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소설 | 제27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문소이 文韶異

1983년 서울 출생. 동국대 역사교육과 졸업.

wire222@naver.com

 

 

 

마이 리틀 그리니

 

 

1

 

지수는 여자를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수술실로 안내했다. 여자가 수술대에 눕자 맞은편에 있는 회복실로 가서 온도와 습도가 적절한지 확인하고 침대가 따뜻한지 손으로 짚었다. 나오기 전 방을 한번 더 둘러봤다. 지수가 상담실만큼이나 신경 써서 관리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지수는 5분 뒤 수술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수술실 문 앞에서 대기했다. 잠시 뒤 수술복을 입은 비몽사몽인 여자가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고 지수가 얼른 여자를 함께 부축해 회복실 침대에 눕혔다.

“괜찮으세요? 수술은 잘 끝났어요.”

“네에. 괜찮아요……”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상태의 여자는 ‘요’를 미처 다 발음하지 못했다.

“충분히 쉬시고 불편한 사항 있으면 여기 벨을 눌러주세요.”

지수가 협탁에 있는 전화기와 호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똑같은 내용의 안내 메모가 코팅되어 있으므로 지금 못 알아들어도 상관은 없다.

“네……”

순하게 대답한 여자는 지수가 솜이불을 가슴께로 올려 덮어주자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수는 불을 끄고 조용히 회복실 문을 닫고 나왔다. 여자는 방금 임신중지수술을 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면? 신촌역 11번 출구, 오프닝산부인과

—비밀 보장 상담, 편하게 문의하세요. 여의사, 오프닝산부인과

—임신중지수술이 가능한 모자보건법 14조, 신촌역 도보 5분, 오프닝산부인과

—태아가 생존능력을 갖추기 전 8주 이내 진행되는 임신중지수술, 오프닝산부인과

 

위층에서 내려와 상담실에 들어온 지수는 모니터를 켰다. 별도로 운영하는 SNS에 새로 올린 카드뉴스 일러스트를 클릭해서 병원 홈페이지로 연결되는지 확인했다. 성형외과 코디네이터로 일을 시작한 지수는 지금은 오프닝산부인과에서 근무 중이다. 7년 전, 지수가 일하던 병원에 상담을 받으러 온 오원장이 곧 개원하는 자기 병원에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며 꽤 높은 연봉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지수는 의료폐기물 봉투를 비롯한 비품을 체크하고 홈페이지와 SNS의 비밀글을 살펴보며 간간이 전화 응대도 했다. 요실금 수술, 소음순 수술, 피임 수술 문의 같은 경우에는 답변이 거의 정해져 있어 어렵지 않다. 평균적인 가격을 알려주고 환자의 몸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임신중지수술을 문의하는 경우에만 지수가 따로 전화한다. 책잡힐 만한 것은 절대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게 지수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Q. [비밀글] 낙태 얼마예여?ㅠ

임신한 거 같은데 아이를 낳기 어렵거든여ㅠ 수술비는 얼마 정도 할까여?ㅠ

A.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프닝산부인과입니다.

비용은 유선상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홈페이지를 훑어보던 지수가 최근에 막내 직원이 쓴 것으로 보이는 관리자 답글 하나를 삭제했다. 다행히 아직 조회 수는 0이었다. 지수는 답글을 다시 달았다.

 

A.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프닝산부인과입니다.

수술 비용이 궁금하신가보군요. 우선은 저희가 임신인지 아닌지부터 확인을 해야 하고요. 사람마다 건강 상태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비용을 유선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내방해주시면 성심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방문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지수는 글만 남기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답글만 남겨서는 고객을 유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바로 글쓴이가 남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수는 상대를 부드럽게 압박하는 특기를 발휘해 예약을 잡았다.

수술 비용은 현금으로만 받았고 병원 매출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현금 결제를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지수가 잘하는 일이었다. 상대방이 카드로 결제한다거나 현금영수증을 달라고 한다면 기꺼이 제공했을 테지만 애초에 그 말이 안 나오게 상담을 진행한다. 지금도 지수의 책상 밑 금고에는 그렇게 수술비로 받은 현금 뭉치가 들어 있다. 지수는 고객이 당한 일, 당할 일에 비하면 여기서 돈을 현금으로 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수샘, 안에 있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노크 소리와 함께 지수가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을 열었다. 오원장이었다.

“잠깐 짬 나서 왔어.”

지수는 얼른 일어나 오원장이 좋아하는 커피를 내렸다. 지수의 상담실에는 둘 사이가 훨씬 친밀했을 때—오원장이 상사이기 이전에 동료이거나 거창하지만 동지 같다고 느꼈을 때—그가 선물로 준 고급 커피머신이 있다. 이 기계는 당시 지수의 월급보다 비쌌다.

“여기 소파 참 좋다니까. 앉으면 잠 올 거 같아.” 오원장은 소파에 눕다시피 앉았다.

“아니, 피부과 뭐 문제 있는 거 아냐? 사람 또 나간대.”

