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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통해 본 ‘건국’ 논쟁

 

 

오제연 吳瑅淵

『역사비평』 편집주간, 성균관대 사학과 부교수. 저서 『‘손상’의 변증법』, 공저서 『쟁점 한국사: 현대편』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 『4월혁명의 주체들』 『한국 현대사 연구의 쟁점』 『저항의 축제 해방의 불꽃, 시위』 등이 있음.

ohstrike@hanmail.net

 


1. 대한민국 ‘건국’ 논쟁의 재개

 

지난 2024년 8월 6일, 정부는 새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했다.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그간 행했던 언행이 알려지면서 곧바로 큰 논란이 일었다. 현정부 들어 역사 관련 주요 공공기관장에 소위 ‘뉴라이트’ 인사들이 계속 임명되고 있다는 우려 속에, 역사학계에서는 48개 관련 학회 및 연구소가 모여 독립기념관장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독립기념관장을 둘러싼 여러 논란 중 하나는, 그가 뉴라이트 인사들이 오랫동안 추진해온 ‘건국절’ 제정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2023년 12월 한 보수단체 강연에서 그는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그게 역사를 정확하게 모르는” 거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시작”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1 이런 언행이 건국절 주장으로 규정되자, 독립기념관장은 자신은 이전부터 건국절 제정 시도를 비판해왔노라며 해명했다. 그리고 “건국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시작돼 1948년 정부 수립으로 완성됐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2

본인이 부인하고 나아가 정부 역시 건국절 제정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건국절 논란은 더이상 커지지 않았다. 하지만 건국절 제정 건과 별개로 대한민국의 ‘건국’ 기점을 둘러싼 이른바 ‘건국’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독립기념관장 문제로 광복절 행사가 파행으로 치닫자 대통령실은 “우리나라 건국은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이어져온 과정으로서 특정 시점을 정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입각할 때 통일 시점이 건국일이 된다”고 진화에 나섰다.3 하지만 이는 윤석열 대통령의 이전 발언과는 차이가 있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으로 규정했다. 석달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5백만원을 기부하며 이승만의 독립운동 역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2024년 7월 한국자유총연맹 70주년 기념식에서는 “광복 이후 격변과 혼란 속에서도” 이승만이 “이 땅에 자유의 가치를 심고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하였음을 분명히 했다.4

대통령의 발언은 건국 시점을 특정하기 어렵고 결국 통일로 건국이 완성된다고 한 대통령실의 설명과 배치되지만, 너른 시야에서 보자면 그보다 공통점이 더욱 중요하다. 첫째 1919년과 1948년을 건국의 과정으로 연결하는 연속론과 단계론, 둘째 헌법상 영토조항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조, 셋째 건국의 아버지(국부)로서 이승만. 이는 앞서 살펴본 독립기념관장의 주장과도 상통하며,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과도 상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기념관장 선임 문제로 촉발된 ‘건국’ 논쟁은 내년 해방 80년, 이승만 탄생 150주년을 맞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지하다시피 ‘건국’ 논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에 이 글은 우선 이전 논쟁의 궤적을 되돌아보고, 주요 논거들과 그 역사적 의미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한국 민주주의의 흐름과 연결하여 ‘건국’ 논쟁을 근본적으로 성찰해보고자 한다.

 

 

2. ‘건국’ 논쟁의 궤적

 

애초부터 ‘건국’ 논쟁은 이승만 재평가, 이승만 선양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1995년 조선일보는 1월부터 1년 내내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이라는 제목의 연재기사를 내보냈는데,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건국기념일을 정부가 제대로 기념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5 이때부터 이승만 재평가 및 선양과 건국절 제정 주장은 짝을 이뤄 하나의 담론을 형성하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2002년부터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만들어진 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과 보수언론들은 한국 근현대사 검정 교과서가 친북좌파 성향을 보인다며 공격했다. 자칭 타칭 뉴라이트로 불리기 시작한 보수 학자들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비판하고 이른바 ‘대안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2005년 ‘교과서포럼’을 조직했다.6 그 주도 인물 중 하나인 이영훈은 2006년 7월 31일자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대한민국은 모든 나라에 있는 건국절이 없는 나라”이며 특히 미국에도 “건국기념일”이 있으니,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취지의 글이었다.7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건국기념일이라고 왜곡 혹은 잘못 이해한 이 칼럼은, 그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건국절 논란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8

