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이야기’는 어떤 역사를 쓰는가
선우은실 鮮于銀實
문학평론가. 평론집 『시대의 마음』, 비평 산문 『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이 있음.
eunsil_official@naver.com
마주 앉아 엮는 역사-이야기
과거의 것을 끊임없이 현재의 감각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시간과의 경합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문학. 우리는 ‘좋은 문학’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 중차대한 인간사를 하나의 이야기로 길어올리는 것이 문학 그리고 소설의 책무라 할 때, 김금희 작가가 『대온실 수리 보고서』(창비 2024)를 소개하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을 자신의 ‘첫 역사소설’이라고 조심스레 표현한 것을 조금 더 지긋한 손길로 붙들어보아도 좋을 터이다. 출간 이후 여러 매체에서도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역사소설’이라는 표현을 빌려 소개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의 그늘”진 역사에 주목하면서 “누구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누구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1는 점을 역사소설의 핵심으로 꼽는가 하면, ‘마음에 대한 이해’라는 작가의 말을 빌려 역사소설이란 과거의 한 존재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것2이라 정리하기도 한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1800년대 말부터 2020년에 이르는 장대한 시간을 가로지르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한국 근현대의 굵직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여성, 아이, 피식민 지배민족이라는 각 시대에 가로놓인 타자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각각의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이야기의 소재로 차용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떠한 ‘사실’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그 안에 깃든 ‘역사’를 끌어낸다. 작가는 근현대, 그리고 동시대 인물의 사연을 통해 개별적으로 쪼개져 보이는 특정 사실들이 거대한 흐름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는 이야기를 경유하여 현재와 맞물림으로써 ‘과거’의 의미를 얻고, 현재 역시 과거와 맞물림으로써 ‘현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긴 시간대의 이야기를 단순히 과거의 적시(摘示)에 그치지 않고 현재로 부단히 끌어오는 소설의 구도에 대해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이야기에 자기를 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소설에 현재적인 얘기가 필요하죠. 대온실에 얽힌 이야기 자체를 고스란히 풀어내는 것도 소설의 한 방법일 수 있겠지만, 거기서부터 출발한 역사가 현재의 나한테 어떤 식으로 문제가 되는가 하는 접점이 느껴질 때 좀더 적극적인 독서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게끔 이야기를 전개해보자고 마음먹었고요. 그런데 소설에서 어떤 비밀은 끝까지 유지가 되어야만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가령 ‘문자 할머니’의 과거 같은 게 그렇죠. 쓸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출간 이후 독자들을 만나면서 이 소설에서 청자와 화자의 교차되는 서술이 반복되도록 ‘영두’와 ‘산아’라는 두 인물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청자’와 ‘화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영두가 자신이 조사한 기록물을 산아에게 읽어주면, 산아는 그 이야기를 듣고 소회를 들려주면서 영두의 시선에 틈을 낸다. 산아가 말하기 시작할 때 영두는 청자가 된다. 김금희의 소설은 ‘사실에 대한 해석’이란 이처럼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말하고 듣는 역할을 서로 바꿔가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2020년대를 사는 영두가 자기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동시에 약 두세기 이전의 시간을 함께 톺아보도록 만든 것은 어떤 식으로 가능했으며, 이때 ‘영두가 읽은 문헌-영두가 산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산아의 코멘트’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의도는 무엇인지 물었다.
연재했던 내용을 하나로 묶고 보니, 기록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화자인 영두, 그 이야기를 듣고 현실의 문제를 연결 짓는 청자인 산아라는 구성이 여러번 쓰였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야기란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하고 말 상대가 되어주는 형식으로 흘러가는 거구나, 이 소설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되었어요.
이같은 전개방식은 이번 소설이 두세기에 걸친 시간대와 방대한 역사적 사료를 다루고 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간을 어떤 식으로 직조할 것이며, 그때 있었던 일을 ‘정보’가 아닌 ‘이야기’로 전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인 것이다.
이 소설을 쓰며 하나의 ‘장면’을 쓰기 위해 상당히 방대한 자료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어요. 예를 들면 ‘기노시타’가 출근하는 장면 하나를 쓰는데도 전차가 어느 방향으로 가며 어디를 지나는지, 소설에서 일일이 서술되지 않더라도 전부 자료를 찾아 확인해야 했죠. 그런데도 어떤 자료는 욕심이 나더라고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일본어로 된 창경원의 경비일지를 찾았어요. 번역해보려고 출력을 했는데 끝까지 읽지는 못했어요. 어떤 자료가 소설에 얼마만큼 반영되었는지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사실들이 개입하고 있다는 걸 강렬하게 경험했죠. 자료를 많이 읽다보니 시간을 어떻게 구성해야지 하는 틀을 미리 짜놓기는 어려웠고요. 우선 이야기를 한번에 풀어놓고,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시간의 어긋남 같은 것들을 추가로 손보았어요.
