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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유담 金裕潭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탬버린』 『돌보는 마음』, 장편소설 『이완의 자세』 『커튼콜은 사양할게요』 등이 있음.
neverend1130@hanmail.net
같은 아이
그날 아이의 킥보드는 중앙공원 놀이터 벤치 옆에 밤늦은 시각까지 세워져 있었다. 아이는 오후 3시 30분경 킥보드를 타고 공원을 가로질러 영어학원에 가던 길에 놀이터에서 같은 반 친구들을 발견하고 무리에 합류했다. 공원 CCTV에는 아이가 킥보드를 세워두고 놀이터로 달려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아이가 놀이터를 떠난 시간은 오후 4시 10분이었다. 그뒤로 킥보드는 한참 같은 자리를 지켰다. 밤 9시경 공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덩치 큰 남자가 벤치에 앉아 한시간 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장면, 그가 벤치에서 일어나 킥보드를 한 손에 끌고 공원을 빠져나가는 모습도 같은 CCTV에 고스란히 녹화됐다.
아이가 4시에 시작하는 영어 클래스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수민은 회의실에서 빠져나와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월간 실적을 공유하는 회의 자리였다. 아이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호통에 당장 학원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준영이, 도착했니? 오늘 단어 테스트 보는 날인데 지각하면 어떡해?
수민은 자리로 돌아와 핸드폰을 테이블 아래에 숨긴 채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킥보드를 잃어버렸어요. 공원 놀이터에 두고 온 거 같아요. 제가 지금 바로 찾아올게요.
아이는 학원에 도착한 다음에야 킥보드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수민은 조용히 화를 가라앉히며 답장을 쳤다.
—또 잃어버렸다고? 이번에는 다시 안 사줄 거라고 했던 거 기억하지? 알겠으니까 우선 들어가서 수업부터 들어.
—엄마, 죄송해요. 킥보드 금방 찾아올 수 있어요. 제가 꼭 찾을게요.
아이는 덜렁거리고 부주의한 성격으로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실내화 가방이나 외투를 잃어버리고도 어디에 두고 왔는지조차 기억을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킥보드를 잃어버린 일도 이번이 두번째였다. S동으로 이사 오기 전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도 준영은 킥보드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수민은 준영에게 본인의 잘못으로 분실한 물건은 그 무엇도 다시 사주지 않겠다고 일러두었지만, 이 동네의 학원가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킥보드가 필수라는 주변 엄마들의 조언에 어쩔 수 없이 마이크로 킥보드 최신 모델을 마련해줬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준영 또래의 아이들 대부분이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고 단지 옆 큰길가의 학원을 오갔다. 학원가에는 영어, 수학, 논술, 예체능 등 온갖 종류의 학원이 밀집해 있었고, 이 동네 아이들은 학원을 쳇바퀴처럼 돌다가 어두컴컴해질 즈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올해 봄, 수민 부부가 원래 살던 구도심의 아파트를 팔고 추가로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이 동네로 이사 온 것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아이에게 좀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어서였다. 본가 근처에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느라 어머니에게 육아를 일임했던 수민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점점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는 게 신경 쓰였다. 아이는 공부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고, 퇴근 후 앉혀놓고 억지로라도 영어와 수학 학습지를 풀게 하려고 하면 “친구들은 안 하는데 나만 왜 이렇게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너그러운 외할머니가 주 양육자 역할을 하면서 버릇이 나빠진 탓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를 주의 깊게 살펴볼수록 문제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보러 다니는 동안 부동산 중개인은 S동 아이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순하고 학업성취도가 높기로 유명하다며, 전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라고 여러번 강조했다. 수민은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은 건 아니었지만 S동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도로는 깔끔하게 정비돼 있고, 거리를 오가는 아이들의 옷차림이 단정하고 표정이 밝았다. 이 동네의 높은 집값과 사교육비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준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마음이었다.
