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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성희 尹成姬

1973년 경기 수원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 『웃는 동안』 『베개를 베다』 『날마다 만우절』, 중편소설 『첫 문장』, 장편소설 『구경꾼들』 『상냥한 사람』 등이 있음.

hitchike@hanmail.net

 

 

 

여름엔 참외

 

 

1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어서 식당에 왔다가 동태찌개를 주문했다. 메뉴판 옆에 ‘동태찌개 시작’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작이라니. 그 말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는 아주머니들을 보았다. 빈 병이 다섯병. 지금 마시고 있는 병까지 합하면 한 사람당 두병이나 마시는 셈이었다. 안주가 맛있으니 저렇게 술을 드시겠지. 왠지 기대가 되었다. 이 동네로 이사 온 뒤 나는 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 버릇을 없애고 토요일 오후에만 한잔씩 하자고 다짐해두었다. 일주일에 한번 술을 마시는 거니 맛없는 음식이랑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마다 식당을 찾아다녔다. 마음에 드는 식당을 네곳 정도 찾아낸 다음 일주일에 한곳씩 돌아가며 먹을 계획이었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닭칼국수를 먹었는데 겉절이가 괜찮았다. 칼국수도 매운맛과 순한 맛을 선택할 수 있었고 사이드 메뉴로 닭날개조림을 팔아서 곁들일 안주로 좋았다. 지지난주 토요일에는 낙지볶음 가게에 갔다. 계란찜과 묵사발이 같이 나오는 세트 메뉴가 있어서 그걸 먹었다. 이 식당도 맛있으면 적어도 세곳은 확보한 거니 나머지 식당은 여유있게 찾아도 될 듯싶었다. 사장님이 밑반찬을 내왔다. 열무김치, 미역줄기볶음, 시금치무침 그리고 양배추찜이었다. 나는 소주 한병을 주문했다. 술을 한잔 마시고 양배추찜에 열무김치를 올려 먹었다. 잠시 후에 동태찌개가 나왔다. 양이 꽤 많았다. “이거 일인분인가요?” 내가 물었더니 사장님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술을 마시던 아주머니 중 한분이 일어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혼자 왔는데 이인분을 팔까.” 그러면서 두 손으로 양쪽 무릎을 주물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말했다. “너 내가 사준 관절약 먹었어?” 그 말에 다른 아주머니가 발끈했다. “왜 나는 안 사주고 정자만 사주냐?” 이름이 정자인 분이 절뚝이며 화장실에 갔다. 관절약을 사주었다는 아주머니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경희야, 계란말이!” 그러자 주방에서 사장님이 대답했다. “이미 하고 있어.” 사장님이 주방에서 접시 두개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하나를 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계란말이 위에 서비스라는 말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케첩으로 쓴 글. 나는 웃었다. “찌개가 너무 맛있어요.”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 “내가 술을 조금 마셔서 간이 제대로 됐는지 모르겠네.” 사장님이 대답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나도 관절약 사줘. 안 그러면 계란말이 돈 받는다.” 그 말에 관절약 아주머니가 약이 더 비싸다며 투덜댔다. 서로 관절약을 선물하는 친구라니. 나는 매달 마지막 주에는 이곳에 와서 혼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마다 이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하나의 인라인스케이트를 한짝씩 나누어 신었다. 한 아이는 오른발에 한 아이는 왼발에. 둘은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탔다. 이인삼각 경기를 하는 아이들처럼.

 

