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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가 사는 곳 ⑪
오래된 신도시에서 ‘고향’이란
과천다움에 대하여
송준규 宋浚圭
인류학 연구자. 주요 논문으로 「부모됨·이웃됨·시민됨: 과천시 풀뿌리 시민운동의 형성과 도전」 등이 있음.
zingari.JQ@gmail.com
경기도 과천, 1970년대 말 정부과천청사와 함께 계획된 이 신도시는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주공아파트 12개 단지가 들어서면서 1984년 완공되었다. 이후 30여년간 인구 7만명 정도를 유지하다, 최근 재건축과 도시 개발로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이 ‘오래된 신도시’엔 마음을 담아 오랫동안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10년 뒤에도 계속 정주하고 싶다’는 응답이 80% 이상, ‘태어나진 않았지만 살다보니 고향 같다’는 응답이 67% 이상으로 경기도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는 설문조사(「2023년 경기도 사회조사보고서」, 2023년 12월)는 사실 새롭지도 않을 정도이다. 갖가지 조사에서 ‘살기 좋은 도시’로 항상 손꼽히는 건 여러가지 ‘정주 여건’이 좋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사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그런 걸까? 40년 넘게 도시와 함께 자라온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런 조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어쩌면 도시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리고 도시 내 동선이 모이도록 해 ‘사회적 교류’를 유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조건’들을 넘어서 사람들 사이 그리고 사람과 도시 사이의 관계에서 쌓여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과천이라는 오래된 신도시에서 함께 엮어낸 ‘과천다움’이라는 마음이 재건축과 도시 개발 과정에서 어떻게 흩어지고 있는지 한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
내가 지금 사는 집은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가 살던 곳이다.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면 1986년부터 2001년까지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실 중고등학생 때 자주 와봤던 집이다. 서로의 호를 불러가며, 나의 아버지 ‘콩밝’과 작가 ‘과인’께선 거의 하루걸러 하루씩 이 집과 저 집을 오가며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어머니 ‘차강’과 이윤기 작가의 부인 ‘소천’께서도 밤이 너무 깊어지면 두 사람을 떨어뜨리느라 고생할 정도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이런 메모가 종종 남겨져 있었다. ‘801동으로 와서 저녁 먹거라, 소천께서 고깃국 끓여놓으셨단다.’
804동에서 801동까지 가는 200미터 남짓 그 길이 기억난다. 열어놓은 창문 너머 웃음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뭐가 그리 즐거우셨을까? 밤마다 이야기도 노래도 끊이질 않았다. 과인께서 큰아버지와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다는 인연 때문에 아버지께서 과인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생긴 ‘큰아버지네’ 같은 관계랄까, 그보다는 흥겨운 코드가 맞았던 걸까, 이웃집이라서 더 그랬던 걸까. 무엇이든 간에 이야기 자리는 날이 갈수록 더 깊어져갔고 그렇게 밤마다 ‘어른의 학교’가 열렸다. 근황으로 시작해 신화에 대해 논하고, 옛이야기를 하다 옛 노래로 흘러가던 자리였다.
어느날은 수다쟁이 차강이 콩밝네 집안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미국에서 돌아가신 큰아버지 소식을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는 아직 모르신다는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마다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었다. 과인은 몸을 기울일 정도로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고, 차강은 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야기 자리는 한쪽만 말한다고 성사되는 게 아니었다. 듣는 이가 귀담아 들어야 가능하다는 걸, 저녁밥 얻어먹으면서 목격할 수 있었다. 진한 고깃국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봤던 그 장면은 마치 판소리 마당이 펼쳐진 모양새였다. 그리고 이내 과인은 소설 「두물머리」(2000)를 내놓으셨다.
사실 부모님이 과인의 가족과 가까워지기 전에, 나는 이미 이 가족을 알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들고 국민학교 언덕을 오를 때면 저 앞에서도 바이올린을 들고 가는 누나가 있었다. 함께 연주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 누나한테 말 한번 걸어보질 못했다. 어느 주말에 가족들과 대공원 산책을 나섰을 때 그 누나네 가족이 지나가는 걸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누나가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 저녁밥 얻어먹으러 801동에 왔을 때, 이 집에서 그 누나를 다시 만나다니. 동네가 무섭다는 건 얽히고설키는 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고등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근거로 과인을 댔었다. ‘큰아버지도 고등학교 졸업 안 하셨는데 지금은 유명한 작가잖아요. 고등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일찍부터 영화 만들겠다던 나의 의지는 결국 어머니의 말발에 꺾여버렸지만, 이 소식을 들은 과인께선 두고두고 나를 놀리셨다. ‘멜빵바지 따라서 입지 말란 말이야. 자꾸 이렇게 따라할 거야?’ 그립다. 이야기꽃이 피고 노랫가락이 춤을 추던 그 시절, 즐거웠던 모습들이 생각난다. 세월이 흘러, 과인이 돌아가신 지 8년이 지나 아버지 콩밝도 세상을 떠나셨을 때였다. 어머니께선 가까이 이사 와서 손주를 자주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이사 갈 집을 알아보던 중 801동 이 집이 월세로 나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집으로 들어온 지 6년 째 되었다.