학원 상가건물과 중앙공원 사이에는 2차선 도로가 있었다. 학원에서 나온 아이는 바로 길을 건너지 못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는 보행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자마자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앞만 보고 횡단보도를 전력질주하던 아이가 거세게 달려오는 25인승 노란 버스에 부딪혀 튕겨나가는 사고 순간은 도로에 설치된 CCTV에 그대로 기록됐다. 아이를 친 H어학원 셔틀버스는 낮에 잠깐 구도심에 들렀다가 저녁 타임 학생들을 태우려고 S동으로 막 들어온 참이었다. 버스기사는 주행 신호등이 노란불 상태에서 깜빡거리는 걸 보고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가속페달을 더 세게 밟았다. 보행 신호가 켜지기 전에 교차로를 빨리 지나가려 했다고, 그게 이렇게 큰 사고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며 그는 경찰 조사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가 사고 순간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엄마가 보고 싶지는 않았는지, 수민은 묻고 싶어도 물어볼 수 없었다. 아이는 상하지 골절, 외상으로 인한 다발성장기부전 및 뇌부종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나흘째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 중이었다. 수민은 오전 10시 하루 한번 허락된 면회시간에만 아이를 볼 수 있었다. 회사에 가족돌봄휴직을 신청하고 하루 종일 병원에 머물렀지만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었다. 수민은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서 손을 모으고 앉아 간절하게 기도했다. 아이를 살려달라고, 세상의 모든 신과 돌아가신 조상에게 빌었다. 아이에게도 용서를 빌었다. 아이와의 마지막 통화가 화내고 다그치는 내용이었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엄마가 너에게 가혹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수없이 사과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수민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아이의 사진을 하루 종일 들여다봤다. 그간 주고받은 메시지도 샅샅이 다시 읽었다.
—어디니? 숙제했니?
—그만 놀고 집에 가서 전화해.
다그치는 엄마의 메시지에도 준영은 늘 다정하게 답신을 보냈다.
—네, 엄마. 근데 저 조금만 더 놀다 들어가면 안 될까요? 사랑해요~
—엄마 수학학원 월말 테스트 때 또 계산 실수했어요. 실수해서 죄송해요.
—엄마 제가 공부를 못해서 죄송해요. 열심히 해서 내년에는 H어학원 꼭 들어갈게요. 엄마 사랑해요.
학구열이 높은 S동으로 이사 온 뒤로 아이는 자신이 또래 친구들보다 공부가 뒤처진다고 느끼는 눈치였다. 수민은 그런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이제야 자기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 건 다행이라 여겼다.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니니 지금부터라도 공부하는 분위기에 젖어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되도록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H어학원은 까다로운 입학테스트를 통과한 상위권 아이들만 다닐 수 있는 영어학원으로 이 동네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아이는 올해 상반기, 하반기 두번에 걸쳐 H어학원 입학 테스트를 치렀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수민은 속상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지금 다니는 J영어학원에서 열심히 해서 다음번에는 꼭 H어학원으로 ‘업그레이드’하자고 아이에게 속삭였다. 너도 열심히 하면 저 버스에 탈 수 있을 거라고 했던 H어학원 셔틀버스에 아이가 치여 사경을 헤매게 될 줄은 몰랐다.
—엄마, 죄송해요. 킥보드 금방 찾아올 수 있어요. 제가 꼭 찾을게요.
아이와 주고받은 메시지는 여기에서 멈춰 있었다. 수민은 메시지 창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답 메시지를 쳤다.
—아니야, 괜찮아. 엄마는 준영이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 준영아 사랑해.
답신을 보내고 수민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한참 울었다. 아이에게 보낸 메시지 옆에 숫자 1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훨씬 전에 해줬어야 하는 이야기를 이제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죄송해야 할 사람은 나라고, 사랑한다는 말도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수민은 아이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아이에게 매몰차게 대한 기억만 계속 떠올랐다. S동으로 이사 온 직후 수민은 아이가 새 학교와 동네에 적응하는 걸 봐주려고 3개월간 육아휴직을 했다. 아이와 여러 학원에 레벨테스트를 보러 다니며 수준에 맞는 학원을 찾았고, 요일별로 촘촘하게 학원 스케줄을 짰다. 복직 후 엄마 없이도 시간 맞춰 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수민은 준영을 따라다니면서 일정을 점검하고 잔소리를 했다. 아이는 학원을 갑자기 여러군데 다니게 돼 고단해하면서도 엄마와 시간을 많이 보내서 좋다고 웃었다. 학원 끝나고 마중 나온 엄마와 떡볶이를 사 먹고 공원을 산책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아이에게, 킥보드 한바퀴만 더 타고 집에 들어가면 안 되냐고 조르던 아이에게 빨리 집에 가서 오늘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라고 재촉이나 하던 못된 엄마였다.
