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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온유 白溫柔

2019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유원』 『페퍼민트』 『경우 없는 세계』 등이 있음.

 

 

 

내가 있어야 할 곳

 

 

15년 전 밴쿠버 국제공항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이모와 이모부는 색종이로 알록달록 꾸민 플래카드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하나 공주님 환영합니다’ ‘국빈 방문 환영’, 그런 문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함께 입국한 한국인들이 모두 한번씩 그 플래카드를 보며 지나갔고 공주님이 누구신가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온 나는 플래카드를 발견하고서도 선뜻 이모와 이모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다섯살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그들은 내게 사실상 낯선 타인이었다. 좋은 첫인상을 남기고 싶었지만 열두시간가량 비행을 한 터라 꼴이 몹시 추레하다는 생각에 우물쭈물했다. 그때 이모와 눈이 마주쳤다. 아기 때 이후 내 얼굴은 가끔 엄마와 주고받은 사진으로 본 게 전부였을 텐데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하나야?가 아니라 하나야!였다. 의심이 아닌 확신. 두 손에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천천히 이모 앞에 섰다. 그녀가 나를 얼싸안자 사람들은 흐뭇한 얼굴로 가족상봉을 바라보았다. 이모부가 점잖으면서도 능글거리는 말투로 첫마디를 건넸다. 공주님,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나는 네, 편안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뿔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이모부의 눈동자가 부드럽고 따스했다. 기대 이상의 환대가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유머를 건네줄 사람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이 달가웠고, 유머를 소화할 마음이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내가 왜 캐나다로 오게 되었는지 대략적인 상황을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티를 내지 않았다. 이모와 이모부가 내게서 캐리어 하나씩을 가져가 받아 들었을 때, 나는 날아갈 듯 몸이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모가 항상 틀어놓는 라디오 소리로 시끌벅적하던 집은 오후 10시가 되면 조용해졌다. 그 시간에 이모가 라디오를 끄기 때문이었다. 고요해지면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모가 내게 따뜻한 우유를 건넨 후 조용히 식탁에 앉아 가계부를 쓰는 시간, 이모부가 설거지를 끝내고 문단속을 하는 시간. 나는 이모를 마주보고 앉아 우유를 홀짝거렸다. 태연한 체하며 이모와 이모부가 결국에 내게 하고야 말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정리했다. 그들이 나를 덜 미워했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내가 저지른 일들을 이렇게 저렇게 마음속으로 각색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스스로 입을 열기 전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이 각자 일터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거나 이모, 이모부를 속상하고 곤란하게 하는 사람들을 대신 욕해주기만 하면 됐다. 그것은 내 속내를 털어놓는 일보다는 확실히 마음 편한 일이었다.

 

*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문구점에 들러 매직과 스케치북을 샀다. 매직을 쥐고서 뭐라고 써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 나는 결국 단순한 문장을 택했다.

‘WELCOME BACK TO KOREA 주여사! 귀국을 환영합니다.’

소박해 보이는 플래카드에 형광펜으로 꽃을 그려넣기도 했지만 손을 댈수록 조잡해졌다. 원래 손재주가 없는 편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비행기가 도착하고도 30분이 지나 혹시 엇갈린 게 아닌지 전화라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쯤에야 이모는 두리번거리며 입국장으로 나왔다. 머리카락이 완전한 백발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모의 얼굴을 한 중년여성이 이모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이모를 불렀다. 그녀는 자기 몸만 한 캐리어를 미느라 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무작정 직진하는 이모를 붙잡아 세우자,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늠하듯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이내 소리쳤다.

“하나야!”

오래전 그날처럼, 이모는 나를 부둥켜안았고 나는 이모의 둥글고 부드러운 어깨를 어루만졌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를 안은 채 체온을 확인했다.

“얼른 가요, 이모. 다들 기다려요.”

나는 이모에게서 캐리어를 건네받았다.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모의 손을 잡은 채로 걸었다. 캐리어가 무거웠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 거짓이었다. 2001년에 한국을 떠났던 이모가 20여년 만에 역이민을 통보했을 때 대부분의 가족들은 의아해했다. 의아해할 뿐 아니라 난감해했고, 이모를 떠올리면 늘 따라붙었던 연민이나 동정심은 어느새 휘발된 듯 적나라하게 곤혹스러움을 표출했다.

“들어오라고 할 때는 그렇게 버티더니만, 이제 와서 어쩌겠다고.”

“젊을 때야 어떻게든 살았겠지. 늙고 병들고 혼자 남으니까 고향 그리운 거야. 사람이 다 그래. 원래 그런 거야.”

“이럴 거면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들어와서 간병도 좀 돕고 하지. 큰누나가 어머니 댁에 들어가서 모시고 살았어봐요, 어머니 돌아가신 후에 우리가 그 집 건드리겠어요? 큰누나 사정 뻔히 아는데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외삼촌이 며칠 전 주고받았던 대화를 곱씹었다. 정제하지 않고 내뱉는 말들에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이모부는 4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엄마와 아빠는 캐나다에 가서 장례를 도왔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취업준비를 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경황이 없다는 말은 핑계고 누군가의 거대한 슬픔을 위로할 여력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어쨌든 표면적인 이유가 분명했기에 빠질 수 있었다. 당시 엄마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이모를 설득하기도 했는데 이모가 거절했다고 들었다. 나 역시 궁금하기는 했다. 이모는 어쩌려는 걸까. 69세. 새로운 삶을 찾아 돌아왔다고 하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가 아닌가 싶었고, 삶을 마무리하러 왔다고 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되었다. 가족들은 집도 절도 없는—이모는 형편이 어렵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모두들 이모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는 경제적인 문제도 크리라 짐작하고 있었다—형제를 얼떨결에 떠맡게 되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가족들은 당장 이모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얼마씩 보태야 이모가 당분간 한국에서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오래도록 상의했다. 이모는 이 집안에서 그런 존재였다.

 

가족들 앞에서 이모의 결정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우려와 불만을 드러낸 사람은 엄마였다. 그럼에도 엄마는 그날 밤 이모에게 전화해, 이미 당신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언니, 우리 집으로 오는 거야. 알겠지? 막내 집으로 가면 올케도 있고 서로 불편할 테니까. 영진이가 독립해서 빈방이 있어. 실은 그동안 하나 아빠가 서재로 쓰고 있었는데 비우면 돼. 우리 집이 아무래도 제일 넓으니까 언니가 와서 지내기도 편하겠지. 벌써 옷장이랑 침대도 주문했어. 다른 말 말고 우리 집 와서 지내.”

신세 지는 게 미안한지 수화기 너머의 이모는 몇번이나 제안을 고사하는 듯했다. 그러자 엄마는 새로운 집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자신의 집에서 지내는 게 맞지 않느냐며 괜히 형제들 마음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저것은 위선일까 허세일까 만용일까. 엄마의 진짜 마음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통화를 끝낸 엄마의 얼굴이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여 어쩌면 오래전 신세 진 일을 지금이라도 갚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는 게 아닐까, 속으로 생각했다.

 

서재로 쓰던 방을 정리하고 새로운 가구를 들였다. 말이 서재지, 사실 책은 몇권 없고 운동광인 아빠의 스포츠 용품들로 가득하던 방이었다. 골프채와 배드민턴채, 테니스채, 아령과 줄넘기들로 혼잡하던 방이 한나절 만에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아빠는 불평이나 반발 없이 엄마의 지시대로 스포츠 용품을 다용도실로 옮겼다. 엄마는 몇날 며칠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가구와 침구와 화분을 넣었다 뺐다 하며 방을 꾸몄다. 나도 엄마를 도와 화장대를 문 앞으로 옮겼다가, 창가로 옮겼다가, 침대맡으로 옮겼다. 지치고 지겨웠지만 군말 않았다.

