 안 보이는 글자를 연출했던 홍주와 그에 질세라 어떤 단어는 거꾸로 뒤집어 쓰거나 자음만 쓰며 내용을 암호화했던 나. 그때 홍주는 주로 돈 얘기와 꿈 얘기, 나중에 살고 싶은 집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중에서도 장래희망을 ‘광화문’이라고 썼던 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고 광화문에 있는 높고 커다란 빌딩 안에 자기 자리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런 기억을 하나둘 꺼내자, 홍주는 내가 그랬다고? 되물으며 황당해했다. 그러고는 네 꿈은 뭐였느냐고, 그런 얘기를 자기 혼자만 했을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내가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서도 말을 아끼려는 게 보였는지 홍주가 이내 먼저 맞혀보겠다며 끼어들었다.

맞다, 선생님. 너 선생님 되고 싶어했잖아. 그치?

……

아닌가. 설마 그때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나?

아니, 그때 나는……

응.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썼어. 그게 내 꿈이라고.

……

……

와, 우리 둘 다 꿈을 이뤘네.

홍주가 짐짓 쾌활한 말투로 말했고,

그렇네, 이뤘다.

내가 전혀 쾌활하지 못한 말투로 대답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 속에서 역시 안 해도 될 말이었다 싶어 후회하는데, 홍주가 있잖아, 하고 운을 떼고는 이제껏 한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말이야. 아저씨가 취하는 게 싫지 않았어.

……응?

가끔 아저씨가 아줌마랑 너 모르게 나한테 술심부름을 시켰거든. 다들 아저씨한테는 안 팔려고 했으니까. 그때 소주 한병이 오백원인가 육백원인가 그랬는데, 아저씨는 항상 나한테 삼천원을 주면서 두병을 사 오게 하고는 남은 돈은 심부름값이라며 받지 않았어. 그러고 나서 꼭 하는 말이 너랑 친하게 지내라고.

……

나는 아저씨가 취하는 날을 내심 기다렸어. 언제쯤 심부름을 시키려나 기대하면서. 그런 날은 아줌마가 밤새 시달리고 니가 많이 울 거라는 걸 알면서. 왜냐하면 그게 내 유일한 용돈이었거든. 화났어?

아니……

홍주가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가 싶더니 돌연 어떤 깨달음이 스친 것처럼 맥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었구나. 그치?

한집에서 어떻게 몰라.

……

……

다시금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우리가 옛 생각에 빠져 한참이나 뒤처진 것을 깨달았을 때,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홍주가 대뜸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내가 너한테 고생 많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느냐고. 그간 생각만 한 건지 아니면 실제로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나는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져서는 홍주가 아닌 다른 것들로 눈을 돌렸다.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두툼한 엄지손톱처럼 생긴 달이 보였고, 가로등 불빛이 물막을 형성하듯 번졌다. 그리고 몇초 뒤에 역광 때문에 하얗게 일렁이는 골목의 저편에서 원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빨리 좀 와! 오늘 많이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나는 어서 가보라며 홍주의 어깨를 살짝 떠밀었다. 걷는 것도 아니고 뛰는 것도 아닌 애매한 걸음걸이로 조금씩 멀어지는 홍주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어쩐지 홍주에게도 오늘이 쉽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주야.

그때 나는 분명히 생각만 한 것 같은데 홍주가 돌아섰고, 왠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오늘과 같은 마음으로는 말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에 입을 뗐다. 그리고 내 말소리가 내 안에 나이테처럼 동그란 물결을 일으키며 고요하게 울려 퍼졌을 때, 내가 이렇게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선명한 감각이 신경줄을 타고 가지처럼 뻗어나갔을 때, 훗날 내가 이 순간을 자주 돌아보리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 밤에 홍주에게 그 말 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리라는 걸, 미리 알 수 있었다.

잘 지나와줘서 고마워.

뭐라고? 안 들려.

나는 니가 자랑스럽고 장하다고!

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처럼 잠시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보이던 홍주가 이내 겸연쩍은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내게 소리치듯 말했다.

야, 니가 더 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