수민은 핸드폰 사진첩을 하나하나 다시 넘겨봤다. 아이와 공원을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여름밤, 해가 진 공원에서 킥보드를 타는 아이의 동영상도 여러번 돌려봤다. 풀벌레 소리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담긴 영상이었다. 준영이 나아서 다시 공원에 함께 갈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킥보드를 타고 달리는 준영을 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수민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준영의 영상을 반복해서 돌려보다가, 불현듯 킥보드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킥보드를 찾으면 준영이 기뻐할지도 모르겠다고, 준영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수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찰에 킥보드 분실신고를 한 지 일주일 만에 A시에 있는 경찰서에서 킥보드를 훔쳐간 피의자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피의자는 카자흐스탄 국적의 이주노동자로, 인근의 물류단지에서 면접을 본 후 S동 중앙공원에 들렀다가 거주지인 A시로 돌아갔다. 그가 공원 벤치 옆에 놓인 보라색 킥보드를 한 손에 든 채 버스와 지하철, 마을버스를 번갈아 타며 집에 돌아가는 모습은 경로마다 설치된 CCTV에 낱낱이 기록돼 있었다. 피의자가 모든 범행을 시인한 상태라고 경찰은 덧붙였다.
“혹시 합의할 의사가 있으신가요? 합의를 안 하면 이 사람 강제추방될 수도 있는 모양이에요. 전에도 자잘한 절도 혐의가 있어서……”
기껏해야 동네 아이들의 소행일 거라고 짐작했던 수민은 킥보드가 대중교통으로 두시간이 넘는 거리의 A시까지 갔다는 사실에 황당해하며 경찰에게 되물었다.
“킥보드는 찾았나요? 제가 원하는 건 킥보드를 찾는 거예요.”
“네, 그렇지 않아도 저희도 그걸 좀 알아봤는데, 물건 찾는 건 힘들겠던데요.”
경찰은 피의자가 합의를 원한다며 수민의 연락처를 알려줘도 되는지 물었다.
이튿날 아침, 수민은 남편과 함께 주치의를 면담했다. 준영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는 소식을 주치의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했다. 열흘 넘게 썼던 뇌부종 치료제에도 별 차도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호흡 기능이 저하되어 기도삽관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듣고 수민은 또 한번 눈물을 쏟았다.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의사의 말에 남편도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남편이 회사로 출근한 뒤 수민은 병원에 남아 소아중환자실 면회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하루에 한번 아이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자마자 수민은 빠르게 아이 곁으로 달려갔다. 입에 튜브를 문 채 가쁘게 숨을 쉬고 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말을 걸었다.
“호흡기 달아서 답답하지? 우리 준영이 잘 버텨줘서 고마워.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참, 준영아 엄마가 킥보드 찾았어. 아직 완전 찾은 건 아닌데 엄마가 곧 찾아올 거야. 준영이 킥보드 훔쳐간 나쁜 아저씨를 경찰에 신고해서 잡았거든. 엄마가 나쁜 아저씨도 혼내주고 킥보드도 찾아올게. 준영이 얼른 나아서 킥보드 실컷 타는 거야.”
그 순간 준영의 볼이 잠깐 실룩였다. 수민은 다급한 목소리로 간호사를 불렀다.
“선생님, 제가 말하니까 준영이가 방금 입가에 살짝 미소를 보였어요! 준영이 지금 제 말 듣고 있는 걸까요? 제 말 알아들은 것 같은데요.”
간절한 목소리로 묻자 간호사는 대답 대신 엷게 웃으며 수민의 손을 한번 잡아주었다.
수민은 면회를 마치고 나와 남편에게 방금 전 중환자실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준영이 숨 쉬는 게 한결 편해 보였어. 내 말도 다 알아들었다니까. 내가 보기에 그렇게까지 나쁜 상태는 아니야. 우리 준영이 잘 이겨낼 거야.
남편도 짧게 답을 보내왔다.
—그래, 고생했어. 당신도 집에 가서 좀 쉬어.
수민은 차에 시동을 걸면서 남편의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따로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A시로 설정한 후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병원에서 A시까지는 차로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A시의 초입에 이르러 수민은 오전에 통화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10분 내로 약속장소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말하자 남자는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며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남자의 이름은 아불, 한국에 온 지는 4년째라고 했다. 어눌한 한국어로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담당 수사관에게 연락처를 전달받았다며, 자신이 수민에게 연락하도록 허락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수민 입장에서 그의 연락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저 준영의 킥보드를 돌려받고 싶을 뿐이었다.