“너도 이모한테 드릴 선물 준비해야지. 각별한 사이잖아, 둘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나는 가끔 엄마가 나를 조롱하고 비웃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한때 내가 이모를 각별하게, 각별한 것을 넘어서 절실하게, 때로는 안달하며 마음에 뒀던 일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릴 만한 이야깃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 지점에 대해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보습과 미백에 효과적이라는 화장품 세트를 샀다. 2천원을 더 주고 선물포장을 해 왔는데,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리본을 풀어 화장품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모가 좋아하겠네. 좋은 걸로 잘 골랐네.”

그렇게 칭찬하다가 갑자기 나를 흘겨보더니 엄마도 화장품 다 떨어져가는데, 사는 김에 내 것도 좀 사지, 센스 없기는, 하고 핀잔했다. 엄마는 자기 서랍에서 뜯지 않은 핸드크림과 아이 리무버, 립스틱, 헤어에센스 같은 것들을 가져와서 이모가 쓸 화장대에 진열해두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넣었다가 빼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15년 전 어느날을 떠올렸다.

 

*

 

칫솔 두개, 딸기맛 치약 두개, 베이비로션 두개, 여드름 연고 두개, 손톱깎이 발톱깎이 한개씩, 양말 다섯켤레, 팬티 세개, 생리용 팬티 두개, 생리대, 잠옷 두개, 반팔 티셔츠 세장, 반바지 세장, 긴팔 티셔츠 세장, 긴바지 세장, 바람막이 한개, 패딩 한개, 야구모자 한개, 전자사전, 수학 문제집 두권, 감기약, 해열제, 두통약, 지사제, 멀미약, 소독약, 김, 참치통조림, 컵라면, 고추장……

나를 이모에게 보내기로 결정한 후, 엄마는 단 한번도 주춤거리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가 머뭇거리고 번뇌할수록 내 삶의 박자가 뒤로 밀릴 뿐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폭주기관차처럼 유학 절차를 알아보고 내가 유학 조건을 갖추도록 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을 뿐이었다. 유학원을 통해 현지 학교에 원서를 넣고 입학 허가를 받기까지 나는 하루에 여덟시간에서 열시간가량 회화 수업을 들었다. 학비를 미리 납부하고 얼마 후 학생 비자가 승인되었다. 엄마는 마침내 한시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이 모든 일이 석달 만에 이루어졌다.

출국을 앞두고 거실에 28인치 캐리어 한개, 32인치 캐리어 한개를 펼쳐둔 엄마는 수시로 물건을 채워넣었다. 나는 빵빵한 캐리어를 볼 때마다 어쩐지 무안하고 서운해졌다. 엄마 아빠는 내게 언제까지 돌아오라는 말이 없었고, 나 또한 언제까지 캐나다에 머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열여섯살의 나는 아직 초경을 시작하지 않았다. 생리용 속옷까지 구비한 걸 보면 최소 몇년은 그곳에서 지내는 것을 염두에 둔 게 분명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성인이 된 후에도 그곳에서 지낼 수 있다고, 그게 내 삶을 위해서 차라리 나은 길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당시 고3이었던 오빠는 내게 말했다.

“거기서는 제발 조용히 지내라.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엄마는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일’을 겪고 보니 무사히 돌아온 아이가 마냥 귀하고 예쁘기만 해서 오냐오냐 키웠다고, 그 바람에 아이가 영 또래에 비해 늦되고 철이 안 든다고.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고집이 세고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쓰는데 불만이 있으면 입을 꾹 닫고 방에 들어가 한발짝도 나오지 않는다고. 엄마가 묘사하는 나라는 존재는 썩 괜찮았다. 진심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냐오냐 키워 철이 없고 고집이 센 막내딸. 살아 있는 것 자체로 유세를 부리며 뻔뻔하게 가장 좋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 말이다.

 

*

 

“우리 언니 늙은 거 봐. 썬크림도 안 발라? 이러면 피부노화가 빨리 온다니까.”

엄마는 그런 말로 이모를 맞이했다. 이모는 익숙하다는 듯 엄마의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다 늙어서 무슨 썬크림. 너는 아직도 젊다. 예쁘다.”

이모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말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엄마와 이모는 여덟살 차이인데 겉모습만 보면 이모가 스무살 정도는 위로 보였다. 엄마는 머쓱한 듯 이모의 손이 가닿은 얼굴을 감쌌다.

“얼른 들어와. 피곤하지. 저녁 먹고 오늘은 푹 쉬어.”

“하나가 데리러 와서 편하게 왔어. 요즘은 비행시간도 줄어서 하나도 안 피곤하다.”

나와 이모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삼촌과 외숙모가 도착했고, 곧이어 사촌동생들과 오빠까지 도착했다. 명절도 아닌데 이렇게 식구들이 다들 모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천덕꾸러기 같은 것을 환영해주어서 고맙다. 너희들한테 민폐 끼치지 않도록 할 테니까 혹시 걱정하고 있다면 다들 긴장 풀어라. 내 한 몸 건사할 정도로는 돈도 있고, 아직까지는 건강도 있으니까.”

이모는 그렇게 솔직한 말로 가족들이 안고 있던 불편함과 꺼림칙함을 불식시켰다. 나는 이곳에 모인 모두가 이모의 말에 부끄러움과 후련함을 동시에 느꼈으리라 생각했다.

식사를 하며 이모는 오는 길에 본 인천공항과 서울의 풍경, 한국사람들의 옷차림에 대해 감상을 늘어놓았다. 나와 대화를 하느라 주변은 아예 살피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새 이모는 많은 것을 눈에 담은 모양이다. 공항에서 길을 안내하는 로봇을 본 일, 인천공항에서 올림픽대로를 타고 오다가 처음 가양대교를 달린 일—2002년에 준공되어 이모는 처음 본 게 맞았다—이 신기했다고 말했고 사람들 모두 차림새가 번듯하고 세련되어 보인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녁식사 자리는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던 중 술이 들어가자 들뜬 아빠가 처형의 마음이 제법 편해진 것 같아 보기 좋다는 말을 넌지시 건넸다. 솔직히 예전에는 마음도 아프고 눈치가 보이기도 해서 처형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게 힘들었다고, 그런데 확실히 시간이 모든 걸 해결 주는 게 맞기는 한 모양이라고 주절거렸다. 외삼촌은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며 시간이 꽤 흘렀으니 이제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누나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도울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돕겠다며 격려인지 훈수인지 모를 말을 전했다. 나는 쓸데없는 말들이 계속 길어지는 게 불안했다. 그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는 이모가 무력해 보였다.

 

*

 

캐나다의 이모 집은 작은 주택이었다. 1층에는 안방과 거실, 주방, 욕실이 있었고, 2층에는 내가 머무는 방과 다용도실, 욕실이 있었다. 내가 도착한 날 이모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씻는 거 도와줄까?”

혼자 씻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머리를 감겨주거나 몸을 씻겨주는 일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후로 아예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혼자서 할 수 있다고 대답했고 이모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라고 말한 뒤 1층으로 내려갔다. 얼핏 이모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친 것 같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종종 이모는 나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대했다. 사실 종종이 아니라 자주였다. 아침에 나를 깨우러 올 때마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 내가 학교에 가기 전 아침을 먹는 동안 드라이어 줄을 끌어와 식탁에서 머리를 말려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색한 마음에 알아서 하겠다거나 머리숱이 적어 금방 마르니 드라이어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그녀를 만류했다. 하지만 금세 적응했다. 이모는 미용실에서 근무하고 있어 머리 만지는 기술이 좋았는데 무슨 마법을 부리는지 몰라도 덕분에 내 머리는 항상 윤기가 흘렀고 좋은 향이 났다.

