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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문학에서 찾는 전환의 힘
믿음과 약속으로서의 소설
김애란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이야기, 비밀의 공유와 보호
우리는 종종 소설에서 인물의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건네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겪는 마음의 움직임, 변화의 과정을 아주 가까이에서 온전하게 지켜보았다고 믿을 때 그렇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작품과 독자 사이에 일어나는 최종적 마음의 포개짐은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 인물과 시도했던 수많은 접속과 소통의(그리고 그 좌절과 실패의) 결과다. 고통이든 희열이든 혹은 악의 심연이든, 인물에 공감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소설의 서사는 제대로 구축될 수 없다. 서사체 이야기 형식에 뿌리를 둔 소설의 역사는 이 노력이 인간의 자기이해와 세계인식의 확장을 포함하는 소설적 기예의 세련과 심화의 시간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음의 소통, 즉 인간 내면의 언어적 탐사라는 가장 기본적인 자리로 논의를 좁힌다면, 우리는 인물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동하고, 그것을 세상을 향해 열어놓는 소설 창작의 비밀의 문 앞에 다시 서게 된다. 그때 인물과의 소통, 공감을 위해 작가가 시도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일종의 자기관찰, 자기 마음의 발견일 수 있다. 작가는 그렇게 타자의 마음을 묘사하고 타자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직관적 척도를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찾아가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확장하려는 노력 속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소설이 시도하는 이같은 일은 우리 모두가 종종 존재적 아픔 속에서 간절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음의 포개짐, 마음의 연결을 바란다. 그것은 온당한 소망이지만 가로막히고 좌절될 때도 많다. 특히 그 소통과 감응의 이야기 안에는 존재의 고통과 관련하여 발설되기 힘든 영역이 있으며, 그럴 때 비밀은 공유와 보호를 동시에 요구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이같은 이중의 형식은 소설이 이야기의 진실을 품는 방식이기도 하다. 소설은 진실을 드러내면서 감싸고 숨긴다. 소설이 품고 있는 이야기의 구조와 형식, 진실의 아이러니한 표현에는 마음의 소통과 관련한 여러 경로와 방식이 그림자처럼 새겨져 있다. 종종 이러한 마음의 경로를 탐사하는 일은 그 자체로 소설의 주제, 혹은 소설쓰기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김애란의 신작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 2024)은 고통스러운 비밀을 품은 세 고등학생의 마음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이 일을 하려고 한다. 소설에서 세 아이는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고 상상하고 살아감으로써 비밀의 소통과 감응, 공유와 관련한 간절한 질문을 던지는데, 이 과정은 소설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로서 하려는 일에 대한 질문과 겹치고 포개진다. 소설은 적극적인 조력자로서 주인공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 곧 마음의 발굴과 소통에 참여한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고통을 객관화하고, 거기에 현실과는 다른 질서를 부여하며 공감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시점(視點)을 바꾸고 시선을 발견하며 이어지는 인물들의 서사는 이야기의 확장, 변화에 대한 소망을 담아낸다. 특히 아이들이 시도하는 ‘시점 바꾸기’는 ‘시점’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을 넘어서서 독자에게 호소해오는 바가 적지 않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절실함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 대한 거듭되는 물음으로 표현된다. 다른 이야기, 다른 세상을 기다리는 이들의 바람이 우리를 계속 아프게 찔러온다.
2. ‘시점 바꾸기’ 혹은 시선의 힘
김애란은 ‘이야기’를 쓰고 상상하며 이를 소설의 또다른 질문으로 만드는 방식을 전작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2011)에서도 인상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이 장편소설에서 조로증을 앓고 있는 17세의 한아름은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감내하며 부모가 만나는 첫 순간을 써나가고, 그 이야기는 소설의 끝에 별도의 장으로 삽입된다. 한아름의 죽음 뒤, 소설의 본편이 끝나고 등장하는 이야기는 한아름이 자신의 비극적인 탄생에 던지는 안타까운 물음이면서 더 큰 아픔의 시간을 견뎠을 부모의 삶을 사랑으로 되갚는 간절한 응답의 방식이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 앞에서 한아름이 써나간 그 이야기는 소설 속 현실의 갑갑하고 무력한 시간을 남다른 사랑과 상상의 힘으로 들어올린다. 한아름이 자신의 이야기에 부여한 ‘거대한 농담’의 어조는 비극적 정화(淨化)의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게 소설 속에서 한아름이 들려주는 ‘두근두근 그 여름’은 『두근두근 내 인생』의 전체 이야기 속에서 흘러나오지만, 그 안에서 전체 이야기를 확장한다. 이는 소설에서 이야기가 하는 일에 대한 각별한 질문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서도 ‘이야기’는 고통스러운 비밀을 나누게 되는 세 친구의 사연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고등학교 2학년 같은 학급의 세 인물 ‘안지우’ ‘오채운’ ‘김소리’는 모두 가족과 관련된 어두운 기억을 안고 있다. 동시에 세 아이는 바로 그 고통을 통해 서로를 알아보는데, 소설은 이 감응과 교류의 과정에 이야기 혹은 이야기의 형식이 개입하는 과정을 거듭 보여준다. “스스로 이야기를 짓는 아이”(11면, 이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로 자라난 지우는 인터넷 까페에 ‘일상툰’을 올리면서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지우가 3화에 걸쳐 연재하는 「내가 본 것」이라는 만화는 소설서사의 중심에 놓인다.