직접 집을 고치면서 아파트의 오래된 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콘센트 안의 전깃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불을 밝혀왔을 테고, 문틀 페인트를 벗기니 예전 나무 색깔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며, 베란다 깔개를 치워보니 오래된 타일이 그대로 있었다. 맞다! 과인께서 불평을 늘어놓으시던 스피커. ‘아파트 안내방송 때문에 미치겠어.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 방송하면 글 쓰다가 머릿속이 하얘진다니까.’ 손재주가 좋은 만화가 ‘반쪽이’ 아저씨가 과인의 고민을 듣고선 스피커를 떼고 문방구에서 사 온 지점토로 메꿔버린 그 자리. 벽지를 뜯어보니 지점토가 그대로 있었다. 소천께서 살아 계실 때 우리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말씀해주셨다. ‘행운의 집이야, 그 집에서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어. 너도 잘될 거야.’ 아이들을 804동 할머니댁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801동 우리 집을 보면 종종 그때 생각이 난다. 소천께서 고깃국을 끓여주시던 이 부엌은 환기가 잘 안 된다는 걸, 이 집에서 백숙을 끓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알게 되었다. 오래 산 동네란, 켜켜이 쌓여온 기억을 딛고 살아가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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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동네 사람들의 인사는 이렇다. ‘이사 어디로 가실 거예요?’ 경—축 사이에 ‘진단 통과’ ‘조합 설립’ ‘시공사 선정’ ‘시행 인가’ 같은 내용이 적힌 현수막이 하나둘 걸리더니, 이젠 ‘조합원 분양 완료’를 알려준다. ‘아, 얼마 안 남았구나……’ 8년 전 이미 7단지 재건축으로 집을 비워줘야 했던 적이 있기에, 이주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당시에는 1단지와 6단지도 한꺼번에 재건축을 하는 바람에 시내에서는 이사 갈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시 외곽의 신축 빌라에 2년간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빌라에서는 집주인을 포함해 여섯 집이 모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옆집에 사는 집주인 형에게 ‘옥상에서 파티 한번 해요’라고 말했다가 금방 단톡방이 생겨버렸다. ‘오~’ ‘그래요’ ‘좋아요!’ 어느새 아빠들은 옥상에서 맥주를 마시며 고기를 굽고, 엄마들은 부엌 식탁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다. 아이들은 문 열어놓은 집집마다 몰려다니면서 놀곤 했다. ‘팡팡빌’이라 이름 붙인 그곳에서 하루걸러 하루,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저녁에서 새벽까지 모여서 놀았다. 우리 집은 지층 주차장에 작은 수영장을 설치했고, 아랫집 목수네는 나무 벤치를 만들어 가져다놓았고, 그 옆집은 조명 장식을 설치하고, 주인집은 모래놀이 장난감을 펼쳐놓았다.
그렇게 잘 놀았는데, 2년 뒤에는 모두 흩어졌다. 각자 사정이 있었다. 우리 집은 8단지로, 누구네는 9단지로, 두 집은 재건축이 완공된 7단지로, 아랫집은 용인으로 이사를 갔다. 도시의 공동체는 이렇게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쉽거나 그립다기보다 좋은 기억을 잘 간직하고 싶었다. 주말 오후 중앙공원에서 ‘팡팡빌’ 형네를 만나면, 두 가족이 함께 치킨집에 가서 맥주에서 소주로 넘어가는 밤을 보내곤 한다. 언제 아이들이 이렇게 컸을까. 함께 잘 놀고 있는 아이들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뿌듯한 마음이 어디선가 올라온다. 모였다 흩어지더라도 인연을 잘 간직하는 게 중요한 듯싶다.
