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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문학에서 찾는 전환의 힘
탈성장의 용기와 지구생활자의 미래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육체성의 형식과 리얼리티」 「‘계모 찾기’, 버림받은 세대와 냉혹한 모성의 세계」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등이 있음.
jjua@kangwon.ac.kr
1. 이탈하고 단절할 용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거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한가지 방향으로 집약되는 듯하다. 돈이 되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가, 혹은 그런 아파트로 옮길 수 있는가. 이른바 아파트 공화국의 화용론인 셈이다. 사전을 열어 거주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일정한 곳에 머물러 삶. 또는 그런 집’이라는 뜻이 나온다. 이 사전적 의미는 머무는 행위와 머무는 장소를 가리킬 뿐, 당연히 머물러 사는 장소의 선별 기준까지 내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부동산 개발과 투자, 재산 증식이라는 맥락을 떠나면 거주에 대해 별다른 화젯거리도, 달리 말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초 거주라는 의미와 ‘산다’는 의미는 분리되어 인식될 수밖에 없다.
개발만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도식이 지배해온 토건국가에서 고향집, 살던 동네, 소풍 갔던 뒷산 등 과거와 연결된 개념들은 이미 변질되었거나 아예 소멸되었다는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방금 ‘개념’이라 말했지만 어쩌면 이런 명명은 당치 않은 것이겠다. 장소가 사라졌다고 해도 그곳에서 호흡하며 자라온 몸과 마음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실체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떤 감상이든 애초부터 용납하지 않는 것이 토건국가의 성장주의이다. 어떤 장소가 품어온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개발론자의 손익계산서 앞에서 증발하는 국면은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가령 “경기도 땅의 운명은 얼마나 평평하고 밀어버리기 쉬우냐에 따라, 그리고 서울 강남에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값이 매겨지고 결정됐다”는 탄식이 나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1 이러한 탄식은 일명 ‘원진레이온 사태’를 일으킨 악명 높은 섬유공장과 해당 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1966년 설립된 이후 1993년 폐업에 이르기까지 유독가스를 배출한 공장 탓에 노동자들은 죽거나 병들었고, 오염된 환경으로 주민들의 일상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소위 ‘수도권’ 개발이 ‘밀고 간’ 지금, 그 파괴와 고통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공장 터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그렇다면 이런 개발은 지역의 갈등 요인을 없애버렸으니 다행하고 좋은 일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엄밀히 말해 개발의 논리에는 다만 기획과 실행이 있을 뿐, 애당초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가할 여지 따위는 없다. 어떤 고통이든 아우성이든 개발도면의 평면성 아래에 깨끗하게 묻어버린다는 것이 개발의 본령이다. 그 무심함은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는다. 공장노동자의 고통뿐 아니라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공장주의 무책임과 파렴치까지도 깨끗이 치워버린다. 감정도 윤리도 평평하게 밀어버리는 강제성, 정해진 미래를 향해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는 압력이 곧 우리가 경험하는 개발이고 성장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장소의 속성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니 장소가 곧 존재를 규정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모두가 한 방향만 바라보고 달려가기를 강제하는 장소에서는 다른 어떤 종류의 미래도 상상할 수 없다. 나아가 지극히 평범하지만 본질적인 질문도 끼어들 틈이 없다. 어떤 삶이 내가 원하는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 이에 어느 노랫말처럼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2은 상태가 된다. 그러니까, 분명 사는데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상태. 무수히 갱신되는 성장 발전 지표들에도 정작 그 안에 놓인 인간들 대부분은 불행하고 불안하다.
더욱이 요즈음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적 재난은 그토록 경쟁적으로 몰입했던 성장방식이 결국 인류는 물론 지상의 모든 생명을 공멸로 몰아가는 파괴행위였다는 사실을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제는 무작정 달리기만 해온 그간의 관성을 버릴 때도 되었다. 다시 말해 생산, 발전, 진보 등 빛나는 미래를 약속한 개념들에 의해 무능, 낙후, 퇴보 등으로 낙인찍힌 대상들을 돌아보고, 나아가 그 이분법 자체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최근 우리 소설들이 그려내는 삶에 대한 회의나 미래에 대한 불신은 단순하지 않다.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는다는 익숙한 플롯들이 탈성장적 전회로, 생태주의적 방향전환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물론 익숙한 사고방식을 끊어내는 일, 이해관계로 촘촘히 얽힌 삶의 패턴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고 어쩌면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모두가 따르는 궤도를 이탈하고 홀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마다 선택하는 단절과 이탈이 장차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궁극의 용기일 것이다.