한편 소설 서두에서 소리가 전입생 채운을 의식하게 되는 장면은 꿈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제시된다. 세 학생은 학기 초 담임교사가 만든 ‘거짓말을 섞어 자신을 소개하는’ 자기소개 게임을 하게 되는데, 채운은 자기소개 과정에서 ‘돼지갈비를 싫어한다’는 말을 한다(이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관련된 채운의 비밀과 닿아 있다). 꿈속 장면이 전환되며 채운의 자리에 소리가 서게 되고, 소리는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본다’는 자신의 비밀을(소리의 특별한 능력은 마음의 소통과 관련해서라면, 우리의 앎을 넘어서는 미지의 신비로운 영역이 존재한다는 소설 전체의 믿음에 이어져 있다) 털어놓는다. 소리는 이 비밀에 웃지 않는 단 한명, 전입생 채운과 눈이 마주친다. 소설이 교실에서의 첫날, 비밀을 품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감응과 교류가 일어났으리라고 전제하지 않았다면, 이같은 꿈의 ‘이야기’는 가능하지 않았을 테다. 다시 말해 소리가 꾸는 꿈의 ‘이야기’는 실제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났을 수 있는 무의식적인 감응과 교류를 사후적으로 보증하는 방식으로 소설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소설 전체에서 마음의 소통과 관련된 이야기의 상호조력과 변형, 확장이 일어나게 될 방법을 암시한다.
소리의 꿈 장면이 보여주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의 소통에는 인과적인 논리와 설명을 넘어서는 직관적인 앎의 시간이 깃들 수밖에 없다면,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그런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작문 시간에 지우가 쓴 짧은 시에 소리가 반응을 보일 때를 떠올려보자. “지우가 남은 문장을 마저 읽고 자리에 앉자 멀리 대각선 앞자리에 나른하게 엎드려 있던 아이가 고개 돌려 지우를 봤다.”(86면) 마음을 찔러오는 어떤 말은 그렇게 급습하듯 다가온다.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85면)이라는 지우의 시에 감응한 소리가 로댕의 「대성당」을 참고해 그린, 눈보라 속 기도하는 사람의 그림이 며칠 뒤 지우에게 도착하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특별해진다. 이 삽화에는 지우의 짧은 시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상상하는 소리의 시간이, 이해와 응원의 마음을 그림 속 ‘이야기’로 담아내려 한 소리의 노력이 내포되어 있다. 그 숨겨진 시간 때문에 지우의 시는 지우의 마음을 보존한 채 다른 관점에서 해석되고, 지우가 의식하지 못하던 지점까지 되돌려받는다. 나중에 소리는 아파트 공사현장으로 떠난 지우의 반려 도마뱀 ‘용식’을 맡아 키우면서(소리는 인터넷 까페에 연재되던 만화 「용식 일기」의 오랜 애독자였는데, 그 만화의 작가가 지우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용식 일기」를 용식의 시점에서 그린 열두장의 달력을 지우에게 줄 선물로 구상한다. 자각적으로 진행된 “시점 바꾸기”(131면)는 마음의 감응과 소통이 창조적으로 변용되고 확장되는 과정을 한층 분명하게 보여준다. “겨울에는 용식이를 지우보다 크게 그려야지. (…) 그렇게 용식이 스스로 대성당이 되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막아주는 모습을 그려봐야지.”(133면)
‘시점 바꾸기’는 단순히 용식을 “의인화”(132면)하는 작업방식이 아니다. 소리는 용식이 지우를 지켜봐온 또다른 생명임을 일깨우고 있는데, 이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주제적 전언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채운의 반려견 ‘뭉치’, 지우와 소리 곁에 있는 도마뱀 용식은 세 아이에게 가족 이상의 존재이며, 마음의 소통에 그어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기준선과 위계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비인간’의 생명들과 맺는 특별한 친밀성의 관계는 이들이 만들어갈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부분적으로 예시(豫示)한다.