일주일이 지났고, 아침부터 비가 왔다. 비가 오니 동태찌개가 다시 생각나서 같은 식당에 갔다. 그때 그 아주머니들이 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번에는 파전에 막걸리였다. 막걸리를 보자 갑자기 김치전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태찌개를 시키면서 혹시 김치전도 파는지 물어봤다. “먹고 싶으면 만들어줘야지.” 사장님이 대답했다. “그러면 김치전하고 동태찌개요. 막걸리도 주세요.” 내가 말했다. 내 말을 들었는지 정자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사이 파마를 새로 한 듯했다. “경희야, 김치전 만들 거면 우리 것도 하나 더 해라.” 김치전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정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내용은 없고 기사 링크만 있었다. 들어가보니 정원이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인 ‘와일드 윈드’가 십육년 만에 컴백을 한다는 기사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정원은 학교 축제에서 와일드 윈드의 춤을 추었다. 앉았다가 일어나는 춤이 많았는데 그걸 연습하면서 정원이 이러다 우리 오빠들 서른도 되기 전에 관절 다 작살나겠다,라고 했다. 정원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인터뷰에서 다들 무릎이 고장 나서 더이상 과격한 안무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댄스곡이 아니라 발라드로 컴백하게 되었다고. 사장님이 김치전을 내왔다. “찌개는 조금 이따 줄게요. 김치전 먼저 먹어요.” 나는 김치전 사진을 찍어 정원에게 보냈다. 사장님이 친구들에게 김치전을 가져다주자 관절약 아주머니가 가방에서 약을 꺼냈다. “이번에는 니들 거 다 사 왔어.” 지난주에 자기도 관절약을 사달라며 투덜대던 아주머니가 그 자리에서 한알을 꺼내 먹었다. “경옥아, 고맙다.” 관절약 사 온 아주머니의 이름은 경옥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정자, 경옥, 경희. 이제 한 아주머니 이름만 알면 되었다. 그 아주머니 이름을 알 때까지 나는 투덜이 아주머니로 부르기로 했다. 잠시 후에 동태찌개가 나왔다. 지난주보다 알이 더 많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알을 좋아하지 않아서 조금 난감했다. 막걸리를 다 마셨는데도 안주가 반이나 남았다. 매주 한병만 마시기로 했는데 어쩌지. 나는 창밖을 보았다. 아까보다 비가 더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비가 오는 날만 예외로 할까. 그렇게 결심을 하고 막걸리 한병을 더 주문했다. 사장님이 막걸리를 사 와야 한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면 그만 마시겠다고 했더니 경옥 아주머니가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도 더 마실 거예요.” 경옥 아주머니가 경희 사장님에게 손가락 세개를 펼쳤다.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전화를 받으면서 들어왔다. “응. 응. 얼른 갈게.” 전화를 끊고 사장님이 내 테이블에 막걸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애 아빠가 넘어져 머리가 깨졌다는데.”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다. “또 넘어졌어?” “얼른 가게 문 닫아. 우리가 치우고 갈게.” 사장님이 앞치마를 벗고 가게 간판 불을 껐다. 나는 막걸리 뚜껑을 따려다 말았다. 그때 다시 전화가 왔다. 사장님이 전화를 받더니 응, 응, 그 말만 다섯번 반복하고 끊었다. “응급실 가서 다시 전화한대. 지금 친구랑 같이 있다고 입원하게 되면 그때 오래.” 사장님이 다시 앞치마를 입었다. 잠시 후 아저씨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간판 불 왜 안 켰어?” 맨 처음으로 들어온 아저씨가 물었다. 그러자 사장님이 말했다. “우리 남편이 머리가 깨졌다네. 그래서 일찍 가게 문 닫으려고.” 그 말에 아저씨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깨져? 피 많이 났대?” “피 나는 게 더 낫지. 안 나면 뇌진탕이여.” “말은 잘해? 말이 어눌해지는지 살펴봐.” “그나저나 우리 삼겹살 먹을 건데.” “고기랑 밑반찬만 내놓고 가. 우리가 알아서 먹고 갈게.” 아저씨들이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이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아저씨들은 헤딩을 하다 서로 머리를 부딪친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부터 기억력이 나빠진 것 같아.” “난 아무래도 그때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거 같아.” 엿들어보니 아저씨들은 조기축구회 회원인 모양이었다. 최근 시합에서 5 대 2로 졌다. 아저씨들이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고 나는 막걸리 병을 땄다. 그사이 사장님은 딸과 통화를 했다. 넘어져서 다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디 용한 작명소 없어? 이름을 바꾸든지 해야지.” 전화를 끊은 사장님이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러게. 구실인데 구실을 못해.” 경옥 아주머니가 말하자 다른 친구들이 웃었다. 사장님 남편 이름은 구실인 모양이었다. 이름이 구실이라니. 어렸을 때 놀림을 꽤 받았을 이름이었다. 나는 막걸리를 반 정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비가 그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걸어가는 여자아이들 셋을 만났다.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내 선물은 너무 작아.” 한 아이가 말하자 다른 아이가 대답했다. “내 건 포장지만 커.” 그러자 다른 아이가 말했다. “나 생일 초대 처음 받아봐.” 아이들은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몇년째 생일날 미역국을 못 먹었다. 아니 안 먹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게 의미 없게 느껴졌다. 집 앞에 도착한 뒤에야 가게에 우산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아챘다.

 

 

2

 

