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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가 사는 곳 ⑫

 

‘19세기’ 적응기

 

 

정지아 鄭智我

소설가.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이상

 

구례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울에 다녀오는 길이던 나는 무심코 하나로마트에 발을 디뎠다. 세걸음을 걷고 얼어붙었다. 구례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경쾌한 하이힐 굽 소리가 마트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아직 55 사이즈가 낙낙하던 그 시절의 나는 구례에 내려왔지만 서울에서 돈벌이를 하고 있던 터라 서울 차림, 그러니까 긴 머리에 7센티미터 하이힐 정도는 서울 사람인 양 소화했더랬다. 내 하이힐 소리가 내 귀에 닿은 뒤에야 나는 이 소리를 구례서는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점원이며 손님들이 매대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소리의 정체를 찾기 위해! 누군가는 입을 열어 소리치기까지 했다.

“먼 소리대?”

시골 사람이라고 눈치가 없지는 않다. 사람들은 보라색 베레모를 쓴, 제법 차려입은 여성의 하이힐이 난생처음 듣는 소리의 정체임을 이내 알아채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사람들이 다시 매대 뒤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얼어붙어 있다가 장도 보지 못한 채 살금살금 길고양이처럼 자리를 떴다.

그뒤로 구례 사람들 차림새를 눈여겨 살폈다. 일단 몸뻬 차림의 할매나 아주머니들이 대부분, 베이지색이거나 회색, 검은색의 정장바지를 입은 중장년 여성들이 약간, 나머지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었다. 어느 쪽이든 옷을 잘 입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구례 사람들은 미의식이 없는 걸로!

몇년 뒤, 역으로 마중 나온 나를 보고 서울 제자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우리 샘, 촌년 다 됐네. 그러고 보니 내 차림이 미의식 없다고 비웃었던 구례 사람들 판박이였다. 미의식이 없어서는 아니다. 일하기에 편한 옷을 입었을 뿐. 구례 사람들은 가정주부라도 다 밭일을 한다. 텃밭에 고추도 심고 상추도 심는다. 작은 텃밭에 잡초는 왜 그리 무성히 자라는지. 일하다보면 금세 옷은 흙투성이다. 마트 갈 일 있다고 새 옷 갈아입을까. 툭툭 털고 가면 그만이다. 다들 그러고 다니니 나도 그렇게 변했다는 걸 의식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서울서의 나는 제법 멋을 내고 다녔다. 백화점에서 옷도 사 입었다. 명품은 언감생심, 고가의 여성복도 언감생심, 주로 중저가의 영캐주얼 단골이었는데, 그마저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 세일 때 한꺼번에 사곤 했다. 그뿐이랴. 서울서 나는 늘 과소비를 하며 살았다. 모닝 정도 타야 할 형편에 무리해서 로체를 샀고, 일년에 세번쯤은 이름난 미용실(그래봤자 대중적인 곳이지만 그래도 가격은 무시무시했다)에 갔다. 그게 서울에서의 당연한 일상이었다. 다들 그러고 산다는 게 아마 무의식적인 내 변명이었을 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누구에게도 내 궁핍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그럭저럭 남들만큼은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울서는 다들 잘도 속았다. 그런데 구례 사람들은 도무지 속아주질 않는다!

구례 내려오니 서울 살 때에 비해 생활비가 거의 반 이하로 줄었다. 텃밭에서 기르는 작물 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구례의 지인들 덕이다. 사실 내 지인은 아니고 엄마와 아빠의 지인들인데, 그들은 올 때마다 두 손 가득 뭔가를 들고 온다. 쌀, 김치, 각종 장아찌, 말린 나물, 참기름에 들기름, 된장에 고추장, 간장, 직접 담근 멸치액젓까지. 엄마와 손님을 위한 고기나 생선이 아니면 돈 쓸 일이 거의 없다. 그게 시골 인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분들은 알고 있었다. 글쟁이의 주머니 사정이 형편없다는 것을.

내 책이 평생 처음으로 많이 팔리고 난 뒤, 그분들께 평소와 다름없는 명절 선물을 드렸다. 평소처럼 손사래를 치며 이 비싼 걸 멀라고 돈 주고 샀능가, 타박이 이어질 줄 알았다. 웬걸? 다들 한입인 듯 웃으며 말했다.

“인자 맘 펜히 받을라네. 그래도 쓰겄제?”

