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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살다’의 세가지 변주곡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평론집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가다, 읽다, 생각하다, 흩날리다 등 각각의 동사는 특정한 움직임을 지시한다. ‘살다’라는 동사는 예외다. ‘살다’는 하나의 동작이나 작용에 직접 대응하지 않는다. ‘살다’는 수많은 행위와 움직임을 통해 결과적으로 실현되며, 신체 기능, 삶의 의지, 역량, 느낌, 기분 등을 다각도로 혹은 총체적으로 필요로 한다. ‘살다’는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동사이고, 동사들의 최정점에 있는 동사이며, 동사 너머의 동사이거나 동사 이상의 동사이다.
차도하, 이소연, 이영광의 시에서 ‘살다’는 걷다, 쓰다, 숨 쉬다, 사랑하다, 말하다/침묵하다, 흐르다/머물다, 알다/모르다 등의 특정 동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특히 이영광은 ‘살다’를 아예 시의 핵심 주제이자 서술어로 강도 높게 사용한다). 생존의 차원에서 철학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살다’는 점점 더 복잡하고 급박한 난제가 되어간다. 생태재난, 전쟁, 양극화, 계급·이념·젠더·세대 갈등과 정치·사회적 내전 등 삶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최근 시인들은 한가지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자기 삶에 침투한 현대문명의 균열을 전반적으로 성찰한다. 세 시인의 시에서 ‘살다’를 실행하는 동사들이 ‘살다’의 최소 형태로 압축되거나 본질적 형상으로 수렴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차도하 『미래의 손』(봄날의책)
차도하는 ‘살다’를 주로 ‘걷다’와 ‘쓰다’를 통해 이행한다. 그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세상보다 더 긴 산책로 걷기’와 ‘천국에 갈 때 파쇄할, 세상을 지키는 기분이라도 드는 시쓰기’. 차도하에게 걷기와 쓰기는 이 세계의 폭력성을 거부하면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삶의 방법이자, 이곳을 치열하게 지나 ‘모르는 곳’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법을 뜻한다. 죽음의 방법과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 삶의 방법.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깝고, 지금 이곳에 최대한 다가가면서 멀어지는 방식.
1999년생의 젊은 시인 차도하는 ‘천국’을 매일의 산책로 끝에 두었고, 슬픔이 구현되지 않고 사랑-기계마저 오작동하는 현실에서 ‘시쓰기’를 최후의 해법으로 여겼다. 그는 시쓰기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미약하게나마 믿었다. 가령 “범지구적인 기념일”인 “저주와 슬픔의 날”을 만들어 딱 한 사람만 누울 수 있는 방에서 각자 온종일 시만 쓰면서 “축복도 기쁨도 버리기로 한 날에 대한 공통감각을 갖는” 것(「기념일」). 차도하에게 ‘시쓰기’는 일년 중 하루만이라도, 누군가가 대신 치르고 있는 이 세계의 ‘저주와 슬픔’을 인류 전체가 나누는 일을 뜻한다. 차도하의 산책로가 세상보다 더 길게 ‘천국’까지 이어져 있는 것, 천국에 갈 때 그가 이곳에서 쓴 시를 모두 파쇄하려는 것도 이 공동체적 정화와 고양의 열망을 반영한다. 천국은 저주와 슬픔이 없는 곳, 축복과 기쁨을 모두가 평등하게 누리는 곳, 고통스러운 인간의 시(언어)가 태어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차도하의 산책은 두가지 층위를 갖는다. 첫째, 홀로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잃어버린 ‘삶’을 찾는 일이며 둘째, 현대의 규율과 욕망과 참사가 뒤얽힌 ‘거리의 복잡성’을 낱낱이 응시하면서 그로부터 탈주하는 일이다. 산책의 기원은 시인이 ‘삶의 미아’가 된 데 있다. “삶이 내 손을 놓고/그만 가라고” 하며 “사라졌”(「미아」)다. 차도하가 걷는 현대의 산책로는 꿈은 허물어졌으나 현실은 준비되지 않은 ‘불안한 현재’로 위태롭다. 늘 공사 중이고, 아름답지도 안전하지도 않으며, 악의에 찬 일들과 비극적인 사건이 끊임없이 터진다. 성폭행이 일어나고, 차별과 실종과 자살과 사고가 잇따르고, 노동자들이 매일 살기 위해 일하다 죽고, “지구 규모의 화재”(「선택」)로 곳곳이 불타오른다. 시인의 진단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 가는/거리의 복잡성이/영혼에 대한 믿음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앗아간”(「기억하지 않을 만한 지나침」) 탓이다. 영혼을 부정하며 슬픔의 구토를 유발하는 세계와 수락하면서 취소하고픈 “받아들이기”(「액체와 이별하기」) 힘든 삶 속에서 차도하는, 천국에 닿는 산책로처럼 이 세계와 삶보다 더 긴 문장들로 “영원히 이어지는 책”(「너를 인용하기」)을 꿈꾸었다. 그 책은 단연 시집이었으며, 그가 천국에 간 후 출간된 『미래의 손』은 그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되었다.
