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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문영 朴文映

2013년 제1회 큐빅노트 단편소설 공모전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방 안의 호랑이』, 중편소설 『사마귀의 나라』, 장편소설 『지상의 여자들』 『주마등 임종 연구소』 『세 개의 밤』 『허니비』 『컬러 필드』 『레이디스, 테이크 유어 타임』 등이 있음.

gomumi21@gmail.com

 

 

 

그린 로드

 

 

“두 사람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평생 서로 사랑하겠습니까?”

주례의 말에 젊은 하객 몇몇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해 들은 대로 꽤 전통적인 예식이었다. 예비부부는 긴 숨을 내쉰 뒤 큰 소리로 네!라고 외쳤다. 그 소리에 놀란 아이 한명이 귀를 틀어막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진의 손짓에 경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자기 위치로 이동했다. 평소에는 누나, 누나 하며 아진을 따르는 직원들이지만 예식에서는 죄다 눈을 부릅뜨고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없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다는 표시였다. 아진은 입을 꽉 다물고 첫번째 스위치를 눌렀다. 곧 홀 천장에서 둥근 유리관이 내려왔다. 반구형의 특수 유리는 캡슐형 알약 반쪽과 비슷한 생김새로 하강 때 아무 잡음이 없었다. 부드러운 바닥에 닿은 유리관은 예비부부와 그밖의 사람들을 완벽히 분리했고, 유리 속 미동 없는 두 사람은 케이크 위의 피규어 한쌍 같아 보였다.

어깨를 늠름히 펴고 주위를 살피는 경호팀, 울음을 그친 아이, 제자리에 잘 안착한 유리관을 모두 확인한 아진이 두번째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유리 안에 빛이 퍼졌다. 몽롱하고 어지러운 초록빛이.

“엄마, 저거 오로라야? 우리 저번에 핀란드에서 봤던 거?”

아이의 질문은 하객들의 환호성에 덮여 들리지 않았다. 유리 안에 갇힌 남자는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코를 훌쩍댔다. 90초간 쏟아지던 빛이 사라진 후 유리관이 천장으로 올라갔다. 막 부부가 된 이들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로써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인 결속식까지 온전히 성사되었습니다. 하객 여러분은 이제 그린 로드를 건너 새로운 여정을 떠날 두 사람을 위해 힘찬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부부는 주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단상부터 입구까지 행진했다. 옛말로는 버진 로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린 로드라 불리는 길이었다. 아진의 일터인 프리미엄 웨딩홀 ‘아비스’에서 버진 로드는 곧 그린 로드였다. 꽃길이나 주단 같은 말은 결속식이 없는 다른 예식에서나 쓰였다.

세기의 혼인이라는 수식이 붙곤 하는 결속식은 보통 세습자본으로 치러졌다. 이곳 계약자들 가운데 자수성가형 예비부부가 드물었기에 사실상 양가 부모가 이 시장생태계를 꾸려가는 셈이었다. 수많은 예식장이 장례식장과 요양원으로 바뀐 뒤 재력가들은 전보다 성대한 혼사를 준비했다. 그린 로드는 이런 초호화 예식의 코스 말미를 장식하는 이벤트로 각광을 받았다. 유리 안, 쏟아지는 빛 속에서 시선을 나눈 신부와 신랑은 서로를 정말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속식 총괄 매니저인 아진은 지난 3년간 이곳에서 젊고 부유한 연인을 수없이 만났다. 다들 말과 동작이 여유롭고 느긋했다. 아진에게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태도였다. 일이 서툴렀던 초창기에 만난 한 신부를 잊을 수 없는 탓이었다.

그날 아진은 신부의 드레스를 밟아 실크 끝단에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0.2 밀리미터가량의 자국이었다. 연신 사과하는 아진에게 신부가 활짝 웃어 보였다. 희고 고른 치아가 눈에 오래 들어왔다. 내가 언제까지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왜 대답이 없지? 신부와 아진의 대치가 길어졌다. 아진은 얼마 안 가 기묘한 싸움을 관뒀다. 신부가 아까부터 소리 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챘기 때문이다.

‘일을 좀 똑바로 하면 좋겠지만, 뭐 괜찮아요. 이런 실수는 제게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까. 그러면 이제 비켜주실래요?’

그때 아진은 진정한 부유층은 입을 열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침묵으로 품위를 유지하면서 상대를 자책감에 빠지게 할 수 있었다. 꺼져. 닥쳐. 그냥 없어져버려. 아비스에서 일하는 동안 아진이 스스로를 탓하는 말은 점점 거칠어졌다. 전신이 쑤시는 퇴근길마다 아진은 차라리 그날 신부가 화를 내거나 언짢아했다면 자신이 더 건강해질 수 있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환승 통로를 지나는 동안 짓이겨졌고 주변 소음에 갈가리 찢어졌다.