어느날 이모가 내 속옷을 손빨래하는 것을 목격하고 깜짝 놀랐다. 이모는 심상하게 브래지어와 속옷들을 가져다 씻고는 물기를 쭉쭉 짜서 2층 행거에 말렸다. 그 이후로는 내가 직접 내 속옷을 빨게 되었는데 민망한 감정은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모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 있었지만 솔직하게는 다섯살 이후로 만난 적 없는 조카를 이렇게까지 허물없이 대하는 이모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모는 내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실은 한국에 있을 때, 이모 집 분위기를 그려본 적이 있다. 분명 잿빛의 음울한 기운이 문진처럼 집을 누르고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내가 그렇게 여긴 데는 엄마의 영향도 컸다. 엄마가 그 집에서 지내려면 최대한 얌전히, 말썽 피우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굴면 안 된다는 말도 했고, ‘그 일’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막상 맞닥뜨린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이모는 잠자는 시간 빼고 항상 라디오를 틀어놓았기에 집은 기분 좋은 시끌벅적함으로 활기가 돌았다. 집에서 청소를 담당하는 이모부는 청소기를 돌리며 라디오에서 들리는 팝송을 따라 부르기도 했고 거실에서 바둑 채널이나 야구 경기를 보며 중계를 하기도 했다. 그 집은 여태껏 한번도 그늘이 드리운 적 없는 듯 아늑했다.

나는 7월 말에 캐나다에 도착했다. 9월에 9학년으로 입학하기 전까지 두달가량 현지 어학원에 다녔다. 2시에 어학원을 마치면 이모가 나를 데리러 왔다. 예약 손님이 많아 이모가 마중 나오지 못하면 이모부가 대신 데리러 왔다. 일주일에 한번 가족이 다 같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보았고 저녁식사는 거의 함께 만들어 먹었다. 나는 당근과 오이를 썰거나 이모가 소금을 넣으라고 하면 소금 한꼬집을, 간장을 넣으라고 하면 간장 한큰술을 넣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모는 크든 작든 항상 내게 역할을 부여했다.

“못생겼어요.”

내가 삐뚤빼뚤 자른 감자와 당근을 보고 자신 없어하면 이모는 말했다.

“괜찮아. 입에 넣으면 다 똑같아.”

이모와 이모부가 살던 주택은 지붕이 오렌지색이었다. 원래 빨간색으로 페인트칠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변색이 됐다고 했다. 집 크기에 비해 마당이 상당히 넓은 편이었는데 잔디가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기는 해도 그 흔한 갈매나무나 플라타너스 한그루조차 없어 어딘가 썰렁하고 허전한 느낌이 감돌았다. 2주에 한번씩은 이모부와 함께 잔디를 깎았다. 내가 온 지 한달이 지났을 때쯤 이모부는 하나가 왔으니 화단을 만들어 꽃을 심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이모와 내가 동의하자마자 주먹만 한 돌멩이를 잔뜩 주워 와 마당 한편에 두세평 정도 되는 공간을 돌멩이로 빙 둘렀다. 어떤 꽃을 좋아하냐고 묻기에 아는 꽃이 별로 없어 대충 해바라기를 심자고 말했다. 이모부는 금세 어디선가 해바라기씨를 구해 왔고, 나는 직접 해바라기씨를 심고 물을 주었다.

이모는 하나가 왔으니 함께 케이크를 만들자고 했다. 얼마 후 이모부가 중고가전센터에서 깔끔한 오븐을 구해 왔고 이모는 부드러운 카스텔라에 생크림과 메이플 시럽을 발라 케이크를 만들었다. 쿠키와 머핀도 자주 구웠다. 하트 모양 초코쿠키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언제나. 그때는 이모, 이모부가 나를 환대하는 의미에서 한 행동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쩌면, 그들이 아주 오랫동안 그런 일상을 고대했고 나는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계기 혹은 마땅한 구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내가 충분히 행복했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이모와 이모부가 사는 곳은 밴쿠버 동쪽의 노스 버나비였다. 크고 작은 공원들이 많은, 경관이 좋은 도시였다. 우리는 주말에 바넷공원과 버나비마운틴에서 캠핑을 자주 했다. 이모부는 용접으로, 이모는 미용으로 기술이민에 성공했다. 이모부는 목공 기술도 좋아 캠핑을 할 때 내가 불가에 앉아 마시멜로우를 구워 먹을 수 있도록 내 몸에 맞는 의자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노스 버나비에는 한인들이 많지 않았다. 있기는 했지만 유럽계 이민자들과 인도인, 중국인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버나비에 있는 이모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가면 코퀴틀람이라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한인타운이 나왔다. 정작 이모와 이모부는 코퀴틀람 쪽으로 자주 가지 않았다. 내가 떡볶이나 부대찌개, 고등어조림 같은 ‘완전한 한식’이 먹고 싶다고 하면 아주 가끔 방문하는 정도였다. 그곳에 가면 한국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사방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한아름마트에 가서 한국 식재료—참기름이나 고춧가루나 도토리묵 따위—를 고르고 있으면 한인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곤 했다. 모녀가 참 많이 닮았네요, 웃으며 그런 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코퀴틀람에 두번 정도 방문했을 때, 나는 이모와 이모부가 왜 한인타운으로 오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은 한국이나 다름없었다. 캐나다까지 온 보람이 없는 것이다.

 

*

 

이모는 입국한 다음 날 곧장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납골당에 갔다. 내가 4시에 퇴근을 하면 그때 함께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이모는 나와는 따로 갈 곳이 있다고 했다.

“며칠간은 내가 좀 귀찮게 해도 참아줘야 된다.”

이모가 한국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나라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퇴근 후에 이모를 픽업해 출입국관리사무소로 갔다. 국적과에서 국적상실 신고와 국적회복 허가 신청을 동시에 했다. 국적회복이 완료되면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서를 제출해야 했다. 서약확인서를 받은 후에 주민등록을 할 수 있고 그때부터는 한국인으로서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나는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요구하는 서류를 정리해 제출했다. 처음에는 스스로 뭐라도 해보려 했던 이모는 내 뒤를 바짝 따라붙었지만 대부분 자동화된 시스템 때문에 기계 앞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다음 방문 때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내가 불러주자 메모지에 받아 적는 것이 그날 이모가 한 일의 전부였다.

나는 이모와 함께 저녁으로 아구찜을 먹고 후식으로 딸기 탕후루를 먹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거예요. 애들은 학교 끝나고 다들 이거 하나씩 손에 들고 간대요.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하니 이모는 눈을 빛내며 반질반질하고 딱딱한 탕후루를 조심스럽게 깨 먹었다.

“맛있다!”

이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 덕분에 이런 걸 다 먹어보네, 하고 밝게 웃는 이모를 보자 15년 전 내가 키운 해바라기씨 껍질을 벗겨 입에 넣고 꼭꼭 씹던 이모가 생각났다. 나는 문득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암으로 입원했을 때, 외할머니의 장례식 때, 오빠의 결혼식 때, 가족들은 간곡하게 이모가 한국에 잠시라도 들르기를 청했다. 하지만 이모는 거절했고 때로는 매정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까지도 한국을 외면했다. 가족들이 너무 그리울 때는 차라리 캐나다로 불러들였다. 그래서 나도 외할머니도 엄마 아빠도 오빠도 외삼촌네 가족도 한번씩은 캐나다 이모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이모는 심지어 참사 10주년 추모행사에도, 20주년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너무한 게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 분리되고자 하는 마음, 한국과 멀어지고자 하는 마음은 나 역시 경험했던 것이니까.