그러니까 이전의 타박은 인사치레가 아니라 가난한 글쟁이를 진심으로 염려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분들이 두 손 가득 들고 온 선물 또한 마찬가지의 배려였으리라. 나는 그분들께 먹고살기 힘들다는 푸념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서울에서처럼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알았다. 서울 사람들은 몰랐던 나의 궁핍을.

구례는 그런 곳이다. 구례는 누구누구네 삼대의 역사를 알고 있다. 가난을 들키고 싶지 않아 화려하게 차려입었다가는 당장에 욕을 먹는다. 언젠가 길에서 샤넬을 메고 가는 젊은 여성을 보았다. 구례서 명품을 보는 일은 참으로 귀하다. 들어봤자 알아주는 이가 없는 까닭이다(자기만족을 위해서라고 아무리 변명해봤자 명품은 누군가 알아주고 감탄해주고 부러워해주는 맛에 드는 법이다). 젊은 여성 뒤로 내 또래의 여성 둘이 걷고 있었다. 왼쪽 여성이 오른쪽 여성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쨔 ○○집 딸내미 아니여?”

○○집이 친한 친구인 모양인지 오른쪽 여성이 앞서가는 젊은 여성을 불러 세웠다. 젊은 여성은 멋쩍게 인사를 하고는 걸음을 재게 놀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길에서 만난 엄마 친구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왼쪽 여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집이 코로나 땜새 수월찮이 빚을 졌다고 안 혔능가?”

“글제. 안즉도 힘든 모양이등만.”

“근디 쨔는 먼 돈이 있어서 샤넬을 메고 댕기까?”

오른쪽 여성은 샤넬이라는 이름도, 그 가격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친구 딸을 변호하고자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쨔 자연드림에 취직했어. 취직했응게 한나 장만했능갑제.”

샤넬을 알고 샤넬의 가격도 아는 왼쪽 여성은 자연드림의 월급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연드림 월급이 ○○○인디, 멫달치를 다 모다도 쩌 가방을 살까 말깐디?”

친구 딸 험담이 내키지 않았는지 오른쪽 여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왼쪽 여성이 비장하게 말했다.

“쨔 시방 바람 들었네. ○○집헌티 귀띔해주소. 가만 놔두먼 먼 사달이 날랑가 모리네.”

젊은 여성이 어떤 마음으로 샤넬을 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집안 사정은 온 동네가 다 알고 있다. 누군가 농협에서 대출을 받았다 치자. 한 이틀 지나면 옆집 사람이 와서 넌지시 묻는다.

“멀라고 대출을 삼천이나 받았대?”

서울 사는 아들놈 전세 옮기는 데 보탤 거라고는 자존심이 상해 말하지 못한다. 그래봤자 이내 다 들통난다. 자신들이 삼천을 쓰지 않는 이상 그 돈이 자식들한테 흘러갔을 거라는 추론쯤은 여기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으니까. 구례에서 재산관계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집은 딱 세 집이다. 로또 일등 당첨자들이란다. 아마 구례 농협에 돈을 예치하지 않은 모양이다. 어느날 글쓰기 강좌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누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인자 다 알아요.”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일품이다.

“돈 한푼 없는 집인디 벤츠를 샀당마요.” (구례 사람들도 외제차는 좋아한다. 샤넬은 몰라도 벤츠는 다들 안다. 구례 사람들이 더 부자가 되면 샤넬도 모두 알게 될지 모른다.)

이래도 저래도 다 아는 동네, 굳이 궁핍을 감출 필요도, 부를 과시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재산 정도가 어떻든 구례 사람들은 차림새가 다 거기서 거기다.

서로가 서로를 다 안다는 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어렸을 땐 정말 싫었다. 누구나 내가 빨갱이의 딸인 것을 알았고, 그래서 서울로 도망치듯 떠났다. 서울로 간들,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빨갱이의 딸인 것을 모른다 한들 내가 빨갱이의 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나에게만 그런 굴레가 주어진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빨갱이의 딸로, 누군가는 성범죄자의 딸로, 누군가는 첩의 딸로, 누군가는 바람둥이 아버지의 딸로, 또 누군가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 내 생의 조건은 평생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거기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꽤 긴 시간을 허비했다. 어쩔 수 없는 내 생의 조건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어디론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구례 내려와서야 알았다.