—당고개행, 당고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진은 헤드폰 볼륨을 높였다. 언제나 바다 건너 록밴드들이 대신 화를 내줬다. 어차피 이 세상은 가짜라고 대신 외쳤다. 스크린도어 가까이 서자 휴대폰을 쥔 행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진은 서로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그들의 표정에서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지하철에서 내린 아진은 출구로 향하는 대신 벤치에 앉았다. 좋아하는 곡이 나오는 중이었다. 좋아하던 사람과 함께 연습했던 곡이.

 

결속식이 막 퍼져나가던 시기엔 긴 식순을 짧은 식순으로 바꿔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결혼식 자체를 결속식 하나로 대체하려는 흐름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 절차를 모조리 밟은 끝에 결속식으로 마무리하는 코스가 웨딩 트렌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가깝게는 브라이덜 샤워부터 멀리는 함 등의 허식과 관행이 사라졌대도 옛 유행은 주기적으로 돌아왔고 노스탤지어는 늘 수요가 있는 코드였다. 그린 로드가 눈길을 끌면서 실제로 ‘그린 라이트’ 따위의 한물간 유행어, ‘콩깍지가 씌었다’ 같은 관용어도 다시금 활발히 쓰였다. 아진은 지루한 예식에 향수를 느끼는 이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한국에 살 만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거지.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그냥 받아들여.”

예약 상담실장의 대꾸는 충분한 답이 되지 못했다. 아진은 습관대로 휴게실 창문가에 앉아 상담실 안쪽의 고객들을 바라봤다. 자신은 고객들을 볼 수 있지만 고객들은 자신을 볼 수 없는 시간. 자신은 고객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고객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간. 아진은 이때 역시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어머, 얘. 너 폐백이란 말도 아니? 우리 며느리가 나랑 통하는 게 많네. 선생님, 지금 말씀하신 옵션, 예식에 다 넣어주실래요? 꽃이요? 당연히 생화로 해야죠.”

화촉 점화와 화동이란 단어를 들은 예비 시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찍었다. 예식 한번으로 재산을 얼마나 탕진하려고. 아진은 창 너머 예비 시모를 멀거니 쳐다봤다. 장성한 아들을 뒀다고는 짐작할 수 없는 외모였다. 아진은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하품했다. 예식 진행에 대한 설명을 듣는 고객들은 늘 자비로워 보였다. 아량과 관용이 넘쳐났다. 기호와 취향을 가장 적극적으로 탐색했던 시절, 전성기가 재현되니 저렇게들 황홀한 건가. 아진의 추측도 충분한 답이 되지 못했다.

새벽녘, 바이브레이터를 끈 아진이 천장을 쏘아봤다. 그래, 유예. 정점은 늦게 도래할수록 찬란한 법. 돈이 발에 채어 결속식을 치를 수 있는 이들이 유예의 미학, 지연될수록 더 강렬한 정점을 단념할 리 없었다. 그들에게 그린 로드는 삶의 기나긴 여정 끝에 찾아오는 광명이자 고점, 곧 오르가슴일 것이다. 아진은 바이브레이터를 향해 말했다.

“알고 보니 우리 동종업계에 있었구나. 하는 일이 똑같네.”

결속식 총괄 매니저라 해도 그린 로드 프로젝터의 세세한 작동원리까지 알 순 없었다. 아진이 아는 것은 프로젝터가 운석의 빛을 압축해 방출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것 하나였다. 장난감 큐브와 분간할 수 없게 생긴 프로젝터를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사가 엔지니어를 이해할 수 있나. 이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근데 내가 이러려고 경호학과를 나온 건가. 아진의 주된 임무는 정해진 시간에 유리관을 내리고 그 안에 빛을 쏘는 것뿐이었다. 단순하지만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는 점에서 큰 부담이 따르긴 했다. 예비부부는 유리 안에 안전히 들어가야 했고, 고가의 빛은 그들을 위해서만 쓰여야 했다. 빛을 직접 쐬지 않으면 아무 효력이 없었다. 예식이 끝나면 아진은 프로젝터 상단부의 컴컴한 렌즈를 들여다봤다. 거기 남은 빛이 있기라도 하듯. 빛을 보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라도 하듯. 하지만 렌즈에 비친 건 뭉크가 그린 듯 굴절된 자기 얼굴 하나였다. 텅 빈 홀에 남은 건 구깃구깃한 천, 흐물흐물한 꽃잎, 조각조각 난 반짝이 같은 것들. 전부 빛이 나는 쓰레기였다.

