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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우에노 지즈코 『돌봄의 사회학』, 오월의봄 2024

좋은 돌봄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은숙 池恩叔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교수 jes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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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사회학자이자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꼬(上野千鶴子)의 『돌봄의 사회학: 당사자 주권의 복지사회로』(ケアの社会学 : 当事者主権の福祉社会へ, 2011, 조승미·이혜진·공영주 옮김)가 일본에서 출간되던 해, 나는 토오꾜오에서 부모돌봄 중인 비혼자들에 대한 현지조사를 하고 있었다. 책을 읽다보면 드물게 저자에 대한 마음의 경계가 해제되고 뇌가 연결된 것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는데 이 책의 4장 「돌봄에 근거는 있는가」를 읽을 때가 바로 그랬다. “왜 고령자를 돌보는가? 이는 실로 두려운 질문이다”(141면)로 시작되는 첫문단을 읽으면서 나는 ‘이런 걸 물어도 되는 거였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막힌 혈이 뚫리는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 그것은 부모돌봄에 휘말려 장기간 돌봄에 매인 비혼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내가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던 질문이다. 왜 인간은 고령자를 돌보는가? 가족돌봄이 최선인가?

우에노는 이 책에서 평균수명의 연장과 고령자돌봄 기간의 장기화, 고령자돌봄 수준의 상승에 따라 고령자돌봄이라는 생애주기의 후반 과정이 새롭게 부상했음을 강조한다. 재생산노동은 생명을 낳는 것뿐 아니라 죽음을 돌보는 노동을 포함해 인간 생명과 관련된 모든 노동으로 재정의된다. 이렇게 고령자돌봄을 재생산노동으로 재정의하면 재생산 비용 분배에 역사적·이론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가족돌봄을 개인의 운명이나 불운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보면 ‘평이한’ 주장인데 당시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은 역시 질문의 힘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이처럼 질문과 해답을 제시하는 간결한 Q&A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돌봄과 복지사회, 페미니즘이라는 분야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보았을 법한 질문에 저자가 다양한 논리와 사례를 동원해 답변을 해준다. 그중에서도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질문은 두가지 방향으로 모인다. 하나는 돌봄을 제공하는 쪽에 초점을 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돌봄을 받는 쪽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먼저 돌봄제공자의 관점에서 제기한 질문을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는 우에노가 1990년 출간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녹두 1994)까지 거슬러가야 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돌봄노동, 즉 재생산노동이 다른 모든 노동보다 하위에 있는 것으로 취급되는 현실을 지적했는데, 『돌봄의 사회학』을 통해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이 문제의식은 ‘돌봄노동은 왜 싼가’로 단순화할 수 있는데, 우에노가 평생을 두고 고민해온 이 화두를 다시 본격적으로 제기하게 된 배경에는 2000년 노인돌봄을 위한 일본의 사회보험 출범이 있었다. 개호보험이 생기면서 지금까지 주로 여성들이 수행하는 부불노동이었던 노인돌봄이 지불노동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노인돌봄은 가사의 일부가 아니라 생산활동이 된 것이다. 저자는 이렇듯 개호보험제도 덕에 노인돌봄이 돈벌이가 되는 노동이 되었지만 여전히 심각한 저임금으로 유지되는 이유를 생협과 복지 워커즈콜렉티브에 대한 현장연구를 통해 규명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돌봄제공자 쪽에 초점을 둔 논의로, 이 질문에 돌봄을 받는 쪽의 행위는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에노는 좋은 돌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상호행위로서 규정되는 돌봄에서 좋은 돌봄이란 돌봄을 제공하는 쪽과 받는 쪽 양자간의 압도적인 비대칭성은 있지만 당사자가 모두 만족하는 형태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좋은 돌봄이 달성되기 위한 영역으로 관(官, 국가)/민(民, 시장)/협(協, 시민사회)/사(私, 가족)라는 네가지 부문을 검토하면서 돌봄을 받는 당사자의 필요를 가장 잘 충족시키는 선진적 돌봄 모델을 창출해온 ‘협’ 부문의 우위를 주장한다. 물론 협 부문에도 한계는 있지만, 가족에서의 증여, 시장에서의 교환, 국가에서의 재분배보다 시민사회의 호혜성을 중심으로 한 협 부문에 우위를 두고 돌봄 부담이 최적으로 혼합된 복지다원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논지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 내에서 다양한 반론을 불러왔는데, 크게 세갈래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는 협 부문의 우위성의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우에노는 협 부문에서 주도한 몇가지 선진적 돌봄 사례를 제시했을 뿐 관/민/협을 동등한 기준에서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협 부문의 우위성론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역사적 사실로서 협 부문의 우위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관/민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의 시민사회가 보여준 협 부문의 우위성은 저자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전후 경제성장 시기 고학력 중산층 기혼여성들의 ‘대거 출자’를 기반으로만 가능했던 기간 한정의 우위성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옮긴이도 언급했듯 공공부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시민사회에 떠넘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다.

한국에서 일본은 선진적 돌봄 시스템의 사례로 빈번하게 거론되지만 ‘어떻게’를 묻는 일은 드물다. 예를 들어 2000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요양원이 다인실에서 일인실로 일제히 바뀌었다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언급하는데, 이 책은 그 변화를 위해 각지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는지를 추적한다. 시민사회가 모범적 사례를 만들어가며 관을 강제해온 기록을 생생히 담은 것이 이 책의 주요한 성과다. 그러나 복지국가로 가는 경로는 저마다 다르기에 이러한 일본의 사례를 관이 주도하는 돌봄노동의 고비용과 비효율을 보여주는 근거로 삼기는 곤란하다. 예컨대 북유럽 국가에서는 돌봄의 공급부족을 개선하고, 돌봄노동이 사회적으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하는 데 공공부문의 개입이 성과를 냈다. 한국의 경우 협 부문이 미발달한 상황에서 시장 우위의 돌봄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그러나 돌봄의 사각지대가 커지고 비효율성이 확대되면서 돌봄의 공공성을 강화하라는 사회적 요구가 분출되었다. 그에 부응해 시작된 것이 2019년 사회서비스원이었다. 공공부문에서 선진적인 돌봄 사례를 만들어갈 주체로 기대를 모았으나 현재 사회서비스원은 민간시장을 활성화한다는 정부의 기조 변화로 폐원위기를 맞고 있다. 좋은 돌봄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당사자들의 질문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다.

우에노 치즈꼬의 『돌봄의 사회학』이 번역 중이라는 소문은 오랫동안 떠돌았다. 하지만 실물이 나오지 않으니 출간이 결국 무산되었는가 싶어 잊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문해 받아보고 두번 놀랐다. 우선 944면짜리 책을 만든 대담함에 놀랐고, 다 읽고 난 후에는 이 번역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들의 열의에 놀랐다. 옮긴이들은 매끄럽고 정확한 번역에 더해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친절한 설명을 곳곳에 넣어두었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한국의 노인돌봄 현황에 대한 옮긴이의 말과 양난주 교수의 해제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한권이었다. 분량이 상당하여 완독은 ‘챌린지’가 되겠지만, 도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