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어떤 이야기가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 ‘더’라고 물었거니와 이는 심상한 이야기가 곧바로 소설과 등치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꺼낸 질문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채집하는 데만 머문다면 소설이 상대하는 세계가 쇄말해지기 쉽고,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실감을 놓치는 경우에는 자칫 소설이 형성하는 세계가 얕아질 수 있다. 그 때문에 소설의 창작과정은 소재뿐 아니라 구성의 신선함을 요구하는 데 더해 개별화된 존재를 향한 관심에서 나아가 세상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구체화할지 고심하기를 요청한다.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올해로 27회를 맞이하는 창비신인소설상에는 총 1,455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글쓰기 환경이 다변화되고 쓰는 행위를 추동하는 소재 또한 다채로워진 이때, 여전히 소설이라는 경로를 통해 말하려는 열정을 풍부히 내비치는 작품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본심에서는 소설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출발은 어떠해야 하는가가 화두로 올랐다. 특히 다수의 작품이 참신한 에피소드를 내세운다거나 잘 단련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들이 ‘소설다운’ 세목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또 서사적 층위를 제대로 구성했는지 여부가 심사의 주요한 척도로 세워졌다. 대중문화적 요소를 활용한 글이 많았다는 점 역시 올해 응모작들의 흥미로운 경향이었는데, 이 경우 해당 요소를 당대적 경험으로 풀어내고 있는지를 살폈다. 이처럼 우리 시대 소설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에 적극 응한다고 여겨진 4편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김미현의 「당신의 원경」은 미학적인 야심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어린아이의 시선에 비쳤던 세상의 일면이 어떻게 한 사람의 심연으로 가라앉게 되는지를 서늘하게 포착한다. 하지만 과거의 입체적 의미를 좀처럼 해명하지 않으려는 소설의 태도가 결과적으로는 의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여 독자와 교감할 수 있는 폭을 스스로 한정하는 듯했다. 이는 단정한 만듦새에 호감을 표했던 심사위원 다수가 해당 작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끔 만든 이유가 되었다.
이은주의 「끝맛」은 단편소설이라는 규모에서 ‘계급천장’ ‘보호종료청년’ ‘인종차별’ 등 만만치 않은 사회적 의제를 다루고자 한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이 생동감있게 움직이면서 주제를 심화시킨다는 점이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작품이 하고자 하는 말에 힘을 싣는 과정이 장황해지면서 일부 사건을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데 그친다거나, 작중 효과를 위해 일부러 개연성을 없앤 것이 충분히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과의 편차가 크다는 점도 사회의 다방면에 관심을 둔 응모자의 장점을 높이 평가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김반야의 「계속 계속 계속(feat. 올겐보이)」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붙드는 미덕이 있어 심사위원들로 하여금 오래 논의를 이어가게 했던 작품이다. 이 소설은 푸에르토리코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골함을 들고 한국에 온 ‘올겐보이’의 사연을 전달한다. 여러 세대 및 오래된 장소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다루면서도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점이 특히 매력으로 다가왔다. 다만 결말로 향하는 작품의 전개방식이 다소 틀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상이 가능한 마무리로 서둘러 가기보다는 작중 인물들의 힘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다음을 기대해보기로 했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문소이의 「마이 리틀 그리니」는 일상에서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그러나 좀처럼 섬세하게 드러나기 어려운 소재들을 치밀한 구성을 통해 안정적으로 엮어낸 작품이다. 무엇보다 임신중지수술을 하는 산부인과 상담실에서 일하는 ‘지수’의 복잡한 내면과 ‘지수’ 바깥의 인물들이 놓인 상황을 오가면서도 양자 모두에 적절한 거리를 둠으로써 노련하게 문제의식을 벼려낸다. 소설이 야기할 만한 논쟁과 질문을 피하지 않으려는 패기가 느껴졌으며,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긴장감있게 서사를 밀고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미더웠다. 심사위원들은 한편의 새로운 소설을 넘어서 좋은 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의견을 모았다. 당선자께는 축하를, 옥고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는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기준영 김유담 성해나 양경언 최진석 황정아
수상소감
문소이 文韶異
1983년 서울 출생. 동국대 역사교육과 졸업.
몇년 전 검진을 받기 위해 산부인과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 제 옆에 교복 입은 커플이 앉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애틋하게 얼굴을 맞대고 밀어를 나누었습니다.
또 언젠가 SNS에서 자신의 진단서를 화면에 비춰 보이던,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소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처참한 기분이 들게 하는 뉴스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녀, 연인, 혹은 타인을 학대합니다. 어제 본 뉴스인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졌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분노에 차서 신촌역을 걷다가 불현듯 지난 여러 장면이 뒤엉켰고 그것이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당선 연락을 받았을 때 손이 떨리고 얼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혼자 흥분감을 가라앉히던 그 오후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합니다. 내릴 때 불편하더라도 버스 안쪽 자리부터 앉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신인이라는 타이틀 아래 관대하게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신 기회를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친구 진영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글을 완성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한 뒤 여러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다정하고 유쾌한 서유미 작가님과 합평수업을 같이했던 문우들, 그들이 거칠고 울퉁불퉁한 글을 읽어주었기 때문에 즐겁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이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문지혁 작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스터디 모임의 문우들. 이렇게 만나게 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모임장인 지윤님께는 각별한 마음을 보냅니다.
일일이 열거하지는 못하지만 훌륭한 작품을 써주신 작가님들과 그 작품이 출간되도록 애써주신 관계자분들 덕에 출퇴근길을, 잠들기 전을, 그리고 주말 오후를 충만하게 채울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간 내어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일로 가득한 나날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