유튜브를 볼 때마다 와일드 윈드의 영상이 자동으로 추천되었다. 일곱명으로 시작된 그룹은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네명으로 줄었다. 춤을 잘 추던 멤버가 나가고 보컬 멤버만 남아서 오히려 발라드가 잘 어울렸다. 라디오에 출연한 리더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한음 한음 소중히 불렀다고 말했는데, 팬들이 그 영상을 쇼츠로 만들었다. 조회 수가 150만회를 넘었다. 정원은 팬사인회에 응모하겠다며 앨범을 여러장 샀다. 당첨이 되면 내가 아이를 봐준다고 약속을 했다. 그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설마 당첨이 되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만 당첨이 되고 말았다. 사인회가 열리는 토요일 오후, 나는 정원의 아들인 수현과 극장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다. 생일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가 생일로 알고 있던 날이 진짜 태어난 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였다. 아이는 입양되었고 출생 기록에는 생년월일이 적혀 있지 않았다. 양부모는 아이를 입양한 날을 생일로 정했다. 아이는 입양되었다는 사실보다 태어난 날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태어난 날 눈이 왔을까 비가 왔을까? 병원 창밖으로 환한 꽃나무가 보였을까 보름달이 보였을까? 그런 것들을 상상하다 아이는 몽유병에 걸렸다. 아이는 밤마다 맨발로 뒷마당을 걸었다. 영화는 몽유병에 걸린 아이의 발을 자주 보여주었다. 아이의 발은 들꽃을 피해 걸었다. 개미를 피해 걸었다. 수현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갓난아기였을 때 수현은 좀처럼 울지 않았다. 기저귀가 젖어도, 배가 고파도, 자다 깨도, 엄마가 들여다볼 때까지 방긋방긋 웃으며 기다렸다. 그랬는데 정원이 이혼을 한 뒤로는 울보가 되었다. 유치원에서 주말농장으로 견학을 간 날 감자를 캐다가 운 게 시작이었다. 선생님들이 꽃삽을 나눠주었는데 그걸로 감자를 캐다 그만 생채기를 낸 것이다. 꽃삽에 파인 감자를 보고 울고, 알이 영글지 않은 옥수수를 보고 울고, 고래를 닮은 구름을 보고 울었다. 그날 밤, 정원은 내게 전화를 걸어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혼소송을 하면서 정원은 밤마다 혼자 술을 마시며 울었다. 그 모습을 수현이 본 게 틀림없다고. 다 자기 탓이라고. “아니야. 수현이가 F인 거야. 잘 우는 만큼 잘 웃기도 하잖아.” 내가 위로를 해주었다. 그 말에 정원이 훌쩍이며 대답했다. “맞아, 우리 아들은 잘 울고, 잘 웃고, 그리고 잘 자.” 내가 정원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똥도 잘 싸고.” “맞아, 우리 아들. 똥도 잘 싸고.” 오랫동안 변비로 고생한 정원은 그것만은 자신을 닮지 않았다며 기뻐했다. 영화는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장면으로 끝났다. 케이크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건 생일 케이크가 아님.’ 영화가 끝나자 수현이 박수를 쳤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정원과 만나기로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정원이 이십분이나 늦게 왔다. 그러면서 팬사인회에 온 아이들이 우는 통에 사인회 시간이 길어졌다는 변명을 했다. “무슨 아이들?” 내가 묻자 정원은 와일드 윈드가 아이돌 최초로 유아 동반 팬사인회를 열었다는 말을 해주었다. “팬들이 거의 엄마가 된 거지. 어떤 팬이 팬사인회에 가고 싶은데 주말이라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는 사연을 보낸 거야. 그 말을 들은 우리 리더가 이렇게 말했어. 버스도 6세 미만은 무료인데 데리고 오세요, 하고.” 그렇게 말하고 정원은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아홉살이니까 무료가 아니고.” 수현이 메뉴판에서 가격표를 가리켰다. “난 엄마보다 만원이나 싸.” 