수민은 아불이 알려준 대로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약속장소인 행복복지센터 앞으로 걸어갔다. 관공서 건물 입구에 덩치 큰 매부리코의 외국인 남성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빈손으로 나온 그를 보며 수민은 킥보드는 어디 있느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아불은 죄송하다고 말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아 새로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라고, 한달 안에 재취업을 하지 못하면 취업비자를 연장하지 못한다고, 이런 상황에서 형사처벌까지 받게 된다면 강제추방될지도 모른다며 자신의 사정을 봐달라는 아불이 수민은 뻔뻔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지금 그런 이야기 듣자고 여기까지 운전해서 온 줄 알아요? 그러게 왜 남의 킥보드를 훔쳐가요?”
“죄송합니다. 버린 물건이라고, 잘못 알았어요. 주인 있는 거 몰랐어요.”
버리다니, 그 킥보드를 찾으려다가 내 아들이 어떻게 됐는데…… 수민은 욕지거리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고 차갑게 말했다.
“찾아내요. 합의나 선처는 그다음 문제고 우선 킥보드부터 돌려달라고요.”
2층 아이들. 아불은 그 아이들을 그렇게 불렀다. 2층 아이들이 킥보드를 가지고 있다고, 예전부터 킥보드를 너무 갖고 싶어해서 선물로 줬다고 변명하듯 말했다. 수민이 그럼 그 아이들에게 훔친 물건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돌려달라고 하면 될 거 아니냐고 말하자 아불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불이 골목 끝에 있는 적갈색 건물을 가리키며 저기가 자기 집이라고 말했다. 골목에 일렬로 즐비한 다가구, 다세대주택 중에서도 가장 노후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그 3층짜리 다가구주택의 반지하가 아불의 주소지였다. 그리고 같은 건물 2층에 그 아이들이 살았다. 수민은 아불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모서리가 군데군데 깨져서 먼지가 떨어지는 계단을 올라 2층 푸른색 철문 앞에 섰다. 앞장선 아불이 초인종을 눌렀고, 아무런 기척이 없자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아직 안 왔나, 올 시간 지났는데……”
아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밖에 나가서 기다릴까요?”
수민이 나가자고 손짓하자 아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계단 통로에서 자매로 보이는 곱슬머리 여자아이 둘이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오는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와 초록색 후드티를 입은 다른 아이는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오르다가 아불과 수민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언니로 보이는 아이는 중학생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고,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준영보다 키와 체구가 작았다.
“안녕, 레아. 내가 아까 전화했는데…… 세아도 얘기 들었지? 이 사모님이 그 킥보드……”
아불이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들은 인사는커녕 경계하는 표정으로 아불과 수민을 번갈아 쳐다봤다. 자매 둘 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눈이 커다랬다.
“너희가 우리 아이 킥보드를 갖고 있다고 들었어. 그건 원래 너희 물건이 아니야. 이 아저씨가 훔친 거고, 나는 그걸 돌려받으러 왔어. 훔친 물건을 타고 다니면 그 사람도 도둑이 되는 거야. 알겠니?”
참다못한 수민이 눈을 부릅뜨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이 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언니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얼굴로 수민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거 저희가 선물받은 건데요? 우리가 훔친 건 아니잖아요. 우리는 도둑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도 훔친 물건을 자기 거라고 우기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그리고 너희가 물건을 돌려주지 않으면 지금 저 아저씨가 경찰에 잡혀갈 수도 있어.”
“아불 아저씨, 전에도 경찰에 잡혀간 적 있어요. 줬으면 그만이죠. 교환, 환불 안 되는 거 몰라요?”
아이들의 공격적인 태도에 수민은 말문이 막혔다. 그사이 언니가 신경질적으로 수민을 밀쳐내고 계단을 올라갔다. 아이는 재빠르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동생을 잡아끌어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수민이 뒤따라가 문을 두드렸지만 굳게 잠긴 현관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뭐 저런 아이들이 있죠? 쟤네들 어디서 온 애들이죠? 저 아이들 부모는 지금 어딨나요?”
언니의 이름은 레아, 동생은 세아. 아이들의 부모는 파키스탄 사람이고 자매는 둘 다 한국에서 태어나 A시에서 자랐다. 아빠는 비자 문제로 몇달간 본국에 돌아간 상태였고, 엄마는 전남의 어느 농장에서 일하느라 보름에 한번씩 집에 다녀간다고 아불이 설명했다. 저 집에서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4학년인 자매 둘이서만 지낸다는 말에 수민은 그럼 아이들 보호자는 없는 거냐고 물었다.