가족들이 추측한 대로 단지 늙고 혼자가 되니 마음이 약해져서 돌아온 것인지,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식구들에게 기대고 싶어진 것인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이모는 15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진심을 알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마흔넷에 하나뿐인 딸을 잃었다. 화재는 한밤중 청소년수련원에서 일어났다. 불이 난 건물에는 유치원생과 미술학원생, 초등학생 등 수련원생과 인솔교사 등을 포함해 500명이 넘게 투숙하고 있었다. 수련원의 건축주는 경비 절감을 위해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올려 건물을 만들었고 외벽을 나무로 마감해놓고는 건축물 대장에는 철골 콘크리트 건물로 허위 기재했다. 벽면과 바닥은 목재와 스티로폼, 비닐장판 등 인화성이 강한 물질로 만들어져 화재가 발생했을 때 불이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다. 화재탐지기도 비상벨도 작동되지 않았다. 우리가 잠자던 곳은 야간순찰도, 불침번도 없을 만큼 무방비였다.

사건 직후에는 모기향이 화재의 원인으로 발표되었으나 전문가들은 누전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일 가능성이 크리라고 판단했다. 인근 주민도 ‘지난해 수련원 건물에서 두차례 누전으로 인한 작은 화재가 발생했다고 증언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화재의 원인이 모기향일 경우 불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자리를 비운 유치원 선생과 원장의 죄가 가중되고, 원인이 누전인 경우에는 불법건축물에 사용허가를 내준 공무원들과 소방장비를 점검하지 않은 수련원 관계자들의 죄가 가중된다. 그러나 끝내 명확한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의 손에 붙들려 비몽사몽간에 그 불길 속에서 걸어나왔고 나보다 한살 많은 나의 사촌은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지만 파편적으로나마 기억나는 게 있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매캐한 연기. 전혀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어수선한 상황에 우리가 겁을 먹어 운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리는,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눈과 코가 매워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바라보았다. 맹렬히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화염 속인지 밖인지 구별할 수 없는 어느 지점에서 불길을 쪼갤 듯한 비명이 들렸다. 나는 그것들을 오래된 영화에서 본 장면들처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특별한 이유 없이 친구들과 불화할 때, 손끝이 야무지지 않아 어딘가 어설프고 엉성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때,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행동이 굼뜰 때,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분명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연기를 많이 들이마신 후로 뭔가가 달라진 것 같다고. 어쩌면 그게 사실일지도 몰랐다. 나 또한 커가면서 느꼈다. 나는 애매하게 애매했고 모호하게 모호했다.

 

나도 ‘그 일’의 당사자이자 생존자로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일’이 이모와 이모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모에 대해 아는 사실은 별로 없었지만 내게 주어진 두세개의 정보가 너무나 핵심적이고 결정적이라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이모라는 인간을 이루는 서사의 전부로 느껴졌다. 이모에 관한 다른 정보를 아무리 입력하려 해도 그 이야기들은 모조리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졌고 그런 이유로 뇌리에서 금방 잊히곤 했다.

화재가 진압된 후 소방관들이 녹아내린 컨테이너 문을 도끼와 망치로 허물고 들어갔을 때 문가에는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정부가 사고 원인규명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가족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까지 찾아갔으나 경찰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국무총리와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유가족들이 정부중앙청사에 갔을 때는 버스째로 견인을 당했다. 당시 국무총리가 재수사를 약속했지만 끝내 재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고의 직간접적인 책임자들은 대다수 무혐의로 풀려나거나 아주 가벼운 형량만을 선고받았다. 이모와 이모부는 사건 2년 후 이민길에 올랐다.

나는 이모를 만나고 나서야 이모가 변진섭을 좋아하지만 변진섭 노래는 되도록 듣지 않고 마이클 볼튼 노래를 주로 듣는다는 것, 밥보다는 디저트에 관심이 많다는 것,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지만 알레르기가 심해 기르지는 못한다는 것,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 같아도 가만히 들어보면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이 많다는 것, 하지만 틀린 문장이라도 자신있게 내뱉어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데 큰 불편을 못 느낀다는 것, 이모부는 집에서는 무척 활달하지만 이모보다 영어가 약해 어디를 가나 이모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한다는 것…… 같은 그런 사소하고도 인간적인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

 

처음에는 이모와 이모부에게 내 치부를 숨기고 밝은 모습만 보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마음을 줄수록, 정이 들수록, 나의 과오를 솔직히 털어놓아야 떳떳하게 그들을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 노란 노을이 집에 쏟아져 들어온 저녁 무렵 당근을 썰다가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모가 캐나다 학교에서 적응하기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친구가 두명이나 생겼다고 말했다.

“신기해요. 한국에는 나를 싫어하는 애들이 많았거든요. 한두명이 아니라 열명 넘게요.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이요.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고요.”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시작하자 이모와 이모부도 차분히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랬니, 그랬구나. 건성으로 듣는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모는 어느새 라디오 소리를 줄이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메뉴는 카레였다. 내가 썰어놓은 당근과 감자를 냄비에 넣고 삶으면서도 이모는 중간중간 나를 돌아보며 눈을 맞추었다. 그 다정한 눈에, 나는 용기를 냈다.

 

강제전학 기록이 남으면 엄마가 점찍어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진학은 불가능해질 것이 자명했다. 두고두고 꼬리표가 남으리라고 생각한 엄마는 혜신의 부모에게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다시는 혜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다행히 정학 처분이 내려졌지만 정학이 끝나기 전까지 다른 학교로의 전학수속을 끝내야 했다. 근방에는 금방 소문이 날 테니 다른 지방으로 알아봐야 했는데 엄마는 오빠가 고등학생인 상황에 당장 이사를 가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그러면 학교 안 다닐래.”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너한테는 선택권 없어. 할머니 집 근처로 알아보고 있으니까 기다려.”

엄마는 그렇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학군을 따졌고 할머니 댁 근처의 고등학교가 내년이면 학생 수 미달로 통폐합이 된다는 소문을 입수한 후에는 아예 기숙사가 있는 국제학교를 알아보았다. 학비가 비싸 선뜻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다음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영어를 사용해 추후 학력세탁도 가능하다고 알려진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의 학교를 수소문했다. 엄마가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고 이모는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조카들을 캐나다로 보내라고 말했다. 사실은 오빠와 내 몫의 비행기표를 끊어줄 테니 여름방학 동안 잠시 놀다 가라고 한 것뿐이지만 엄마는 그 제안이 무슨 계시라도 되는 양 얼굴이 밝아졌다.

당장 다음 날부터 종로에 있는 캐나다 전문 유학원을 몇군데나 돌아보았다. 엄마는 준비를 끝내놓고—나는 유학원에 이미 등록한 상황이었다—이모에게 의견을 구한다는 듯 전화를 걸었다. 사정이 이러하다고, 여기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될 상황이라고. 이모는 엄마의 예상보다 더 흔쾌히 나의 유학생활을 돕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나는 유학이 결정되고도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할머니네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먼 곳으로 가는 것은 너무 무섭고, 두렵고, 내가 적응할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다고 엄마에게 빌다시피 사정했다.