이후 2008년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건국’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미 2007년 11월 뉴라이트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한 상태에서, 이명박정부는 2008년 출범 직후 이 위원회를 기초 삼아 ‘건국 60년 기념사업단’을 만들었다.9 여기에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이 2008년 7월 3일 광복절의 명칭을 ‘건국절’로 개칭하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2007년 9월에 이어 국회에 다시 제출했다. 2008년 8·15 행사도 ‘제63주년 광복절 및 대한민국 건국 60년 중앙경축식’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 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은 2번만 언급한 반면 ‘건국’은 9번이나 언급했다.10 하지만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자는 주장은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야당은 물론 독립운동단체 및 역사학계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2008년에 정점을 찍은 첫번째 ‘건국’ 논쟁은 건국절 제정에 이르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두번째 ‘건국’ 논쟁은 박근혜정부 때 발생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 68주년’을 언급했다.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는 이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여야 갈등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여당 새누리당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지정하는 방안을 곧 논의하기 시작했다.11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정부 역시 2016년 11월 25일 공개한 편찬 기준에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및 파면되고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두번째 ‘건국’ 논쟁은 한순간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윤석열정부 들어 세번째 ‘건국’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건국’ 논쟁을 되돌아봤을 때 논쟁의 구도는 비교적 명확하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국의 기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1919년론)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의 기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1948년론)의 대립이다. 1948년론은 항상 보수정권하에서 공세를 폈다. 이 주장의 가장 핵심적인 논리는 1919년에 수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근대국가의 성립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현실정치와 국제법상 국가 성립의 기본 요건을 구비한 국가로서 대한민국 탄생은 1948년 8월 15일이라고 단언한다. 이때 탄생한 대한민국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한민족이 1945년 해방 이래 3년간의 진통 끝에 탄생시킨 최초의 완성된 국가라는 것이다.12

다만 2008년 첫번째 ‘건국’ 논쟁 때 나온 1948년론이 1919년과 1945년의 의미를 경시하고 이와 대립각을 세우는 경향이 강했다면, 2016년 두번째 ‘건국’ 논쟁 때 나온 1948년론은 1919년 및 1945년의 연속성을 적극 인정하는 방향으로 그 논리와 내용을 조정했다. 즉 역사적 배경과 정신사적 측면에서 대한민국은 대한제국 선포 당시 확립한 국가주권과, 3·1운동의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명문화한 국민주권의 바탕 위에서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대한민국은 1919년에 수태되고, 임신과정을 거쳐 산고 끝에 1948년에 탄생했다”는 식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1919년을 ‘정신적 건국’이라 칭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대한제국 선포 이후 대한민국 건국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쳤으므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45년 해방, 1948년 대한민국 탄생은 결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며, 상호공존해야만 하는 존재이자 통합된 과정의 산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3 이번에 세번째 ‘건국’ 논쟁을 촉발한 현 독립기념관장의 주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러한 연속성의 논리에서도 핵심은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 완성’에 있다.

1948년 건국론에 대한 주된 반박논리 및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근대국가의 구성요소를 건국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것은 “식민지를 지배하기만 했지 통치당한 경험이 없는 서구 국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에 불과하다. 국제사회의 승인도 결국 제국주의 강대국의 처분이었을 뿐이다. 반면 한국은 식민지배를 받으며 이에 저항한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근대국가의 구성요소를 단순하게 형식적·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14

이같은 반박은 1919년 건국론으로 이어졌다. 1919년론의 핵심 근거는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과 이 헌법으로 탄생한 이승만정부의 입장이다. 제헌헌법은 전문을 통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고, 이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음을 밝혔다. 즉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하고 1948년에 ‘재건’되었음을 명백히 했다. 이승만정부 역시 처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라는 연호를 썼고 그 기점을 1919년으로 삼았다. 그래서 1948년 당시 정부 문서를 보면 그 연도가 ‘대한민국 30년’으로 되어 있고, 이승만 대통령 또한 연설 등에서 당시를 ‘대한민국 30년’으로 지칭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는 1919년부터 시작”되었음이 명확하다고 1919년론은 주장한다.15 시간이 지날수록 1919년론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앞세웠다. 문재인정부가 2019년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건국 100년’을 강조한 맥락도 여기에 있다.

