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심사평

 

 

 

모든 합리적 판단은 그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찾는 일을 필요로 한다. 근거를 이미 확보하고 있을 때는 판단이 쉽겠지만, 좋은 문학작품이란 늘 우리가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지점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 문학작품을 깊이를 지닌 언어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비평의 일차적인 성패는 두터운 의미의 대목들을 얼마나 말이 되게 읽어내느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작품의 언어를 해명하기 위해 여러 영역의 언어를 동원하여 작품을 비추어보는 작업을 거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참조 작업 또한 간단하지 않다. 해석의 과정에 여러 언어들이 교합함으로써 보통 풍부하게 해주기를 기대하지만, 오히려 특정한 틀에 가둬버리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과 비평이 있는 자리에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작품 자체에 대한 성실한 관찰과 독해’이기도 하다.

이번에 심사를 진행하면서 이 작품을, 혹은 어떤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런 담론으로 감싸 읽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질문이 거듭 환기되었다. 특히나 요즘 비평에 활용되는 담론들은 특정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는 경향을 보였다. 기후위기 시대를 빚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며 비인간과 사물들이 지닌 주체성을 회복시켜 새로운 관계 맺음을 강조하는 담론들이 비평장에 유행처럼 번진 지 꽤 오래다. 그것이 전지구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실험적 모색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하더라도,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윤리성을 특권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인간의 책임을 필히 동반하는 정치적 문제는 소거되지 않는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최근 비평장에는 비인간담론으로 문학작품을 읽어내는 작업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비평들이 종종 눈에 띄는 상황이기도 하다. 비평의 언어가 어떤 담론을 참조할 때, 그 참조 대상이 되는 언어 또한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완벽한 답안으로서 호출되는 참조 담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참조한 담론 또한 작품의 언어로 문제화하는 작업을 가동할 때 의미를 생성하는 뜨거운 비평작업이 진정 가능할 것이다.

4편의 글을 두고 마지막까지 고심했다는 것을 밝힌다. 「우연히 나타난 타인에게 해줄 수 있는 몇가지 이야기: 문진영론」(김경민)은 문진영의 소설이 어떻게 타인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지를 섬세하게 그린다. 그런데 섬세한 서사 읽기와 별도로 작품의 의미를 프로이트와 벤야민의 기억과 서사담론에 전적으로 기댄 채 풀어내고 있어 작품들의 역사성이 소거된 것처럼 보였다. 「근원의 숲에서, 나무 곁에 다시 앉을 때: 최진영론」(임혜민)은 최진영의 작품을 비평하는 언어들의 선회를 주장하는 과감함이 돋보인다. 하지만 ‘빛’과 ‘동물’ 등을 말할 때는 소재주의적이고, ‘온몸’과 ‘공산’ 등을 말할 때는 관념적인 해석을 하고 있어 아쉬웠다. 「에코토피아를 향한 시적 전회들」(이섬)은 최근 한국시의 흐름 전체를 굽어보는 너른 시야가 주목할 만했다. 사물들과 삶을 도모하는 시적 전회에 대해 실험적이고 다소 난해한 작품들을 거론하는 열정도 뜨거웠다. 그런데 담론 의존성은 차치하더라도 결정적으로 작품과 담론의 맥락이 연결되지 못하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벽을 허무는 돌봄과 커먼즈: 김혜진 소설을 중심으로」(김원경)는 김혜진의 작품세계 전반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물론이고 최근 문학장에서의 돌봄담론의 추이 역시 꿰어내는 성취가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은 어딘가 비평이 아니라 정리를 한 글처럼 느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비평언어를 꺼내야 하는 순간 곧바로 ‘커먼즈’ 같은 개념어가 등장하는 식의 진술이 많았고, 결말부에 등장하는 ‘벽’ 같은 용어는 추상적이었다. 한층 더 섬세하게 다듬어질 이후를 기대해보기로 한다.

길고 심도있는 논의를 거듭했으나 심사위원들은 결국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했다. 귀한 비평문을 보내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아쉽게도 당선작을 뽑지 못했지만 심사위원들은 응모작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머지않아 지면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든든한 동료들이 많으리라 기대한다. 이 느낌이 꼭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백지연 송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