이같은 작가의 설명은 ‘역사’가 품고 있는 장대한 시간성을 어떻게 기술적으로 다뤄냈느냐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소설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믿음까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야기를 왜 읽는가? 이 질문은 ‘소설은 무엇을 하는가’를 묻는 일과 다름없다. 언뜻 나와 무관해 보이는 어떤 존재, 한번도 나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어떤 존재, 즉 ‘타인’의 삶이 지금 내 삶 곳곳에 틈입한 시공간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역사로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일. 그것이 바로 소설의 역할이며, 소설이 역사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상처받은 마음을 마주하기
김금희가 구축해온 서사세계의 흐름을 죽 돌이켜보건대, 그의 문학세계에서 ‘마음’을 빼놓고는 그 어떤 이야기도 시작할 수 없다. 작가의 소설에서 ‘마음’은 개개인이 지닌 아주 내밀한 것이면서 지극히 사회적인 것으로 발화된다. 이를테면 개인의 내밀한 마음은 지극히 사적인 관계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이 지켜야만 하는 신념 및 그 주위를 두르고 있는 어떤 감정들에 기초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마음의 결은 단편 「너무 한낮의 연애」(『너무 한낮의 연애』, 문학동네 2016)를 지나 장편 『경애의 마음』(창비 2018)에 이르면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다.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작가는 이미 만연한 자본의 논리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인물들의 분투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독보적인 감각과 그들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 주목한 바 있다. 이어 『경애의 마음』에서는 인현동 화재사건의 사망자이자 누군가의 애인, 누군가의 친구인 ‘은총(E)’을 중심으로 사회적 참사와 사회적 약자 사이의 간극을 조망했다. 어떤 ‘없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 ‘이어져 있다’는 감각 역시 연애나 사랑, 우정, 그리움 같은 여러 감정을 토대로 한 ‘마음의 일’인 것이다. 이처럼 김금희 서사 속 ‘마음’이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정동이고, 아주 내밀한 감정의 움직임이 삶의 양태를 바꾸고야 마는 움직임이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그의 서사 속 인물들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마음’을 간절히 탐색하고자 할 때 대체로 ‘있음’보다는 ‘없음’에 주목해왔다는 것이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또한 ‘없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플롯의 첫머리, 2020년대의 영두는 상실 이후에 서 있다. 고향 친구 ‘은혜’의 소개로 ‘바위 건축사사무소’에서 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단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영두는 고등학생 시절을 창경궁 근처인 원서동에서 지낸 적이 있다. 보호자 없이 홀로 강화에서 서울로 ‘유학’와서 원서동 ‘낙원하숙’에 머물게 된 영두는, 할머니의 친구이자 낙원하숙의 주인인 문자의 동의하에 그녀의 손녀라 소개받은 (영두와 마찬가지로 사연이 있어 부모와 떨어져 지내며 서울 유학살이를 하는) ‘리사’와 함께 지내게 된다. 영두는 단번에 리사의 상처를 알아본다. 문자 할머니에게 쌀쌀맞게 굴고 자신에게도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 리사를, 영두는 좋아할 수는 없지만 포기하거나 모른 체하지 않는다. 영두는 “리사의 세계를 알아내고 가능하면 조립해보고 싶”(113면)어한다. “그 안에 있는 두려움, 수치심, 공격성, 슬픔, 연약함, 욕심,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것을”(같은 면).
자신의 외로움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감당하는 두 여자아이는 스스로에게 속수무책 주어진 난처함과 고독감을 서툴게 드러낸다. 리사는 그 누구도 더는 믿을 수 없어 날을 세우고, 그런 리사를 보며 영두는 누구도 무엇도 믿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어쩌면 서로의 차가움을 알아보았을지도 모를 두 사람은 그러나 끝내 가까워지지 못한다. ‘알아보는 마음’ 혹은 ‘이해하려는 마음’이 도달하는 하나의 부조리한 결말일 텐데, 이들의 서늘한 마음은 서로를 겨누는 데 쓰인다. 리사와 사이가 틀어진 뒤, 영두는 반에서 일등을 하는 ‘빽’의 작당에 리사가 자신을 연루시켰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희생과 굴종을 바라는 빽과 리사의 악의에 영두는 무너지기 시작하고, 커다란 상처를 받은 채 고향인 석모도로 돌아간다.