 

 

3. ‘건국’ 논쟁의 허와 실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에 이루어졌으며(혹은 완성되었으며), 나아가 이를 기념해 건국절을 제정해야 한다고 공세를 펴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승만을 선양하고자 한다. 그들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기억하며, 선양을 위한 기념관 건립까지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제헌헌법 전문을 통해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하고 1948년에 이를 ‘재건’했다는 점을 강조한 이는 이승만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회식사 및 대통령 취임사 등을 통해 1919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재건’의 논리를 내내 견지했다. 이는 앞서 살펴봤듯이 1919년론의 핵심 근거이며, 거꾸로 1948년론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지점이다.

당시 이승만은 왜 1919년 건국론을 주장한 것일까? 이에 관련하여 역사학자 도진순의 연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이 1919년 건국론을 주장한 근본 이유는, 김구와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의 정부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1919년의 임시정부, 특히 처음부터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한 한성(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기점으로 삼아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또한 1948년 5·10선거에 의해 수립된 제헌국회 및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 단독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의회이며 중앙정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결국 남한의 배타적 정통성에 입각한 통일이라는 반북·반공적인 입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16

이승만은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하여 ‘민국’ 연호를 선호했고, 이같은 민국 전통이 “미국의 독립선언보다 영광스러운” 것이라 강조했다. 즉 민국 연호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강하게 의식한 것으로 이승만 자신을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과 비교하는 화법이었다. 한마디로 1919년 건국론의 창시자는 이승만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승만 자신에 대한 선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17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승만 선양자들이 1948년 건국론을 주장하며 1919년론을 공격하는 것은 실로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최근 1948년 건국론자들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연속성을 적극 인정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1948년 건국론이나 건국절 제정 시도가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친일파를 건국의 주역으로 역사 세탁하려는 꼼수라 비난하는 여론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48년 당시 이승만의 본의를 늦게나마 이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여전히 1948년론을 주장하는 것은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근대국가의 3요소에 대한 단순하고도 기계적인 이해와 더불어,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달리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을 통해 합법정부로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1948년 12월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은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다. 역사학자 신용옥의 연구에 따르면 19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할 때, 유엔임시위원단이 감시·협의할 수 있었던 남한만의 합법정부로 승인했을 뿐이며, 대한민국을 독립주권국가로 승인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의 국가, 즉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제헌헌법상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애초 유엔총회가 결의한 통일국가에 이르지 못한 미완성의 분단국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당시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스스로를 유엔총회가 목표로 했던 ‘전국정부’로 자처한 것은 총회의 결의를 분단적 사고방식에 따라 부정 혹은 오독한 것이며, 북한을 흡수하는 것 이외의 다른 통일방법은 있을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이었다.18

이를 바탕으로 신용옥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 혹은 건국일로 정하자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비판한다. 나아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끌어오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합법성을 가져와 양자를 연속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역시, 적대적 남북관계와 분단을 고착화하고 상대에 대한 적대적 소멸의 흡수통일 이외의 통일방법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역사인식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역사를 대한민국사의 관점으로 획일화하는 문제를 낳을 뿐이다. 실제로 ‘건국’ 논쟁 과정에서 부상한 대한민국사 중심의 역사인식은 그간의 역사연구 성과들을 퇴행시키며 협애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9 특히 이 과정에서 부활한 낡은 ‘정통론’ ‘법통론’은 역사인식과 상상력은 물론 실천의 폭을 크게 제약하고 있다.

 

 

4. ‘정통’과 ‘법통’에 갇힌 ‘건국’ 논쟁

 

1948년 대한민국 건국론이 수차례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힘을 얻지 못한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친일의 역사 세탁이라는 불순한 의도 및 성급한 건국절 제정 시도가 몰고 온 역풍과 더불어 ‘헌법’이라는 강력한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봤듯이 제헌헌법에 명시된 1919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재건’의 논리는 1948년론이 넘기 힘든 역사적 장벽이다. 그리고 현행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은 1948년론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적 장벽이다. 1948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최근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도 분명 이와 관련이 있다. 역으로 1919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제헌헌법은 물론이고 현행헌법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즉 임정 법통론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손쉬운 무기다.