나는 맥주 한잔 값으로 무제한 리필이 가능하다는 안내 문구를 가리켰다. “나는 이거 사줘.” 직원이 빈 맥주잔을 가져다주면서 샐러드 코너 뒤쪽에 맥주 탭이 있다고 말했다. 첫잔을 따르는데 거품만 나왔다. 거품이 가득 담긴 맥주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니 정원이 날 한심하게 보았다. “자신 없으면 나한테 부탁하지.” 정원이 말했다. 그리고 내 잔을 들고 가더니 잠시 후 돌아왔다. “완벽한 8 대 2의 비율이야.” 정원이 내 앞에 맥주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십대에 정원은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생맥줏집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손님들에게 원하는 거품의 비율을 물어봐 거기에 맞게 맥주를 따라주기도 했다. 8 대 2나 9 대 1을 원하는 손님이 가장 많았다. 정원은 7 대 3의 비율을 가장 좋아했다. 내가 술을 마시러 가면 정원은 사장님 몰래 두가지 맥주를 섞어주기도 했다. 라거 7에 흑맥주 3.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이었다. 정원이 팬사인회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히트곡 메들리를 부르다 한 멤버의 바지가 터졌다는 거다. “노래 부르다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한 거야. 그러다 양복바지가 그만. 그걸 보는데 옛날 생각 나더라.” 정원이 웃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정원은 학교 축제에서 커버 댄스를 추다가 바지 엉덩이 쪽이 터진 적이 있었다. 그래도 정원은 춤추는 걸 멈추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정원은 공연을 보던 아이들에게 말했다. 제 영상 찍은 분들 손 들어보세요, 하고. 많은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약속해요. 영상 지우기로.” 정원이 소리쳤고 아이들이 그 말을 따라했다. “지우자. 지우자.” 정원이 엉덩이가 찢어진 바지를 입고 춤을 추는 영상은 아무 데도 유포되지 않았고, 교장선생님은 졸업식 날 그 일화를 이야기하며 그런 학생들이니 모두 좋은 어른이 될 거라고 말했다. 수현이 와플에 생크림을 잔뜩 올려 가지고 왔다. 그걸 보고 정원이 살찐다고 잔소리를 하자 수현이 말했다. “이거 내 생일 케이크. 오늘 내 생일이야.”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래서 재빨리 대답해주었다. “그래, 오늘 수현이 생일.” 정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뜻이냐 물었다. 나와 수현은 말해주지 않았다. “궁금하면 너도 영화 봐.” 자신의 진짜 생일날을 알아내지 못한 아이는 해마다 생일날을 바꿨다. 어떤 해는 첫눈이 내린 날로 생일을 정했고, 어떤 해는 개기월식이 일어난 날로 생일을 정했다. 어떤 해는 생일파티를 세번이나 했고, 어떤 해는 생일이 없기도 했다. “올해 이모의 생일은 6월 21일로 할래. 낮이 가장 긴 날이거든.” 내가 말했다. 수현이 그날 잊지 않고 생일 메시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정원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골목에서 번호가 0621인 차를 보았다. 휴대폰을 꺼내 번호판 사진을 찍었다. 태어난 날이 아닌 날을 생일로 하면 미역국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정원에게 사진을 보냈다. ‘잊지 마. 올해는 이 날이 내 생일이야.’ 내 이름이 들어간 간판만 보면 사진을 찍어 보내던 사람과 사귄 적이 있었다. 목포에는 내 이름으로 된 미용실이 있었고 안동에는 칼국수 가게가 있었다. 군산에는 내 이름과 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가게가 나란히 있기도 했다. 그 두 가게의 간판을 찍어 보내던 날 내게 농담을 했다. 삼년 후에도 가게들이 망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때 결혼하자고. 나는 가게들이 아직까지 있는지 검색해보려다 말았다.