오원장은 산부인과 수입이 줄어드는 상황에 대응해 작년에 숍 인 숍 형태로 산부인과 안에 피부과를 개원했고 페이 닥터를 고용했다. 조만간 분만실을 폐지할 것이고 피부과가 더 자리 잡으면 산부인과를 통째로 피부과로 바꿀 계획도 있다고, 지수샘만 알고 있으라며 은밀히 말한 적이 있다. 전공이 아닌데 할 수 있어요? 지수의 물음에 오원장은 웃으며 답했다. 지금 우리 피부과 허원장도 원래 전공은 종양학이야.

“자기가 은근히 피부과 동태 좀 살펴봐줘. 조무사들이나 코디샘 통해서.”

사람 자꾸 바뀌면 손님들이 싫어하잖아. 병원 신뢰도와도 관련이 있는 거라고. 덧붙이면서 오원장은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누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구나. 지수는 오원장이 자신을 찾아온 진짜 이유를 알아챘다. 오원장은 갑자기 커피 향이 좋다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참, 이거 보여주려고 온 건데. 내가 지금 링크 하나 보냈거든? 한번 봐봐. 깜짝 놀란다?”

병원 초창기 오원장은 공유할 가치가 있다 싶은 뉴스 기사의 링크를 보냈었다. 지수는 오원장이 처음으로 보냈던 뉴스의 주인공 리베카 곰퍼츠를 기억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10대 소녀들, 민간요법으로 임신중지수술을 받다가 합병증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여성을 보고 ‘선장’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네덜란드 산부인과 의사. 임신 초기에 복용만 해도 임신중지가 가능한 유산유도약을 배에 싣고 임신중지가 합법인 나라의 국제수역에 들어서면 필요한 여성들에게 약을 나눠주었다는 일화. ‘이 약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면 굳이 수술까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했던 자신의 답장까지. 그때의 오원장은 종종 이런 영문 기사의 주요 내용을 직접 번역해주었다.

지금의 오원장은 주로 웃긴 영상이나 귀여운 동물 영상을 직원 단톡방에 보낸다. 사람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오원장은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아무 때나 링크를 공유한다. 이번에 오원장이 호들갑 떨며 지수에게 보내준 것은 클링클링 링크였다. 클링클링 계정이 없던 지수는 오원장이 틈만 나면 ‘이거 봐봐’ 하고 링크를 보내는 통에 클링클링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지수샘이랑 완전 똑같지? 지수샘이 스무살에 사고 쳤으면 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야.”

좀 전까지의 근심이 지수에게 말하는 순간 사라져버린 오원장은 유통기한이 어제까지인 보톡스를 놔주겠다며 퇴근 전에 들르라는 말을 남기고 가뿐한 걸음으로 상담실을 나갔다.

 

“헤이 가이즈, 아임 그리니.”

오원장이 보내준 클링클링 계정의 주인공은 구독자가 89명뿐인 무명 클링커였다. 주로 에이미 와인하우스나 코린 베일리 래 노래를 부르는, 미국에 사는 평범한 동양인 여자아이 같았다.

오원장이 왜 난리를 쳤는지 수긍이 갈 만큼 얼핏 보면 전체적인 인상이나 웃는 모습이 지수와 닮았다. 그리니는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낡은 캠핑카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주로 올렸고 이따금 라이브방송을 했다.

그리니의 노래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마치 노래를 감상하듯 나긋나긋하게 고갯짓을 하며 옆에 붙어 있는 하얀 고양이였다. 몇 안 되는 구독자들도 어쩌면 고양이를 보려고 구독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리니가 고양이를 안고 있는 썸네일의 영상이 조회 수가 가장 높았다.

취미로 하기에는 나쁘지 않지만 직업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영상 몇개를 짧게 훑어보던 지수는 그리니가 이 SNS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대목에서 멈칫했다. 영상을 조금만 봐도 그리니가 영상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를 거의 다 털어놓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채식주의자이고, 아기 때 텍사스로 입양됐고, 기타는 어릴 때 교회에서 배웠고,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열일곱이 되며, 유니콘들이 나오는 「마이 리틀 포니」라는 만화에 환장하며, 아빠한테 맞아 죽을까봐 가출했다는 그런 얘기들.

고양이 이름은 스노우로 열세살이며 각종 알레르기와 질병이 있다고 했다. 그리니의 부모는 고양이를 전혀 돌보지 않기 때문에 같이 데리고 도망쳤다. 지수는 그리니가 올린 영상을 보는 걸 멈출 수 없는 이유가 그리니의 눈꺼풀 때문이 아닐까 하고 자문했다.

그리니의 눈꺼풀에는 또렷한 갈색 점이 있는데, 지수는 그리니처럼 눈꺼풀에 갈색 점이 있는 사람을 딱 한명 알고 있다. 경민. 지수의 생일날 자취방에서 자작곡을 불러줬던 경민이 떠올랐다. 경민은 그리니처럼 어릴 때 교회에서 기타를 배웠다.