해방 직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의 주도권을 의미했던 임정 법통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이승만에 의해 전유되어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비록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언급은 헌법 전문에서 삭제되었지만, 역사학계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3·1운동의 성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귀결되었음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임시정부 법통과 대한민국 정통성 강조의 바탕에는 반북·반공적인 기조가 짙게 깔려 있었다.20

1980년대 이후 진보적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기성 보수학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에 대한 비판과 도전이 본격화되었다. 우선 임시정부가 정부로서는 물론 독립운동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도 거의 수행하지 못한 채 “하나의 단위 독립운동 단체로 떨어져 갔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21 즉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영도기관으로 수립되기는 했지만 운동 세력의 범위, 활동 등에서 많은 한계를 지닌 하나의 독립운동단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인적 구성, 이념 등을 계승하지 못한 정치 세력들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임정 법통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22 그 대신 다양한 독립운동세력들이 주목받으면서 임시정부의 위상은 갈수록 낮아졌다. 그리고 임시정부만의 “배타적 정통성을 강조하고 또 그러한 정통성을 대한민국만이 계승하였다는 식의 주장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결코 분단 극복을 위한 노력이 될 수 없다”는 성찰이 이어지며,23 이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판은 역사학계에서 갈수록 힘을 얻었다.24

하지만 1987년 6월항쟁의 결과 개정된 헌법 전문에 군사정권 이래 사라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언급이 다시 등장했다. 제헌헌법에도 없던 ‘법통’이라는 용어까지 함께 들어갔다. 당시 야당은 개헌 논의를 시작할 때부터 군사정권의 반민족성과 반민주성을 비판하고 평화통일과 민족자주, 민주공화제의 전통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임정 법통론을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임정 계승을 헌법 전문에서 삭제했던 군사정권에 강한 부정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당도 1980년대 등장한 ‘민중사학’을 비롯한 진보적 또는 급진적 저항이념에 대한 대응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임정 법통론을 쉽게 수용했다. 이처럼 여야는 개헌 과정에서 국가 정통성을 강화할 필요를 공유하며 임정 법통론의 헌법 반영에 합의하였다. 사실 ‘87년 헌법’ 자체가 한편으로는 투쟁으로 쟁취한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성과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6월항쟁으로 터져나온 대중의 격렬한 민주주의 요구를 집권세력과 제도권 야당이 타협하여 형식적 또는 절차적 민주주의 차원으로 순치시킨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임정 법통 계승이 헌법 전문에 명기된 것은 ‘87년체제’의 산물이자 그 한계를 상징한다고 하겠다.25

1987년 6월항쟁 직후 직선제 개헌 과정에서 여야가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명기하기로 합의했을 때, 많은 진보 소장학자들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90년대에도 임정 법통론은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임정 법통론 비판에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는 사실의 역사적 의미가 크게 부각되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과 2008년 광우병 파동 등 민주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자각이 시민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한국 역사에서 민주공화제를 최초로 구현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이 다시 서기 시작했다.26 그리고 이 무렵부터 시작한 ‘건국’ 논쟁에서 1948년 대한민국 건국론을 비판하는 논거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이때 임정 법통 계승을 명시한 현행헌법은 1919년론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1948년론을 국가 정통성 부정으로 낙인찍는 근거가 되었다.