암투병 중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엄마의 묘소를 찾는 길에 소리가 어린 시절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대목이 있다. 그 대화에서 “네가 어른이 된 미래에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라는 엄마의 말에 소리는 “미래라는 말”을 가져도 되냐 묻는다(185면). 그러나 소리, 지우, 채운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 소망을 너무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스스로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 뒤 지우가 원하는 이야기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 “끝내 살아남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10면)다. 소설 서두에 나오는 동화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온통 어둠으로 덮인 밤하늘에서 ‘엄지’만큼의 빛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야기다. 그 빛은 묘소에서 세상을 떠난 엄마와 비밀 대화를 나눈 뒤 소리의 머리통에 찾아오는 햇볕처럼 아주 “먼 데서”(195면) 오는데, “먼 곳으로부터” 오는 “지지”를 소리는 깨닫지 못한다(196면). 전지적 시점에서 기술된 ‘지지(支持)’라는 ‘이상한’(작가가 소설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표현은 정확히 이 소설이 세 아이에게 하고 있는 일, 하려고 하는 일을 거듭 환기한다. 적어도 지우, 소리, 채운은 이 소설 안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의 노동, 감응과 이해의 시간만큼 이미 어둠을 조금은 지워내고 있다고 소설은 말해주는 듯하다. 채운이 뭉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상에 우리 둘뿐이야. 알고 있지?”라고 속삭이고(30면), 지우가 용식의 커다란 눈을 보며 “세상에 너랑 나랑 둘뿐이야. (…) 알고 있니?”라고 말할 때(46면), 소설은 이 아이들이 ‘현재’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의 영토를 가진 빛의 ‘미래’를 이미 살고 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듯하다. 소설에서 뭉치와 용식은 이야기의 보조적 장치가 아니라, 아이들이 현실의 어둠 속에서 감지하는 미래의 빛으로 강력하게 존재한다. 뭉치와 용식은 너무 이르다 싶게 아이들 곁을 떠난다. 아이들의 슬픔은 크지만, 두 생명이 이들에게 나누어준 행복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소설서사의 핵심이라 할 채운과 지우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채운의 집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이웃에 살던 지우는 그날 연립주택 옥상에서 경찰차와 구급차 도착 이후 채운 모자를 지켜본 것으로 되어 있다. 사건의 극히 일부만을 목격한 지우는 어떻게 그날 채운의 집 내부에서 일어난 진실을 바로 알아채고 그 이야기를 「내가 본 것」이라는 인터넷 연재만화로 그릴 수 있었을까(만화에서는 당연히 인물과 상황이 변형되고 재구성되며, 진실의 포착은 이러한 만화 창작과정에서 지우 자신의 마음에 대한 재발견과 함께 이루어졌을 수 있다). 우리는 지우에게도 친부와 관련된 고통스럽고 잔혹한 가족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지우가 우연히 목도한 사건의 진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면, 채운 모자가 마지막으로 비밀을 나누는 모습에서, 그리고 채운의 눈동자에서 자신과 유사한 고통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고통의 감응이 일어나는 이와 같은 신비로운 영역의 존재는 이 소설이 시종 우리에게 설득해온 것이기도 하다. 지우는 그날의 사태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이해, 느낌과 상상을 만화 「내가 본 것」의 최종화에서 다음과 같이 ‘같지만 조금은 다른’ 이야기로 채운에게 돌려준다.
그곳에 멍하니 선 태오 곁으로 골든리트리버 한 마리가 다가와 발밑에 멈춰 선다. 미동도 없는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동자가 슬픔에 가득차 있다. 태오의 손을 핥는 골든리트리버. 이준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경찰차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이윽고 이준의 손에 들린 송곳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경광등 불빛이 아득히 멀어지며 점점 작아진다.(212면)
경찰차가 동네 골목에 도착한 그 어수선한 순간과 관련해서라면, 뭉치의 존재는 채운의 기억에 없다(채운은 사건 직후 집 안에서 뭉치가 자신의 피 묻은 손등을 핥아준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만화 속 태오(채운)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동자’가 그 순간, 거기 있었다. 소리가 시도했던 것처럼 ‘시점 바꾸기’가 만화를 그리는 지우의 시점과 마음을 경유하여 결정적인 비밀의 순간을 연 것이다(소리 역시 「내가 본 것」의 애독자다. 채운에게 뭉치를 찾아준 날, 소리는 어떤 만화를 보며 울고 있다. 채운은 슬쩍 넘겨본 소리의 태블릿 피씨에서 「내가 본 것」이라는 만화 제목을 확인한다. 세 아이는 이렇게 연결된다).
