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시의 시간을 들여다보다
▶ 쓰고 읽는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한국시를 다룬 특집 ‘오늘의 한국시, 이룬 것과 나아갈 길’이 무척 반가웠다. 한국시를 구성하는 움직임을 면면이 살펴보며 “시 자체가 거대한 협동작업”(송종원 「되찾은 ‘님’의 시간」)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님’의 상실, 커먼즈, 노동, 페미니즘 등 다양한 키워드를 바탕으로 독자로서의 경험을 돌이켜보고, 시의 여러 장르와 계보뿐 아니라 한국시가 변화해온 양상도 알 수 있었다. 어릴 적 책장에 꽂아둔 시집을 떠올리는 데서 시작해 자신만의 “시인하기” 방식을 이야기하는 주민현의 글(「우리가 기억하는 시, 시가 기억하는 우리」)이 특히 눈에 띄었다. “나에게 시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시간의 역사는 순차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 시를 사랑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기분이다. 어떤 현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 그 틈에서 어떤 장면을 응시하는 사람이 될지 고민해온 마음이 읽혀 소중했다.
한국시가 나아간 경로를 따라 나도 함께 전진하는 듯했다. 필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이름들과 내 책장을 대조해보며 즐거움을 느꼈다. 거론된 무수한 이름을 보며 수많은 사람의 시간이 쌓여 오늘에 다다랐음을 실감한다.
김진하 sso_o99@naver.com
시와 소설 속 생동들의 돌출방식
▶ 생동하는 모든 것은 고유한 소리를 낸다. 벌레 우는 소리가 귀를 찌르는 이 계절에 만난 시와 소설들의 생동이 유독 와닿았다. 송정원의 시 「그래도의 마음」에서 여자는 “그래도”라는 이름에 도달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겪는다. 여자는 전자레인지가 되었다가 극장을 통과하고 비둘기에게 대화를 요청하기도 한다. 호명 이전의 이름 짓기를 위해 부지런히 내가 속한 ‘여기’를 살핀다.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의 눈을 따라가다보면 여기에 있는 나의 존재가 선명해짐을 느낄 수 있다. 무명의 존재에게도 이야기가 있을까. 시는 이렇게 답한다. “아, 이건 내 이야기입니다”. 장철문의 시 「식당 칸은 없다」는 생과 사, 있음과 없음의 이분을 놓고 그 사이를 오가거나 그 둘 모두에 가닿아 있다. 그에 따르면 일어난 것은 다시 일어나지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말하는 일은 어지럽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없는 것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소설란에서는 「옮겨붙은 소망」(이미상)의 돌출이 인상적이었다. 화자는 이웃 부부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아내의 빈껍데기 같은 소망이 남편에게 옮겨붙게 하는 것은 “한물간 제도”인 혼인이다. 죽음에 관한 연민을 적당히 덜어낸 채 맞물릴 수 없었던 각각의 삶을 지켜보고 이 모든 것에 미약한 싫증을 느끼는 화자 자신이 정작 혼인제도를 누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반전처럼 느껴진다. 서사를 따라가다보니 화자의 감정이 곧 내게도 옮겨붙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곁가지” 같은 사건들 속에서 행불행을 따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분노를 삭이기 위해 남몰래 사방치기를 하는 화자를, 결국 “옮겨붙은 소망”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를 따라 나만의 돌출방식을 찾아나서고 싶어진다.
박이빈 ibin0605@naver.com
역사의 실패를 딛고 한걸음 더
▶ 지난호 기획 현장 ‘가자사태가 던지는 질문들’(알베르또 또스까노, 프레데리끄 로르동, 한기욱)과 논단글 「K-현대사의 성취와 역동성」(홍석률)은 평화가 실패한 인간사에 지치지 말고 그 실패를 껴안고서 한걸음 더 나아가자는 역설적인 희망의 제안들처럼 읽혔다. 가자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룬 기획 현장의 글들은 외교적 상상력으로 체결된 오슬로협정 이후 30여년간 이어져온 ‘평화’ 프로세스의 모순을 주지시키는데, 그 결과를 엄밀히 따져 묻고 향방을 지켜보자는 각 필자들의 준엄한 제안이 저항의 의미로 다가왔다. 「K-현대사의 성취와 역동성」은 한국사회가 성취해온 역동성에 집중하며 특히 한반도 평화를 국제사회 평화와 동시대적으로 연결 짓고자 한다. 실패로 점철된 듯 느껴졌던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비록 한순간 좌절하더라도 그 실패의 결과를 지켜보며 다음을 위한 힘을 내야 할 때다.
김소희 ourstorytolove@gmail.com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민들의 결의가 필요하다
▶ 연일 지속되는 폭염과 폭우 속 대북전단과 ‘오물 풍선’ 살포,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등 접경지역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한반도 외교안보 전문가 3인의 대화 「위기의 남북관계, 지속가능한 평화를 찾아서」(문장렬·이승환·정욱식)는 야권의 대승으로 마무리된 4월 총선 이후, 남북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옅어지는 시점에 적절하게 다가왔다. 한반도평화를 둘러싼 문제에서 북한의 대남정책 변경은 깊이 분석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통일을 포기하고 남한을 이른바 ‘적대적 교전국’으로 선언한 데 대해 “조건부적이고 반응적”(문장렬)인 것이라는 의견과 “근본적이고 전략적”(정욱식)인 변화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북측이 선대의 ‘말씀’을 헌법이나 로동당 규약만큼이나 중시한다는 특성을 감안할 때 이러한 ‘유훈’까지도 대대적으로 수정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이러한 태도 변화는 근본적인 방향전환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해 보인다. 북한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사회자가 적절히 지적했듯 “남북 양쪽의 분단국가주의를 강화”(이승환)하는 움직임이라는 점이 문제다. 수사적·의례적으로나마 남북한이 평화적 조치들을 취해온 근년의 역사에 역행하는 흐름인 듯해 우려스럽다.
최근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초점은 온통 국내정치에 매몰된 느낌이다. 내외의 악조건 속에서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남과 북의 조치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동시에, 이 상황에서 남한 시민사회가 어떻게 평화를 위한 움직임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정치권은 남북한이 임시적이더라도 관리 가능한 공존체제나마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 체제가 무너지고 대결구도가 고착화된다면 비용과 손실이 막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승범 sun_ paju@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