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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언 해킹 『영혼 다시 쓰기』, 바다출판사 2024

‘영혼의 과학화’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이두갑 李斗甲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doogab@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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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그리고 영혼의 고통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과 마음의 과학화는 인간 존재와 정체성, 그리고 우리 삶의 가능성과 자유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캐나다 철학자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영혼 다시 쓰기: 다중인격과 기억의 과학들』(Rewriting the Soul, 1995, 최보문 옮김)은 1990년대에 첨예하게 진행되었던 다중인격을 둘러싼 정신의학적 논쟁과 기억의 정치에 관한 분석이다. 다중인격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누구인가? 당시 다중인격 환자들은 대부분 여성으로 어렸을 때 성적으로 학대받았으며, 일부 과거에 대해 기억상실을 겪었다. 이들은 마치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듯 서로 다른 나이, 인종, 체격, 목소리의 인격들로 매우 빠르게 전환되었으며, 종종 드라마에 나오는 이름과 인격을 선택하기도 했다. 치료사들은 이들의 인격이 어린 시절의 학대로 인해 여러 다른 정체성을 형성했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기억을 잊고 ‘다중인격들’로 도피하여 살아간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전까지 극히 드물었던 다중인격은 1980년 미국정신의학협회의 공식진단명으로 지정되고 나서 1990년대에 이르러 대도시마다 수백명의 환자가 나타날 정도로 급증한다.

해킹은 다중인격이 곧 기억을 둘러싼 정치적 운동의 장이 된 과정을 분석한다. 다중인격자들이 겪는 고통의 뿌리에 가부장제와 공공연한 성폭력, 남성에게 유리한 사회·제도적 억압이 있다는 인식은 1980년대 아동학대 반대와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되며 하나의 사회운동으로서 나타났다. 그렇지만 비판자들은 일부 치료사들이 여성과 아동학대 피해자를 돕는다는 열정에, 경험하지도 않은 학대의 기억을 암시하며 환자들에게 거짓 기억을 심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급기야 1992년 학대자로 고발당한 부모들은 치료사들이 아이들에게 거짓 학대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며 거짓기억증후군재단을 설립, 다중인격이 치료사-환자의 ‘이인조 정신병’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해킹은 다중인격에 대한 정신의학적 논쟁을 분석하며, 삶의 고통을 직면하고 극복하려는 다중인격자들에게 공감과 존중을 표하면서도, 치료사들이 전적으로 피해자의 편에 서게 되면서 환자들을 무력한 존재로 그려내지 않는지 우려를 드러낸다. 과연 우리가 기억에 관해 완벽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기억이 ‘진정한’ 자아의 기반이라고 믿게 되었는가?

해킹은 다중인격의 계보학을 다루며 19세기 아동기의 트라우마와 기억상실, 그리고 인격의 파편화와 정신적 고통을 연관 짓기 시작했던 기억의 과학의 등장을 살펴본다. 이 작업에서 해킹이 ‘기억-정치’라고 부른 근대적 영혼의 과학화에 대한 분석은, 근대의학의 탄생에 대한 푸꼬(M. Foucault)의 분석 기획과 맞닿아 있다. 푸꼬는 19세기 이후 근대의학이 죽음, 즉 인체를 죽음으로 이끄는 병리적 상태를 탐구함으로써 질병과 생명에 대한 임상적 이해를 얻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해킹은 19세기 영혼의 과학화가 인간 마음의 병리, 즉 기억상실과 인격의 분열에 천착하며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18세기 해부학자 비샤(X. Bichat)가 병리해부학을 통해 질병과 생명에 대한 임상적 지식을 얻었다면, 19세기 정신분석학자들은 기억의 파괴가 마음과 자아의 병리를 일으키는 방식, 즉 기억의 과학을 발달시켜 영혼에 대한 진리를 얻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는 지식을 바탕으로 영혼을 근대사회의 규율에 맞게 구성하고 개입하고 통제하려는 ‘기억-정치’ 기획의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해킹은 19세기 트라우마의 심리화가 진행되면서 기억이 영혼의 열쇠라는 ‘심층지식’이 나타났고, 이 새로운 가능성의 장이 열리면서 다중인격이 1885년 7월 27일 늦은 오후부터 존재했노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그날 빠리의 한 정신병원 의사는 루이 비베(Louis Vivet)라는 환자가 여덟개의 뚜렷이 다른 인격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비베는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나 매를 맞으며 성장하고, 가출하여 도둑질을 하다가 소년원에 보내지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던 당시의 전형적인 정신병원 수감자였다. 그의 사례가 새로웠던 것은 그가 나타내는 폭력적 특성, 온순한 남자, 반신불수 상태, 여섯살 아이 등 인격의 분열증상들이 특정한 단편적 기억, 특정 금속이나 약물에 대한 반응, 신체적 증상들과 관련된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자아가 의식, 감각, 기억의 복합체이고 서로 다른 인격은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다중인격을 통해 영혼을 과학화하는 방편으로서 기억의 과학이 탄생한 것이다.

해킹은 인간과학의 진리와 우리의 삶과 자유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며 책을 끝맺는다. 종교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영혼을 이동시킨 ‘영혼의 과학화’가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하는가? 그는 신체적 고통에만 사용되었던 트라우마의 심리화를 통해 기억과 정신적 고통의 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환자들을 치료했던 삐에르 자네(Pierre Janet)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사례를 대비시킨다. 환자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최면암시와 거짓 기억을 심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자네와, 환자에게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기억의 진리를 대면하라고 완고하게 요구했던 프로이트. 기억을 탐구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에 대한 과학적 진리를 얻을 수 있다면 환자들은 어떠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해킹은 기억의 과학에 기반한 다중인격 치료가 우리를 거짓 의식으로 이끌 수 있으며, 이 극단적 형태는 이를테면 “여성은 스스로는 인생을 버텨나갈 수 없는 수동적 존재”(428~29면)라는 편견으로 몰아간다고 비판한다. 과연 환자들이 기억을 통해 ‘진정한’ 내면의 자아를 발견해야만 하는가? 그는 오히려 다중인격 환자가 “자기 정체성을 선택하고 창조하고 구성해낼 자유를 향한 돌파구를 찾”(136면)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기억의 과학은 자아의 성장과 인간의 자유를 막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최선의 비전에 반대”(429면)된다는 것이다.

유려하게 번역된 해킹의 『영혼 다시 쓰기』는 그 분석의 치밀함, 번뜩이는 통찰과 기지 넘치는 글쓰기, 그리고 인간과학의 진리와 윤리에 대한 그의 심대한 질문들로 가득 차 있는, 인간과학 역사의 고전이 되었다. 인공지능과 뇌과학의 시대를 맞아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데이터에 바탕해 새로운 형태의 의식을 만들고 있는 듯하다. 또한 기억의 병리가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연구하는 데 큰 자금을 투자하고 있기도 하다. 30년 전에 쓰인 해킹의 책은 21세기 인공지능과 뇌과학에서 나타나는 영혼과 기억의 새로운 결합이 정신적 삶의 조건과 가능성에 어떠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