 

그린 로드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물질은 운석의 빛이었다. 정확히는 변형과 가공을 거쳐 상품이 된 빛. 유성은 뽀르뚜갈, 튀르키예, 호주, 몽골 등 세계 곳곳에 간헐적으로 떨어졌다. 그때마다 대륙에 낙하한 운석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보도가 이어지곤 했다. 혜성의 파편으로 밝혀진 유성은 태평양이나 대서양 상공에서 타버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어떤 돌들은 모래 속에 깊이 파묻혔다가 어느 북아프리카 부족의 명상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빛의 초창기 쓰임새였다. 아진도 요가수행자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나 뇌과학 연구자들이 운석에 대해 떠드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비누즈족 여자는 말했다.

“세상은 눈부신 곳입니다. 대지와 대기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는 그저 이 풍경을 선물받은 거죠.”

“그래요. 삶은 선물인걸요. 우리의 눈꺼풀이 열려 있는 동안 받는 선물.”

여자 옆의 남자가 말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우리는 그냥 한 몸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헤어진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어요.”

두 사람은 리비아 고원지대 근처에 사는, 눈이 올리브색인 부부였다.

“내가 동물에 아예 관심이 없던 사람인데요. 터를 옮겨서 그런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이 도마뱀은 매일 보고 싶어요.”

얼굴의 반이 수염으로 덮인 남자가 돌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는 손등을 타고 어깨에 오른 도마뱀을 보고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미소를 지었다. 20대에 운석 조각을 손에 쥐었다는 여자는 돌이 뿜어내는 신비로운 빛이 자신과 연인을 70년이 넘도록 지켜줬다고 확신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볼 때마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죠. 나는 허약하며 기괴합니다. 그러니 나를 가엾게 여겨 보살펴주세요.”

90대의 부부는 인터뷰 내내 지극한 태도로 서로를 챙겼다.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짓고 있던 평온한 표정은 얼마간 화제가 되었다.

운석 융합분석팀은 연구결과를 속속 발표했다. 돌에는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없고 돌에서 발생하는 빛 파장에 시각이 손상될 위험도 없었다. 운석을 오랜 시간 접한 비누즈족을 대상으로 한 뇌 관찰에서는 미상핵 영역이 계속 활성화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들 몸에서는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이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있었다. 반면 폭력성과 공격성을 주관하는 영역의 활동은 미약했다.

돌에서 나오는 빛을 본 사람은 그 순간 곁에 있던 존재를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는 속설, 한 존재를 대상으로 끊이지 않는 설렘을 느낀다는 가설이 사례로서 누적되기 시작했다. 도파민은 한 존재를 대상으로 두번 지속되지 않기에 같은 존재에게 새롭게 떨릴 일이 없다는 기존 이론, 페닐에틸아민이 지속되는 시기는 보통 3년이라는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예시 역시 늘어났다. 그러자 시간과 호기심이 넘쳐나는 거부들은 일단 운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운석이 발산하는 빛에는 부정할 수 없이 확실한 증거가 따랐기 때문이다.

빛을 접한 사람들의 동공 둘레는 전보다 0.2밀리미터가량 커졌고 연한 풀색을 띠었다. 태어난 지 한두달 된 고양이 눈처럼, 뿌옇고 오묘한 녹청색 계열의 색상이었다. 그들은 새끼 동물이 어미를 찾듯 상대를 찾았다. 복수의 운석 목격자가 하는 말을 요약하면 하나의 일관된 문장을 도출할 수 있었다. 우리는 빛을 봤고 그 즉시 끝없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북아프리카 고원에 떨어진 운석이 한국의 웨딩 산업에 그토록 강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운석 수출이 시작되면서 그 활용이 한국식으로 맹렬하게 굴러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했다. 운석은 도파민 중독과 과시성 소비가 일상이 된 곳에서, 각종 증빙 절차와 그 절차의 모순이 빼곡한 나라에서 거침없이 사업화될 수 있었다. 은행들은 신혼부부를 위한 결속식 자금 대출 상품을 속속 만들어냈다. 장기와 단기, 운석의 효능 기한에 따라 대출금을 책정한 상품이었다.