“레아 아빠, 내 친구가 아이들 잘 지내게 도와달라고 했어요. 킥보드 세아가 좋아하니까, 그래서 선물 줬어요.”
아불은 다시 취업해서 돈을 벌게 되면 킥보드 값부터 갚겠다고, 제발 합의를 해달라며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부탁드립니다.”
수민은 대답 없이 그들이 사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며칠 사이 준영의 병세가 더 위중해졌다. 심각한 경련이 한번 있었고, 경련 이후에는 열이 올랐다. 수민은 하루에도 몇번씩 집과 병원을 오가며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최선을 다하겠다던 주치의가 수민 부부를 따로 불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 수민은 무릎이 꺾여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일 내로 뇌사 판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주치의에게 남편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정말 가망이 없는 거냐고 재차 물었다. 주치의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기기증에 관해 따로 안내가 있을 예정이라는 주치의의 말에 수민은 주저앉은 그대로 땅바닥을 치며 오열했다. 사고 이후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남편도 수민 옆에 선 채로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수민 부부는 점심도 거른 채 얼빠진 사람처럼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서 기진맥진한 상태인 수민 부부에게 흰색 가운을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여자가 수민에게 건넨 명함에는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많이 슬프고 힘드신 상황인 줄은 알지만……”
여자는 어렵게 입을 뗐고, 장기기증 절차에 대해 긴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에는 막힘이 없었다. 수민과 남편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허공만 바라봤다.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 상황에서 준영이가 갑자기 안 좋아지면, 이런 설명을 들으실 시간조차 없을 수 있어요. 그래서 미리 생각을 해보시라고 말씀을 드린 겁니다.”
“선생님, 왜 하필 준영이죠? 저희는 남한테 피해 주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수민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여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머님, 힘드신 마음 이해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실지 저로서는 가늠도 되지 않아요. 하지만 준영이가 이렇게 된 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저 저는 준영이가 떠나기 전에 장기기증을 한다면 살 수 있는 아이들에 대해 설명을 드리는 거예요. 결정은 보호자께서 하시는 거고 그 뜻을 존중합니다.”
“지금 저희더러 준영이를 포기하라고 하면서 다른 아이는 살려보겠다고 하시는 거잖아요. 우리 준영이부터 살려주세요. 준영이도 장기이식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주고, 우리 아이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요. 제발 부탁이에요.”
수민은 울먹거리며 여자의 손을 붙들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수민은 사과를 원한 게 아니었다. 준영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말, 준영도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좋았다. 하지만 끝내 수민이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는 어떤 아이죠? 준영이 장기가 필요한 아이는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요.”
“누구를 특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도 준영이 또래의 아이예요. 준영이와 키와 몸무게가 비슷하고, 그러니 준영이와 같은 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아니에요. 준영이와 같은 아이는 없어요. 저한테 아이라고는 준영이 하나뿐이라고요. 저는 준영이밖에 없어요.”
수민은 얼굴을 감싸 쥐고 울었다. 장기이식 코디네이터가 수민의 어깨를 토닥이며 몇마디 더 했지만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울고 있는 수민을 일으켜 세우며 그만 집에 가자고 말했다.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수민을 데려다준 뒤 남편은 다시 회사에 가봐야겠다며 집을 나섰다. 수민은 지금 이 상황에 회사가 대수냐고 남편에게 그냥 집에 있으라고 말했다. 오늘만큼은 집에 혼자 있기가 싫었다. 남편은 어쩌면 자리를 일주일 이상 길게 비워야 할 큰일이 닥칠지도 모르니 급한 일을 마무리해두고 오겠다며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에둘러 말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준영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민은 도저히 남편처럼 냉정하게 굴 수 없었다. 포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아이였다. 수민은 노트북을 켜고 준영과 비슷한 증세를 보이다가 회복된 경우가 없는지 논문을 찾아봤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례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기적이 준영에게도 찾아올 거라고 믿고 싶었다.