경민과는 대학교 1학년 때 아르바이트하던 식당에서 만나 10년을 사귀었다. 지수는 전문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경민은 법대를 다녔다. 둘 다 지방에서 서울로 왔고, 신촌 골목 빌라촌에 살았다. 지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망치듯 집을 나온 상태였고, 경민은 부모가 신용불량자였기 때문에 둘 다 일찌감치 경제적으로 자립해야만 했다. 경민은 근처 이모 집에서 이모 부부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사촌동생과 지냈는데, 연인관계가 무르익고 편해질 때쯤에는 지수의 자취방에서 같이 살았다. 경민은 과외를 여러탕 뛰어 데이트 비용을 충당했지만 본격적으로 수험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는 지수에게 경제적으로 크게 의지했다. 지수는 그런 걸로 생색낸 적이 없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 여겼으므로. 지수는 자신과 경민은 다른 어리석은 연인들과 다르다고,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특히 경민을 유니콘 같은 존재라 믿었고, 그래서 법조인이 된 경민 옆에 자신이 함께할 미래를 그렸었다.

어쨌든 이제는 경민의 성이 김이었는지 이였는지 퍼뜩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다. 그리니의 영상을 보지 않았다면 경민과 함께했던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지수는 그리니를 발견했고, 그래서 잊으려 했던 예전 기억도 같이 떠올랐다.

처음은 괜찮은 데에서 하고 싶다며 돈을 모은 경민은 여의도의 호텔룸을 예약했다. 분위기를 내겠다고 마트에서 와인과 유럽 치즈를 사 왔지만, 둘 다 치즈 냄새에 적응하지 못해서 먹지도 못했다.

“지수야 나 처음인데 한번만 그냥 넣어보면 안 돼? 한번만……”

처음이니까 콘돔 없이 하고 싶다고 졸랐던 경민. 너무 좋다 지수야. 너무 뜨거워 너무 좋아. 지수의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던 경민.

지수는 스무살에 경민의 아이를 밴 적이 있다.

 

 

2

 

지수는 책상 서랍에 업무용 휴대폰을 넣고 퇴근 준비를 했다. 야간 진료는 교대로 담당했고 오늘은 정시에 퇴근하는 날이다. 대기실에는 재즈풍 캐럴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접수처 왼쪽에는 트리가 반짝였다. 오원장에게 보톡스를 맞으러 가기 전에 습관처럼 대기실을 쓱 둘러보는데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한명이 초점을 잃은 눈을 하고 앉아 있었다. 피부과에 온 것인지 이마와 볼에는 붉은 여드름이 가득했다.

 

—2021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사상 최초로 12월에 치러졌습니다. 코로나19 여파로 기존 일정보다 2주 연기하여 12월 3일 목요일에 시행되었는데요. 올해 수능 풍경, 김미미 기자입니다.

 

남학생에게 피부과 대기실은 이 복도를 지나야 한다고 알려주려는데 뒤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왔다. 보통 텔레비전은 오원장이 출연한 적 있는 종편 프로그램들을 편집해둔 영상이나 오케스트라 연주 영상 정도만 내보낸다. 아니 누가 뉴스를 튼 거야? 지수가 데스크에 있는 막내 직원에게 영상을 바꾸라고 말하는데 동시에 뒤에서 남학생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괜찮아요?”

지수가 얼른 접수처 데스크에서 휴지를 찾아 건넸다.

“고맙습니다. 으흐흐흐흑.”

남학생은 발음을 뭉개가며 얼굴이 흠뻑 젖도록 눈물을 터뜨리더니 황급히 병원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오원장의 진료실은 겉보기에는 다른 원장실과 면적이 비슷해 보이지만 책꽂이 옆에 있는 문을 열면 가정집 서재처럼 꾸민 넓은 공간이 나온다. 해가 짧아 벌써 어둑어둑한 거리에 통창 너머로 크리스마스 조명 장식을 한 백화점이 빛났다.

“원장님.”

지수가 불렀지만 오원장은 스윙 연습에 여념이 없다. 처음 시작은 골프 매트 한장이었지만 이제는 퍼팅 연습기와 어프로치 연습기가 이 서재를 어지럽히고 있다. 오원장은 스크린도 설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지수샘, 잠깐만요. 침대에 누워 있어요. 곧 갈게.”

아 짜증 나. 공이 제대로 맞지 않았는지 오원장이 벌컥 소리쳤다. 지수는 골프채를 짚고 삐딱하게 선 오원장의 뒷모습을 가만히 본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오원장의 긴 생머리가 침대에 누워 있는 지수의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지수의 이마에 능숙하게 주사를 놔주며 골프나 부동산, 주식투자와 사모펀드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아 정말요? 그래요? 지수는 관심있는 척하며 적당히 추임새를 넣었다. 친구들과 급하게 예약해서 내일부터 월요일까지 방콕에 간다고 했을 때만 주의를 기울였다. 다른 원장들도 있고, 어차피 오원장은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진료를 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야간 진료를 하는 오원장과 직원들을 남겨두고 퇴근하며 지수는 남학생이 앉아 있던 자리를 힐끗 쳐다봤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 책가방과 도시락통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늘 야간 근무를 하는 막내 직원이 리모컨을 든 채 대기실에 서 있는 지수에게 해맑게 인사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실장님.”