 

 

3

 

일주일 내내 같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정글짐 맨 꼭대기에서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려 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흔든다.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 몇개가 떨어진다. 동전을 향해 침을 뱉는다. 곧이어 동전 주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집에 가야 하는데. 비에 젖기 전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도 모두 사라진다. 나는 거꾸로 매달린 채 비를 맞는다. 점심에 정원이 미역국을 끓이는 사진을 보냈다. ‘오늘도 생일이래. 도대체 어떤 영화를 보여준 거야?’ 나는 생일 축하 이모티콘을 보냈다. 미역국을 보자 뜬금없이 잡채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 오늘은 고추잡채를 먹어야지. 나는 중국집을 검색해보았다. 별점이 4.9인 중국집이 있었다. 지도를 보니 옆 건물에 빨래방이 보였다. 그래서 이불을 들고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경희 사장님의 식당 앞을 지나갔다. 가게 문은 닫혀 있었다. ‘환갑 여행 중.’ 가게 입구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여행을 간 걸 보면 머리가 깨졌다는 남편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부부가 여행을 갔을까? 매주 어울리던 친구들이랑 가지 않았을까?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무인 빨래방에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이불을 넣고 빨래가 돌아가는 것을 한참 구경했다. 한 남자가 들어와 운동화 전용 세탁기에 운동화를 잔뜩 넣었다. 나랑 똑같은 운동화도 있었다. 올봄에 달리기를 해보려고 샀는데 족저근막염이 생기는 바람에 일주일 만에 그만두었다. 남자의 운동화는 뒤축이 닳아 있었다. 빨래 시작 버튼을 누른 뒤 남자는 무인 아이스크림 판매대로 가서 메로나를 사 왔다. 메로나가 처음 나왔을 때 아버지는 하루에 하나씩 메로나를 드셨다. 그래서 메론을 사다 드렸더니 아이스크림보다 맛이 없다고 한입 드시고는 마셨다. “난 이상하게 가짜가 더 맛있다.” 아버지는 메로나를 먹을 때마다 그 말을 했다. 바나나보다는 바나나우유가 더 좋고 메론보다는 메로나가 더 좋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옷을 정리하는데 가짜 브랜드 티셔츠가 잔뜩 나왔다. 가짜 푸마. 가짜 리복. 가짜 나이키. 내가 그걸 버리려고 했더니 어머니가 잠옷으로 쓴다고 그냥 두라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목이 늘어난 티셔츠 때문에 불면증에 걸렸다. 평생 예쁜 잠옷 한번 입어보지 못한 어머니 때문에. 예쁜 잠옷 한벌 사주지 않은 못된 딸 때문에. 나는 아이스크림 판매대로 갔다. 메로나를 사려고 했는데 그 옆에 옥수수가 그려진 아이스크림이 있어서 그걸 골랐다. 어머니는 옥수수를 잘 드시지 않았는데 옥수수밥은 좋아했다. 옥수수 모양의 과자 안에는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와일드 윈드의 팬사인회 영상이 올라왔다. 정원이 말했던 춤을 추다 바지가 터진 영상도 있었다. 바지가 찢어진 멤버가 양손으로 엉덩이를 가리고 게걸음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 팬들이 괜찮아, 괜찮아, 하고 소리쳤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하다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지가 찢어진 멤버는 데뷔 초에 방송에서 콜라 빨리 마시기 장기를 선보이다가 트림을 했던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그 순간 벽에 붙어 있는 풍선이 터지는 바람에 트림으로 풍선을 터트린 아이돌이 되었다. 유튜브 영상 댓글에는 그 풍선 사건 때부터 좋아했다는 글이 있었다. 생일 케이크의 초를 끄다가 눈썹을 태웠을 때부터 좋아했다는 글도 있었다. 춤을 추다 신발이 관객석으로 날아갔을 때부터 좋아했다는 글도 있었다. 팬들이 남긴 댓글을 따라 읽다 이상한 글을 보았다. ‘이런 건 창피한 일에도 못 들지. 전교생 앞에서 바지가 터진 친구도 있는데.’ 나는 그 댓글을 쓴 사람의 채널에 들어가보았다. 올린 영상도 구독자도 없었다. 남의 영상에 댓글만 세개 달았다. 그 사람이 댓글을 쓴 다른 영상에 들어가보았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막춤을 추는 고등학생들의 영상이었다. 영상 제목이 ‘어디 내놓아도 창피한 친구들’이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댓글이 달려 있었다. ‘눈사람 머리가 데굴데굴 구를 때 나도 창피했었지.’ 다른 하나는 달리기를 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영상이었다. 영상에서는 달리는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고 자막으로 그의 인생이 요약되어 흘러갔다. 열일곱살에 아이를 임신했던 일. 그 아이를 지우려고 했던 일. 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부모님이 창피하다며 인연을 끊은 일. 달리는 사람은 그런 인생 이야기를 담담하게 고백했다. 거기에는 이런 댓글을 달아놓았다. ‘힘들면 따뜻한 냄비우동을 드세요. 그러면 용기가 생겨요.’ 이불 빨래가 끝났다. 나는 이불을 건조기에 넣고 고온 버튼을 눌렀다. 글을 남긴 사람이 영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영수와 정원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났다. 정원과는 앞뒤 자리에 앉아서 서로 농담도 하고 가끔 떡볶이도 사 먹는 사이였지만 영수는 자리가 멀어서 학기가 끝나가도록 몇마디 주고받지 못했다. 이른 첫눈이 내린 날이었다. 그날 나는 체육시간에 피구 게임을 하다 얼굴에 공을 맞았는데 판다처럼 두 눈에 멍이 들었다. 맨날 화난 얼굴로 수업을 하던 국사선생님이 내 얼굴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번 웃기 시작하자 선생님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다가 갈비뼈나 부러져라,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갈비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웃다가 담에 걸렸다. 