그래도 내가 자랐던 8단지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하다. 어릴 적 뛰어놀던 803동 놀이터에서 이제는 내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고, 이 아파트와 함께 시작한 지하 설렁탕집은 여전히 할머니와 아이들의 단골집이며, 아버지와 손을 잡고 까르르 뛰어다닌 9단지 길도 그대로인데…… 고향과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니. 나처럼 아이들 키우며 동네 곳곳에 사는 여러 친구들도 곧 모두 여기를 떠나게 되겠지. 저렇게 커버린 나무들은 다 어떻게 되는 걸까.
과천의 열두개 단지 아파트가 하나둘 재건축되더라도, 도시 곳곳을 연결하는 자전거 길 가로수는 그대로 있을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푸르른 나무들 때문에 과천에 뿌리내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산책을 나갈 때면 시원한 나무 그늘과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끊이지 않던 길이었다. 그런데 왜 나무들을 잘라버리는 걸까. 아파트 철거로 단지 안 나무들이 잘려나가는 것도 마음이 아팠는데, 단지 밖 가로수마저 이렇게 막 잘라도 되는 걸까? 그 오래된 플라타너스는 우리와 함께 자란,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준, 이 도시의 소중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나만 하는 걸까?
내 소유의 집이라면 재건축 후 돌아올 수 있겠지만 월세로 전전하며 과천에 버티고 있는 나는 어쩌면 더이상 갈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 과천에서 전월세로 거주하는 사람들은 절반이 넘는데, 이들은 재건축이 되면 어디로 가는 걸까. ‘소멸과 생성’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나의 고향을 바라보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어른들이 계셨고, 내가 자랐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이곳이 ‘40년짜리 고향’이었다는 생각에 허무함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래도 뭔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재건축 후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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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이었다. 과천의 청년들을 모아서 수다를 떠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당시 30년 정도 된 이 ‘오래된 신도시’와 함께 자란 아이들이었다. 저녁 먹고 대공원으로 산책을 나서는 건 당연하고, 다른 중학교로 배정받아도 ‘형태네 떡볶이집’에 모였으며, 고등학생 때 몰래 데이트를 하다 친구 엄마한테 들키기도 했고, 시험 앞두고 축제에 나가 거리극을 보기도 했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직접 그린 과천 지도에 ‘추억 장소’ 스티커를 붙이는 것만으로 웃음소리 깊어지는 왕수다를 떨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마치 작은 도시 하나가 각자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듯한, 그 공동의 감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드라마에서 스치듯이 지나가는 장면에서 ‘어? 저기 굴다리 시장 가는 길인데?’ 하고 단톡방에 올리면, ‘너도 봤어? 나도 봤어!’ 하는 식이었다. 이런 친구들을 모아 ‘과천 청년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도시와 함께 자랐다는 건, 인간 너머 다른 존재와도 관계를 맺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1단지 아파트가 재건축된다는 소식에 어찌할 줄 몰라하던 친구에게 독립잡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이인규 엮음, 전5권, 2013~23)를 알려주었다. ‘형, 내가 하고 싶은 게 바로 이런 거예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을 앞두고 사람들의 사진과 사연을 담아낸 이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친구는 1년 동안 비슷한 작업에 몰두했다. 1단지를 지나가는데 길쭉한 누군가 쭈그리고 엎드려 보도블록 사이에 핀 꽃 사진을 찍고 있었다. 불러보니 뒤돌아보는 녀석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이내 그는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이한진 지음, 2016)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콘크리트 아파트를 ‘고향’으로 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다. 둔촌과 과천을 비롯해, 서울 고덕, 개포, 반포의 주공아파트와 경기도 안양 진흥아파트 등 곳곳에서 이런 활동들이 있었다. 둔촌주공을 상징하는 ‘기린 미끄럼틀’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누군가는 실측을 하고, 누군가는 사진을 남기고, 누군가는 사연을 나눴다고 했다. 몇몇이 모여 이별을 고하는 밤, 아파트 주민들이 그 자리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나눴다던 이야기도 들었다. 개포주공 1단지에서는 너른 잔디밭에 있던 열두그루의 나무를 살려내려는 노력이 있었다. 주민들은 곧 사라질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면서 나무를 만져보고 서로의 추억을 나누는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대를 작은 공원으로 지정해 열두그루의 나무를 살리고자 강남구청과 시공사, 조합 사이를 열심히 설득했다. 결국 나무는 살려내지 못했지만 ‘개포동 나무 산책’ 프로젝트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콘크리트 녹색섬」(이성민 감독, 2023)이 이번 여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다고 한다.