수민은 준영의 방으로 들어가 벽면에 붙은 아이의 사진을 쓰다듬었다. 아이의 침구를 다시 정리하며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방 안에는 아직 아이 냄새가 고여 있었고, 물건도 모두 그대로였다. 아이가 사고를 당한 그 순간부터 이 집의 모든 것이 정지되거나 마비된 상태였다. 세탁기도 청소기도 제때 돌아가지 않았고, 냉장고 안의 음식들은 썩어가고 있었다. 그런 건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는 문제였다. 아이는 점차 나아질 거고 모든 것을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 킥보드. 수민이 낮게 탄식하듯 읊조렸다. 현관 입구에 두던 킥보드가, 늘 같은 자리에 세워두던 킥보드가 없었다. 수민은 킥보드부터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준영이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는데, 준영의 킥보드를 신나게 타고 다닐 그 아이들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수민은 급하게 차를 몰아 A시로 갔다. 그들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2층 창문에 불빛이 비치는 걸로 보아 아직 아이들이 깨어 있는 게 분명했다. 수민은 초인종을 누르고 아이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분명히 안에서 소리가 들렸지만 내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급기야 수민은 문을 쾅쾅 두드리며 레아와 세아 자매를 불렀다.
“너희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킥보드 내놔. 그건 훔친 물건이야. 너희가 그걸 타고 다닐 권리는 없다고!”
한참 문을 두드리다가 기척이 없자 수민은 건물 밖으로 나와 2층 창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대로 물러설 거 같니? 그게 어떤 킥보드인 줄 알기나 하니? 너희가 그걸 알면 이렇게는 행동 못할 거야.”
2층의 모든 불이 꺼졌고, 인기척이 사라졌다. 이웃 중 누구 하나 나와보는 사람도 없었다. 1층과 3층 주민들이 잠깐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가 이내 창문을 닫았다. 아불이라도 부르려고 지하로 내려가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광등을 밝힌 경찰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앳된 얼굴의 순경이 차에서 내려 수민에게 다가왔다. 레아가 수민을 불법침입 혐의로 경찰에 신고한 모양이었다. 수민은 순경을 붙들고 정작 피해자는 자신이라며 억울한 사연을 호소했다. 젊은 순경은 인내심이 있는 편이었다. 수민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줬고, 수민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늦은 밤 남의 집 앞에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건 “명백히 선생님의 잘못”이라며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저도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으니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선생님.”
순경은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별일이 아니라는 듯 구는 순경의 태도에 수민은 더 화가 났다.
“알았어요. 가면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아이들이 저 지경이 되도록 쟤네들 부모는 대체 뭘 한 거죠? 아니, 어떻게 겨우 열몇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저럴 수가 있어요?”
수민은 저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아직 어린 애들이잖아요. 어려서 뭘 몰라서 그렇겠죠.”
진정하라고 손짓하며 순경이 말했다.
“어리다고 이런 행동들을 용납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저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요. 대체 저 아이들이 왜 저러는지 아세요? 저는 도통 이유를 모르겠네요.”
“이유랄 게 있나요. 그냥 아이일 뿐인 걸요. 그저 킥보드를 타고 싶은.”
대답을 해놓고 순경은 자신의 말이 우스운지 쿡 하고 웃었다. 수민은 그 말이 전혀 우습지 않았다.
수민이 굳은 표정으로 순경에게 물었다.
“이 상황이 웃긴가요? 아니면 제가 우스워 보이세요? 지금 제가, 저희 아이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르시죠? 그걸 알면 이렇게 못 웃으실 텐데요.”
“아니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순경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수민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따져 물었다.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왜 저 아이들의 편을 드는 거냐고, 저 아이들도 공범이나 마찬가지라고, 경찰이 출동해서라도 장물을 찾아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핏대를 세워가며 말했다.
순경은 웃음을 거둬들이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이런 경우에는 도움을 드릴 방법이 없어요. 경찰이 피의자를 처벌할 수는 있지만 아이들에게서 강제로 물건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집을 수색하려면 영장이 나와야 하는데, 저 아이들에게 법적인 잘못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저는 신고를 받고 이곳에 출동했습니다. 이렇게 길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건 문제가 돼요. 자꾸 이러시면 저희가 지구대로 모시고 갈 수밖에 없어요. 이쯤하고 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순경의 단호한 얼굴에 수민은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2층 창문으로 다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게 보였다.
수민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은 혼자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평소에 잘 마시지 않는 도수 높은 위스키였다.
“늦었네. 어디 다녀온 거야?”