2. 더이상 ‘남들처럼’ 살 수 없다면
성해나의 「화양극장」(『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2022)은 교사 임용시험에 여덟번 떨어지고 방황하는 주인공 ‘경’의 이야기이다. 낙방의 경험이 누적되면서 그녀는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줄거리로 요약되는 인생”(57면)이 되었다는 패배감에 시달린다. 황폐해진 그녀의 내면과는 별개로 가족들은 다음 시험에는 합격하여 “사람 구실 하면서”(71면) 살리라는 기대를 접지 않는다.
경아.
언니는 다정히 말했다.
너도 남들만큼은 살아야지.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 그 말을 경은 오래도록 곱씹었다. 경은 아버지와 언니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72면)
‘사람 구실’이라든가 ‘남들만큼’이라는, 집단의 암묵적인 기준선을 맞추는 동안 경의 건강과 자존감은 엉망이 된다. 노량진을 떠나 고향에 돌아온 경은 아버지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집에도 머물지 못한다. 그녀에게 유일한 도피처는 관객이 거의 없고 시설도 노후화된 극장뿐이다. 이곳에서 경은 남의 인생을 싸잡아 참견하거나 설교하려 들지 않는, 그래서 ‘예상을 깨는’ 할머니 이목씨를 만나 친구가 된다. 이목씨의 삶은 객관적으로 불행하다. 희귀한 여성 스턴트 배우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큰 부상으로 경력이 단절됐고, 절망의 순간에 한 여성을 만나 연인관계로 발전했으나 사회는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삶을 대하는 이목씨의 태도는 단호하다. 삶을 ‘살아내기’보다는 ‘살아가고’ 싶다, 남들을 의식하며 참고 견디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살겠다는 것이다. 이목씨의 존재는 남들의 삶을 의식하느라 정작 한번도 발 들일 용기를 내보지 못한 경에게 ‘나의 삶’으로 건너가는 버팀목이 된다.
말하자면 ‘사람 구실’의 재설정이라고 할까, 탈성장의 선언이라 할까. 「화양극장」이 보여주는 주인공의 홀로서기는 전적으로 ‘남들의 삶’을 기준으로 끼워 맞춰진 생산적인 인간은 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성장주의가 상정하는 미래관에서 인간은 그 자체로 중요한 자원이다. ‘사람 구실’이란 쉽게 말하자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라는 말이겠지만, 문제는 그 ‘최소한’에 대한 규정이나 정도에 정작 당사자의 동의는 끼어들 틈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은 생산적 인간을 육성하는 사회적 통념이란 반드시 폭력적인 억압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도리어 자상한 걱정과 염려의 형태를 띠기도 하기에 더욱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스스로 미래를 선택한다는 의미를 곧바로 주체성의 낭만적 향유라든가 자유를 향한 도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앞서 「화양극장」의 주인공이 망가져가는 자신을 외면하면서까지 시험 교재를 붙들고 ‘견디며’ 살았던 것은 ‘남들처럼 사는 삶’을 따르는 일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자기 삶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일에는 외로움과 공포가 따르기도 한다. 자신의 삶을 혼자서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낭만도 자유도 아닌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다.
김유나 장편소설 『내일의 엔딩』(창비 2024) 또한 유사한 두려움을 안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자경’은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6년 동안 홀로 돌봤다. 아버지의 상태를 호전시키겠다는 결심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손수 간병을 맡기도 했고, 아버지의 투병기간이 길어지자 병원비와 간병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재취업해서 오로지 돈을 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옹색하게 살아왔다. 아내를 잃은 뒤 홀로 어린 자경을 키워낸 아버지, “예상하지 못한 어느 순간에 작고 여린 것을 태우고 가는 삶”(27면)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에게 애처로움을 느낀 만큼 자경은 그를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마음가짐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동안 그녀의 성격은 점차 강퍅해지고, 잠시 연인이었던 이들은 자경의 형편을 알자마자 모두 떠나버렸다. 여러번의 이별을 경험한 후에 자경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영화 촬영감독이라는 꿈을 놓지 않는 ‘응현’을 사귀지만, 좀처럼 그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오랜 간병생활 동안 자경에게 미래란 책임과 같은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겐 응현을 책임질 여유도 마음도 없는 만큼, 응현에게도 책임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자경은 결심한다.