“자신이 없어도 용기를 내야지. 뭐가 그렇게 무서워? 캐나다 가도 안 죽어. 하나야, 넌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그러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난 뒤 더이상 엄마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방학 때는 한국에 오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전부였다. 엄마의 말대로 그 당시의 나는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학교 다니는 내내 지독한 따돌림을 당했다. 내가 가장 패닉에 빠지는 순간은 아이들이 내게 질문을 던질 때였다. 아이들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너는 거울 보면서 무슨 생각 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무슨 생각 했어? 너는 애들이 왜 너를 싫어한다고 생각해? 너는 우리가 괜히 이런다고 생각해?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네가 사람을 얼마나 거슬리게 하는지, 진짜 몰라?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짜증 나는지 정말 몰라? 왜 대답을 안 해? 너랑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싶은 건데.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은 죄로 거친 욕설과 모욕을 감내해야 했지만 답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입을 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내게 던진 질문의 답을 찾아 몇날 며칠 동안 골몰했다. 거울을 마주 보고는 그러게,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왜 이곳에 있니. 있을 필요도 없는데 굳이 왜 있니. 왜 살았니. 거슬리게. 그러고 보니 몹시 거슬렸다. 귀하게 자란 것치고, 오냐오냐 자랐다는 것치고 나는 귀해 보이지도, 사랑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된 나는 최대한 말을 삼가고 웃지 않기를 택했다. 그러자 모두의 앞에서 욕설을 듣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과 잘 지내고 싶었고 더이상 겉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또 나를 저버렸다. 나만큼이나 눈엣가시인 아이를 지목해 나와 그 아이 중에 누가 더 거치적거리고 역겨운 존재인지 투표를 부쳤다.

혜신은 언제 어디서든 바른말 하기로 유명한 아이였고 그런 이유로 아이들과 융화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혜신이 입을 열면 냄새가 나서 비위가 상한다고 비아냥대기 일쑤였다. 물론 혜신에게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여론이 형성되자 혜신이 지나가기만 해도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막았다. 나도 코를 막았다. 코를 막으면 이상하게 매캐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 싸하고 묵직한 냄새는 분명 환취였지만 그 향이 코끝에서 맴돌 때면 나는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났다.

어느날 혜신을 공격하던 무리 중 한명이 내게 체육시간 후에 혜신을 체육관 창고에 가두라고 말했다. 우리 학교는 컨테이너 박스에 매트리스나 뜀틀, 농구공, 피구공을 넣어뒀는데 주번은 체육시간 후에 뒷정리를 다 해야 교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마침 혜신이 주번이니 창고 문을 밖에서 잠갔다가 하교시간에 열어주라는 것이었다. 그럴 수 없다고 말했지만 아이들은 온갖 이유와 핑계를 대며 나를 부추겼다.

솔직히 김혜신이 우리 다 무시하고 혼자 잘난 척하는 건 사실이잖아. 우리가 걔를 괜히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여러명이 동시에 혜신을 괴롭히는 것이 정당하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수가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증오하고 괴롭히는 데는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야 내 마음이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혜신이 창고에 들어갔을 때 재빨리 철문을 닫았다. 손이 떨려 자물쇠를 닫아거는 손이 둔하게 헛돌았다. 그때 안에서 문을 흔드는 게 느껴졌다. 혜신과 나는 체구도 체중도 엇비슷했다. 우리는 서로 물러서지 않고 문을 사이에 두고 맞섰다. 나는 철문을 잠그기 위해, 혜신은 문을 열기 위해. 안에서 비명이 들렸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치가 길어지자 혜신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수업 시작종이 쳤다. 나는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를 때까지 그 문 앞에서 버텼다. 마침내 혜신이 물러섰고 나는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물쇠를 마저 닫아걸었다. 얼마나 힘을 줬던지 손에 잠금장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따끔거려 확인하자 살이 벗겨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기이한 후련함에 체육관 문 앞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교실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린 순간 나는 창고 안이 수상하게 고요한 것을 느꼈다. 문득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주춤주춤 다가가 문을 도로 열었다. 문 앞에 혜신이 쓰러져 있었고 소변을 지렸는지 체육복 바지가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혜신을 부르며 그애를 흔들어 깨웠다. 그때 지나가던 교감이 우리를 발견했다. 교감이 혜신을 등에 업고 보건실로 내달릴 때 나는 함께 뒤를 따르며 속으로 미안해, 미안해만 반복했다.

 

학폭위가 열렸고 사안이 위중해 징계수위가 높아질 것이라고 담임이 내게 말했다. 내게 그 일을 시킨 아이들의 이름을 말했지만 아이들은 완강히 부인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도 아니고 아예 내게 어떤 말도 한 적이 없다고, 하나같이 그렇게 주장했다. 증거도 없었고 증인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 아이들의 협동심이, 의리가, 서로를 향한 믿음이 그만큼이나 끈끈하다는 것이 한편으로 부러웠다. 왜 나는 끝내 저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지, 나 자신을 한심해하기 바빠 혜신에게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못했다.

혜신은 문을 사이에 두고 내 목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교감도 내가 혜신의 뺨을 내리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어깨를 흔들어 깨우다가 볼을 톡톡 두드렸을 뿐이지만 교감의 눈에는 내리치는 것으로 보였다고 했다. 놀랍게도 혜신은 다른 아이들이 내게 그런 짓을 시키고도 남을 만하다고 목소리를 내주었다. 혜신의 부모님은 처음에 강제전학이 아니라면 학폭위의 조치에 불복하고 행정소송을 제기하겠다며 교육청과 교장을 압박했다. 하지만 엄마가 무릎을 꿇고 자발적으로 전학을 가겠다고, 다시는 혜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각서도 쓰게 하겠다고 혜신의 부모님에게 빈 후 마음을 돌린 듯했다. 나는 학교에서 내릴 수 있는 최대 정학 일수인 30일을 받고 조기유학길에 올랐다.

 

한국을 떠나게 된 사정이란 이러했다. 내 이야기가 끝낸 후에 이모부는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모부의 손은 따뜻하고 조금은 무겁게 느껴졌는데 그 무게감이 싫지 않았다.

 

*

 

캐나다 학교의 겨울방학은 12월 중순부터 1월 초까지였다. 단 2주이지만 그래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사실 조금이나마 나아진 내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평생 모르고 살았던 감정들, 그러니까 소속감이라든가 안정감이라든가 자부심 같은 것이 내 안에 싹텄다는 것을 보이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비행기표가 비싸니 내년 여름방학 때나 오라고 내 말을 단칼에 잘랐다. 나는 서운함을 감출 길이 없어 며칠간 우울함에 빠져 있었다.

 

방학식 날 학교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발원지는 과학실이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 안내방송과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바깥으로 탈출했다. 캐나다 학교는 건물이 거의 2층 정도로 야트막했다. 10여분 만에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가 수업을 듣던 건물 맞은편 2층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프링클러가 제때 작동했고, 인근 소방서에서 대원들과 살수차가 금방 도착해 한시간도 되지 않아 화재는 진압되었다. 인명피해도 없었다. 곧바로 사람들이 학교로 몰려들었다. 학교가 주택단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 주민들이 전부 들이닥친 것이었다. 선생님은 방학식을 생략하기로 했다며 모두 곧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가방과 짐을 챙겨 나오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내화를 신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부모들을 만났다. 길 한복판에 서서 아이들이 무사한지, 얼굴과 손과 발을 확인하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모는 미용실 앞치마를 그대로 두르고 학교로 내달리고 있었다. 코앞에 있는 나를 못 보고 스쳐 지나가는 게 우스웠지만 얼핏 확인한 이모의 얼굴은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이모는 굽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뛰었기 때문에 걸음걸이가 불안했다. 내가 뒤에서 이모를 불렀는데도 정신없이 앞만 보고 뛰다가 결국 돌부리에 걸려 나동그라졌다. 나는 쓰러진 이모를 부축해 벤치에 앉혔다. 이모의 양손이 심하게 까져 피가 맺혀 있었다.