어린 시절, 지금 생각하면 나보다 더 구례를 떠나고 싶었을 동네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의 엄마는 바람이 나 밤도망을 쳤다. 정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고구마줄기를 벗기거나 콩을 까던 동네 여자들은 언니만 보면 한마디씩 했다. 느그 어매가 니헌티도 연락을 안 하디야, 졸업식에도 안 왔디야, 썩어빠질 년, 샛서방이 그리 좋으까, 언니는 그런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자랐다. 언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이 고무신 코로 죄 없는 땅바닥만 파헤쳤다. 언니는 제 엄마가 샛서방에게 푹 빠져 자식조차 내팽개쳤다는 사실을 시도 때도 없이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야 했을 것이다. 서울이라면 옆 동네로 이사만 갔어도 됐을 테지. 그럼 옆집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을 테지. 설령 엄마가 없다는 걸 알아도 물어보지조차 않았을 테지. 그랬다면 언니는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가슴 깊숙이 묻어두고 살았을 테지. 그 상처는 점점 곪아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터져나왔을 테지.

구례에서 언니는 바람난 여자의 딸로 묵묵히 살았다. 엄마에게 버림받았어도 살아는 졌다. 동네 여자들이 입바른 소리로 언니 속을 뒤집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김장철이면 에미도 없는데 김장이나 했을까 싶어 앞다투어 김치를 퍼 나르고, 에미도 없는데 맛이나 봤을까 싶어 호박전이며 부추전이며 틈만 나면 애들 손에 들려 보냈으니까. 그 언니, 엄마에게 버림받았지만 순한 남자 만나 자식 셋 낳고 잘 산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슬픔이야 어디 가지 않고 마음 깊숙이 고여 있을 테지만 그 슬픔, 자식에게 곱절의 사랑으로 베풀면서 말이다. 너무나 잘 알아서 서로서로 자신의 존재를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게 하는 동네다, 구례는. 구례만은 아닐 게다. 아직도 농사짓고 사는 작은 공동체는 어디나 그럴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이상은 1930년대에 김기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동경은 20세기인데 나는 19세기’라며 초조해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이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서울은 21세기인데 나는 19세기를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도 하지. 19세기를 너무 오래 산 탓일까. 더이상 초조하지가 않다. 나는 요즘 구례에서 19세기를 즐기고 있다.

언젠가 오일장에 가서 머위를 사려던 참이었다. 집 뒤에도 머위가 지천인데 내 몸속에는 21세기의 피가 흘러(19세기를 사는 주제에! 아닌가? 19세기에도 노동이 싫은 나 같은 종자들이 있었을 것도 같다) 노동이 귀찮은 탓이다. 장 초입, 싱싱한 머위가 보이기에 막 사려는데 아는 언니가 내 옷을 잡아끌었다. 사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저만치 끌고 간 뒤에야 언니는 옷자락을 놓았다.

“쩌그서 사 묵지 말소.”

“왜요? 싱싱하고 좋은데?”

“아이가, 쩌 아짐은 멀리 가들 않네. 차도 옆에, 동네 개들 죄 똥 싸는 디서 막 캐오네이. 똥 묵고 컸응게 보기가 좋은 것이여.”

언니는 나를 장 안쪽의 어느 노점으로 이끌었다. 더 늙은 할매가 머위며 쑥 등속의 나물을 좌판에 놓고 장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앞으로는 여그서 사 묵소. 이 아짐은 매화밭에서도 나물을 안 뜯네이. 매화밭에는 한번썩 농약을 핑깅게로.”

사 먹는 사람을 가족처럼 여겨 깊은 산중에 들어가 나물을 캐온다는 할매는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몸뻬바지 차림이었다. 장에서 나물 파는 할매들은 죄 비슷한 차림이다. 그래서 서울 것들은 그런 할매들을 우스이 여긴다. 절대 우스운 할매들이 아니다. 어떤 할매 아들은 대기업 임원이고 어떤 할매 아들은 변호사다. 자식이 성공했거나 말았거나 평생 농사짓고 그것 팔아 육고기나 비린 것 사 먹고 살았으니 지금도 그리 살 뿐이다. 이런 사정 다 아는 웬만한 구례 사람들은 장바닥에서 장사한다는 이유로 사람 깔보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파는 물건으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학벌 좋다고 돈 많다고 추켜세움을 당하지도 않는다. 외려 욕먹기 십상이다. 아이고, 갸는 박사를 똥구녕으로 땄는갑서. 박사먼 머흘 것이여. 부모 알기를 똥구녕으로 아는디. 그런 것도 사람이가니? 아이고, 즈그가 원제부텀 부자라고 그 옘벵을 떨어쌓능가 몰러. 돈 많다고 다 부자가니? 누구 겔혼식 때 부조금을 딸랑 삼만원 냈다대. 지 몸에 둘른 것만 팔아도 돈 백은 수월하겄구만. 구례에서는 이런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19세기 구례에서의 인간관계는 솔직하고 전면적이다. 21세기의 인간들은 이 솔직하고 전면적인 관계가 참으로 놀랍고 부담스러울 것이다. 나도 그랬다. 노크조차 하지 않고 불쑥불쑥 문을 열어젖히는 사람들 때문에 학을 뗀 것도 수차례다. 심지어 우리 집 주인아저씨가 팬티만 입은 모습도 봤다. 내 탓이 아니다. 나는 분명히 노크를 했고, 아저씨는 분명히 들어오라 했다. 시킨 대로 들어갔더니 아직 아저씨가 바지를 입지 못한 상태였을 뿐이다(그 자리에 주인아주머니도 있었음을 명확히 해둔다). 손에 들린 바지를 급히 꿰차긴 했지만 아저씨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나 혼자 놀랐다. 그런데 뭐? 팬티 차림의 아저씨를 봤다고 한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아직도 핏속에 흐르는 21세기 유전자를 버리지 못한 내가 문제일 뿐이다. 요즘 나는 노크를 하고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져도 아저씨가 팬티만 입었다는 가정 아래 바지 입을 시간을 헤아린 뒤 문을 연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나도 불쑥불쑥 문을 열게 되려나).