절대 놓칠 수 없는 연인이 곁에 있다면, 지금 함께 그린 로드를 걸어요! 최대 90초 자금으로 평생 결속 보장, 최소 10초 자금으로 임시 결속 보장(기간 협의 가능)

빛은 언젠가 분리되어 지내야 할 가족을 비롯해 커플 매칭 업체 그리고 종교계와 연예계같이 불확실한 애정이 오가는 곳에서는 쓰일 수 없었다.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거금을 들인 콘서트 이벤트가 처참하게 실패한 뒤에 따른 여파였다. 무대에서 관객석 쪽으로 빛을 쏜 사건 당시, 관객의 태반이 10대였다는 게 화근이었다. 빛과 함께 뜬 무대 전광판의 글자는 ‘영원히 사랑해줘’였고 그야말로 전쟁 같은 사랑이 이어졌다. 자녀들의 녹색 동공을 본 가족들은 소속사를 상대로 수백억원대의 소송을 걸었다. 녹색 동공은 보름쯤 지나 원래 색으로 돌아갔지만, 재판 결과 팬들의 보호자 측이 승소했다. 문제의 콘서트 이후 운석 사용에 대한 승인과 관리체계는 퍽 철저해졌다. 결국 빛의 가장 안전한 용처는 혼인이 이뤄지는 예식장, 가장 안전한 대상은 혼인이 코앞인 예비부부였다.

이혼 전문 변호사들을 포함한 법조계에서 크고 작은 반발이 일어나긴 했지만, 세상엔 여전히 너무 많은 이별과 재회가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다투어볼 만한 일이 넘쳐났다. 각종 소송에 휘말릴 일 없이 기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 재계는 결속식에 우호적이었다. 크고 작은 위험요소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는 면에서 외제차 서너대 정도의 빛 가격은 그들에게 푼돈이나 마찬가지였다.

배우자의 외도에 지친 이들은 결속식을 지지했고 그린 로드를 선망했다. 헤어진 연인들은 결속식을 치르지 못한 것을 결별의 이유로 여겼다. 때때로 결속식이 결별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린 로드가 있는 한, 그린 로드를 연인 중 한 사람만 원하는 한 속속 생기는 문제였다. 가족의 지원 없이 어렵사리 그린 로드를 건넌 연인들은 늘어나는 빚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빛을 함께 본 상대와 떨어질 수 없는데, 빚을 갚기 위해서는 따로 떨어져 일해야 했다. 반대로 부유층 가운데도 결속식을 하지 않는 커플은 있었다. 서로를 신뢰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물질로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고 감정을 관리하는 행위를 용인할 수 없었다. 결속식은 어떻게 봐도 세상에서 가장 시대착오적이고 천박한 쇼일 뿐이었다.

“감정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야죠. 강줄기를 댐이나 보로 막으면 어떻게 돼요? 썩죠. 흉물이 된다고요. 아니, 다들 부끄럽지 않아요? 내가 살면서 이렇게 머저리 같은 결혼식 풍경을 볼 줄은 몰랐네요.”

한 유명 배우의 발언은 얼마 후 역공을 받았다. 결속식을 비판했던 그가 이혼 두달 뒤 스무살 어린 신인 배우와 교제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뒤로 한동안 강물과 흉물이라는 단어는 조롱의 뜻으로 쓰였다.

“이제라도 결속식을 하면 어떠세요? 조금 저렴한 단기형 그린 로드 상품도 있는데.”

“장난해요? 저 인간이랑 무슨 놈의 그린 로드를 걸어요? 같이 한발짝도 걷기 싫은데. 두번 다시 엮이고 싶지 않은데. 내가 그런 감옥을 살 돈이 있으면 차라리 사회 환원을 해요.”

이혼을 앞둔 부부들은 결속식이라는 말에 진저리를 쳤다. 반려동물이나 식물을 안고 그린 로드를 걸은 셀럽과 아티스트들은 두고두고 빈축을 샀다. 결속식은 인지 성형 또는 정신 성형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사고체계를 바꾸는 것과 신체체계를 바꾸는 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느냐는 반문 아닌 반문도 꾸준히 따랐다.

빛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빛을 찾았다. 반딧불이와 모닥불 앞에서 하객 없는 결혼식을 치르는 커플이 부쩍 생겨났다. 일명 러브 빔이라는 속어로 불리는 초록 조명은 술집과 모텔 그리고 각종 축제에서 사용되곤 했다. 운석 소유자들이 돌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는지, 관련자들이 돌로 이득을 얼마나 취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돌이 몇천 톤에 달한다는 말부터 희귀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 이리저리 나돌기만 했다.

 

아진이 탈의실에 들어서자, 상담실장이 그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오늘 너무 고생했어. 걔네 자기 덕에 맺어진 거다.”