얼마나 경황없이 왔는지 이모의 손에는 지갑도 휴대폰도 없었다. 겨울 날씨에, 평소 미용실에서 입는 얇은 니트 카디건만 걸쳤는데도 이모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불길은 보지도 못했고 그저 먼 곳에서 검은 연기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모는 내가 재난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안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이모가 나를 끌어안고 호흡을 골랐다. 맞닿은 피부로 두근거리는 심장의 진동이 전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아주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 소리도 들렸다. 이모는 그렇게 한참이나 나를 끌어안은 팔의 힘을 풀지 않았다. 아주 강한 힘이 나를 보호하는 감각이 좋았다. 그때 이모가 윽,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무언가에 세게 두드려 맞고서 고통을 참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이모, 괜찮아요?”

이모는 대답 없이 윽, 윽,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것이 이모가 울음을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이모는 걱정이 많아졌다. 나를 더 자주 단속했고 건강염려증도 심해졌다. 학교에 화재가 난 일이 이모의 어떤 트라우마를 자극했는지 알고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일 것이다. 나는 엄마와의 전화통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밴쿠버의 시간은 한국보다 열여섯시간 늦어서 엄마와 통화를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잘 맞춰야 했다. 가장 적당한 때는 내가 학교에 갈 준비를 하며 아침을 먹는 8시 30분이었다. 한국은 밤 12시 30분이었고 엄마와 아빠가 잠들 무렵이었다. 엄마 아빠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게 학교생활은 어떤지, 수업 내용은 몇 퍼센트나 알아듣고 있는지, 친구는 몇명이나 사귀었는지 물었다. 나는 일본에서 온 아이 한명과 중국에서 온 아이 한명을 사귀었다. 한번도 집에 초대한 적은 없지만 친하다고 말하기 부끄럽지 않을 만큼 친해졌다. 엄마는 웬만하면 영국인 아이와 프랑스 아이를 친구로 사귀라고 했다. 10학년이 되면 프랑스어 수업도 필수로 들어야 하는데 프랑스 친구를 사귀면 말이 금세 늘 거라고 했다.

 

이틀 혹은 사흘에 한번씩 하던 통화는 일주일에 한번으로 줄었다. 나는 주말에 걸려오는 전화마저도 피하기 일쑤였는데, 엄마는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 이모는 나를 불러 엄마에게 바꿔주었다.

그렇게 억지로 통화를 하고 나면 나는 괜히 이모에게 분풀이를 했다. 진짜 화를 낸 것은 아니지만 공연히 밥을 먹지 않거나 휴대폰을 두고 친구 집에 놀러갔다. 이모와 이모부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나를 걱정해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친구 집까지 찾아오면 나의 이상한 반항 행위는 종료되었다. 내가 무사함에, 이모가 자신도 모르게 이름 모를 신에게 감사하다는 기도를 할 때, 화를 낼 기력도 모자라서 차 뒷좌석에 앉아 그냥 내 손을 가만히 쥐고 있을 때, 내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그 시기의 나는 이모와 이모부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불안감을 조장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왜 시시때때로 그런 충동을 느꼈는지, 그리고 왜 그때마다 매번 실행에 옮겼는지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만 나조차도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때의 나는 그것이 손에 잡히는 행복을 확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

 

엄마는 처음에 내가 일부러 전화를 피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화를 피하면 이런 문자를 남겨두곤 했다. ‘하나. 캐나다가 그렇게 좋아? 아주 신났네. 잔소리 안 들으니까 그냥 살판났지?’

농담처럼 던진 말이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나는 그곳에서 살 만한 삶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겨울방학이 끝난 후에 학교를 핑계로 더 노골적으로 통화를 피하자 엄마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더는 시차를 따지지 않고 밤이든 낮이든 아무 때나 이모에게 전화해 나를 바꾸라고 했다. 엄마는 혹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가 나의 태평한 목소리를 듣고는 걱정되니 일주일에 두번은 전화를 하라고 타일렀다. 그럴수록 나는 엄마와 대화하는 것이 불편해졌다. 이모, 이모부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이모가 엄마와 통화한 지 얼마나 됐느냐고 물으면 꽃밭에서 노니는 듯 안온했던 마음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급속도로 냉담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도 이상을 느꼈을 것이다. 성의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는 나에게. 엄마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일주일이건 보름이건 두문불출하고, 어느새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까맣게 잊은 듯이 행동하는 나를 보고 분명 뭔가가 틀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매일 하나씩 늘어났다. 이모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내 머리를 집에서 깔끔하게 다듬어주었다. 내가 오렌지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다고 하자 미용실에서 탈색약과 염색약을 챙겨 와 그날 밤에 바로 염색을 해주었다. 나는 우리 집 지붕과 똑같은 색의 오렌지빛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다. 귀가 트여 학교 수업도 조금씩 따라가기 시작했다. 경영이나 과학, 프랑스어는 여전히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예술, 진로 및 적성, 수학 과목은 편안해졌다. 둘이던 친구는 넷으로 늘었다. 엄마의 소원대로 프랑스인 친구를 사귀었지만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여름방학에도 집에 가지 않기로 선언하자 결국 엄마는 폭발해버렸다. 여름방학은 두달이 좀 넘는 기간이었다. 엄마는 방학이 시작되기 두달 전부터 한국에 오면 제주도로 다 같이 가족여행을 가자고,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자며 전에 없던 태도로 나를 구슬렸다. 나는 안 그래도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수업을 따라가기 힘드니 방학을 틈타 복습과 예습을 제대로 하고 싶다고 우물쭈물 말했다. 그럴듯한 핑계였지만 방학만을 바라보고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던 엄마로서는 무언가 강렬한 위화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것도 사랑일까? 내가 집으로 가길 거부하자 엄마는 생활비를 끊겠다고 엄포를 놓더니 며칠 후에는 아무래도 수상하니 눈으로 확인을 해야겠다며 직접 캐나다로 오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방문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마음이 불안하고 껄끄러워졌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오랜만에 캠핑을 떠났다. 자주 가던 버나비마운틴 쪽이 아닌 밴쿠버의 컬투스 호수 쪽으로 이모부가 캠핑장을 예약했다. 캐빈 스타일의 텐트가 마련되어 있었고 앞에는 호수, 뒤에는 울창한 숲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낮에는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로 호수가 시끄러웠지만 해가 지자 낚시꾼 몇몇과 우리 가족만 남게 되었다. 달빛이 반사되어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호수 표면에 이따금 물고기들이 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녁을 먹으며 이모부는 마이클 볼튼의 ‘Somebody to You’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척이나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엄마의 신신당부를 잊고 ‘그 일’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정확히는 내 사촌에 대한 이야기를. 사촌은 나보다 3개월 먼저 태어났는데 이모와 이모부가 결혼한 지 10년 만에 어렵게 얻은 아이라 집안의 보배였다고 들었다. 나는 사실 사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엄마가 그애를 안고 있는 사진이 내 사진첩에 있어서 한동안은 당연히 그 아이를 나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어느날 자세히 보니 나와는 다른, 다르지만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바뀐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는 말은 다행히 하지 않았다.

이모는 아마 그 사진을 자기가 찍어줬을 거라고 했다. 사촌이 태어났을 때 엄마가 무척 예뻐했다고, 배 속에 있는 아이도 부디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며 이모와 엄마는 다섯살 때까지 우리를 자매처럼 함께 키웠다고 했다.

 

나는 원래 그렇게 말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체로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바라는 일이 생겨도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여겨 되도록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다른 영혼이 씐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이모가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정말?”

“네, 이모가 제 엄마였으면 저는 나쁜 애가 안 되었을지도 몰라요. 지금보다 훨씬 착했을 수도 있고요.”

“왜 네가 나쁜 애라고 생각해. 이모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모르겠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보면 다들 마음이 불편하대요.”

이모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어나갔다.

“이모, 이모부랑 같이 있으면 뭔가 좀 편안한 것 같아요.”