차도하의 산책은 이탈과 속박의 이중양상을 띤다. ‘걷는 나’는 자유분방함을 발산하며 세계를 사소한 것으로 전유한다. “세계를 주머니에 넣고 조금 걸었다. (…) 그러다 나는 세계를 한입에 넣었고, 물과 함께 세계를 삼켰”(「안녕」)다. 한편 ‘걷는 나’는 생존의 노역에 갇혀 악순환의 세계를 떠돈다. “자기 것이 아닌 수많은 물건을 싣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 위를 떠도는 일”은 현대적 삶의 실상이며, “죽음의 길을 가본 적 있”으나 “일하지 않는 길을 가본 적 없”는 노동자들은 이 대열의 다수를 이루는 소수자들이다(「HOMELESS GO HOME」). 차도하가 ‘루비’라고 칭한 ‘슬픔의 토사물’은 노동의 최저이며 최악의 현장에, “사람은 갈 수 없”으나 “어떤 사람”이 유령처럼 일하는 ‘지하’에 쌓인다(「구현되지 않은 슬픔」). 비단 노동만이 아니다. 시인이 시를 통해 인류가 공유하기를 바란 현대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는 ‘저주와 슬픔’의 현실적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슬픔의 토사물’이 ‘루비’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모두를 대신한 익명의 고통을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나누어 가질 때 일어나는 일이다.
차도하에게 ‘산책’은 ‘시쓰기’의 다른 이름이다. 추락하지 않고는 걷고 쓰고 나아갈 수 없는 세계에서 ‘천국’은 역설적이게도 어두운 지하에서 도래할 가능성을 얻는다. 천국은 이 세계의 (불)가능성을 품은 불가해한 타국이자, 오직 단 한번의 입국만이 가능한 “외국”(「입국 심사」)이다. 온몸으로 걸어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길을 걷는 일은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세계를 생산하는 일”1이라지만, 시인은 이제 세계의 바깥에서도 그 일을 한다. 차도하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전혀 모르는 곳인 천국을 어떤 식으로든 경유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천국은 지금 이곳에 스며들고, 그의 시는 어디로부터인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번져나간다. “살아라/라는 말이 비겁하게 느껴질 때도//그래서 그녀가 이미 죽은 이후에도//나는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지키는 마음」)
이소연 『콜리플라워』(창비)
“사라진 숨 한 조각 어디로 갔을까?”(「안녕」) “나는 사랑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사라지는지 생각해”(「네가 잊히지 않는 말」). 첫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걷는사람 2020)에서 이소연은 사라진 ‘숨’과 ‘사랑’의 행방을 물었다. 현대사회의 모순과 생태위기를 여성과 언어(시)의 곤경을 통해 읽어낸 두번째 시집 『거의 모든 기쁨』(아시아 2022)에서는 삶의 환상을 걷어내자 ‘거의 모든 기쁨’이 사라진 일상을 짐짓 명랑하게 노래했다. 그리고 세번째 시집 『콜리플라워』에 이르러 그는 ‘숨’과 ‘사랑’이 소멸하는 경로를 더 집요하게 수색한다. “숨을 쉬는 거지?/사랑을 하다보면/그게 궁금하다” “숨을 쉬는 거니?/그거 말고는 정해진 게 없어서/그것에 대해서만 묻는다”(「양서류적인 코번트리 부인」). 호흡은 인간의 모든 사회적 역량에 앞서는 생물학적 기능이다. ‘너’와 ‘나’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어긋날 수 없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다. 시인은 급기야 ‘종이’와 같은 사물에서도 숨소리를 듣고, 우리가 숨을 쉬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감탄한다. “종이에 귀를 대어보면/숨소리가 들렸다//눈이 번쩍 뜨였다//우리가 숨을 쉰다는 게/이렇게나 놀랍다”(「해몽」).