영두는 굉장한 패배감을 맛보았죠. 자존심이 센 아이였기 때문에, 사과까지 해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결국 타인이 내가 뜻하는 대로 뭔가 해주지 않겠구나’, 그런 자신감의 상실을 겪잖아요. 나름대로 욕심을 가졌던 서울 생활에서 자기 삶 전체가 모멸당한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끝까지 사람을 믿으면 됐는데, 문자 할머니가 영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학교로 찾아갔을 때 영두는 그 선의를 믿을 힘조차 없었던 거죠.
그런데 사실 저는 영두가 고향에 돌아가 틀어박힌 것이 용기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영두는 리사에 대한 스스로의 적의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나쁜 생각을 하고 있구나’ 깨닫고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석모도에 가는 거였으니까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두는 자신에게 악의를 숨기지 않았던 리사와, 자기 삶 자체를 모욕적으로 굴복시켰던 빽과의 사건을 거치면서 “불신과 고립과 경계와 냉소, 분노와 비루함 그리고 가장 나쁘게는 자포자기를 배웠다”(216면)고 말한다. 이 시기 어두운 경험이 영두에게서 사람에 대한 ‘믿음’을 앗아갔다면, 소설은 바로 그 ‘믿음 없음’(믿음 불가능)의 경험 이후에 선 영두를 첫머리에 놓고 그녀의 지난 시간과 공간(원서동)을 다시 환기하는 고통스러운 대면의 여정을 따르는 셈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마음의 역사’란, 인간으로서 보살핌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누군가에게 감히 기댈 수도 없을 것 같은 아주 적막하고 외로운 시기를 톺아보는 작업,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상황에 좌우되는 고독감이라기보다 하수상한 시대의 풍경에서 모두가 얽혀 만들어진 사회적 산물임을 다시금 돌이키는 이야기-행위다.
우리 곁에는 늘 누군가가 있다, 아주 어두운 순간에도
영두는 ‘10대 시절 원서동’이라는 시공간에서 벌어진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어 그것을 잠시 마음속 지하실에 가둬두었지만, 우연히 원서동 일대를 오가며 일을 하게 되면서 그 기억과 맞닥뜨린다. 이 순간, 영두의 곁에는 누군가가 있다. 그뿐 아니라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보건대 영두가 가장 어두웠던 순간에도 그녀의 곁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영두가 돌이키는 기억이란, 과거란, 그녀의 어두웠던 마음의 역사를 되감아본 끝에 결국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서 있는 장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불안과 외로움에 떨던 영두를 가만히 눌러주던 연인 순신을 비롯하여 낙원하숙 식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상실해버린 영두에게 손을 내밀었던 낙원하숙 주인 문자 할머니와,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맞아준 절친 은혜까지. 당시의 영두는 이들이 건네는 마음이 호의라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만큼의 여유가 없었고, 손 내밀던 이들을 모두 물리며 자신을 유폐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토록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도 그들이 있었고, 그들이 영두의 상처 입은 마음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는 사실 또한 남아 있다. 가장 돌이키기 두려운 어두운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을 영영 그 안에 남겨두지 않도록 온기를 준 다른 사람이 존재했음을 상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에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살리는 것.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마음을 폐기할 뻔한’ 사람이 완전히 자포자기하지는 않고 지나온 시절을 어떻게 다시 들여다보는가에 대한 작업으로 읽힌다. 작가는 시간이 지나 밀어두었던 컴컴한 시간, 그 역사를 돌이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기를 붙들고 자기 기억을 들여다보는 일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기억이 자아를 구성하는 거의 전부인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안고 지금을 살고 있는 거고요. 상처든 영광이든 과거의 것에 기대서 힘을 얻는 게 곧 현재인 거죠. 그래서 자아를 잘 붙들고 개인으로서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이 소설이 작은 몫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보통 어떤 과거를 대면하는 순간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마음을 폐기하지 않을 수 있나. 누구에게나 어두운 역사는 존재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 아픔을 마주보기를 요청받는다. 개개인의 역사 속 ‘폐기하고 싶은 기억’은 어떤 식으로든 재해석되어야 하며 재해석될 수 있다. 앞선 질문에 대한 이 소설의 응답이다.
어두운 마음의 역사를 수리하며
빽과 리사의 음모에 휘말리게 된 영두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다. 그런 그녀를 마지막까지 구원하고자 한 인물이 낙원하숙의 주인 문자다. 고등학생이던 영두는 문자가 내민 손을 붙잡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으나, 소설의 ‘현재’, 즉 2020년대에 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는 어른이 되고 나서야 당시 문자가 영두의 절망을 눈치챘음을, 그래서 간곡하게 그녀의 고통을 함께 바라보려고 했음을 깨닫는다. 바로 이 순간부터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과거를 현재로 기워내기 시작한다.