둔촌주공 철거 때는 주민모임에서 그 안에 살고 있던 길고양이까지 모두 안전히 나가도록 강동구청과 동물권단체 카라가 함께 작업을 했다. 이내 곧 서울시 동물보호조례가 개정되면서 이제는 재건축 현장의 길고양이가 안전하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쪽문을 곳곳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파트, 놀이터, 나무, 길고양이 등 인간 너머 존재와도 관계를 맺는 이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서로의 맥락이 맞닿은 채, 함께 긴 시간을 보냈던 그 과정에서 생겨난 건 아닐까? 누군가 ‘우리의 도시는 기억을 지우는 곳’이라고 했건만, 미세한 떨림들을 차분히 관찰해보면 ‘기억을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실천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스타그램에선 동네나 도시 곳곳을 기록하는 계정들을 추천해준다. 이들의 기록하는 시선을 보고 있노라면 ‘기억의 실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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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봉봉이’를 유아차에 태우고 중앙공원을 지나던 길이었다. 멀리서 자전거를 세우고 나뭇잎을 주워 손을 닦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딱 봐도 손에 묻은 기름을 닦는 것 같았다. ‘아, 자전거 체인이 빠졌나보구나.’ 다가가서 물티슈를 건네주면서 ‘내가 좀 봐줄까?’ 하고 물었다. ‘이렇게 한쪽을 걸고 바퀴를 돌리면 체인이 차르르 따라 걸리게 되거든……’ 소년은 쑥스러운지 모자 아래 작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마음이 충분히 느껴졌다. 나도 어릴 때 체인이 빠져 손에 온통 기름을 묻혀가면서도 고치지 못한 적이 있었기에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자전거로 내 옆을 지나가며 다시 한번 인사하던 그 소년, 나중에 여기서 또다른 아이에게 체인 거는 방법을 알려주려나.
동네에 오래 살다보면, 일상 속 작은 행동마저 도시 전체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 ‘둥둥이’와 803동 놀이터에서 분필로 낙서를 하고 있으면 다른 아이들도 와서 ‘이거 뭐예요?’ 하고 묻는다. 이내 놀이터 온 아이들과 함께 분필로 바닥 곳곳을 그림으로 채워나갔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의 세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동네 사람들이 그림을 재미있게 보면서 지나가면 괜히 좀 뿌듯하다. 언젠가는 과천 축제 퍼레이드가 지나간 자리에 분필로 낙서를 남기는 프로그램이 생겼더랬다. ‘혹시 내가 인스타에 올린 걸 참고했나’ 생각하다가, 이내 그보다는 낙서를 구경하는 재미에 집중했었다.
더이상 과인도 소천도 아버지도 동네에 계시지 않지만, 그래도 어머니께는 아직 동네 친구들이 남아 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직후, 동네분들은 804동 15층 창문에 불이 켜졌는지 종종 올려다보셨다. 불이 꺼져 있으면 ‘어디 가셨어요?’ 걱정하시고, 켜져 있으면 ‘저녁 같이 드실래요?’라고 물어봐주었다. 이 감사한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편찮으신 아버지를 힘겹게 돌보던 어머니를 만나러 804동에 종종 찾아와서 수다를 떨고 간 친구 ‘멜라’도 몇년 전 세상을 떠났다. 장례가 끝나고 나는 친구가 살던 불 꺼진 9단지 집 앞에 앉아 미안한 마음에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동네란, 살면서도 떠나보내고 떠나보내면서도 사는 곳인가보다.
얽히고설킨 채 시간의 켜가 쌓인 동네에서 나는 자라왔다. 내 아이들에게도 그런 동네를 알게 해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이곳을 곧 떠나야 한다. 떠나보내야 한다. 나무들이 모두 잘린 폐허가 된 둔촌주공 324동 앞에서 울면서 헤매던 인규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가 발 딛고 있던 이 감각을, 등대고 있던 삶의 맥락을, 가슴속 깊숙한 이 마음을 고이 접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고이 접어 어느 서랍 안에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파트: 새로운 삶을 담다」(토지주택박물관 기획전시, 2022~24) 전시에 ‘아파트 키즈’ 이야기를 담아준 친구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 담아봐. 박사논문 때문에 못했다고 하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할 거야. 너를 담아내는 작업일지도 모르는데……’ 그러길래, 오랜만에 ‘과천 청년들’에게 연락해 8단지 기록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하나둘 관계를 맺고 마음을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자체가 ‘과천다움’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