아진은 실장에게 안기는 대신 사물함에 뒤통수를 붙였다. 예식 전에 티격태격하는 이들이야 더러 있었지만, 아까 예비부부는 유독 유치한 싸움을 벌였다. 신부대기실 문을 잠근 아진은 여자의 등을 어루만지며 급속 상담에 나섰다. 여자가 드레스를 벗으려다 말고 말했다.

“결속식은 결국 서로를 믿을 수 없어서 하는 거잖아요. 불안해서 하는 거잖아요.”

이제 와서 진실된 사랑을 논하려는 건가. 지금부터 같이 사랑의 상품화에 대한 비토라도 시작해야 하나. 아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라벤더 티에 빨대를 꽂아 여자에게 건넸다. 여기서 보는 예비부부가 사실 한심하게 여겨진다는 소리,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짝을 자주 본다는 소리는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설사 상대를 잘못 골랐더라도 빛을 보면 다 덮일 문제라는 말은 더욱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아진은 신부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답을 꺼냈다.

“불안은 막을 수 있다면 막는 게 좋지 않겠어요? 사는 게 고통뿐이라는 사실을 잊게 해주는 짝이 옆에 있으면 참 든든할 것 같은데요. 저는 그린 로드를 걸어갈 신부님이 부럽기만 한걸요.”

결속식 뒤, 신부는 도넛 열두개를 먹은 사람처럼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설득이 어렵지도 않았다. 진짜 헤어질 생각이었으면 드레스를 그렇게 조심히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아진은 탈의실을 나서려는 실장에게 물었다.

“혹시…… 그린 로드를 걷고 싶은 적이 있으셨어요?”

아비스 근무 7년 차인 실장에게는 터무니없는 질문일 수 있었다. 실장이 턱을 들고 되물었다.

“응? 자기는 원 앤 온리가 싫어?”

아진은 실장의 답이 조소인지 진심인지 아리송했다.

“아진씨, 세상에 사랑으로 해결 못할 게 어딨겠니. 우리한테 오는 사람들, 물불 안 가리고 돈으로 트루 러브를 하겠다잖아. 다른 사람이 거들떠보든 말든.”

“보든 말든요?”

탈의실 밖으로 나선 실장이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말했다.

“그동안 여기 가족 말고 진짜 축하하러 온 하객이 있었겠어? 둘이서만 빛을 받겠다는데? 그걸 돈 내고 구경까지 하라는데?”

며칠 뒤 휴게실에서 막간 스트레칭을 하던 아진은 팔을 한참이나 내리지 못했다. 창문 너머 보이는 사람 때문이었다. 규선이 예식 상담을 받고 있었다. 옆자리의 예비 신부와 손을 꼭 잡은 채였다. 규선의 인상은 수년 전 대학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진이 좋아했던 모습 그대로. 어쩌면 더 좋아할 수 있는 모습으로. 아진은 벽을 짚고 그들을 조용히 지켜봤다. 두 사람의 미소, 두 사람의 눈웃음. 그 반원 두개를 합치면 꼭 완전한 원이 될 것 같았다.

용기를 냈구나. 어려운 용기를.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다니. 아진은 방금 한 탄식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여태껏 저렇게 잘 어울리는 예비부부를 본 적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동안 크고 검푸른 포도를 그저 시디시다고 여겨온 걸까. 아진은 눈앞의 예비부부가 사라질 때까지 휴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규선의 결속식 담당은 다른 매니저로 배정되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아진은 이번에도 출구로 향하는 대신 벤치에 앉았다. 음악 스트리밍 앱 안에 만들어뒀던 플레이리스트 몇개를 삭제하기 위해서였다. 아진은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모든 곡이 규선과 함께 연습한 노래였다. 친구, 밴드부원, 대학 동아리 멤버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규선과 함께.

 

“너 왜 여기 있어?”

아진은 무전기를 홀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규선의 손이 어깨에 올라와 있었다. 아진은 입을 벌린 채 규선과 예비 신부를 쳐다봤다. 며칠 전 상담을 받고 계약을 마친 두 사람은 예식 뷔페 음식을 시식하러 왔다고 했다.

“오, 규선이 성공했구나.”

아진이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규선이 아진에게 귓속말로 답했다.

“어. 로또 됐거든.”

아진의 눈이 커지자 규선이 피식거렸다.

“농담이야. 근데 우리 대체 몇년 만에 보는 거냐?”

이 예비부부의 식사 권유를 족히 대여섯번은 거절한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요리들이 놓여 있었다. 결속식은 다른 매니저가 맡아줄 거라고 대여섯번은 설명한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니 그날 그들은 자신이 맡게 되었다. 실장이 동문을 잘 부탁한다며 바뀐 일정표를 전송했다. 아진은 반도 못 비운 음식 접시를 옆으로 밀어둔 채 규선이 내민 휴대폰에 번호를 남겼다.