 

무슨 일인지 운전해서 집에 오는 동안 ‘02-3145’로 시작하는 병원 대표 번호로 전화가 두번이나 왔다. 몇년 전이라면 당연히 받았겠지만 이제는 받지 않는다. 급한 일이면 메시지가 오겠지, 지수는 병원 전화를 무시했다.

반려동물은 고사하고 선인장 화분이나 그림 액자 하나 없는 지수의 집은 안락하고 따뜻한 상담실과 달리 삭막한 느낌마저 풍긴다. 지수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지수는 씻고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아무것도 없는 반대편 벽을 가만히 보고 있는 걸 좋아한다. 아무도 말을 시키지 않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상황에 고요히 혼자 있고 싶다. 자기 전, 휴대폰으로 알람을 설정하던 지수는 그제야 막내 직원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실장님 병원에 일 터졌어요ㅠㅠ’

 

 

3

 

다음 날 오원장은 아침 일찍부터 지수에게 여러통의 메시지를 연달아 보냈다. 자신은 공항이라며 취소 수수료가 비싸기도 하고 지수샘이 있어서 비행 취소는 안 했다며, 일 잘 해결해달라고, 시끄럽지만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지수가 출근하자마자 막내 직원은 호출하기도 전에 먼저 실장실을 찾아왔다. 지수보다 열다섯살이 어리고 연봉이 절반도 안 되는 이 직원은 분위기를 살펴서 눈치껏 해야 하는 일이 많은 이 업종에 아직 적응하는 중이다. 홈페이지 답글, 손님 응대, 상담할 때 하지 말아야 할 말, 비용 얘기를 꺼내는 방법 등 막내 직원이 실수할 때마다 지수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히 알려주고 사고를 치면 수습을 해줬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그게.”

직원은 칭얼거리듯 어제 일을 쏟아냈다. 요약하자면 어제 왔던 남학생이 자기 여자친구가 여기서 낙태수술을 받았다고 울고불고 난리였으며 그것 때문에 수능시험을 보는 내내 정신이 팔려 시험을 망쳤다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수술한 건 확실해요? 본인이 봤대요?”

“그 여자친구가 일방적으로 디엠 보내고 잠수 탔대요.”

지수는 방금 실연당한 10대 남자애에 대해 생각해본다. 여름철 찜통이 된 자동차 속 콜라가 떠오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저분한 거품도.

지수는 최근에 미성년자가 임신 검사를 받으러 온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두달 전에 엄마와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왔던 학생을 생각해냈다. 질 초음파 진찰을 보고 나자 씨발 좆같다라고 차지게 혼잣말을 했던 아이. 그애인가?

“우리 병원에 온 적은 있대요? 그 여자친구라는 아이는 이름이 뭐죠?”

“남자애 이름은 이준희예요. 웃긴 게, 자기 이름을 계속 말 안 해주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름표를 봤어요.”

“네. 그래서 여자친구 이름은요?”

“윤다인이요. 참, 제가 그 여자애가 보냈다는 디엠 찍어놨어요.”

지수는 눈을 빛내며 휴대폰을 내미는 막내 직원에게 “잘했어요”라고 칭찬했다. 윤다인과 이준희가 주고받은 메시지는 예상보다 길었다. 왜 연락이 안 되냐는 준희의 애타는 메시지로 시작해서 수능을 안 볼 거고 유학 준비 중이라는 다인의 설명이 이어졌고 서로 다정하게 안부를 묻다가 준희가 임신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병원 같이 가줄까?’ 그러더니 준희는 수술비가 얼마인지 알아보라며 자기가 저금을 깨서 반을 내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저번에 검사한 데서 수술했다는 다인의 메시지로 대화가 마무리되는가 싶더니만 별안간 시작된 다인의 욕과 함께 상대를 헐뜯는 내용이 이어졌다. 마지막은 서로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끝나 있었다.

요즘 애들은 욕도 참 창의적으로 하는구나. 지수는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좀더 알아봐야겠지만 지수가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고생 많았어요.”

지수네 병원은 임신중지수술 관련 서류를 전산화하지 않는다. 서류의 싸인은 전부 수기로 받아서 정리하고 5년이 지나면 폐기하는 게 원칙이다. 지수는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캐비닛에서 최근 작업한 서류를 꺼내려 했다.

캐비닛을 여는 지수의 손목에는 예전에 오원장이 해외여행을 갔다가 면세점에서 사준 시계가 채워져 있다. 오원장이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큰일이 될 뻔한 사건을 지수가 정리해준 뒤에 받은 거였다.

“피부과 코디샘도 건너오셔서 미성년자니까 부모님하고 얘기해야 한다고 부모님 번호 좀 달라고 했더니.”

“했더니?”

“주춤하더라고요. 뭐라고 구시렁대다가 자기 사촌형이 변호사 사무실에 있는데 어쩌고 하더니 형이랑 얘기해보고 다시 오겠다고 좀 수그러들긴 했거든요? 근데 인터넷에 글을 올리겠다느니 공론화를 하겠다느니 암튼 그러고 갔어요.”

“네. 피부과 샘한테는 제가 따로 인사해야겠네요.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학생 이름, 나이, 주민등록번호, 부모님 이름, 학교까지 물어보고 파악해요. 주민등록번호는 가짜로 대는 경우가 많으니까 꼭 조회해보고요. 무엇보다 잘 달래는 게 중요해요.”