남편은 수민에게 어딜 다녀왔는지 물었지만 딱히 대답을 듣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수민은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는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냉장고에서 치즈와 마른안주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가볼 데가 좀 있었어.”
“그래,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남편이 피로한 얼굴로 위스키를 들이켰다.
“아니야, 말할게. 당신도 알아야 할 이야기야.”
수민은 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남편에게 그간의 일들을 전했다. 준영의 킥보드를 훔쳐간 아불에 대해, 그리고 그에게 킥보드를 넘겨받은 후 자기 것인 양 돌려주지 않는 몰상식한 아이들에 대해서. 남편은 말없이 수민의 이야기를 듣다가 얼굴을 감싸며 미간을 찌푸렸다.
“수민아, 그만. 지금 그게 중요해?”
“준영이 거잖아. 그 킥보드 준영이한테 다시 찾아줘야 해.”
“당신도 알잖아. 준영이 상태…… 오늘 주치의 얘기 같이 들어놓고 왜 이러는 거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그건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의사들은 원래 최악의 상황부터 이야기하는 거래. 자기네들이 책임지기 싫어서 그러는 거라고. 내가 찾아보니까 그런 이야기 듣고도 살아난 아이들 사례도 있어. 아직 준영이 뇌사 판정 받은 거 아니잖아.”
“그건 당신 욕심이야. 만에 하나 준영이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더라도 예전처럼 킥보드를 탈 수는 없을 거야.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이상한 짓 하고 돌아다닐 시간이 없다고.”
남편은 수민이 정작 중요한 문제는 회피하고 킥보드 따위에 집착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의사가 뭐라든,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준영이를 포기하면 안 되는 거지. 준영이 회복될 거고, 다시 집으로 멀쩡하게 돌아올 거야. 예전처럼 킥보드도 신나게 타고 다닐 수 있을 거고.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포기하라고 해도 적어도 우리는 준영이 포기하면 안 되는 거 몰라?”
수민은 남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남편은 대답 없이 술만 들이켰다.
다음 날 아침, 수민이 잠에서 깼을 때 남편은 이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민은 핸드폰으로 남편이 새벽에 보내놓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여보, 내가 말이 심했어. 그래,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우리 기도하면서 기다려보자. 오늘 준영이 면회는 내가 할게. 나도 준영이 손이랑 팔다리 만져보고 싶어. 그리고 킥보드 준영이 원래 타던 거랑 같은 걸로 내가 주문했어. 당일배송이라 오늘 바로 올 거야. 당신이 받아줘. 제발 부탁인데 집에서 쉬고 있어. A시에 다시는 가지 마.
수민은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대충 아침을 먹었다. 쌀알이 입안에서 서걱거렸다. 지금 채비를 하고 병원에 가면 준영이 면회시간을 맞출 수 있겠지만 중환자실 면회가 허락된 보호자는 하루에 단 한명이었다. 남편에게도 아이를 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내렸다. 거실 창을 열어젖혀 환기를 하고, 발코니로 나가 햇볕을 쬐면서 커피를 마셨다. 부정적인 감정이 몰려올 때마다 아직 비관하기는 이르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오후가 되자 하교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으로 킥보드를 타고 단지 내를 빙빙 도는 아이들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저 무리 속에 준영도 같이 어울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준영은 중환자실에 인공호흡기와 수액을 단 채 누워 있고, 준영의 킥보드는 염치없는 아이들의 차지가 되어 있다. 수민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A시로 가는 도중에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남편이 주문한 킥보드가 오늘 저녁 집으로 배송될 거라는 안내문자였다. 수민은 알림을 확인하고도 차를 돌리지 않은 채 A시로 달려갔다. 이건 똑같은 킥보드를 새로 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수민은 적갈색 건물 벽면에 차를 바싹 붙여 댔다. 이번에는 2층에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지 않은 채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이 나오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완력으로라도 킥보드를 빼앗아 올 작정이었다. 아니, 빼앗는 게 아니라 되찾는 거였다. 내 아들의 킥보드라고, 훔친 물건을 마치 네 물건인 양 여기지 말라고, 분명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한시간쯤 지나자, 동생 세아가 혼자 킥보드를 끌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천천히 킥보드를 끌고 나오는 중이었다. 수민은 차에서 급하게 내려 아이 뒤로 슬며시 다가갔다. 준영이 늘상 타고 다니던 보라색 킥보드가 맞았다. 준영이 붙여놓은 포켓몬 스티커까지 몸체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수민이 아이의 점퍼 뒷덜미를 잡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킥보드 내놔. 나도 이제 참을 만큼 참았거든.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너 같은 애 상대할 시간이 없다고.”