일례로 한 1919년론자는 대한민국과 북한이 민족사에서 점하는 위상이 같을 수 없음에도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삼으면 대한민국은 북한과 대등한 관계가 되어버린다고 1948년론을 비판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근대적 국가주권을 선언한 대한제국과 국민주권에 기초해 민주공화정을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해 1948년에 정식 정부를 수립하여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반면, 북한은 1948년 소위 공화국 창건을 선포함으로써 스스로를 민족사로부터 단절시켜버렸다는 것이다.27 1919년론자들은 1948년론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1919년과 1948년의 연속적 이해 및 대한민국의 배타적인 정통성 강조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진보적 학자들마저 임정 법통 계승을 규정한 현행헌법에 근거해 1919년 대한민국 건국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는 묘하게 얽혔다. 보수진영이 남한 중심의 반공·산업화 서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구성했다면, 진보세력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의 민족·민주화 서사를 통해 그것을 구성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에 대한 성찰은 뒷전으로 밀리고 ‘건국’과 ‘국가 정통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전제되기 시작했다. 다만 건국의 주체와 대한민국 정통성을 구성하는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전개될 뿐이었다.28 치열하고 때로는 원색적인 대립에도 불구하고 1919년론과 1948년론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임정 법통론은 이제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담보하는 핵심 지점으로 신성화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학자 이용기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했다는 자신감 혹은 주술에 사로잡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나아가 ‘대한민국 민족주의’는 반공·반북 이념에 입각하여 남한만의 발전(또는 선진화)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는 ‘대한민국 국가주의’와 공모할 가능성이 있으며,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던 건국절 논쟁도 실은 이질동형의 주장이 맞붙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국가 정통성’의 신화를 대중적으로 확대·강화하고 있는 임정 법통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29 어떠한 형태든 ‘정통’과 ‘법통’의 강조가 가져올 수 있는 폐해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5. ‘건국’을 넘어선 역사 인식과 나라만들기

 

임정 법통론이 ‘헌법’에 기초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앞서 살펴본 대로 이번 ‘건국’ 논쟁에서도 언급한 ‘자유민주주의’ 역시, 현행헌법 전문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문구에 근거해 신성한 권위를 획득하고 있다. 올해 검정을 통과한 모든 한국사 교과서들은 정부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해 수립되었다고 기술하였다. 물론 이는 역사적 사실에 반한다. 당시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제헌헌법은 개인의 “경제상 자유”를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보장했다.

