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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바실리 그로스만 『삶과 운명』, 창비 2024

전쟁의 시대, 지난 세기 비극의 역사를 읽는 법

 

 

윤영순 尹英順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ysyoo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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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끄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각국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드는 2024년, 바실리 그로스만(Vasily Grossman)의 『삶과 운명』(Жизнь и судьба, 최선 옮김, 전3권)이 마땅히 그래야만 할 시간에 마침내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단순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제목의 소설은 ‘우끄라이나 출신의 유대계 소련 작가’ 그로스만이 1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쓴 역작이다. 우끄라이나, 유대인, 소련. 그로스만을 설명하는 이 세 단어에는 그의 삶과 운명을 따라다닌 비극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1905년생인 그로스만은 러시아 10월혁명, 1937년 대숙청과 공포정치,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등 20세기 전반을 뒤흔든 사건들의 직간접적인 목격자이자 희생자였고, 그 경험을 『삶과 운명』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이 소설 원고는 출판사 편집국에서 바로 압수되어 KGB(소련 국가보안위원회)의 비밀금고에 수십년 동안 봉인되었고, 소련 붕괴의 조짐이 보이던 1989년에야 독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지인들이 사본을 해외로 빼돌린 덕분에 소설은 스위스에서 먼저 출판되었으며, 이후 영어와 프랑스어 등 여러 나라말로 옮겨지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삶과 운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참혹했던 스딸린그라드 전투와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한다. 그로스만은 종군기자로 스딸린그라드 공방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으며, ‘붉은 군대’와 함께 서진하면서 학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유대인 절멸수용소를 취재했다. 이 시기 우끄라이나에서 행해진 유대인 대학살 과정에서 어머니를 잃었던 그로스만은 이러한 개인사의 비극을 인류사 가장 참혹한 전쟁의 한 부분으로 상세히 기록했으며, 소설 『삶과 운명』을 통해 예술이라는 영원의 범주로 옮겨놓았다.

이 작품은 당대 소련의 다른 전쟁문학처럼 위대한 승리와 고귀한 희생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승자가 없는 전쟁의 참상과 대학살의 현실, 그리고 악의 원천을 파헤친다. 이에 더해 소설에서는 스딸린 시대 농촌 집단화와 부농 척결, 우끄라이나 대기근과 대숙청 당시의 참상도 자주 언급된다. 더불어 공포정치가 강화되면서 밀고와 감시가 일상이 된 소련 후방도시의 풍경도 자세히 그려진다. 히틀러와 스딸린을 마치 거울을 마주 보듯 서로 닮은 존재로, 나치즘과 스딸리니즘을 전체주의의 이형태이자 같은 차원의 악으로 보는 이 소설이 1960년대 소련에서 출판될 수 없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19세기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의 전통, 즉 똘스또이 장편의 거대한 서사적 흐름과 도스또옙스끼 소설의 논쟁적이고 대화적인 관계, 체호프 특유의 휴머니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스만은 샤뽀시니꼬프 가족을 중심으로 그들과 연관된 수많은 등장인물의 삶과 운명을 긴 호흡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히틀러와 아인슈타인의 시대’, 인류 전체가 공멸할 위기에 처했던 20세기는 ‘순진하고 인간적이었던’ 19세기와는 또다른 서사의 방식을 요구했다. 그로스만에겐 과거의 문호들처럼 사건을 객관화할 시간적 말미도, 연민과 증오의 대상에 대한 물리적·심리적 거리도 확보할 여유가 없었다. 작가는 때로 예민하게 개입하고 분노하며 이념과 혁명, 역사와 체제, 과학과 예술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이 소설을 읽는 또다른 재미 중 하나이다.

그로스만의 주인공들이 마주하는 20세기 역사는 개인이 저항하거나 극복하기 힘든 비극으로, 개인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닌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떤 숙명으로서 강제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은 극단의 시대,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니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로 수렴될 수 있다. 피비린내 나는 스딸린그라드, 우끄라이나의 유대인 게토, 나치의 포로수용소, 유대인 절멸수용소, 후방도시 까잔과 모스끄바 등에서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운명을 마주한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대체로 죽을 운명 앞에 선 인간들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다. 작가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전쟁터와 가스실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인간을 구원하는 두가지로서 자유와 사랑을 이야기한다. 죽음의 공장 건설현장으로 투입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포로 이꼰니꼬프, 의사라는 신분을 밝혀 살아남을 기회를 버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면서 소년과 함께 가스실로 향한 소피야 오시뽀브나, 게토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환자를 치료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뜨룸의 어머니 등은 파국의 순간에도 인간은 자유로우며, 자기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그로스만은 사랑 역시 인간다움을 증명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로 보았다. 폭격으로 내일을 알 수 없는 전선에서도 세료자와 까쟈는 사랑에 빠지며, 예브게니야는 노비꼬프 장군을 사랑하고, 시뜨룸은 친구의 아내인 마리야 이바노브나에게 끌린다. 자신도 까쟈에게 이끌리면서 그녀를 세료자와 함께 탈출시키는 사령관 그레꼬프, 전남편 끄리모프가 체포되자 노비꼬프를 떠나 그에게로 돌아가는 예브게니야, 서로 사랑하면서도 각자의 가정을 지키는 시뜨룸과 마리야 이바노브나의 선택이 그것이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사랑과 죽음 앞에서의 치열한 선택이야말로 파시즘이 강제하는 파국의 순간에 인간이 자기 삶과 운명에 대해 행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과 투쟁의 방식임을 그로스만은 보여준다.

그로스만은 히틀러와 스딸린의 시대를 예술공간에 박제함으로써 인간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위험을 미래 세대에 경고하고 있다. 이 소설이 바로 지금 유효한 이유는 20세기 인류가 겪었던 비극의 원인이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고, 인류는 어리석게도 미래가 아닌 과거를, 작가 알렉시예비치(S. Alexievich)의 표현처럼 ‘세컨드핸드 타임’을 살아야 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을 러시아어와 영어로 여러번 읽었음에도 우리말로 번역된 책의 독서가 쉽지는 않았다. 전편(前篇)이 있는 길고 복잡한 이야기 구조, 많은 등장인물과 어려운 이름체계, 낯선 지명 등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 수반되는 예의 그 장벽이 작품으로의 편한 접근을 방해한다. 책의 첫머리에 주요 등장인물의 관계도, 이름과 성, 애칭 등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배경이 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과 후방도시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면 좀더 독서가 쉬웠으리라는 점이 한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