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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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徐潤厚

1990년 전북 정읍 출생. 2009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등이 있음.

syhcompany@naver.com

 

 

 

후르츠산도

 

 

으깨진 후였다

향기가 남아 있기로 한 일은

 

크림은 많은 것을 감추려고 부풀어 오르다가

아무것도 없는 신체를 가지게 된다

구겨질 수 있는 정도까지가 마지막 소회라는 듯이

 

텅 빈 눈동자로 우는 법을 배웠다

마른 붓을 종이 위에 짓눌러

끝까지 남아 있던 색을 확인하는 것

 

알록달록한 건 슬픔이 신선해서가 아니라

생활을 위장해온 순서였으니까

잼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과일을 밀봉했었는지

 

깨진 종이를 주워 반으로 갈라 나눠 가진다

포개어질 사이가 되려고

시간의 덩굴 속 남몰래 기르던

각자의 과일을 그려넣는다

길든 적 없는 껍질 같은 손을 모아

 

끈적임으로라도 붙잡고 싶었는지 모른다

차가워서 먹기 좋았던 표정들은 벌써

우리 얼굴을 떠나고 있었던가

 

마른 식빵처럼 푸석한 사람들과 함께

무너지지 않으려 모서리를 부여잡으면서

서로의 눈물을 열심히 뱉어주면서

흐르던 과즙을 신중히 핥으면서

 

눈물을 벗어나 남겨진 자국

이것은 혼자서 그려온 투명한 과일이지

알려주고 싶은 맛이 있을 때는

모두가 화가가 되어 자신의 얼굴을 그린다

 

창백한 형광등이 밝히는

모형 케이크의 반짝임을 모른 체한다

엄선된 슬픔의 진열장을 지나면

느닷없이 갈증은 찾아오고

 

크림이 남아 있어서

빈 그릇을 치울 수가 없다

 

 

 

작년 이맘때 무슨 옷을 입었었는지

 

 

엎드린 사람의 찡그림 속에 내가 입었던 옷이 걸려 있을 텐데

 

의자 등받이에 외투를 걸쳐두고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외투를 지키느라 몇 계절 흘려보냈고

창문에 일그러진 물방울이 모두 얼룩으로 만나던 날

그것을 둘러 입고 바깥으로 나섰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어 거울 앞에 섰을 땐

아버지 얼굴이 보였다

 

이만큼 지켰으니 내 것이라고 해도 될까

 

움츠린 어깨를 덮어주는 넉넉한 품에

막 탈락한 보풀처럼 떨어져나와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엄마의 반영구 눈썹도 희미해지고

쓸쓸하지 않은 구석이 없어 매일 걸레로 바닥을 훔치는 동안에도 옷장엔 내가 모르는 옷이 너무 많았다

작아지거나 커지지도 않은 채

옷으로 계속 나를 덮어주는 일을 멈출 수 없다니

 

저 자리에 저런 나무가 있었던가

해마다 창문에게 묻는다

 

돌려줄 대답이 남은 삶은 좋은 게 아닌가

심부름꾼처럼 계속 움직일 테니까

풍경을 끊임없이 휘저을 테니까

낙엽을 밟고 바람도 이고 눈송이도 털어낸 자리에는

반바지를 입고 내가 도착해 있다

 

담요를 찾으러 막 떠났을 땐

세상에 날려 보낸 솜털 같은 시간을 압착해

둥근 공을 만드는 가정들

쏟아져내리는 구슬 사이로 작아진 나를 셔츠 앞주머니나 건빵바지 주머니에 넣어두고

긴 낮잠에 빠지게 되었지

가지고 있던 담요를 모두 잃어버리려고

 

외투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어디에서 보온되는지

따뜻한 바지 오고 있는지

공원 벤치에 앉아 움직이는 창문이 되어 입김을 나른다

올 사람이 있다는 듯 구석에 앉아

안 보이는 옆자리를 만들면

이 등받이엔 줄을 서지 않아도 돼

 

외투 옷깃에 묻은 도깨비풀과 함께

잔디를 넘어서는 공들을 본다

튀어오를 때는 주인이 없는 법이어서

 

벤치 아래엔 지켜야 할 것들이 떨어져 있다

내 그림자를 덮고서

추위를 기꺼이 기다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