그뿐만 아니다. 1950년대 이후에야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확산한 ‘자유민주주의’ 담론은 역사적으로 ‘반공주의’의 동의어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문구는 한국현대사에서 ‘자유’를 가장 억압했던 유신헌법에서 처음 등장했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그만큼 모순적이고 허약하다. 반면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실제 내용에 대한 성찰은 물론 다양한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이나 모색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에 반한다는 자의적 규정에 따라 폭력적인 배제와 절멸이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 최근의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정통’이든 ‘법통’이든 ‘자유민주주의’든,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개념, 이념을 ‘헌법’ 등 제도를 앞세워 강제하는 것은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크다. 특히 여전히 민주주의가 쉽게 흔들리고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할 뿐만 아니라, 평화가 정착하지 못하고 분단체제 역시 극복하지 못한 이 나라의 문제해결에 큰 제약이 된다. 이는 결국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어긋나는 대상에 대한 배제와 절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대한민국’만이 강조되는 현재의 ‘건국’ 논쟁은 그 한계가 명백하다. 한국 근현대사는 과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로 환원할 수 없는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맥락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논쟁은 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일례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 다수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동안 독립운동사에서 축소되거나 배제되었다.30 당연히 ‘건국’ 논쟁 속에서도 이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인식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남북한의 정통성 경쟁 과정에서 초래된 분단과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후 반전과 평화, 특히 한반도 주민들의 생존이나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는 문제에는 남북 모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31 솔직히 대한민국이 언제 건국되었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건국’ 자체가 정의에 따라 그 내포와 외연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 개념이다. 이승만이 임정 법통론을 전유하여 자신만의 ‘건국’ 개념을 만들었듯이, 김구는 ‘건국강령’을 통해, 또 김대중은 ‘제2건국’ 운동을 통해 각각 자신만의 ‘건국’ 개념을 제시했다. 개념에 대한 논쟁은 있을 수 있으나 유동적인 개념을 절대화하거나 이에 집착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한반도를 어떤 나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혹은 민족공동체의 생존과 민족공동체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진전시키기 위해 현실적 문제나 분단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더 고민해야 한다.32 관용과 공존이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사회에서 다층적인 역사인식 및 상상력, 그리고 민주적 실천이 가능할 때 그 고민은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24년 10월 18일 세교연구소의 제200차 포럼에서 발표한 동명의 발표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 「“1945년 광복 아니다” “홍범도 흉상 옮겨야”… 이런 인물이 독립기념관장에」, MBC뉴스 2024.8.7.
  2.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내가 뉴라이트? 건국절 양심 걸고 반대”」, 중앙일보 2024.8.12.
  3. 「尹대통령 “건국절 논란,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 무슨 도움 되나”」, 연합뉴스 2024.8.13.
  4. 「건국절 언급한 적 없다 … “건국운동·이승만이 건국”?」, MBC뉴스 2024.8.13.
  5. 「가까이서 느꼈던 거대한 삶: ‘이승만’ 시리즈를 마치며」, 조선일보 1995.12.28.
  6. 신주백 「정부수립과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광복·건국의 연속과 단절」, 『한국근현대사연구』 48호, 2009, 56면 참조.
  7. 이영훈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 동아일보 2006.7.31. 다만 현재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는 버전은 2009년 10월에 업데이트된 글이다.
  8. 최혜성 「과연 우리나라에 건국절이 필요한가?」, 『철학과 현실』 2017년 봄호, 271~72면 참조.
  9. 신주백, 앞의 글 56~57면 참조.
  10. 이완범 「건국 기점 논쟁: 1919년설과 1948년설의 양립」, 『현상과인식』 2009년 겨울호, 80~83면 참조.
  11. 최혜성, 앞의 글 277면 참조.
  12. 이민원·강규형 「대한민국 건국의 연속성과 독자성: 조선왕국에서 대한민국까지」, 『정신문화연구』 2016년 봄호, 43~49면 참조.
  13. 같은 글 49~52면 참조. 인용은 49면.
  14. 신주백, 앞의 글 참조. 인용은 76면.
  15. 한시준 「대한민국의 역사, 언제부터 보아야 하나」, 『현대사광장』 2호, 2013, 46~51면 참조. 인용은 51면.
  16. 도진순 「시간(Kairos)과 기억(Memory): 건국 원년, 건국기념일, 연호」, 백낙청 외 『백년의 변혁: 3·1에서 촛불까지』, 백영서 엮음, 창비 2019, 110면 참조.
  17. 같은 글 115~17면 참조. 인용은 115면.
  18. 신용옥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건국절’ 논란: 헌법 전문과 중앙정부론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65호, 2016, 515~18면 참조.
  19. 같은 글 519~22면 참조.
  20. 윤덕영 「민중적 역사인식과 3·1운동 연구: 각 신문사 주최 3·1운동 학술발표회에 대하여」, 『한국역사연구회회보』 3호, 1989, 20~21면 참조.
  21. 강만길 「독립운동 과정의 민족국가 건설론」, 송건호·강만길 엮음 『한국 민족주의론 1』, 창작과비평사 1982 참조. 인용은 106면; 역사문제연구소 민족해방운동사 연구반 엮음 『민족해방운동사: 쟁점과 과제』, 역사비평사 1990, 242면.
  22. 노경채 「‘임시정부’의 이념과 노선」, 역사문제연구소 엮음 『바로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1』, 역사비평사 1993 참조. 인용은 94면.
  23. 신춘식 「상해임시정부 인식에 문제있다」, 『역사비평』 1988년 봄호, 393~94면 참조. 인용은 394면.
  24. 졸고 「3·1운동 100주년의 연구와 ‘3·1혁명론’」, 『역사비평』 2020년 봄호, 166면 참조.
  25. 이용기 「임정법통론의 신성화와 ‘대한민국 민족주의’」, 『역사비평』 2019년 가을호, 330~32면 참조.
  26. 졸고, 앞의 글 168~69면 참조.
  27. 최혜성, 앞의 글 285면 참조.
  28. 이용기, 앞의 글 334~35면 참조.
  29. 같은 글 340~43면 참조. 인용은 343면.
  30. 임경석 『독립운동 열전 1』, 푸른역사 2022, 6~7면 참조.
  31. 지수걸 「건국절 논쟁의 지형 바꾸기」, 『내일을 여는 역사』 2016년 가을호, 16~17면 참조.
  32. 같은 글 22~23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