“네! 근데 실장님, 요즘 애들 진짜 장난 아니죠?”

 

지수는 가끔씩 널스잡이나 코디 구인 사이트에 마땅한 구인공고가 뜬 게 없나 찾아보곤 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지금 받는 연봉을 맞춰줄 만한 곳이 없었다. 서울을 벗어나도 된다는 생각에 영역을 넓혀봤지만 지방에서 자리를 찾는 건 더 어려웠다.

문득 옮길 만한 자리가 있나 싶어 구인 사이트에 오랜만에 들어가봤지만 별다른 건 없는 듯했다. 지수는 수술 동의서 서류철을 꺼내 하나씩 넘겨봤다. 부모님 얘기에 주춤했다는 건 아직 부모님은 모른다는 뜻이겠지. 이 아이가 자신의 추악한 부분을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휴대폰으로 그리니의 클링클링 계정에 들어갔다. 마침 라이브방송을 한다고 알람이 왔기 때문이다. 그리니의 영상은 자본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음질과 화질이 깨끗하지 않다.

“난 여기서 이렇게 방송하는 게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이야.”

그리니는 어렵지 않은 단어로 느릿느릿 말하는 편이었고, 자동 번역이 아니어도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신은 경계성 지능에 ADHD, PTSD와 CPTSD를 앓고 있다며 여러장의 진단서를 카메라 앞에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전에는 아빠가 보호자 증인을 서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고 그때 돈을 모아 중고 캠핑카를 산 뒤 어느 새벽에 고양이를 데리고 도망쳤다고. 아니 얘가 어디까지 말하는 거야? 지수는 미국이라고 다를까 싶어, 잠깐만 보고 말려던 방송에 결국 토독토독 실시간 댓글을 남겼다.

‘하이, 그리니. 난 네 방송 잘 보고 있어. 넌 정말 매력적이야. 그런데 온라인 세상에 너에 대해 너무 자세히 말하지 마. 범죄자가 노릴 수도 있잖아.’

“내 고양이 볼래? 얘는 스노우야. 너무 예쁘지? 여기 두드러기가 나긴 했는데…… 아침에 소셜 서비스 센터에서 빵을 타 왔어. 이거 조금 나눠줘야지. 스노우! 베이비! 컴 온. 뭐라고? 이렇게 데리고 나와 사는 게 뭐? 고양이를 학대하는 거라고? 학대? 학대라고? 빵은 안 돼? 야! 네가 뭘 알아? 스노우는 몸이 약해. 먹는 것도 가려 먹어야 해. 이건 줘도 되니까 주는 거야. 그 집에 있었으면 아빠가 얘를 잘 돌봤을 거 같아? 아빠는 스노우한테 관심도 없어. 너 정말 말하는 거 엿 같다. 꺼져! 스노우는 나랑 있어야 행복해. 네가 뭘 알아? 너 제정신이야? 제정신이야? 제정신이야? 빌어먹을. 뻑큐!”

뻑큐 뻑큐. 고요한 지수의 상담실에 그리니의 분노가 메아리쳤다. 채팅창에서 고양이에게 빵 주지 말라는 문구를 발견한 그리니가 흥분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못 들은 척하고 때로는 상대가 원하는 말을 하는 건 지수에게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인데 그리니는 그러지 못한다. 그애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말 한마디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막내 직원이었다.

“실장님, 어제 그 학생 사촌형이라는데요. 실장님 바꿔달래요.”

그리고 곧장 상대방 전화로 연결되는 소리가 났다. 지수나 다른 직원들 같았으면 ‘전화 연결할까요?’라고 물어보든가 아니면 상대방 연락처를 받은 뒤에 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내 직원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사나운 민원인과의 전화를 연결했다. 이것도 나중에 얘기해야겠구나. 지수는 갑작스러운 긴장감에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다듬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오프닝산부인과 은지수입니다.”

“이준희 학생 사촌형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지수야.”

상대방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수는 훅 치고 들어온 상대방이 누구일지 가늠하려 했다.

“나야, 경민이. 설마 나 잊은 거 아니지?”

 

그리니가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지수는 작게 탄식했다. 데이팅 앱을 통해 만났다는 남자친구는 그리니보다 나이가 많고, 그 역시 복합적인 정신질환이 있다. 부모와 함께 사는 그는 시에서 제공하는 일자리가 있어서 일을 한다. 그리니는 가끔 캠핑카를 남자친구 집 근처에 둔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이 말을 자주 했다.

“내가 어딨는지 알면 아빠가 날 죽일 거야.”

클링클링에 접속해 영상을 보던 지수는 그렇다면 네가 어디 있는지 유추되는 말은 전혀 안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남자친구는 안전한 사람이니, 아예 안 만나는 건 어떨까, 피임은 하고 있니,라고 묻고 싶었지만 역시 속으로만 물었다.

“나는 차에서 노숙하면서 이렇게 클링클링에 접속하는 것만이 세계와 연결되는 유일한 창구야. 네가 뭔데 나를 화나게 해?”