마흔셋, 만난 지 2년이 다 되어가도록 다음 단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서로가 이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미 답이 나온 거라 여겨지기도 했다. 다음 단계는 결혼이건 동거건 이별이건, 하여간 머리도 마음도 복잡하게 만들면서 뾰족한 답은 없을 현실 그 자체일 거였다. (…) 살아본 결과 미래란 행복이 아니라 책임이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숨 쉴 틈 없이 닥쳐오는 것이었다.(49~50면)
자경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도 예측이 가능하기에 회피하려는 것이다. 적어도 남들과 같은 미래는 서로를 책임질 경제력이 없는 응현과 자신이 꿈꾸기엔 사치라고 여긴다. 이런 자경의 결심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골집을 정리하는 동안 대학시절 찍었던 영화필름을 찾아내면서 무너지게 된다. 그녀조차 까맣게 잊었던, 너무나 무모했음에도 무엇이든 돌파하려 했던 대학시절의 자신이,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보관해온 사랑스러운 딸의 기록들 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던 것이다. 순간 “어째서 이토록 낯선 삶의 한복판에 서 있게 된 건지”(129면)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응현에게 같이 있자고, 비록 남들처럼 살 순 없어도 같이 머무는 ‘선택’을 해보자고 말한다.
「화양극장」이나 『내일의 엔딩』의 인물들은 적당히 시류를 따르는 삶에 머물고자 했지만 어떤 이유로든 그 시류에서 이탈한 이들이다. 이들은 당초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고 경제력이 있는 상대와 결혼하는 등 소위 남들처럼 사는 삶을 택했다. 사회적으로 안전한 관습 안에 자기 삶의 속도와 방향을 맞추기를 원했다. 계산이 맞아떨어지는 일반적 삶의 유형에 스스로를 맡기고 그것이 곧 자신의 선택이라 믿는 것, 이것은 행복하기는커녕 공포스럽기만 한 진짜 자유와 대면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흐름을 따를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성해나와 김유나의 소설은 이 지점에서 한걸음을 더 내딛는 용기를 보여준다. 더이상 내일을, 미래를 내다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사회가 만든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출 수 없다면, 타인에게 떠밀려 미래로만 나아가려는 관성을 버릴 수밖에 없다. 성해나의 인물은 남들이 뭐라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황폐해진 내면부터 돌보려 하고, 김유나의 인물은 남들처럼 살기 위해 그간 보류해온 행복을 더이상 미루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일상적인 행복과 건강을 희생해서라도 도달해야 할 미래라면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이렇듯 성장주의의 채찍을 맞아가며 벼랑 끝까지 몰린 인간, 안간힘을 썼으나 그 냉혹한 계량의 세계에서는 숨 쉴 수 없었던 절박한 인간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다.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보겠다는 용기,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나의 삶은 계속된다는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3. 지구생활자라는 운명공동체
온 사방에 불행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중이라면 한번쯤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달려가는 성장과 발전의 청사진은 과연 유효한가. 그런 미래를 위해 차압된 현재의 불행을 언제까지 감내해야 하며, 파괴되는 몸과 마음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지구적 기후문제와 환경파괴에 대응하는 최근의 생태론적 사유들이 “생산체계는 파괴체계와 동의어”3라 비판하고 현인류의 신앙과도 같은 성장주의를 거부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인간 또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 일부임을 감안하면, 꿀벌이나 북극곰을 멸종으로 이끄는 개발과 성장의 관성이 모두를 같은 운명으로 이끌 것임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앞서 성해나와 김유나의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탈성장적 사유는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정치적인 인식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제부터 살필 어떤 보편적인 연대의 감각, 즉 지구상의 여타 생명체와 분유하는 고통의 감각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악스트』 2023년 3-4월호)는 도발적인 제목만큼이나 생활의 범주를 단숨에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기초 수영반에서 만난 두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초등교사로 일하던 ‘희주’는 학내 폭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부모들의 정서적 폭력을 견디다 못해 사직한 상태다. 간혹 이유 없이 쏟아지는 일상적인 멸시와 적의를 감내하면서 희주 자신도 괴물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던 중이었다.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던 ‘주호’는 작업장 기계에 동료가 끼어 죽는 사고가 발생한 뒤 회사로부터 휴직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전처럼 기계를 돌리는 무심함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여긴 순간부터 더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지표와 경쟁을 앞세운 현실에서 질식할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전 죽고 싶다거나 죽으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이상해요. 그럴 수가 있는 걸까요.(192~93면)
이들은 ‘죽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이미 예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작가가 환경문제와 성장주의에서 유사한 파국을 감지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이 환경문제를 도입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일단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인물들의 생활을 윤리적으로 변화시킨다. 희주는 괴물이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채식을 선택하고 환경문제에 집착한다. 주호는 사라지는 꿀벌을 보며 세계의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한층 중요한 것은 윤리적 각성이 아니라 즉물적인 공포, ‘기초 수영반’이라는 모티프가 보여주듯 턱밑까지 차오른 물에서 허우적거릴 때 느낄 법한 생생한 공포이다. 죽어가는 생명에서 전해지는 공포는 역설적으로 숨 막히는 생존의 장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동기로 작용한다. 논리는 이러하다. 지구상의 모든 것이 소멸된다면 인간도 그 운명을 피하지는 못할 터, 어차피 모두가 죽는다면 매사를 견디며 악착같이 허우적거릴 필요가 있을까,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먼저 나가려 스스로를 다그치고 남을 끌어내릴 필요가 있을까. 이에 이 소설은 좀더 나은 일상을 만들고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흔치 않은’ 인물들을 그려낸다. 이들은 실망스러운 현실 앞에서도 염세주의로 빠지거나 은둔하지 않고 오히려 몸과 정신을 더 건강하게 만들려 애쓰는 자들이다. 요컨대 이 소설은 멸종당하는 존재들의 보편성을 확인한 후 오히려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독자의 예측을 비껴간다. 세상의 죽어가는 것들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용기가 도리어 경쟁과 성장의 압박으로부터 이들을 구원한 셈이다.