보육원 책자에 몇줄로 남은 할머니의 회상은 이렇게 다른 증언들로 사실의 두께를 얻어갔다. 수리를 통해 보강되어가는 대온실처럼. 기억은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나 마찬가지였다.(299~300면)
소설은 창경궁 대온실에 대한 조사자료들(‘후쿠다’의 기록 및 대온실 관리자로서 ‘마사시’, 기노시타의 이야기, 창경궁에 대한 ‘마리코 히메’라는 여자아이의 소설 등)과, 이 자료를 중심으로 좌우로 배열된 영두의 과거 및 현재로 구조화되어 있다. 시간대로만 치자면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까지를 아우르는 셈인데, 어떻게 두세기 전의 역사가 ‘지금’과 연결되는 걸까?
징검다리를 놓는 인물은 바로 문자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의 책임을 맡게 된 영두는 기록물을 탐독해나가면서 점차 문자가 어린 마리코였으며, 훼손되기 이전의 대온실을 알고 있는 사람, 일제강점 말기 살아남기 위해 대온실에 숨어든 일본인 소녀,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처럼 과거의 고통을 매순간 환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서사 속에서 영두의 위치 역시 창경궁 대온실 기록물을 열람하는 관찰자에서 대온실에 얽힌 역사적 소수자와 유관한 인물로 전환된다.
이렇듯 관계와 서사의 차원에서 문자는 일종의 ‘구원자’다. 절망에 빠졌던 영두가 그 시간으로부터 조금씩 헤엄쳐나올 수 있도록 지긋한 마음을 보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설에 드리운 아주 먼 과거와 아주 먼 미래를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문자가 영두에게 손 내밀었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영두의 아픔과 상실을 알아볼 수 있었음을 뜻한다. 타인의 상처를 발견하는 시선은, 그 자신이 지닌 어두운 역사를 온전히 대면한 이가 수행했던 자기성찰에 기반한다. 문자에게 그 역사라 함은 그녀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으로 와 살았던 ‘내지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문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을 몸소 체험한 일본인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 존재들이 ‘잔류일본인’이라 불리고, 소설에서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호칭된다.
‘대온실’이라는 장소는 예전에 제가 편집자로 일했던 시절 동궐 관련한 책을 만들면서 한차례 깊은 관심이 생긴 곳인데요. 이번에 본격적으로 대온실을 중심으로 소설을 집필하면서 제가 처음 그곳에서 느꼈던 일종의 이질감을 느꼈어요. 내가 실제로 동궐을 보고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과, 그것이 구축되면서 끌어안았던 역사적 함의 같은 것들, 의도와 무관하게 펼쳐지는 근대의 폭력성 같은 것들이요. 이 이질감이 잔류 일본인 할머니와 그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잔류 일본인들 가운데 돌아가신 분도 꽤 있지만, 소설을 통해 문자 할머니를 형상화한다면 사람들이 그들을 사자(死者)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우리 역사와 결부된 존재로 여기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잔류 일본인에 대해서는 5, 6년 전 뉴스를 통해 알게 됐는데요, 그때는 ‘재한일본인 여성’이라는 표현을 썼던 걸로 기억해요. 저 역시 그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죠. 곰곰 돌이켜보니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그렇게 많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때의 일본인들, 특히 일본인 여성들이 돌아가지 못하고, 혹은 가지 않기를 택하고 조선에 계속 머물렀겠구나 싶더라고요. 언젠가 이 이야기를 써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가 이번 소설에 등장시키게 됐죠.