“우리도 그래, 하나야. 네가 와 있는 동안 우리는 10년치 웃을 거 다 웃었어.”

이모부가 내게 말했다.

“정말요?”

“응.”

“사실 저도 그래요. 저도 16년치 행복을 몰아 받은 것 같아요.”

그때 우리 텐트와 가까운 호수에서 50센티도 넘을 것 같은 큰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우리는 함께 와,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순간 나의 마음과 이모, 이모부의 마음이 완전히 겹쳐졌다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엄마는 지금도 내가 이모와 이모부의 딸로 살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난생처음 경험한 외국 문화에 도취되었다거나 뒤늦은 사춘기가 와서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고 살았다는 식으로 나의 유학생활을 한동안 폄하했으니까. 내가 이모와 이모부 때문에 캐나다에 남고 싶어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엄마는 짧은 시간 안에 내가 그렇게까지 이모를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겼다. 내게는 뒤늦은 사춘기가 와서 흑역사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비꼬지만 오히려 당시에는 나보다 이모를 수상하게 여기며 공격했다. 이모가 나를 이용해 적적함을 달래려 한다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 나를 캐나다에 주저앉히려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끝까지 몰랐다. 딸이 되고 싶다고, 비어 있는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싶다고 분별없이 이모에게 매달린 나를 이모가 완곡하게 거절했다는 것을.

 

금방이라도 쫓아와 나를 데려갈 것처럼 굴더니 엄마는 회사가 바빠졌다는 이유로 입국을 계속해서 미뤘고,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어서야 캐나다에 왔다. 나는 1년하고도 반년 만에 만난 엄마를 나도 모르게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알아차릴 정도였다.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티 나게 거리를 두자 엄마는 안달을 내며 나를 추궁했다.

“죄 지었니? 뭔 짓을 하고 다니기에 엄마를 똑바로 못 쳐다봐?”

난생처음으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보름간 나와 대치상태로 어색한 시간을 보내던 엄마는 무슨 마음에선지 갑자기 2층으로 올라와 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게 어떻겠냐고 회유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이야, 그게. 그러다가는 엄마가 말한 대로 나는 정말 망할 거야.”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음에도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가 다가올수록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방법도 많다며 어느새 구체화된 계획들을 늘어놓았다. 이모는 이제 겨우 적응해서 친구도 사귀고 잘 지내고 있으니 고등학교는 이곳에서 마치게 하는 게 어떻겠냐고 엄마를 타일렀다. 그 말은 지극히 타당했지만 엄마는 전에 없이 이모를 차갑게 대했다. 이모 때문에 내가 헛바람이 들었다고, 아주 부모고 형제고 다 버리려 한다며 억지를 부렸다. 비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분명 엄마가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게 그때 일을 언급하는 데에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마음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자신의 판단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곳에서 아주 몹쓸 인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야 그때의 패악질이 덜 민망할 테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이모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엄마를 말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내 얘기는 어차피 안 들을 테니 이모가 엄마를 설득해달라고. 엄마는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면서 항상 엄마로서 딸의 미래를 결정할 마땅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엄마가 자리를 비웠을 때 나는 이모의 손을 잡고 그녀를 뒷마당으로 이끌어 다짜고짜 따졌다.

“제가 가면 이제 어쩌실 거예요?”

나는 이모 앞에만 서면 당돌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2층 방은 창고가 돼요? 해바라기는 누가 가꾸고 이모 새치 염색은 누가 해줘요? 우리는 오로라도 못 봤고 미국으로 여행도 아직 안 가봤는데요.”

이모는 한참 만에 입을 뗐다.

“모두 그대로 둘게. 2층 방도 그대로 두고 해바라기는 내가 너 대신 잘 키울게. 머리는 네가 다시 와서 염색해줄 때까지 그대로 둘게. 그곳에서 견디기 힘들면 다시 돌아와. 성인이 되어서 오면 더 나을 거야. 여기는 네 집이야.”

한국으로 돌아갈 일을 상상하면 눈앞이 깜깜했다. 캐나다에서 평안을 느낄수록 이전 생에서의 삶에는 큰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나는 한국을 이전 생처럼 나와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간은 악몽과도 같아서 차마 꿈으로도 다시 꾸고 싶지 않은 생애였다. 내가 과장해서 기억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의 마음이 그랬으니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이모는 엄마 편에 서서 나를 설득했다. 너희 엄마도 생각이 있을 거라고, 막무가내처럼 보여도 본심은 그게 아닐 거라고, 이곳에서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격이 바뀌었으니 너는 한국에 가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실현되지 않을 것만 같던 일이 결국 일어났다.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엄마는 현지가이드와 함께 다시 유학원을 통한 한국 고등학교로의 전학수속을 알아보았고 나는 10학년 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열여덟살의 나이에 고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고 졸업 후 성적에 맞춰 수도권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캐나다는 그후로 한번도 가지 않았다. 한국이 견딜 만해서는 아니었다.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서도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 나는 내 삶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지만 의외로 더 불행해지지도 않았다. 이모 말대로 캐나다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되기는 한 것 같았다.

이모를 생각하며 자주 울었다. 캐나다 버나비의 공원이, 밴쿠버의 호수가, 연락이 끊겨버린 일본인 친구와 중국인 친구들이, 그리고 해바라기가 그립기도 했지만 찾아갈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이모에 대한 실망감과 오기로 그곳을 외면했지만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캐나다에서의 좋은 기억을 내 안에 잘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의심할 여지 없는 사랑으로만 가득하던 시기를 훼손할 가능성은 모두 배제하고 싶었다. 그때 느낀 그리움과 슬픔은 애매모호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가져본 것 중 가장 확연하고 선연한 감정이었다. 이모는 1, 2년에 한번씩, 비행기표를 끊어줄 테니 한달만이라도 머물다 가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매번 다른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

 

요즘은 이모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빌라나 아파트가 아닌 주택을 찾으려다보니 경기도 남부 쪽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이모는 마당이 있는 집을 원했고, 고즈넉하고 사람이 붐비지 않는 동네면 더욱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주어진 예산에서 조건에 맞는 집을 찾기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외진 곳으로, 낯선 동네로 향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영 불안하고 변변치 않아 보이는 매물인데도 이모는 보는 곳마다 이만하면 훌륭하다며 계약하는 게 어떻겠냐고 내게 물었다. 이모가 내 의견을 1순위로 생각할 때, 내게 허락을 구할 때 나는 이모의 보호자가 된 기분에 더욱 신중해졌고 그래서 자꾸 한곳만 더, 다른 동네도 한번 더, 하면서 계약을 지연시켰다. 이모는 어디든 좋으니 어서 짐을 풀고 편안히 쉬고 싶은 것 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우리 집에서 머무는 일은 감정 소모가 큰 일인 모양이었다. 오늘도 집을 세곳이나 보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모를 흘깃 보니 체력이 많이 깎인 듯해 걱정스러웠다. 나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이모에게 말을 걸었다.

“이모. 봄이 오면 우리 마당에 꽃 심는 게 어때요?”

“좋지. 나도 너랑 같은 생각.”

“무슨 꽃 심을까요?”

이모가 나를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랑 같은 생각.”

“해바라기요?”

“그게 기본이지. 고구마도 심을 거야. 나중에 구워줄게. 맛탕도 할까.”

아직 심지도 않은 고구마를 어떻게 요리해 먹을지 얘기하며 우리는 도로 위를 달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퇴근시간과 맞물려 교통체증이 심했다. 조수석에서 캄캄하기만 한 하늘을 한참 살피던 이모가 지나가는 말처럼 내게 물었다.

“하나, 여기서 현장까지는 멀까?”