소멸하는 지구의 생명체들과 인간 사이에 형성되는 동지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생태주의적 사고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두려움과 무기력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소멸되어가는 생명체 일반의 고통과 위기감이다. 이때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여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체를 일컬어, 프랑스 철학자 라뚜르(B. Latour)의 명명을 빌려 ‘지구생활자’(the Terrestrial)4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지구생활자라는 명명은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하나의 운명공동체를 상상하게 한다. 아울러 이 명명은 우리의 삶을 가능케 하는 가장 근본적 조건인 자연을 인간과 동일한 눈높이의 생명 존재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가령 프랑스 사상가 바따유(G. Bataille)는 그 옛날 빛과 온기에 감사하며 태양을 숭배했던 인류가 그것을 에너지원으로 여기게 된 순간부터 점유와 활용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예를 든다. 이런 사태를 두고 그는 “옛날에는 비생산적인 영광에 가치가 부여되었던 반면에, 우리 시대에는 생산이라는 척도에 가치가 결부된다”5고 분석했다. 태양을 자원이라 보는 순간부터 그 존재에 대한 감사와 경외는 사라졌다는 것. 이는 인간이 생명을 기대어온 본원적인 자연을 오로지 수단이자 자원으로만 대하는 오만과 무지를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오랫동안 탈북민, 이민자, 농민 등 성장주의에 밀려난 주변의 존재에 애정을 보여온 중견작가의 눈이 지구상 모든 존재의 본원인 ‘땅’으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전성태의 「깡통」(『여기는 괜찮아요』, 창비 2024)은 아주 작은 질문에서 시작해 큰 고민을 끌어내는 소설이다. 작가는 몽골인 ‘네르귀’를 통해 문명과 거리를 유지해온 유목민 고유의 문화와 그들에게 닥친 위기를 조명한다. 고비지역의 황무지에서 태어난 네르귀는 네살 때부터 할아버지 ‘엔비쉬’의 손에 자랐다. 한국으로 취업해 떠나면서 3년만 지나면 돌아온다던 부모는 연락이 없고, 그 대신 이들에게는 몽골의 유목민 생활을 조사하거나 체험하려는 여행객들이 찾아온다. 그중 한국인 여행객들이 떠나면서 선물로 남긴 다섯캔의 콜라는 엔비쉬와 네르귀에게 강렬한 문명의 맛으로 각인된다. 그러나 이내 콜라 깡통들은 엔비쉬에게 커다란 골칫거리가 된다.