예비 신부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우자 규선의 말이 길어졌다. 아진은 물을 들이켜고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규선과 예비 신부가 공동으로 경호용 로봇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 예비 장모의 막대한 투자금으로 업체가 커지고 있다는 것, 그래도 돌이켜보면 밴드 동아리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것, 예비 신부는 우리처럼 어둡고 우중충한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아진은 자리로 돌아온 예비 신부를 멍하니 쳐다봤다. 희고 고른 치아가 눈에 오래 들어왔다. 그날 밤 아진은 서랍 속 바이브레이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핑크 플로이드의 곡 하나를 반복해 들었다. 쓸쓸해도 아주 스산하지는 않은 노래였다. How I wish, how I wish you were here. 재생이 몇번쯤 되었을까. 휴대폰을 집은 아진은 쇼핑몰에 들어가 무드등 하나를 주문했다. 충동구매라는 사실을 알아도 지금의 충동 말고 중요한 건 없었다. 아진은 내친 김에 와인도 병째 비웠다. 누가 줬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된 술이었다. 여덟번째 반복되던 곡의 도입부를 끊고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오늘 반가웠다. 번호 지워져서 아쉬웠는데.

규선의 문자에 최대한 덤덤한 답문을 보내려던 아진이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재생 중인 곡을 선물로 잘못 보내버린 직후였다. 술김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 술김이 아니었잖아. 노래는 결혼 선물로 치기에 터무니없이 작았고, 의미는 묘하게 컸다. 결제 창을 아무리 뒤져도 취소는 불가능했다. 망설이던 아진이 결국 구차한 말을 보탰다.

—우리 합주할 때 생각나서.

규선의 답문은 자정이 넘어 도착했다.

—나도 자주 생각나. Wish You Were Here.1네가 여기 있길 얼마나 바랐는지.

이튿날 아진은 규선이 아닌 규선에게서 긴 문자를 받았다. 예비 신부가 규선의 휴대폰으로 보낸 글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문장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가운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늦은 시간까지 이런 말을 주고받는 일은 앞으로 없었으면 좋겠다. 아진은 부랴부랴 긴 해명을 늘어놓았고 답은 오지 않았다. 진짜 규선의 전화는 한참 후에나 걸려왔다.

 

“이 동네 그대로네. 내가 너 데려다주러 많이 왔는데.”

아진의 아파트 뒷산, 오래된 산책로는 눈이 닿는 곳곳마다 온통 초록이었다. 초봄 날씨는 맑았고 잎사귀가 만든 그늘은 포근했다. 아진과 규선은 한동안 기후위기와 미국 대선에 대해 떠들었다. 반지성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해 한탄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였다. 문자 소동에 대해 경쟁하듯 쏟아내는 사과도 덧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진은 빙빙 도는 이야기를 멈춰 세우고 싶었다.

“그린 로드 걷는 사람들, 많이 봐서 별 감흥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너 보니까 부러워.”

“그래? 부러워? 거길 걸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어서?”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하려던 아진은 입을 다물었다. 맥락에 맞지 않는 답이었다.

“사실 자신이 없다. 그래서 예식까지 애써보려고.”

아진은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우연을 인연으로, 인연을 운명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을 너무 오래 바보 같다고만 생각해왔다.

“일단 너랑 이렇게 걸으니까 편하네. 친구랑 오랜만에.”

그 말에 빙긋 웃던 규선이 자리에 멈춰 말했다.

“친구 아진아, 여기 그 노래방 아직 있어? 상가 지하 있잖아. 우리 밴드 7기 누나가 사장님인 데.”

“어. 아직 있긴 있을걸.”

노래방은 예전처럼 정글 같았다. 단조롭고 울적한 초록색 조명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몽롱하지도 어지럽지도 않은 빛 속에서 아진은 맥주를 조금씩 마셨다. 규선을 기억하는 사장이 서비스로 시간을 계속 넣어줬다. 두 사람은 어느새 마이크를 내려놓고 화면에 흘러가는 굴림체 노래 가사만 쳐다봤다. 몇번의 헛기침 뒤에 규선이 말했다.

“야,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알아?”

아진은 규선의 물음에 동요하지 않은 듯 빈 캔을 가만히 흔들었다. 목이 탔지만, 그 옆의 새 맥주는 뜯지 않을 생각이었다. 거짓말. 오랫동안 내 마음을 못 본 척하다가 지금 그런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다니. 아진은 결혼을 앞둔 사람의 가벼운 투정, 흔한 일탈 욕구에 아무 의미도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관 안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규선처럼 경솔한 사람들은 많았다.