“무슨 현장이요?”

“거기 말이야. 수련원 있던 곳.”

그곳으로 가려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왜인지 무심코 꺼낸 듯한 그 말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참아왔다가, 이제야 겨우 용기를 내어 꺼낸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멀지 않아요. 가볼까요?”

“찾을 수 있겠어?”

“몇년 전에 가본 적이 있어요.”

나는 이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신호를 받자마자 차를 돌렸다. 인적이 드물고 캄캄한 길을 계속해서 달렸다. 사건현장 주변에는 여전히 캠핑장으로 운영되는 숙박시설들이 있었다. 사건이 있었던 현장은 건설자재와 벽돌, 건설폐기물로 지저분했다. 자동차와 사람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가 허술하게 쳐져 있었는데 오래도록 관리되지 않은 것이 느껴져 을씨년스러웠다. 이모는 두리번거리며 이곳이 정말 그 자리가 맞느냐고 눈으로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바리케이드를 넘어갔다. 나는 차에 상향등을 켜고 따라 내렸다.

“아무것도 없네.”

시장과 시의원들이 한때는 이곳에 위령탑을 세우겠다고, 추모공간을 만들겠다고 거창하게 공표하기도 했지만 소리 소문 없이 무산되었다. 이모의 얼굴에 스친 노여움은 생경했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모는 이곳에서 딸을 잃었다. 그애는 나의 사촌. 나는 한때 그 아이의 자리를 탐냈다. 이모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희미한 입김이 공기 중에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멀리 도망치고 싶었는데, 나도 내가 참 이상하다. 결국 내 발로 찾아왔잖아, 이렇게.”

“이모, 왜 한국에 오신 거예요?”

이모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슬픔을 찾으러 왔지. 어느날 문득 깨달았어. 이제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는 걸.”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슬픔을 찾기 위해 왔다니. 내가 대답을 기다리듯 이모를 빤히 쳐다보자 이모는 마주 보며 웃어주었다.

“내가 내팽개친 슬픔을 회수해야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때는, 그러니까 20년 전에는 말이지, 떠나야 했어. 더럽고 치사하고 천박한 이 땅에 실망이 너무 커서 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시간이 지나고 늙으면 다 무뎌질 거라고 누군가가 말했거든. 그 말을 믿고 싶어서 믿어버렸어. 총기가 흐려지는 속도로 내 안의 슬픔이 옅어지기를 바랐지. 운 좋게 휘발된다면 더 좋을 테고.”

저무는 삶처럼 슬픔도 고통도 앙심도 잠잠해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딸의 얼굴이 뇌리에서 희미해지기를, 엄습하는 그리움도 무뎌지기를. 이모는 말했다. 그런데 새싹같이 파릇파릇한 슬픔이 매일 움텄다고, 눈을 질끈 감아도 암흑 속에서 유독 딸의 얼굴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고.

“어떤 슬픔은 다른 슬픔보다 확실히 가소로워. 새로운 땅에서 그렇게 많은 수치와 수난을 겪었지만 다 견딜 만했어. 이 땅에 돌아오는 것보다는 뭐든 낫다고 생각하면서 버티니까, 고통도 시시했어. 여기서 성실하게 슬픔을 감당한 다른 유가족들은 어떨까. 나랑은 좀 다를 거야. 나는 이 땅이 싫어서 떠났는데 여기서 한발짝도 못 나아간 느낌이야.”

 

이모는 깜빡 잠이 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눈을 감았다. 상향등 불빛이 이쪽을 비추고 있어 나는 이모 얼굴에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들, 깊이 팬 주름과 검버섯과 주근깨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15년 전만 해도 이모에게 없던 것들이었다. 나는 그 흔적이 새겨지는 과정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가슴 아플 정도로 아쉬웠다. 이모는 한참 만에 눈을 떴다.

“한국에 오니 진아가 무성해.”

잊고 있던 이름이 그제야 떠올랐다. 나의 사촌 이름은 진아. 나보다 3개월 일찍 태어난 집안의 보배. 총명하고 귀했던. 나는 내가 제대로 살아내지 못할 때마다 진아의 짧은 생애를 선망하고는 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사방에서 진아가 몰려오는 기분이네. 긴 시간 아등바등 살았는데도 삶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내가 슬픔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기 때문인가봐.”

제대로 슬퍼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쉽게 이해되기도 했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줄 알면서도 얼음장 같은 현실에 몸을 담가야만 하니까. 그게 삶을 나아지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모가 본격적으로 고통을 견뎌보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그 슬픔을 잘 버텨내도록 곁에서 지켜야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오래전에 너희 엄마의 말을 듣고 찔렸던 것 같아. 내 욕심을 채우려고 너를 캐나다에 주저앉히려 한다는 말은…… 사실이기는 했지. 속내를 간파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어. 하나를 하나로서 사랑하는 건지, 하나에게서 진아의 모습을 찾고 있는 건지 헷갈렸거든. 여러모로 네게 떳떳하지 못해서 차마 떠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어.”

 

*

 

돌아가는 길은 교통체증이 풀려 차가 많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적막했다. 라디오를 틀자 거짓말처럼 마이클 볼튼의 ‘Lean on Me’가 나왔다. 이모부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중 하나였다. 이모도 알아챈 듯 말했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노래네, 이모가 중얼거렸다. 이모가 좋아하는 노래라서 이모부가 자주 불렀던 건데 그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먼 곳에서부터 희미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금세 소방차 여러대가 우리 차를 추월해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모든 일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내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망가져버린 듯해 모든 의욕이 꺾이곤 했다. 이미 글러먹은 삶을 저버리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세상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일들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라고, 인간은 무작위로 그 사건들에 꿰어진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내가 따돌림을 당한 일과 이모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은 일, 내가 살아남은 일과 혜신에게 고통을 준 일, 내가 캐나다를 떠난 일과 이모가 한국으로 돌아온 일, 그 모든 일들의 인과관계를 일일이 따질 수는 없는 거라고, 나는 분열하는 내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했다.

“네가 없었으면 이 길을 혼자 올 수는 없었을 거야. 고맙다, 하나야.”

“아니에요.”

“이모가 정말 고마워. 정말이야.”

정말 이상하게도 학교에 불이 난 날이 떠올랐다. 그때 이모가 윽, 윽, 하며 간신히 울음을 꼴깍꼴깍 삼키던 순간이. 그때 느꼈던 야릇하고 불손한 마음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감정이 나를 뭉근하게 내리눌렀다.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게 제 꿈이었어요. 처치곤란인 적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정말 간절해지고 싶었어요. 남아도는 그런 거 말고요.”

유리창이 닫혀 있는데도 어디선가 다시금 매캐한 연기 냄새가 끼쳐와 내 코끝을 자극했다. 비명 소리는 내 안에서 들리는지 밖에서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깨끗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앞을 봐야지.”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정신을 놓고 이곳에서 멀어질 뻔했지만 이모가 나를 건져올렸다. 이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나는 항상 하나가 간절했는데. 살아 있는 인간들 중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라곤 네가 유일했어.”

달리다보니 우리보다 앞서간 소방차가 사고현장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며 본 바로는 불씨가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아주 잠시 그 장면을 눈에 담았다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다. 아무도 안 다쳤나봐. 모두 무사한 것 같아.”

그것이 이모의 추측일 뿐일지라도 간절히 믿고 싶어졌다. 오늘은 모두 무사하다는 그 말을.

 

* 청소년수련원 화재참사와 관련한 대목들은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 화재사고백서』(경기도 1999), 씨랜드 화재 참사 희생자 유족회 『씨랜드 참사 백서: 그 날 밤 씨랜드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2000),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재난을 묻다』(서해문집 2017)를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