“호흡은 우리의 마음 저 깊은 곳, 저 무의식의 심연으로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2다. 이소연은 자신이 숨 쉬고 있는 지금 여기를 주시한다. “말끝마다 죽겠다”면서 “살고 싶”(「해몽」)은 그의 눈앞에 범람하는 것은 세계와 자신의 한계이다. 갈 곳도 꼭 해야 할 일도 없는 세계, 나를 벗어날 수 없는 ‘나’, 아무도 없는 세계에 혼자 살아남은 듯한 삶의 감각 등. 시인은 삶의 의지와 의미가 휘발된 ‘총체적 없음’의 상황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두가지를 발견한다. 하나는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걷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있음’ 자체다. “걸어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이천 변”(「완벽한 이야기 1」)에 모든 것이 그저 “있고/있고/있다/날마다 있다”(「머그컵」).
이소연은 세계의 빈약함과 삶의 무의미를 존재론적 성찰로 아우르면서 ‘나’의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차도하가 세계의 바깥을 향해, 죽음마저 통과해 ‘천국’으로 걸어간 것과는 반대의 방향이다. ‘모든 것이 하나’인 전체성(wholeness)의 관점에서 보면 두 방향은 다르지만 같을 것이다.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우주의 원리가 곧 전체성의 내향적 펼쳐짐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존재는 우주의 내향적 펼쳐짐의 장소이자 과정이며 산물이다. 이소연은 내면 깊은 곳에서 시공간과 존재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며, 이로써 어느 시공간의 누구와도 무엇과도 연결되는 무한 변형의 이야기를 창조한다. 이야기들의 바탕에는 성찰적 여성의 자의식이 깔려 있다. 예컨대 이소연은 시 쓰는 앨리스가 되고(「앨리스의 상자」), “언제나 훌륭하고 괴팍한 남자”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을 등장시키는 소설가가 되며(「충실한 슬픔」),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아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받은 중세의 실존 인물 ‘코번트리 부인’의 퓰리처상 시상식에 참석한다(「코번트리 부인」 「휴 그랜트의 아내 코번트리 부인이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소연은 새로운 이야기로 ‘나’를 재창조하면서 삶을 재창조할 가능성을 얻는다. 삶은 여전히 무지와 착각과 부조리로 혼곤하지만, 시인이 ‘나’를 새롭게 펼쳐나갈 때 다른 존재들도 그에 맞춰 반향한다. 모든 차이에도 우리는 숨을 쉰다는 공통점이 있고, ‘숨 쉬다’에 가장 근접하는 행위는 ‘침묵하다’와 ‘말하다’이며, 시가 인간의 숨결과 침묵과 언어로 빚어진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시집의 아름다움은 모두가 연결된 전체성이 정겹게 발현되는 풍경에 있다. 