“실망했지? 한심하지? 그린 로드 걷기 전이라고 이렇게 떠벌려서.”

“응. 좀 실망이네.”

“그래도 다시는 못할 말이니까.”

아진은 마음이 흔들리는 게 초라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린 로드를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건널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보다 더 허약하고 비겁한 것도 아니었다. 마음은 원래 부들부들하고 미끌미끌했다. 번거롭고 시끄러웠다. 규선이 빈 캔을 우그러뜨리며 물었다.

“있잖아. 내가 진짜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친구를 정말 영원히 사랑하게 되면 어떡하지?”

아진은 규선을 쳐다보지 않고 되물었다.

“그게 왜?”

“관에 들어가면 끝나잖아. 빛을 보면 앞으로 궁금한 게 없어지잖아.”

“그 대신 마음이 부서질 일도, 깨질 일도 없는데?”

“아진아, 지루한 건 사실 역겨운 거래. 싫고 무섭고 징그러운 거래. 근데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뇌에서 역겨운 걸 지루한 거라고 처리해버린대.”

아진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대화에 어떻게든 샛길을 내고 싶었다.

“찾아보니까 진짜네. 호러블 뜻이 이렇게 많았어? 지긋지긋한, 끔찍한, 소름 끼치는, 무시무시한, 불쾌한, 못된, 지독한……”

“내 말 들어봐. 나 겁나. 내가 지루한 걸 지루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봐 겁난다고.”

규선이 얼굴을 감싸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진은 그에게 휴지를 내밀었다. 안아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커지는 마음을 잡아 우그러뜨릴 수도 없었다. 아진은 눈을 감고 망상을 이어갔다. 결속식에서 자신이 유리 안에 들어간다면. 신부를 밀치고 들어가 규선과 함께 빛을 본다면. 그도 아니면 프로젝터로 가짜 빛을 쏜다면. 아진이 자신의 뺨을 두세번 가볍게 때렸다.

 

규선의 결혼식에는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몰렸다. 예비부부의 업체가 만든 신형 로봇이 홀을 돌아다니며 하객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진은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피해 로비 기둥에 몸을 붙였다. 간신히 들어간 식장 입구엔 플라스틱 재질의 공룡, 카드, 큐브, 기차 따위가 떨어져 있었다. 인사하는 로봇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이 놓친 장난감들이었다. 아진은 물건들을 그러모아 프로젝터 옆 의자에 올렸다. 그러고는 사회자에게 다가가 예식이 끝날 즈음 분실물을 찾아가라는 안내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평생 서로 사랑하겠습니까?”

스위치를 누르려던 아진이 멈칫했다. 네!라고 외친 사람이 규선 한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부님이 긴장해서 못 들었네요. 우리 신랑님이 신부님 손 좀 잡아주세요. 자, 두 사람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평생 서로 사랑하겠습니까?”

아진이 스위치에 다시 손을 올렸다. 이번엔 대답이 없어도 그냥 누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규선이 자신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고 생각한 순간, 실내가 컴컴해졌다. 프로젝터를 떨어뜨린 아진이 입을 벌리고 주위를 더듬었다. 다행히 손끝에 각진 물건이 닿았다. 프로젝터는 흠 없이 멀끔했다.

“이거 건물 전체 전원이 나간 것 같은데?”

“하객 여러분, 금방 조치 취할 테니 진정하세요.”

“엄마, 엄마!”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뒤엉켰다.

“아진아, 어디 있어? 대답 좀 해봐!”

뒤엉킨 목소리 틈에서 규선의 음성을 들은 아진은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식장 바닥을 기어 밖으로 빠져나갔다. 꺼져. 닥쳐. 그냥 없어져버려. 규선과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그와 한 공간에 있으면 안 된다는 직감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았고 그게 절대 산뜻할 성격일 리 없었다. 규선이 자신의 고백을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던 그 공연일에 어떤 만행을 저질렀던가.

“뭐야. 저 사람 어떡해.”

차분하기 그지없는 곡을 연주하다 통기타를 부수고 정수리에 생수를 들이부었다. 열광은커녕 아무 호응이 없는 최악의 퍼포먼스였다.