슬픔에 가득 찬 반려견의 커다란 눈동자 하나가 ‘이야기의 끝’을 바꾸고 있다. 태오(채운)의 ‘마음의 지옥’도, 누군가를 찌르려고 했던 이준(지우)의 어두운 마음도 조금 옅어지는 순간이다. 채운의 이야기가 지우의 시점을 통해 만화로 변형되고, 다시 지우의 이야기 속에서 뭉치의 시선이 발견되는 구도.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뭉치의 시선이 채운의 이야기를 바꾼다.
만화에서 골든리트리버는 하나의 시점을 부여받지 못한 채 ‘눈동자/시선’으로 발견되고 있는데, 그렇기에 손쉬운 ‘의인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미미한 시선의 조력이 만화 속 태오와 이준의 비극적 이야기를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동시에 아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낼 새로운 시선/시점의 탄생이 얼마나 절실한 요청인지 알려준다. 어떤 생명의 눈동자/시선이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의 확인만으로도 「내가 본 것」의 이야기는 변화한다. 지우의 만화는 그 시선을 하나의 생동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소리의 ‘용식 달력’이 그랬던 것처럼, 지우의 만화에서도 ‘시점 바꾸기’는 마음의 경계를 넓히는 일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3. 잠재된 미래
소설에는 채운의 큰 비밀 말고도 세 아이의 어긋나고 겹치는 시간과 관련된 작은 비밀들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가령 지우를 그림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유튜브 계정주 ‘선선(線線)’은 영상에서 얼굴 없이 자신의 손만 보여준다. ‘선은 대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라며 ‘좋은 직선을 그려보자’고 하는 이 ‘랜선 선생’의 말은 지우가 그림을 그리는 지침이 되는데, 똑같은 말이 용식을 스케치하던 소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우리는 잠시 소리와 ‘랜선 선생’을 동일시하게 된다. 소리 역시 그 유튜브 계정의 구독자였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두 사람을 하나로 겹쳐 보게 되는 우리의 마음은 소설이 정교하게 구축해놓은 서사의 여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읽는 이에게도 비밀과 관련된 이야기의 연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두근두근 내 인생』의 비극적 이야기가 ‘농담’과 ‘익살’에 의해 얼마간의 가벼움을 얻는 데 비해,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시종 무겁고 심각하다. 아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고통의 상호감응 그리고 마음의 소통은 뭉치, 용식과 더불어 아름답게 확장되지만, 그 과정에서 제기되는 뾰족한 윤리적 심문은 편한 독서에 제동을 건다. 세 아이가 서로간 감응과 소통에 특별한 능력을 보이게 되는 전개는 그들이 감내하고 있는, 쉽게 달래지기 힘든 고통의 무게를 역설한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소리의 상처도 만만찮지만,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문제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지우와 채운의 경우는 결국 ‘칼’과 ‘송곳’으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적의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 폭력적 아버지들이 존재하는 세상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왔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이야기는 소설 밖으로 넘어오게 되고, 거기서 소설과는 다른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묻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작’ 때문에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한 소리와 ‘끝’이 있어서 이야기가 좋다고 말한 지우를 기억한다. ‘끝이 없는 암담함’과 ‘시작조차 안 되는 허무함’은 같은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무언가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의 다른 가능성. 그러니까 소리가 가지고 싶다고 한 ‘미래’라는 말에 대해 소설 밖의 현실은 어떤 응답을, 어떤 이야기를 내어줄 수 있을까.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그 곤혹스러움을 향해 계속 질문을 던진다.