랜덤으로 재생된 이전 라이브영상에서 그리니는 또 분개에 차 있었다. 네가 뭔데 내 기분을 잡치냐고, 꺼지라고 노여워했다. 쉼터나 센터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받자 북받쳤는지 눈물이 고였다.

“내가 그 생각 안 해봤을 거 같아? 내가 바보야? 너는 몰라, 우리 아빠를. 내가 어디에 등록하면 바로 나를 잡으러 올 거라고. 그걸 원해? 잡혀가면 나는 죽임을 당할 거야. 너는 그거 원해 정말로?”

그러더니 곧장 기타를 잡고 다른 노래를 불렀다. 감정전환이 기가 막히게 빨랐다. 노래를 부를 때 그리니는 다른 사람 같다.

가끔씩 경직된 그리니의 표정이 풀어지고 부드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구독자들은 간혹이기는 했지만 그리니가 안내한 사서함 주소로 선물을 보내줬는데 그게 고양이 장난감이거나 유니콘 캐릭터와 관련된 소품이면 꺅,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헤이 가이즈, 내가 클링클링으로 버는 돈은 정말 푼돈이거든. 근데 그거는 생필품을 사는 데 써야 해. 빵도 사야 하고 탐폰도 사야 하고. 그래서 이런 선물들이 정말 고마워. 아이 러브 유 쏘 머치 클링키.”

지수는 이렇게 화를 내지 않는 그리니의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다. 지수의 아빠도 그리니처럼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분노는 대부분 술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5일은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셨는데 술을 마시면 기분이 나빠졌다. 기분이 나빠서 술을 마시면 또 기분이 나빠졌다. 회사에서는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아빠의 분풀이 대상은 가족이었다. 지수가 고향의 국립대를 포기하고 꾸역꾸역 서울로 도망쳐 온 이유다.

그리니의 아빠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화를 냈을까. 그도 기분이 나빠서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부수고 주먹질을 하며 화풀이를 했을까. 그러는 동안 그애 엄마는 걱정만 하고 방관했을까. 지수는 생각의 고리를 끊고 클링클링을 종료했다.

 

 

4

 

토요일에 병원을 방문한 경민은 빈손이 아니었다. 좋은 일로 오는 것도 아니면서 ‘같이 드세요’ 능글맞게 웃으며 병원 직원들에게 포장해온 조각 케이크 세트를 건넸다. 지수는 경민을 상담실로 안내했다. 정장을 빼입고 온 경민의 모습이 낯설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찌듦과 얼굴 주름과 튀어나온 배도. 향수도 바꿨는지 전과 달리 경민에게서는 가죽 냄새와 단내가 섞인 향이 났다.

“톰 포드야?”

지수는 경민을 상담실로 안내하면서 애써 칭찬거리를 찾아 간신히 향이 좋다고 했다.

“역시 넌 예리하네.”

명함을 건네고 소파에 앉은 경민은 마치 동창과 회포라도 풀러 온 사람처럼 굴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지수가 서둘러 경민의 사촌동생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하는 것과 달리 경민은 느긋하기만 했다.

“아이, 뭐가 그렇게 급해. 우리 거의 7년 만에 보는 거잖아.”

경민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상담실 여기저기를 관찰했다. 특히 벽 귀퉁이에 있는 캐비닛에 날카로운 시선을 줬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캐비닛에는 급하게 집어넣은 듯한 서류가 가득했다. 맨 위에는 ‘임신중지수술 동의서(2020)’라는 제목이 눈에 띄는 문서철이 있었다.

“커피 향이 좋다. 원두 뭐야?”

경민은 지수가 내준 커피를 마시며 시답잖은 얘기를 늘어놓았다. 여기 우리 자주 가던 해장국집 없어졌더라? 거기 맛있었는데. 그럼 설마 제육볶음집도? 제발 거긴 아직 있다고 해줘. 우리 거기서 김치찌개 진짜 많이 먹었잖아. 여긴 오랜만이라 뭐가 많이 바뀌었는데 분위기는 또 그대로인 것 같다? 여전히 어수선한 것이. 지수는 너무 쓰다며 커피는 입에도 대지 못했던 경민이 떠올랐다. 그때의 경민은 소주도 맛이 없다고 못 마셨는데.

경민은 학원강사를 하며 돈을 좀 모을 만하면 부모에게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로스쿨 등록금의 벽은 높았고, 그래서 1년에 한번 시험 보는 법원직을 준비했다. 떨어지면 학원강사를 하며 수험생활비를 벌고 다시 시험을 준비했다. 합격할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싶어 검찰 수사직을 준비했다가 떨어지고 다시 학원강사를 해서 돈을 모으다가 다시 원래 준비했던 법원직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다가…… 불과 몇년 전까지도 이모네서 사촌동생 과외를 해주며 신세를 졌다고 제삼자에 대해 말하듯이 지난 세월을 나열했다. 지금 회사에 운 좋게 들어갔고 많이 내려놓으니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지수는 간간이 대답하면서 잠자코 경민의 말을 들었다. 매우 흥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시계를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머릿속으로 막내 직원에게 일러둔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헤아렸다.