 

아진은 눈앞에 보이는 버스에 무작정 올랐다. 사람이 가득 차면 내려서 다른 버스에, 그 버스에도 사람이 가득 차면 내려서 다른 버스에. 해가 지기 전 도착한 곳은 을왕리 해수욕장이었다. 이곳에 유니폼 차림은 자신 혼자인 것 같았다. 구두를 벗어 든 아진은 그제야 휴대폰을 오래 들여다봤다. 실장에게 걸려온 전화는 단 한통이었고 그마저도 몇시간 전이었다. 아랫입술을 물어뜯던 아진이 검색을 시작했다. 곧 생활 뉴스 코너의 몇몇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A 예식장 한낮 소동, 관리실 잘못 들어간 로봇 때문에 한동안 정전 사태

하객들 휴대폰 불빛으로 밝힌 낭만의 예식

우여곡절 끝 결혼식 올린 부부의 환한 미소

결속식 못 치렀지만, 잊지 못할 세기의 혼인 치렀죠

아진은 휴대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프로젝터의 사각 면을 차례로 쓰다듬는 동안 허공에 불꽃들이 솟아올랐다. 막대 폭죽을 쥔 연인들이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아진이 보기에 대기를 수놓는 불꽃은 인생의 기쁨이 찰나라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는 금세 가느다란 연기 몇가닥만이 남았다. 부숭부숭하고 추레했던 마음, 뜨겁고 허망했던 마음, 소중하고 하찮았던 마음. 아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아름다웠지.”

하지만 원래 아름다움의 속성이란 찰나일지도 몰랐다. 아진은 사람들이 없는 해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모래사장엔 깨진 조개가 즐비했다. 더 멀리엔 떠밀려온 건지, 일부러 깐 건지 모를 천 조각이 바람에 풀썩였다. 아진은 해변 끄트머리의 낡은 배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폐선에 기대앉아 고개를 들자 바다 위 노을이 무서울 정도로 선명해 보였다. 아진은 노을이 이토록 또렷한 윤곽과 명암을 갖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을의 존재는 흐지부지하지 않았다. 노을은 자기 영역과 경계선을 명확히 지니고 있었다. 흩어진다 해도. 금세 사라진다 해도. 수시로 모습을 바꾼다 해도. 아진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 머리 위를 떠다닐 무정형의 노을을 떠올리곤 긴 숨을 내쉬었다. 적막을 깨고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고객님이 주문하신 소중한 상품, 인테리어 오로라 무드등이 오늘 배송될 예정입니다.

두 무릎을 끌어안은 아진은 머릿속으로 해변에 빛을 쏘기 시작했다. 노을 아래 해안가는 보이지 않는 푸른 오로라로 점점 물들어갔다. 저기 노숙자는 컵라면을 먹는 사이, 옆의 떠돌이 개를 사랑하게 된다. 저기 여자는 남자가 호텔에 외투를 가지러 간 사이, 가까이 있는 카자흐스탄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저기 여자들은 남자들이 맥주를 사러 간 사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아진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조개구이집 아르바이트생은 아이가 둘인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다. 빚을 받으러 온 사업가는 채무자를 사랑하게 된다. 신앙심이 깊은 군대 후임은 선임을 사랑하게 된다.

아진은 사람이 사람을 그저 쉽고 가뿐하게 사랑하게 되는 장면을 계속 그려갔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아진은 약간이라고 말하지 못할 해방감을 느꼈다. 이곳에 빛을 뿌리면 사나흘, 길어야 일주일 정도의 사랑이 지속될 것이다. 그러니 다 나눠줘도 되지 않나. 프로젝터는 정전 때 손상되어 오작동이 일어났다고 둘러댈 수 있었다. 유니폼 안에 있는지도 몰랐다고 우길 수 있었다. 아니, 더 나은 핑계는 나중에 떠올리고 싶었다. 지금은 그린 로드가 예식장 밖, 이 해변에 깔려도 상관없었다.

아진은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잠자코 지켜봤다. 모랫길을 따라 물거품이 일자 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던 미역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잠깐은 누구든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해수욕장의 사람들도 나도. 아진은 낯선 사람을 응시한 채 주머니 속 프로젝터를 꺼내 쥐었다.

“나오세요. 여기 계시면 안 돼요.”

안전요원이 아진에게 말했다.

“이게 뭔데요?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세요.”

아진은 처음에 스위치가 눌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큐브였다. 예식장에 왔던 아이가 아직도 찾고 있을지 모를 작은 장난감.

“술 드셨어요? 괜찮아요?”

아진의 대답을 기다리던 안전요원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손을 내밀었다. 축축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던 아진은 입을 꽉 다물고 그 손을 잡았다.

 

 

  1. 영국 밴드 핑크 플로이드가 1975년 발매한 앨범 「Wish You Were Here」의 수록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