작가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조선에 사는 일본인’의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역전되는지, 그리고 특히 여성이 어떤 식으로 약자화되는지에 주목한다. 패망국의 여자아이 ‘마리코’에서 한국 거주민 ‘문자’로 이행하는 인물의 삶 자체가 그렇거니와, 마리코였던 어린 문자 앞에서 일본인 아기 엄마에게 “더이상 조선인 종은 없”(299면)다고 말한 조선인 가정부의 전언은 달라진 위치를 잘 보여준다. 한편 지배자의 역사와 타자의 역사 사이에 가로놓인 ‘여자아이’라는 정체성이 약자의 지위로 재배정되는 소설 속 일련의 과정은 단순히 패전국과 광복국 사이의 전복된 역학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작가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제국주의 피해국으로서의 역사가 고통을 관통하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스며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며, “마리코가 겪어야 했을 여러 고통을 독자들이 충분히 헤아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었다고 말했다. 이분법적으로 의식되기 쉬운 현실이지만, 소설 속 ‘인물’을 거친다면 그 현실을 통과해온 여러겹의 고통을 헤아릴 수도 있으리라는 믿음이 엿보였다.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당시 모계 인물의 삶을 되짚어가며 ‘현재 여성의 역사’가 과거의 그것과 어떠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살피는 최근의 여러 소설3이 보여주었듯, 여성계보서사 속에 무겁게 드리워진 젠더폭력은 결국 약자를 향한 폭력의 역사의 중핵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헤아려보건대, 문자가 일본인 여자아이로서 경험한 위기감각 내지 생존의식은 그녀가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상대화될 수 없고, 동시에 ‘여자아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여성과 완전히 동일한 감각을 형성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패망한 일본 국적의 여자아이라는 이 모든 복합적인 요소를 통해 문자가 겪은 ‘어두운 역사’와, 그것에 대한 문자의 어떠한 ‘해석’이 자신과 완전히 같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은 또다른 여자아이를 보게 만들었느냐에 대한 문제다. 그러니까 마리코가 자신의 역사를 경유해 영두를 통해 마주하는 것은 영두의 ‘어둠’이자 ‘마리코’였던 시절, 문자 그 자신 과거다.
문자의 이름은 마리코. 이는 훗날 영두가 대온실과 관련한 기록을 조사해나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마리코가 한 어린이 잡지에 남긴 대온실 동식물에 대한 소설화된 기록, 그리고 실제 2020년대 창경궁 대온실 아래 정체불명의 인골로 추정되는 물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마리코의 실존을 거치며 한 줄기로 이어진다. 이제 대온실 아래 묻힌 누군가의 뼛조각은 마냥 묻힌 채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선뜻 파헤쳐 집을 수도 없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대온실 조사와 관련한 모두가 알게 된 이상 ‘지금 우리의 문제’로서 맞닥뜨려야만 하는 역사의 한 조각이다.
그러니 대온실 아래서 발굴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당대 타자의 시간이자 그것을 증명하는 부피, 그로써 공간화되는 복합물이다. 소설 속 대온실은 수리와 수선의 ‘대상’이 아니라, 수리되고 수선됨으로써 ‘다시금 이해되는’ 시공간이다. 영두와 문자의 마음이 맞대어지고 그 둘의 시간이 연결됨에 따라 파묻혀 있었던 어두운 마음의 역사가 발굴되어 매만져지는 것. 그것이 대온실에서 일어나는 ‘수리’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마음은 발굴되어 전수된다
우리가 소설적 현실 혹은 이야기를 통해 나와 비슷하거나 같거나 혹은 전혀 다른 조건의 삶을 추체험하고 그것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앞서 문자가 영두에게 내보였던 용기를 재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계속 무언가를 마주보려고 용기를 내는 한 소설의 삶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당사자성’이라는 해결되지 않는 과제를 지속적으로 내밀 것이다.
기억의 전수 측면에 있어서, 최근에는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콘텐츠들이 수많은 정보를 전달해주기는 하죠. 하지만 정보 자체에 그치지 않고 조금 더 나아가야 ‘이야기’가 아닐까요? 그 정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 또는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야기고, 소설이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역사소설을 써나가고자 할 때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서 더 나아가서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소설의 역할, 소설가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두가 문자 할머니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끌어당기고, 독자가 이 소설을 통해 여러 타인의 삶을 자기 것으로 끌어당겼듯, 우리의 이야기는 이후를 살아갈 세대의 이야기로 끌어당겨질 테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영두와 산아의 대화 장면은 먼젓번의 역사가 끊임없이 차후의 시간으로 끌어당겨짐을 암시하는 듯하다. 즉, 우리의 역사는 어떤 식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전망은 이러하다.
후쿠다, 마사시, 기노시타의 대온실 관련 기록은 전학 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는 전학생 ‘스미’를 이해하려는 산아의 현재 삶과 언뜻 무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영두가 들려주는 그 기록이란 ‘사실 기록’ 그 자체가 아니라, 영두의 관점에서 ‘해석된 기록’이다. 따라서 산아에게는 그저 옛날 옛적에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영두가 들려주는 어떤 ‘이야기’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사실’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영두의 역사가 겹쳐졌을 테고, 영두의 시선에서 포착된 어떤 ‘마음’들이 발굴된 채로 전수되었듯 말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주목했던 ‘영두-산아’의 대화 나눔의 구성을 다시 떠올려보자. 이제 그들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소설적 장치 이상으로 이해된다. 지금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나가고 또 겹쳐나가는 것. 문학이 역사를 전수하는 한 방식일 것이다.(2024.10.9 창비서교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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