네 아버지가 열두살 때 소련군한테서 받아먹은 햄 통조림 깡통이란다. 나는 이걸 붉은 모래언덕에다가 버렸는데 썩지 않아 평생 두려웠단다. 항상 마음에 걸렸어. 그렇다고 썩지 않는 걸 함부로 대지에 묻을 순 없었다. 아마 너도 저 썩지 않은 것들을 여기에 두면 평생 고통스러울 거야.(29면)
‘썩지 않는 것을 대지에 묻을 수는 없다’는 마음, 지금 우리에게는 희미해진 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것은 대지에 대한 경외라 할 수 있겠으나, 온전한 지구생활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예외적인 반응은 아니다. 자기 몸에 섞여드는 이물질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노쇠한 엔비쉬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순간부터 주변 정리를 시작하고, 홀로 유목민다운 죽음을 맞이할 준비에 나선다. 그는 네르귀에게 긴 여행을 부탁한다. 아들대에 버려졌던 통조림 깡통과 손자대에 생겨난 콜라 캔을 합쳐서 모아두었으니, 그 깡통들을 버리러 큰 도시 울란바토르로 가라는 것이다. 그 큰 도시에는 아마도 네르귀의 어머니가 일하고 있을 터였다. 엔비쉬는 한국으로 일하러 떠났던 아들이 죽었으며 며느리가 재혼하여 울란바토르의 고물상에서 일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지만, 그간 손자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깡통들을 메고 떠난 네르귀는 익숙한 사막을 떠나 처음으로 ‘거대한 발전소 굴뚝’이 보이는 낯선 도시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낯익은 깡통들’이 수북한 고물상에서 엄마를 만나게 된다.
엄마를 찾아나서는 어린 소년의 여행이라는 익숙한 플롯이지만, 이 소설을 신선하게 만드는 지점은 유목민의 정화된 삶과 도시인의 산업화된 삶이 만들어내는 선명한 낙차이다. 썩지 않는 콜라캔을 차마 대지에 묻을 수 없어서 시작된 네르귀의 여행은 그의 선조들이 땅을 지키기 위해, 아니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수해온 뚜렷한 신념을 보여준다. 작중에는 빗물이 누군가에게 속하면 “물이 귀한 대지에서 모든 생명들이 위험”(11면)해지기에 빗물조차 함부로 손바닥에 받지 않는다는 유목들의 터부가 등장한다. 자연을 점유하는 행위를 삼가는 것은 물론이고, 애초부터 그와 비슷한 마음이 생겨날 가능성조차 막겠다는 뜻이겠다. 몽골고원은 소위 ‘문명화’된 눈으로 보자면 미개하고 낙후된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이들의 땅이겠으나, 지구생활자의 눈으로 본다면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 현명한 이들의 땅이다. 앞서 성해나와 김유나의 소설이 한국사회 특유의 경쟁적 성장주의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얼마나 불행해졌는가를 이야기했다면, 공현진의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 경쟁구도를 거절하며 “갈 수 있는 만큼 간다”(「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197면)고 선언한다. 그리고 전성태에 이르러 반성장주의의 시야는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지구생활자가 공동운명체로 묶이는 지점에 이르는 것이다. 그 결론은 명료하다. 불행한 땅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4. 떠난 적 없지만 머물러본 적도 없는 세계
진보의 꿈이 악몽으로 바뀌는 전환의 국면이 명백해졌다. 이 악몽은 관념이나 가정이 아니며, 지금 발 딛고 선 땅과 숨 쉬는 대기에서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진행형의 현재이다. 해수면 상승으로 가장 고통받는 나라인 방글라데시는 앞으로 30년 안에 인구의 4분의 1이 난민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비단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의 예를 들지 않아도, 점점 더워지고 추워지는 세계에서 이대로라면 인류는 장차 더 안전한 먹거리와 주거지를 놓고 아비규환의 쟁탈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미래가 이처럼 예측 가능했던 적이 또 있었던가.
그렇다면 이러한 전환기의 소설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야 할까. 그 출발은 자신이 놓인 장소성에 대한 회의와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이때 일차적 동력은 무엇보다도 더이상 자신을 생산의 수단으로 방치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에서 나온다. 주목할 것은, 한 개인에서 비롯된 현실에 대한 거부감과 환멸이 곧 인류가 지향해온 성장주의에 브레이크를 거는 저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는 개인의 용기가 곧 지구를 살리는 용기가 된다는 것, 이는 문명전환기 우리 소설이 지닌 정치성을 가늠하는 대목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우리 소설이 ‘나’에서 ‘지구생활자’까지 인식이 확장되어가는 국면을 그려낸다는 사실은 다행이고 동시에 고무적인 일이다. 그간 우리 문학이 지속적으로 외쳐온 ‘돈이 되지 않는’ 삶의 가치가 결국 모두가 살 길을 가리키는 유일한 출구였다는 점에서 다행이고, 그 언명들이 문명전환기에 걸맞은 지금-여기의 발언이 된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이제 지구는 더이상 낯익은 지향과 미래관에 지배되어서는 안 되는 장소가 되었다. 단 한번도 떠난 적 없지만 머물러본 적도 없는 낯선 세계라 할까. 부디 지구생활자로서 서로가 서로를 호명하는 목소리들이 좀더 많아지기를, 그리하여 침몰의 위기를 견뎌내는 연대를 만들어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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