그 바람에 오른손을 들지 못해서 칠판에 글을 쓰지 못했다. 그제야 선생님이 내게 사과를 했다. 웃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선생님이 웃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스무살 때 선생님도 나처럼 두 눈에 멍이 든 적이 있었다고. 그때 선생님은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학원에 다녔는데, 학원에서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을 짝사랑했다. 그 학생은 평소에는 공부를 잘했는데 시험만 보면 망쳤다. 긴장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수능을 사흘 앞두고 선생님은 계단에서 미끄러지면서 난간에 이마를 부딪쳤다. 처음에는 이마에 들었던 멍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두 눈에 퍼렇게 멍이 고였다. 수능시험을 보고 난 다음 여학생이 선생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멍든 눈을 생각하자 자꾸 웃음이 났다고. 그랬더니 긴장이 풀렸고 그 덕에 시험을 잘 봤다고. “그래서 나보다 더 좋은 대학에 합격했지. 그런데 그게 자격지심이 되어서 그후로 연락하지 못했어. 나 참 못났지?” 선생님이 말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이 말했다. “선생님, 지금이라도 찾아봐요. 결혼 안 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자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창피해. 창피해.” 정원이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전교생 앞에서 바지가 터진 사람도 있어요. 그게 뭐가 창피해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이 활짝 웃었다. “그래, 맞다. 맞다. 그게 뭐가 창피하냐.” 수업이 끝나고 영수가 내게 사과를 했다. 공을 던진 건 자기였다고. 내가 미안하면 맛있는 거라도 사라고 대답했다. 그때 뒤에 앉아 있던 정원이 끼어들었다. “나도 사줘. 내 엉덩이 보고 영수 니가 제일 크게 웃었어. 내가 다 봤어.” 정원이 냄비우동을 먹자고 했다. 눈이 오는 날은 냄비우동을 먹는 법이라고. 분식집 사장님이 내 눈을 보고 웃었다. “우리 보고 웃었으니 양 많이 주세요.” 내가 말했다. 사장님이 웃어서 미안하다며 유부초밥을 서비스로 주었다. 우동을 먹으면서 정원이 말했다. “우리 엄마가 내가 배 속에 있었을 때 이걸 자주 먹었대. 이걸 먹으면 용기가 생겼대. 혼자서도 날 키울 용기가.” 정원의 말을 듣던 영수가 내게 고백했다. 사실 일부러 내 얼굴을 향해 던졌다고. 내가 미워서 그런 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미워서 그랬다고. 그날 우리 셋은 눈이 쌓인 곳마다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그러다 어느 가게 앞에서 만화 「명탐정 코난」의 코난을 닮은 눈사람을 보았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나비넥타이까지 하고 있었다. “수수께끼로 놔두는 편이 나을 때도 있어.” 영수가 코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3기. 세기말의 마술사.” 내가 대답했다. 영수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고 내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때였다. 눈사람 머리가 갑자기 떨어졌다. 코난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안경이 떨어지고, 넥타이가 떨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굴러가는 머리를 보았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된 것.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러 한 거 아니에요.” 영수가 말했다. 그리고 뛰었다. 정원이 영수를 따라 뛰었다. 그 뒤를 내가 따라 뛰었다. 그러다 넘어졌다. 영수가 먼저 넘어지고 넘어진 영수를 일으켜주려다 정원이 같이 넘어졌다. 그리고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못한 내가 두 친구 위로 넘어졌다. 영수는 엉덩이뼈에 금이 갔다. 구급차를 기다리면서 영수는 창피하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그때마다 정원이 말했다. “괜찮아. 전교생에게 빨간 팬티를 보인 나도 있잖아.” 내가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 신발에 토했을 때도, 영수가 중고나라에서 사기를 당해 카메라 대신 벽돌을 택배로 받았을 때도, 정원이 면접을 보러 가다 하이힐이 부러졌을 때도 우리는 서로에게 말했다. 괜찮아. 이런 건 창피한 일에도 못 들지. 그후로 십년 동안 우리는 새해 일출을 같이 보았다. 그리고 지난해에 있었던 창피한 일들을 종이에 적은 다음 비행기로 접어서 날리고 냄비우동을 사 먹었다. 영수가 정원의 돈 삼천만원을 가지고 사라졌을 때 정원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창피한 게 뭔지 몰랐던 거야, 그년은.” 건조가 다 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영수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남긴 댓글에 다시 댓글을 남겼다. ‘수수께끼로 놔두는 편이 나을 때도 있을까?’ 건조기에서 꺼낸 이불은 따뜻했다. 이불을 접어서 가방에 담았더니 갑자기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고추잡채는 다음 주에 먹어야지. 나는 국수 가게에 갔다. 매운어묵국수와 닭발편육을 주문했더니 직원이 편육이 매운맛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 어묵국수를 순한 맛으로 바꿔주세요. 소주도 한병이요.” 편육이 매콤해서 안주 삼기에 좋았다. 날이 쌀쌀해지면 편육에 막걸리를 마셔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단 댓글에 또다시 댓글이 달렸다. ‘너구나?’