“결국은 다 돈이라는 거지.” 경민은 세상의 진리라도 알려준다는 듯 젠체하며 지수와 말다툼할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다리를 꼬고 소파 등에 팔을 얹었다.

“본인이나 배우자가 정신장애,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경우, 인척간의 임신, 모체의 건강을 해칠 수 있어 임신 유지가 어려운 상황, 이럴 때만 낙태가 합법인 거 알지? 그애는 내가 알기로는 어디에도 해당되는 게 없던데?”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온 경민은 지수도 다 아는 얘기를 줄줄 읊었다.

“글쎄. 해당사항이 없을까?”

지수는 묘하게 말을 끌었다.

“우선은, 그 여자친구라는 아이 우리 병원에서 수술 안 했어.”

“지수야.”

경민이 지수를 어르듯이 말했다. 나 법적 공방하러 온 거 아니야. 합의하러 온 거지. 잘 생각해. 일 커져서 병원에 좋을 거 없잖아.

“정신과에서 잘 아는 환자니까 전화 통화만으로 약 처방한다든지, 성형외과에서 광고와 다르게 값싼 국산 약물 쓴다든지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런 식으로 잡아내려면 잡을 수 있거든. 어디든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긴 어려우니까.”

지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사 법조인이면서 검사라도 된 것처럼 구는 꼴을 비꼬고 싶었지만 고객에게 하듯이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중요한 건 안 했다는 거야, 경민아. 최근 3개월간 관련 서류 다 찾아보니까 없어서 직원들하고도 더 찾아봤는데, 차트에 보니까 그애가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서 자연유산이 됐대. 하혈을 많이 해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 담당 원장님한테 확인받았어.”

지수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우리 병원은 불법 수술 안 해. 뒤지려면 정식으로 고소를 하든 뭘 하든 뒤져봐도 돼. 그 대신 아무것도 안 나올 때는 우리 원장님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을 것 같아.”

경민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기억났다. 저 표정은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는 경민의 표정이라는 것을. 지수는 그 얼굴에 대고 모든 걸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더구나 고3인데, 걔도 얼마나 스트레스였겠어. 그 나이에 임신했는데. 어린애들은 생리도 규칙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고 생각보다 자연유산 흔해. 우리도 그랬잖아. 기억 안 나?”

지수는 되돌려주듯 물었다. 기억 안 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표정을 어둡게 하고 경민을 똑바로 바라봤다. 경민이 아는 지수의 유산 경험은 자연유산 한번이다.

경민아, 나 스무살 겨울에 고향 갔잖아. 그때 수술받으러 간 거였어. 엄마가 알아봐준 곳에서 지웠어. 나중에 다 끝나고 나와보니 엄마가 차에 히터 틀어놓고 기다리고 있더라. 우리 엄마가 원래 그런 잔정이 없는 사람인데. 근데 경민아, 왜 실수는 같이 했는데 나만 그 뒷감당을 해야 했지? 너는 그런 걸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그치만 경민아. 난 너한테 이 얘기 안 해줄 거야. 그뒤로도 내가 사후피임약을 두번 더 처방받은 것도 넌 모르지. 자궁에 호르몬 폭탄을 떨어뜨린 것 같다고들 하더니 정말 힘들더라. 하지만 넌 영원히 모를 거야. 내가 말해준다면 넌 가끔 속상해하고 때로 억울해하면서 처음부터 네 것도 아니었던 걸 도둑맞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지수는 이 모든 걸 토해내고픈 욕구를 참았다. 이대로 경민의 인생에서 지수의 존재가 점점 흐릿해지길 바랐다.

경민은 다른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는 것처럼 지수의 상담실을 계속 눈으로 훑었다.

“서류 좀 확인해봐도 될까?”

“당연히 안 되지. 개인정보인데.”

똑똑똑.

막내에게 말해둔 약속한 30분이 벌써 지났는지 노크 소리가 났다. 지수는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근데 그애 엄마는 좀 다르게 생각하시더라고.”

내가 어디까지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경민아 너니까 믿고 말할게. 애가 그…… 임신한 걸로 추정되는 그날 이후 몸이 많이 아팠대. 마치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처럼? 잠도 거의 못 자고 계속 울었대.

머리가 좋은 경민은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렸는지 동공이 흔들렸다.

“유학 간다는 거 보니까 돈이 좀 있는 집 같던데.”

지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잔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네 말대로 모든 게 돈이지.”

똑똑똑. 노크 소리가 한번 더 나고 막내 직원이 상담실에 들어왔다.

“실장님, 나와보셔야겠어요. 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지수는 상담실을 나가기 전에 캐비닛에 눈길을 한번 더 줬다.

“이거 문이 고장이 났는지 잘 안 닫히네. 경민아, 이것 좀 닫아줄 수 있어? 나 금방 갔다 올게.”

그리고 나와서는 직원에게 당부했다.

“이제 상담실 들어가서 시간이 좀 걸리니까 손님은 편하게 계시라고 해요. 한 30분 정도 걸린다고.”

“네. 알겠습니다!”

지수는 직원용 출입문으로 향했다. 잠깐 대형 문구점에 가서 한바퀴 돌 동안 경민은 캐비닛에서 서류를 꺼내 살펴볼 것이다. 경민이 성격에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설치해둔 장치였다.