즉 ‘나’가 침묵할 때 침묵도 입술을 열고, 인간이 후회할 때 후회는 인간을 통해 말하고 싶어하며, ‘나’가 “배롱나무를” 보고 있으면 “시 한 구절이 작게, 굽은 등을 하고/내 빈 종이를 들여다본다”(「작게, 굽은 등을 하고」). 시인이 “너와 내가 주고받는 노래”라고 명명한, 존재들의 진실하고 다정한 상호 펼쳐짐은 ‘너’와 ‘나’가 함께 숨을 불어넣어 좋은 ‘세계’를 만드는 일로 귀결된다. “나와 너는 더운 숨을 불어 넣듯/툭툭, 흰 돌 하나 놓고 검은 돌 하나 놓고/자유로운 다섯을 위해/뒤꿈치를 그리듯 툭툭, 한개의 세계를 빚었지/악담과 비난마저 돌 속에 가두면서”(「오목놀이」). 악담과 비난마저 새로운 ‘세계’를 빚는 재료로 활용하면서, ‘흰 돌’과 ‘검은 돌’로 상징된 이원적이자 적대적인 것을 “자유로운 다섯”으로 재창조하기. 이소연은 숨 쉬는 일부터 새로 시작하자고 말한다. 함께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나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며, 부서진 삶과 세계를 재건할 수 있다고. 아프지 않을 수 없어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면, 얼마든지.
이영광 『살 것만 같던 마음』(창비)
희망도 사랑도 삶도 끊임없이 출렁이고 증발하며 흐른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자리라고 이영광은 말한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렇다. ‘나’는 얻고 잃으면서, 너무 바쁘고 게으르면서, 계속 죽고 자꾸 살아나면서, 대책도 무대책도 없이 기다가 걷다가 달리다가 멎다가 하면서 늘 ‘제자리’다. “떠남과 머묾이 한자리인/강물”(「강가에서」)처럼. 삶과 ‘나’가 늘 같은 자리임을 알게 된 것은 ‘모름의 빛’ 덕분이다. “인간은 기진맥진인데 하루도/빠짐없이 삶이 찾아”오고, “모름은 빛처럼 다가”와 “그 빛은 언제나 날/살려두”시기만 하고 “살려내시는 법이 없어”, ‘나’는 “맞으면서 용서하는 사람처럼/제자리에서 부풀고 있다/터지고 있다”(「제자리」).
제자리에서 부풀어 터지며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나’는 ‘모름’의 차원을 포용함으로써 그동안 ‘앎’에 지배되던 차원을 넘어 삶의 진경과 마주한다. 내가 제자리에 있음을 알기 위해서는, 제자리 이상이나 바깥을 ‘알면서도 모르는’ 시야가 필요하다. 앎의 몫과 모름의 몫이 어우러져 삶의 실상을 다시 빚는 광경, 모름을 앎으로 바꾸거나 섣불리 흡수하지 않는 시의 광경들은 이영광의 『살 것만 같던 마음』에 이중적이며 동시적인 긍정의 진술과 직유, 반복, 반전, 반어, 역설 등의 장치가 왜 그처럼 자주 필요했는가를 알게 한다. 예컨대 팬데믹은 “모두를 괴롭혔지만 모두에게 정말 좋은 어떤 것”(「마스크들」)이었을지 모르고, “별세계의 자본이며/국가”(「별 세개」)가 착취하고 유린한 ‘김용균씨와 그의 어머니들’은 돈 계산과 죽음 계산과 생명 계산을 할 줄 모르며, “책을 보다가 엄마를 얼마로/잘못 읽”어 “아픈 엄마를 얼마로/계산한” ‘나’는 끝내 “엄마가 얼마인지/알 수 없었”노라 고백한다. “엄마는 진짜 얼마세요?”(「계산」) 이영광에게 ‘모름’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능력과 윤리를 포함한다.