 

 

4

 

영수는 내게 전화를 걸어 국사선생님 이야기를 했다. 쓸개 제거 수술을 받은 국사선생님의 아내와 같은 병실에 입원을 했다고. 선생님 왼쪽 눈썹 밑에 점이 있어서 한번에 알아봤다고. 국사선생님은 같은 위치에 점이 있는 학생들만 보면 이런 말을 했다. “이건 재물운이야. 그러니까 절대 빼지 마라.” 우리에게 재수 시절을 고백한 뒤 선생님은 이상한 일을 연이어 겪었다. 겨울방학 때 조카랑 눈썰매장을 갔다가 뒤따라오는 조카의 발에 차여 오른쪽 눈이 퍼렇게 멍들었다. 그 멍이 가시기도 전에 왼쪽 눈이 멍들었다. 술에 취해 길을 걷다 전봇대에 부딪힌 것이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그게 뭐가 창피해요, 하고 소리치던 학생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래서 선생님은 짝사랑했던 학생의 소식을 수소문해보았고 어느 기업의 홍보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선생님은 회사 사이트를 뒤져서 메일 주소를 알아냈다. 수능 전날 눈에 멍이 들었던 남학생을 기억하세요?라고 선생님은 메일에 적었다. 선생님의 짝사랑은 메일을 받자마자 그날을 기억해냈다. 그러자 또 웃음이 났다. 그날 마침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있었는데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쳤다. 그래서 고맙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대.” 영수는 내게 말했다. 선생님은 영수를 정원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영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니가 춤추다 바지가 터지는 바람에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었어.” 선생님의 말에 영수는 그건 자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 그 친구의 영상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친구에게는 지웠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웃고 싶을 때마다 혼자 그 영상을 본다고. 그 말을 하다 영수는 울었다. 갑작스럽게 눈물을 흘리자 국사선생님이 위로를 해주었다. “걱정 마. 우리 아버지는 이십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건강해.” 영수는 그것 때문에 운 게 아니었다. 졸업식 날 교장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영수가 수술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선생님 아내는 퇴원하고 없었다. 그 대신 영수의 침대에 손때 묻은 작은 도마뱀 인형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은 막내딸이 초등학생 때 만들어준 인형을 놓고 간다고 적었다. ‘우리 딸 말에 의하면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도마뱀이래. 이게 너에게 행운을 줄 거야.’ 영수는 도마뱀 인형을 손바닥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도마뱀 사진으로 바꾸었다. 무슨 일이든 척척. 소개 문구도 바꾸었다. 그러자 영수는 정원의 프로필 사진이 궁금해졌다. 정원을 검색해 프로필 사진을 보았다. 와일드 윈드 팬사인회장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래서 팬사인회 영상을 찾아봤어. 그러다 혹시 정원이 볼까 싶어 댓글을 남겨봤고. 그런데 니가 알아봤네.” 영수가 말했다. 영수와 통화를 마친 뒤 나는 정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하냐고 물었더니 수현이랑 세상에서 가장 예쁜 단어 찾기 게임을 한다고 했다. “그게 뭐야?” “몰라. 숙제래. 예쁜 단어 열개 찾아오기. 근데 사랑, 엄마, 뭐 이런 단어는 안 된대. 너도 하나만 말해봐.” 나는 숭늉이라고 말했다. 왠지 그 단어만 생각하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고. “그게 뭐야. 하나도 안 예쁘지만 일단 후보에 넣어둘게.” 정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찾은 단어들을 말해주었다. 잠자리. 노을. 그림자. 맨발. “그거나 숭늉이나 비슷하네. 그건 그렇고 영수한테 연락이 왔어.” 내 말에 정원이 영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다. 지금은 예쁜 단어를 말하는 시간이라고. “응. 미안. 그런데 암이래.” 내가 말했다. 정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정원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예쁜 단어들을 생각했다. 꽃삽. 지우개. 간지럼. 한참 후에 정원이 말했다. “죽는대? 아니면 산대?”

 