 

박예○. 만 14세. 경찰과 함께 내방. 집단성폭행 피해자. 수사 협조 및 상급병원 진료의뢰서 작성.

손서○. 만 19세. 성폭행 피해자. 사후피임약 처방 및 에이즈검사 진행.

강하○. 만 16세. 보호자 상담 완료. 초음파검사 후 자연유산 확인.

김은○. 만 33세. 피부과 처방 약 복용 후 기형아 위험 진단. 보호자 수술 동의.

 

샅샅이 뒤져도, 3개월이 아니라 1년치를 넘게 살펴봐도 윤다인의 서류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덧붙인 말 중에는 지수가 지어낸 이야기도 섞였다는 걸 경민은 모를 것이다. 경민은 지수를 모르기 때문에.

지수는 대형 문구점을 구경하며 「마이 리틀 포니」 관련 상품을 찾아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니는 매번 쑥스러워하며 ‘뭐 보내주려면 보내주고 아님 말고’라면서 클링클링에 사서함 주소와 아마존 위시리스트 링크를 걸어뒀다. 그리니는 만 18세가 될 때까지 남은 1년 동안 어떻게든 클링클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리니의 위시리스트에 있는 물품들은 개당 10달러를 넘는 게 없었고 주로 생필품과 고양이 용품이었다. 하지만 그리니는 유행하는 섹시 댄스를 추지도 않고 어설프게 벗지도 않는다. 구독자를 모으기 위해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지도 않는다.

“기특해.”

지수는 장바구니에 그리니를 위한 선물을 담으며 혼잣말을 했다. 지수는 그리니를 잘 모른다. 다만 그애가 구독자들에게는 차마 요청하지 못하는 작은 욕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그래서 생필품이 아닌 것들, 작고 귀엽고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고양이가 그려진 지갑, 손거울, 귀여운 핀, 색조 화장품, 메이크업 브러시, 도금된 귀걸이, 실 팔찌, 그리니가 유난히 좋아하는 「마이 리틀 포니」 주인공들이 그려진 스티커북과 색연필, 깜찍한 지우개, 연필 같은 것을 바구니에 잔뜩 담았다.

 

 

5

 

—2021년부터 낙태죄가 사실상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은 부실해 혼란을 주고 있는데요, 김미미 기자입니다.

 

새해 첫 근무 날, 오후 출근을 한 지수는 습관적으로 대기실을 둘러보다 당황해서 막내 직원을 불렀다.

“나리씨, 대기실에 뉴스 틀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요?”

“뉴스를 틀면 사람들 마음이 불편해져요. 여기 온 사람들이 편하게 진료받고 가는 게 좋겠죠?”

그러자 의아해하던 막내 직원은 금방 수긍했다. 그가 채널을 돌리는 걸 본 지수는 상담실에서 업무를 시작했고, 휴게시간이 되자 혼자 샌드위치 가게에 가서 점심을 먹으며 며칠 전 놓쳤던 그리니의 라이브방송을 틀었다. 방송을 보는 휴대폰은 오원장이 새로 바꿔준 것이다. 명분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방송을 켜지 않았던 그리니는 뒤늦게 몇몇 구독자들이 보내준 선물이 도착하자 개봉하는 방송을 진행했다. 그리니는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박스를 뜯었다. 그리니가 아마존 위시리스트에 담아놓았던 생필품들—티슈, 수건, 양말, 통조림 같은 것—이 나올 때마다 그리니가 소리를 질렀다.

“꺄악!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정말 너무 고마워.”

그리니의 개인 사서함이 터져나가도록 선물을 보내두었던 지수의 소포 박스는 마지막에 개봉되었다.

“와, 이건 박스가 굉장히 크네?”

미니 가방, 지갑, 인형, 머리끈, 핀, 립밤, 귀걸이, 스노우를 위한 머리띠…… 포장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그리니는 울기 시작했고 「마이 리틀 포니」 피규어 다섯개가 나오자 캠핑카가 흔들리도록 방방 뛰었다.

“오늘은 너무 고마우니까 내 특기를 보여줄게. 난 블루보닛 꽃 진짜 잘 찾거든. 어디서든 블루보닛을 찾아낼 수 있어. 자 봐봐, 날 따라와.”

그리니가 휴대폰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지수는 처음으로 그리니의 캠핑카 밖을 보게 됐다. 그리니의 머릿결이 바람 따라 살랑살랑 나부꼈다. 이곳은 겨울이지만 그애가 있는 곳은 따뜻해 보였다. 곧 넓게 펼쳐진 들판에 들어선 그리니가 짜잔, 하고 카메라를 돌리자 들판 한쪽에 푸른빛과 보랏빛이 도는 꽃들이 피어 있었다. 지수는 처음 보는 꽃들이었다.

“봐. 나 잘 찾지? 신기하지?”

그리니가 싱글싱글 웃었다.

지수는 그리니가 나중에 카드도 읽어보길 바랐다. 선물을 보낼 때 카드에 무슨 말을 적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이렇게 적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니가 행복하길 바라며.

문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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