이영광의 ‘모름의 빛’은 ‘사랑’을 중심으로 삶 전체를 비춘다. ‘사랑’은 누구나 “아는 말, 배워서 다 아는 말”이지만, “이해되지 않는” “말”(「사랑」)의 으뜸이다. ‘삶’은 또 어떤가. 산다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아닌 것과 싸우고 아무것도 아닌 것과/사랑”하는 일이다. 그러나 반전. “아무것도 아닌 것과 싸우지 않고/무엇과 싸운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과/사랑하지 않고, 대체 무엇과 사랑한단 말인가”(「나의 인간 나의 인형」). ‘아무것도 아닌 것’과 싸우고 사랑하는 일이 삶임을 마침내 아는 것, 더불어 삶이 늘 제자리이며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이유를 끝내 모르는 것. 이영광은 ‘앎의 몫’과 함께 삶의 본질을 이루는 ‘모름의 몫’을 응시한다. 먼저 ‘모름의 몫’은 삶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태를 낳는다. ‘사랑’이 대표적인 예다. ‘나’는 자발적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촉발된 피동형 주체로서 사랑(당)한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시간에. “나는 죽은 채로 걸어다녔던 오늘”, “매일 뜨는 해처럼 티 없이/환”한 얼굴을 가진 “너에게,/한밤중의 한밤중에/사랑을 당한다/사랑당한다/사랑한다”(「내일에게」). ‘모름의 몫’은 또한 내가 내 마음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채로 살아가게 한다. 타인과 ‘나’의 어떤 고통에도, 심지어 부모의 죽음에도 “반짝이며 반짝이며 헤엄쳐 오던,/살 것만 같던 마음”은 살 수 있는 마음이나 살고 싶은 마음과는 조금 다른, “살 것만 같던” 후련하면서도 모호한 기분이자 바닥이 없는 “어두운 마음”(「어두운 마음」)이다.
“생명도 죽음도 없다는 듯/생명도 죽음도 그냥/있다는 듯”(「문어들은 저런 식으로」), “살지 않기 위해 살아갈 것/죽지 않기 위해 죽을 것”(「평화식당」). 삶과 죽음에 대한 앎과 모름을 함께 끌어안는 순간들마다 이영광 특유의 역설이 탄생한다. 이번 시집의 주요 성찰 대상의 하나인 병든 노인의 “안 보이는 발들을 버둥거리며/걷지 않는 걸음”(「누운 당신 걸음」)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걷고 있다. 육십갑자를 한바퀴 돌아 “나는 이제 삶은 물론이고 죽음까지도 절뚝여 부축해야 할/부유한 터수”라고 자부하는 시인은, “숨 쉬는 일과 멎는 일이 한통속이란 서먹한 사실도 얼음 둥둥 뜨던/겨울밤 동치미만큼이나 달가워”(「그해 세밑에는」)졌다고 토로한다. 한통속, 한자리, 제자리. 이 말들은 ‘정지’와 ‘부동(不動)’이라는 부정적인 뜻으로도, ‘전체성’과 ‘본래의 자리’라는 긍정적인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알면서도 몰랐을 뿐, 인간이 둘로 나눈 것들, ‘나’가 날아오르고 추락했던 곳들은 처음부터 한통속, 한자리, 제자리였다. 삶의 ‘끝’이 아무리 끝나도 끝날 수 없는 “끝없는 끝”(「당신의 끝」)인 이유다.
이전 시집까지 이영광은 가족과 지인을 중심으로 병과 늙음과 죽음을 노래했다. 그들과 멀어진 거리만큼 그의 아픔은 깊어졌다. 이제 시인은 그들 곁으로 부쩍 다가선다. 그들처럼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존재로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당)하는 주체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살 것만 같던 마음”에 안도하던 개체로서 그렇다. ‘살다’의 끝없음과 고약함을 정직하게 투영하는 이영광의 시는 지금 “환한 어둠”(「당신의 끝」)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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