정원은 녹두죽을 끓여 왔다. “이거 먹고 건강해져서 일 많이 하라고. 그래서 내 돈 갚으라고.” 정원은 죽집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녹두죽 효능에 암환자 회복에 좋은 음식이라고 적혀 있었던 게 기억이 나 끓여봤다고 정원은 말했다. 영수가 정원의 돈을 가지고 사라진 후 정원은 술만 마시면 영수 욕을 했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마다 닭발 가게에 갔다. 거기에서 가장 매운 닭발을 시킨 다음 가운데 발가락을 하나 남겨놓고 먹었다. 그리고 그걸 흔들면서 영수 욕을 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건 영수가 우리에게 알려준 방법이었다. “이게 바로 닭발 뻑큐지. 욕은 닭발로 대신하고, 내 손으로는 예쁜 것만 하자.” 그렇게 말하며 영수는 우리한테 손가락 하트를 해주곤 했다. “니 말대로 일년 내내 닭발 먹으며 니 욕을 했어. 그랬는데도 화가 하나도 안 풀리더라.” 내가 말했다. 영수가 잘했다고 대답했다. 앞으로 계속 계속 욕을 해도 괜찮다고. “사실 니 욕을 하면서 내가 이런 저주를 했어. 암이나 걸리라고. 미안해.” 정원이 말했다. 처음에 정원은 가벼운 저주를 했다. 변비나 생겨라.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자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지는 상상을 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저주의 강도를 높였다. 정원은 영수가 암에 걸려 찾아오는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그때마다 정원은 희열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미안해. 니가 진짜 암에 걸릴 줄은 몰랐어.” 정원이 말했다. 영수가 정원에게 통장을 주었다. “12월이 만기야. 니가 가지고 있다가 그때 찾아가.” 정원이 통장을 보더니 다시 영수에게 돌려주었다. “니 통장이잖아. 12월에 니가 찾아서 줘.” 정원은 서른살이 되기 전에 방 두칸짜리 전셋집을 얻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영수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자 정원은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먹어가며 아르바이트를 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돈을 막 쓰기 시작했고 손님들에게 짜증을 냈다. 점장은 정원을 해고하지 않고 휴가를 주었다. 봉투에 휴가비까지 넣어주면서. 봉투를 받자 정원은 울었다. 그러자 점장은 정원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일어나 휴게실 문을 닫아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그때 그 사람이 참 다정하게 느껴졌어. 그래서 사귀었어.” 정원이 거기까지 말하고는 아이스커피를 한번에 마셨다. “한잔 더 마셔야겠다.” 정원이 추가 주문을 하러 가는 사이 내가 나머지 이야기를 영수에게 해주었다. “그래서 결혼을 했다가 이혼했어. 정원이 말에 의하면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다정하다고 착각했던 거래.” 정원이 돌아와 마저 이야기를 했다. “너 때문에 결혼했다 이혼한 거야. 그런데 니 덕분에 우리 수현이를 얻었으니 됐어.” 정원이 영수에게 수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영수가 수현의 사진을 보고는 고개를 들어 정원의 얼굴을 보았다. “너 닮았네. 신기하다.” 내가 실제로 보면 더 닮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변비는 안 닮았어.” 정원이 말했다. “다행이다.” 영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과일 트럭이 까페 맞은편에 차를 세웠다. 꿀참외 팔아요. 꿀복숭아 팔아요. 꿀토마토 팔아요.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다 영수가 웃었다. “저럴 거면 그냥 꿀을 팔지.” 영수가 우리에게 과일을 사주겠다고 했다. 몸에 좋은 거 미리미리 먹고 자기처럼 암에 걸리지 말라며. 우리는 까페에서 나와 과일 트럭으로 갔다. 영수가 참외를 하나 들고는 냄새를 맡았다. 나도 냄새를 맡았다. 단 냄새가 났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해준 이야기인데, 줄이 열한개인 참외를 먹으면 행운이 온대. 엄마는 딱 한번 먹어봤는데 그렇게 단 참외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대.” 영수가 참외의 하얀 줄을 세었다. 열한개는 없고 모두 열개만 있었다. 과일 장수가 화를 냈다. 참외는 전부 열줄이라고. “사장님, 제가 일주일 전에 암 수술을 했거든요. 죽기 전에 끝내주게 맛있는 참외 한번 먹어보려고요.” 영수의 말에 과일 장수가 그러면 마음껏 찾아보라고 했다. 찾으면 공짜로 주겠다고. 그러면서 자기 어머니도 암 수술을 하셨는데 지금까지 건강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요새 우리 어머니는 매일 두시간씩 산책을 해요. 매일 토마토를 다섯개씩 드시고요.” 나는 하얀 줄이 아홉개인 참외를 찾았다. 영수가 맨 마지막 박스에서 열한개 줄이 있는 참외를 찾았다. 그걸 과일 장수에게 보여주었다. “에이, 이건 열줄이잖아요.” 과일 장수가 말했다. 하얀 줄 하나가 중간에 두개로 갈라진 것이었다. 그래서 참외 꼭지에서 보면 열줄이지만 반대쪽인 배꼽에서 보면 열한줄이었다. “치사하게. 그러면 내 돈 내고 살게요.” 영수가 말했다. 참외는 만원에 열개였다. 영수는 참외 이만원어치를 사서 나와 정원에게 나누어주었다. 열한줄짜리 참외는 정원에게 주었다. 혼자 먹지 말고 꼭 아들이랑 같이 먹으라는 말과 함께. 나는 토마토를 만원어치 사서 정원에게 주었다. 우리는 과일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면서 걸었다. 나는 영수에게 6월 21일이 내 생일이니 곧 보자고 말했다. 그때까지 열한개 줄이 있는 참외를 찾아놓겠다고. 나는 정원에게 예쁜 단어 목록에 참외를 넣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영수가 그게 무슨 말이냐 물어서 나는 수현이 예쁜 단어 찾기 숙제를 하는 중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영수가 산책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매일매일 산책을 하는 사람이 될 거야.” 영수가 말했다. “매일 산책을 하고, 매일 일곱시간씩 잠을 잘 거야.” “매일 토마토 다섯개씩 먹는 사람이 되자.” 나는 영수와 정원에게 식당에서 만난 아주머니들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나중에 관절약 선물해줄게.” 내 말에 영수가 울었다. “나중이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영수가 울자 정원이 화를 냈다. “울지 마. 울면 암세포가 다시 생길지도 몰라.” 나는 식당 사장님의 남편 이름이 구실이라고도 말해주었다. 어릴 때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부모님이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이름이 웃긴데 그걸 상상해보면 또 슬프기도 하다고. “구실이라니. 그래도 좀 창피한 이름이다.” 영수가 말했다. “뭐가 창피해. 전교생 앞에서 바지가 터진 사람도 있는데.” 정원이 그렇게 말하며 참외가 든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비닐봉지가 터지면서 참외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참외들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이고, 저런.” 지나가던 사람이 소리를 쳤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두명이 달려와서 참외를 주워주었다. 정원이 참외 하나를 들고는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그래도 이 참외는 안 깨졌어. 열한줄짜리.” 정원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조금 창피했다. 그래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응. 다행이다. 집에 가서 수현이랑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