소설의 이야기는 소리로부터 용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지우가 급하게 공사장 숙소를 떠나 서울로 향하는 ‘현재’로 끝난다. 이 끝은 숙소를 나온 지우가 오토바이 배달기사와 부딪치는 사고로 파출소에서 ‘보호자’인 ‘선호 아저씨’(그는 연인이었던 지우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지우에게 최선을 다한다. 소설의 마지막, 지우와 선호 아저씨의 동행은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소설의 서두와 맞물려 있다. 일종의 원환적 형식이며, 우리는 세 아이의 이야기를 과거라는 액자 안에서 읽어온 셈이다. 그 서두에서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를 꿈꾸었던 지우는 소설의 끝에서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왔다”(235면)는 시를 떠올린다. 「내가 본 것」에서 지우가 최종적으로 한 일이기도 하다. 시를 떠올리기 직전, 지우의 휴대전화에 ‘빛’이 들어온다. 하나는 한번도 말을 섞어본 적 없는 채운에게서 온 문자고, 또 하나는 소리에게서 온 것이다. 소설은 컴컴한 밤하늘에 ‘엄지’로 지워낸 작은 빛이 당도했음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아이들은 뭉치, 용식과 함께 서로의 눈동자에 “아주 적은 양의 흰 물감”(196면)을 빛으로 새겨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지우의 언어를 통해 그 빛의 이야기를 보충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233면)
그런데 빛과 관련된 소설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소설이 ‘허구’(fiction) 혹은 ‘이야기 짓기’의 방식으로 실제 현실과 맺는 관계, 그러니까 일종의 ‘(선의의) 거짓말’ 만들기에 우리 역시 동의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의 제목이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는 여러차례 ‘거짓말’이라는 표현과 그와 관련된 삽화가 나온다. 다섯문장의 자기소개 속에 반드시 거짓말이 하나 들어가도록 한 담임교사의 규칙은 소설에서 허구가 맡고 있는 역할을 환기하는 측면도 있다. 소리가 ‘용식 달력’ 그리기에서 하고 있는 ‘시점 바꾸기’나 지우가 「내가 본 것」을 그릴 때 해낸 이야기의 ‘변형’은 좀더 맞춤하게 서사예술에서 일어나는 ‘허구-거짓말’의 기능을 암시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말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과의 ‘차이’만큼 언제든 ‘거짓말’이기도 하다.
채운 모자는 그날 밤에 일어난 일과 다른 판본의 이야기, ‘거짓’을 만들고 그것을 ‘비밀’의 형식으로 봉인한다. 그 비밀은 도덕적·윤리적으로 위태롭고, 당자들에게 면책될 수 없는 죄의식과 함께 큰 고통을 안긴다. 여기에는 댓가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 댓가를 감수한 자리에서 ‘거짓말’이 만든 차이가 또다른 이야기의 시작으로, 소설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끝을 향해 뻗어 있는 지점이 있다. 채운의 엄마가 교도소에서 아들에게 쓰는 편지. “이제 누구의 자식도 되지 마, 채운아. 그게 설사 너와 같은 지옥에 있던 상대라 해도. (…)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182면). 무섭고도 비상(非常)한 말이다. 그러나 편지의 언어는 모자에게 닥친 그날 밤의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만 발화되는 것으로, 세상을 향한 일반적인 호소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엄마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다는 결의,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아들의 삶이 진행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특별한 울림을 얻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시에 이 소설의 비극적이고 불행한 이야기들의 근원에 ‘폭력적 가부장’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 엄마는 자신을 면책의 자리에 두지 않으면서 어떤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편지의 말미에 쓴다.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같은 면) 채운을 가족의 굴레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답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편지의 마지막 말들은 적어도 이 출구가 ‘온 힘을 다해 찾아낸 선택지’이고, 자신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속이지 않으려는 정직한 마음의 발로임을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엄마는 그날 밤의 이야기에서 채운에게도 숨길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비밀을 밝히는데, 진실은 무결(無缺)한 상태로, 그리고 완결(完結)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알려준다.
그러나 엄마의 편지는 결국 ‘기도’이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말에 채운이 어떤 ‘접속사’를 찾아내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세 아이가 세상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뭉치, 용식과 함께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메워가려는 것처럼, 채운 엄마의 기도는 여기서 또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에 대응된다. 소설의 마지막, 지우의 휴대전화에 빛과 함께 도착한 채운과 소리의 문자메시지는 앞으로 이들 사이에 일어날 더 큰 감응과 소통을 기대하게 한다. 그것은 믿음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믿음과 약속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차이의 영역을 포함한다. 지우의 말대로(“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232면) 소설은 어떤 믿음도, 어떤 약속도 보장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약속의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때로는 비밀스럽게 숨어 있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고 상상하게 해줄 수는 있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진실을 믿듯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서 ‘허구-거짓말’을 믿는다. 김애란의 소설은 ‘이야기’가 하는 일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그 믿음을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마음과 마음을 이으며 비밀의 이야기에 입장할 수 있는 소설의 특권은 답과 결론이 아니라, 약속으로서의 진실을 향한 믿음과 포개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