그렇게 하면 아이가 겁을 먹고 킥보드를 내놓을 거라고 생각했다. 13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체구가 작은 아이였다. 아이 편을 들어줄 언니도 옆에 없었다. 뒷덜미를 잡힌 아이가 꽥 하고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아이의 거센 몸부림에 수민은 아이를 잡은 손을 도로 놓쳐버렸다. 그 순간 아이는 킥보드에 올라타 빠르게 도망쳤다. 수민도 아이를 뒤쫓아 뛰어갔다. 숨이 차도록 달렸지만 아이가 더 재빠르게 앞서갔다.
“메롱, 잡아보시지롱.”
제법 격차가 벌어지자 아이가 뒤돌아보면서 수민의 약을 올렸다. 옆 골목에서 오토바이가 튀어나오는 줄도 모르고, 아이는 수민을 쳐다보며 웃었다.
“야! 멈춰! 오토바이 오잖아! 앞을 보라고!”
그 순간 수민이 악을 쓰듯 비명을 질렀다. 골목길에서 빠르게 달리던 오토바이가 수민의 비명 소리를 듣고 급정거를 했다. 끼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멈춰 선 오토바이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우뚱 옆으로 쓰러졌고, 아이는 킥보드를 잡은 채 반대 방향으로 풀썩 넘어졌다.
“너, 미쳤어? 골목길에서 킥보드를 타고 튀어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오토바이 기사가 몸을 일으키며 윽박지르자, 아이는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수민이 아이에게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좀 전에 아이를 쫓아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수민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얼굴과 머리부터 살폈다.
“아줌마, 얘 엄마예요? 미친 거 아니야? 골목길에서 이렇게 킥보드를 타게 하면 어떡해?”
“그쪽도 급하게 달린 건 마찬가지 같은데요. 다행히 서로 부딪치진 않았고. 다 떠나서 애가 괜찮은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민이 오토바이 기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와 씨, 이 아줌마 뭔데 이렇게 당당해. 아줌마, 아줌마도 봤죠? 얘랑 서로 안 부딪친 거. 그냥 애새끼가 혼자 놀라서 넘어진 거야.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요.”
수민이 대답도 하기 전에 오토바이는 재빠르게 내빼버렸다. 오토바이가 떠나자 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얘, 괜찮니? 너 이름이 세아 맞지?”
수민은 다가가 아이의 손을 들어 살폈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불그스름했지만 다친 건 아니었다. 아이의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마디가 여리고 부드러웠다. 준영의 손을 잡았을 때와 비슷한 감촉이었다.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슬그머니 손을 뺐다.
“손이랑 얼굴은 괜찮아. 다리 보자.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이의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주며 물었다. 바지 무릎 부분에 피가 스며나오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무릎이 깨진 거 같았다. 바지를 걷어서 확인하려 하자 아이가 수민의 손을 쳐내며 일어났다. 아이는 킥보드를 황급히 일으키고는 손잡이를 꼭 끌어안은 채 말했다.
“이거 제 거예요. 제가 선물받은 거라고요. 절대 뺏길 수 없어요.”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너 진짜 큰일 날 뻔했어. 다친 데 괜찮은지 한번 확인해보자.”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킥보드에 올라타더니 급하게 속도를 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민은 골목 끝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아이를 쫓아가려다 말고 맥이 풀린 표정으로 멍하니 섰다. 온몸이 땀에 젖었고, 큰 사고가 날 뻔했다는 생각에 놀란 가슴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가슴에 손을 대고 여러번 쓸어내리며 심호흡을 했다. 정작 아이는 넘어진 적이 없는 듯이 신나게 킥보드를 밀며 유유히 멀어져갔다. 오른발을 발판에 올린 채 왼발로 땅을 박차며 씽씽 달리는 뒷모습이 평소 준영이 타는 폼과 영락없이 같았다.
아이의 곱슬곱슬한 뒷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바람이 불자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올라왔다. 수민은 옷깃을 여미며 아이를 눈으로 좇았다. 따라잡을 수 없는 아이를, 예측할 수 없는 아이를, 그래서 종내 놓쳐버린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린 순간,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K대 병원 중환자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수민은 손을 떨면서 전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