당혹스럽기 짝이 없던 19세기 인간관계에 익숙해지니 이처럼 편할 수가 없다. 나는 도대체 21세기의 서울에서 무엇을 위해 그토록 긴장하며 살았던 것일까. 여기서는 궁핍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과소비를 할 필요도 없고, 배운 사람답게 교양을 떨 필요도 없으며, 시류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파인다이닝을 예약할 필요도 없고, 유행하는 뮤지컬이나 연극 따위를 기를 쓰고 찾아볼 필요도 없다. 그저 계절에 맞춰 뭔가를 심고 거두면 그뿐이다. 거기에 삶의 이치가 있다. 상추가 무럭무럭 자라 솎아야 될 때가 되면 어느 집에 상추가 없는지 눈여겨 살피고 나눠 먹는다. 상추 주러 가면 보인다. 그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안 되면 하소연이나 들어준다. 귀 기울임에 한숨 한번은 쉬어갔을 테지. 농사짓는 사람들은 논밭만 들여다봐도 기후위기를 알고 정치인들의 실정을 안다. 책이나 뉴스로 아는 게 아니다.

오늘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사흘을 내렸다. 가는 비를 맞고 들깻단 나르던 주인아저씨가 구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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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짝에도 쓸모없는 가을비가 멀라고 와쌓는가 모리겄네.”

가을비가 유례없이 몇날 며칠 오는 건 그놈의 지구온난화 때문일 것이고, 요맘때 오는 가을비가 쓸데없다는 것은 21세기의 피가 적잖이 흐르는 사람이라 나는 이제야 알았다. 생각해보니 당연한 사실이다. 내가 관심이 없었을 뿐. 지금은 수확한 농작물을 말리고 곶감을 말려야 할 때다. 빨래까지 뽀송뽀송, 사각사각, 기분 좋게 말리는 태양이 제 역할을 할 때라는 말이다.

이곳에서는 사람관계만 전면적인 게 아니다. 자연과의 관계도 전면적이다. 서울 사람들은 출근할 때 우산을 가져가야 할까, 정도로만 날씨와 관계를 맺는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날씨는 생계와 직결된다. 모심기 전에는 봄비가 사나흘 충분히 와줘야 하고, 호박이며 온갖 모종 심을 때는 촉촉이 땅만 젖을 정도면 족하고, 고추나 벼가 익어갈 때는 햇볕이 쨍하게 내리쫴야 한다. 비든 햇빛이든 넘쳐도 모자라도 재앙이다. 이래서 시골 사람들은 눈 뜨면 공기 속에 섞인 수분의 밀도와 그 시간대의 무엇으로 날씨부터 가늠한다. 그들의 삶은 날씨와 풍경(21세기 인간의 눈에는 풍경이되 농부의 눈에는 잡초까지 포함하여 작황이다)과 닭이 낳는 달걀 개수에 이르기까지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이 얼마나 전면적인가! 인공의 불빛 하나 없는 깊은 밤에도 저 하늘의 별을 지도 삼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뼛속 깊이 21세기의 원자화된 피가 흐르는 나는 밤이면 이 동네서 유일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블라인드를 내린다. 우주로부터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나의 고독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내 핏속의 21세기를 희석시킬 수 있을까 싶어 위스키를 홀짝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