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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해자 金海慈
1961년 전남 신안 출생. 1998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해피랜드』 『니들의 시간』 등이 있음.
haija21@naver.com
공기의 기분
*
앞에 가는 사람의 등짝에 시시각각
아랍어 같은 알파벳이 새겨지는 정오를 지나왔어
덜덜 떨다 멈춘 에어컨디셔너
기사는 어제도 오지 않았어 그는 망가진 공기를 고치다
실외에서 쓰러졌어 숨이 헐떡거리는 실외기에서
아직도 탄 냄새가 나
잘린 밑동이 의자가 된 버드나무가든,
영안실엔 눈물이 마른 향불을 막걸리처럼 들이켜는 노인들뿐
끈적한 콜타르가 신발 바닥을 움켜잡는 오후를 지나
나비정원에 도착했어
나비라 불리던 나그네비둘기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먹었다는 만나, 사람이 10억이었을 때 50억이 넘었던 나비떼는 거대한 눈폭풍, 하늘에 대고 총질만 하면 됐어. 화약과 피 냄새 진동하는 바닥에 층층이 살 쌓이는 소리, 몽둥이질 소리. 땅에 닿기도 전에 숨이 멈추고 어떤 나비는 퍼덕이며 떨며 날갯짓을 멈추지 않아. 목숨을 다해. 마지막 나비는 미국 영부인 이름을 딴 마사, 1914년 9월 1일 오후 1시 동물원에서 숨진 마사는 단 하루도 야생을 살아보지 못했대
나비정원에 나비가 없어 여름과 겨울이 나란히 걸린
귤나무와 수국의 컨디션은 누가 조절하나 냄비 속에서 볶아지는
원두의 감정을 흠향하려는 순간 맞은편에 입간판이 세워지고
수도 긴급 복구가 걸리고
전기 긴급 복구가 올라가고 충돌 방지 팻말이 붙여진 다음
거리는 출입통제구역이 되었어
강물이 끓는 병풍의 뒷면을 보았니
거품에 둥둥 떠다니는 도시
공기가 유령들을 인터뷰하고
피 묻은 개와 발 많은 거미들이 들어갈 발목이 없는
신발들을 끌고 가는 동안에도
양호한 주식의 날씨
냄비 속 뜨거운 경제에게서 열을 빼앗아 리프레시하는 에어컨처럼, 별을 단 군복과 융단을 밟고 걸어가는 양복들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다시 발열해. 국경선처럼 군사분계선처럼. 공기를 날카롭게 찢으며 날아가는 무인기가 닿는 곳마다 증발해. 조각나버린 미얀마처럼 우끄라이나처럼, 국경을 건너가는 보트 속에 밀가루 포대처럼 말을 잃은 피플, 개줄에 묶여 쇠창살 속으로 등 떠밀려가는 이민자들 위로 융단폭격이 쏟아져
멀리서 보면 잎사귀 잘라 짊어지고 가는 잎꾼개미떼 같지
부글부글 끓는 거품이 녹차라떼처럼 보여 강 건너에서 보면
녹조가 점령한 강이 장인이 짠 카펫처럼 보이듯
꿈인가봐
잠시 눈 감으면 프라이팬 속 삼겹살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려
돼지 코골이 소리도 명상음악이 될 수 있대
그러나 아직은 명상에 빠지지는 말자 서둘러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어느날 급보보다 먼저 잠수되기 전에
플라스틱 사리보다 물렁한 달팽이와 고양이의 시간을 돌려줘
*
에어컨 기사는 아직도 오지 않고
혀끝에 엉겅퀴꽃이 피고 있어 그사이
망사리에 보말이 담긴 손수레는 갯가에 혼자 남겨지고
일곱물 뜨거운 바다에 든 해녀 할망은 끝내 나오지 않았어
공기는 밤에도 잠들지 않아
하룻밤 사이에 번개가 오백번 치고
벼락왓과 물앞이물을 건너온 천둥이 지붕 위를 굴러다녀
번개 빛을 셀 때마다 안도감을 느껴
폭탄 소리를 들으면 안도한다는 팔레스타인 사람처럼
이미 폭격된 자들은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콰광 쾅 지지직
급발진하듯 날카로운 모서리가 부딪칠 때마다 허밍으로 응답하던 하늘을 생각해
수만 수십만 나비가 펄떡이는 화폭이었던
깃털 속의 공기
홍해를 건너온 공기가 알알이 울부짖는 액정화면을 열어보았니
십자가를 입은 제사장들이 입을 열 때마다 고압선 전류가 흘러
모든 성지는 전쟁터
예루살렘과 헤브론과 갈릴리에 이어 레바논의 타이레까지
검은 연기가 북상하고 있어 장마전선처럼
누군가의 시체를 신고 다니는 꿈을 꾸었어
지구를 인터뷰하듯 번개가 얼굴을 비춰줄 때마다 털가죽은 십자선을 따라 흩어지고
칼끝이 지나간 틈새마다 본드 냄새가 났어
퀵서비스를 등에 붙인 검은 오토바이가 상복처럼 보일 때가 있어
허공에 빌딩을 쌓는 쌍둥이 토네이도는 나동그라진 주황색 조끼들로 쌓은 탑
빨리 달릴수록 회오리는 더 높이 올라가
내 등에 업혀
바구니에 영국 신사를 담아 등에 지고
오르막을 오르던 벵골 여인처럼 높이높이 올려다줄게
보풀이 풀린 스웨터 끝에서 한없이 풀려나오는
실오라기 같은 시간을 상속받은 기분이 어때
그런데 나비에게 물어는 봤니 뼈가 녹고
살점이 덴 공기의 기분
산담 교실
밤새 바다를 수놓던 집어등이 흐릿해지고
수평선 기—인 빨랫줄에 걸려 있던 배들이 포구로 돌아오며
학교가 감았던 눈을 뜬다
돌이 쌓인 자리마다 제단
갯가 사시는 돈지할망께 제를 올리는 가파도 짓단 건너편
산담 낮게 두른 둥근 교실이다
용왕님 여럿 거느리고 일만사천 해녀와 함께
바당을 건너오는 바람이 선생이고
강아지풀과 억새 출렁이는 짓밭이 운동장이다
거사 조공과 처사 이공이 노를 젓는다
대와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뗏목 타고 방어와 멜을 잡는다
테우 출렁거리는 소리로 학교가 시끌벅적하다
자리돔 잡아 모슬포까지 두세시간 노 저어
쌀과 반찬으로 바꿔 왔신디……
가운뎃줄 학생 강공과 김공이 넓은 그물을 펼친다
교실이 갯내로 가득하다
먹빛 몸뻬 사이에 낀 손수건만 한 푸른 하늘에
억새가 주문 같은 말들을 받아적는다 마르바리 수바리 요수바리1
억센 바람에 반나마 빠진 깃털펜이다
벼슬 근처에 안 갔어도 유인(孺人)
이씨와 나씨 고씨는 맨 앞줄에 반듯하게 서서
펄떡이는 은빛 글자를 읽는다
넙개를 넘어온 바람이 학생들 머리를 쓰다듬는다
참 장하다고 오늘 하루도 공부 잘했다고
소라마다 별 같은 뿔 몇개 달아주신다
―
- 제주 남쪽 가파도에서 고기 잡는 방법이나 배를 일컫는 말로서, 혈혈단신 통나무배 한척으로 조업하던 마르바리에서 두척의 배가 합심하는 수바리와 요수바리 덕분에 어민들이 멸치와 자리돔을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