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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있음을 알려주는 시들
송현지 宋炫知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수행하는 시인과 행위하는 시」 등이 있음.
hyunji0122@hotmail.com
‘있다’라는 말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사전에는 ‘없다’라는 술어만이 제시되어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모르다’나 ‘잊다’를 그 반대편에 세워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의미 자질이 전혀 다른 어휘들 사이에 이처럼 반의관계가 성립되는 때는 ‘있다’고 말해지는 대상이 ‘발견’되는 특별한 경우에 한정된다. 계속해서 이곳에 있었으나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누군가 ‘있다’고 말할 때 그제야 그것을 몰랐거나 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내게는 이런 일이 문학을 읽을 때 자주 찾아와서 문학의 여러 역할 중 하나가 이런 순간을 마련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왔다. 그런 점에서 최근 출간된 권선희, 안희연, 김민지의 시집을 ‘있음에 대한 발견’이라는 주제로 묶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를테면 그들의 발견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그것이 과연 필요한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이는 세 시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들이 지금껏 보이지 않게끔 작용해온 조건들을 비평이 함께 심문하는 일이기도 하다.
권선희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창비)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은 구룡포에 매혹된 권선희가 2000년 봄, 어떤 연고도 없는 그곳으로 떠난 이래 발간한 세번째 시집이다. 그간 두권의 시집과 르뽀와 산문을 통해 구룡포라는 지역과 그곳 사람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바 있는 그는, 이번 시집에서도 거기서 보고 들은 것들을 시에 담는다. 이제는 권선희의 고유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구술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는 방식의 시를 읽는 일은 육성을 듣는 것과 같다. 한 나이 많은 해녀가 “내 나이 팔십이니 사램이가 귀신이제”(「나의 첫 해녀, 박옥기」)라고 입을 뗄 때 우리는 드러난 사연만이 아니라 그 목소리에 밴 지난 세월의 궤적까지 상상하게 된다. 막연한 말이지만 그의 시를 읽으며 무언가 ‘살아 있는 것’을 마주 대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분명 이러한 서술방식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만큼은 이런 이유가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유독 ‘살아 있다’는 감각과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특별히 공을 들인다는 점에 있다. 이는 단지 인물들의 입체적인 면면을 제시하는 차원이 아니라 신체의 작동 여부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살아 있는 상태’ 자체를 그가 보여주려 한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상태’란 무엇인가. 저마다 다른 답을 내어놓을 질문에 권선희는 이것이 ‘관계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가운데,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와 같은 철학적 문제에 우리를 골몰하게 만든다. 가령 막 자맥질을 끝낸 해녀가 고단한 몸으로도 “막내 이마 쓰다듬”으며 아이들과 둘러앉아 뜨거운 국수와 함께 “서로 눈빛을 떠먹”는 장면이나(「깔때기국수」) “팔이 한쪽뿐”인 “아비”가 딸에게 짜장면을 먹여주는 모습(「사과나무에게」)을 보여줌으로써 그는 살아 있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이들과 마음을 나누고 때로는 이 생의 고됨과 부대끼며 지내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이때 권선희가 재현하는 생의 주체가 인간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시집에 수록된 가장 인상적인 시편이자 시집 제목을 포함하고 있는 「물의 말」에는 동료 해녀의 생환을 바라는 이들의 울부짖음에 뒤이어 “숨을 놓는 동료”를 살리기 위해 “몇번이고 분기공 띄우려 애쓰던 참돌고래들”의 모습이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겹쳐지는 두 장면은 생명종의 가치란 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행동을 하는 자는 누군가를 살아 있게 만듦으로써 그 자신이 살아 있는 상태임을 증명한다고 할 때, 종차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종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의 유무라고. 이때 시인이 가리키는 바는 ‘인간다움’을 넘어선, ‘생명다움’이라고 불려야 할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덕목을 말하면서도 권선희의 시는 이를 당위적인 윤리로 내세우지 않는다. 먹고살기 위해 고래를 죽이면서도 그들과 한 몸임을 실감해온 고래잡이(「고래잡이는 고래로 돌아가고」)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레 배운 것처럼, 화자는 이런 장면들을 독자에게 그저 보여줄 뿐이다. 물론 때로는 권선희의 시에도 윤리가 부자연스럽게 강조될 때가 있다. 가령 세월이 흘러 서로 의지하게 된 본처와 첩의 사연(「서로」)을 다룰 때, 정작 비판되어야 하는 구세대의 악습은 여성의 화합과 연대라는 가치를 내세우느라 너무 쉽게 덮인다. 한편 구룡포의 특수한 장소성이 강조되며 그 안과 밖이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도화되는 시들도 아쉬움을 준다. 모래밭을 메우는 외지인의 행태를 비판하는 「점령의 수법」이 대표적인데, 이렇게 안팎을 가르는 시들은 구룡포에서 이루어지는 연대와 사랑을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권선희의 좋은 시는 정확히 이 반대 지점에 있다. 우리가 잊고 있던 ‘생명을 가진 자’로서의 자질, 그러니까 연민과 같은 보편적인 덕목이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장면을 그가 보여줄 때, 그의 시는 “목숨으로 목숨을 연명하”면서도 “목숨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채”(「살자고 하는 짓이」) 사는 작금의 상황을 비추는 한편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이것은 시인이 지난겨울 구룡포를 떠나기까지 20여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이룬 빛나는 성취 중 하나다.
안희연 『당근밭 걷기』(문학동네)
안희연의 네번째 시집 『당근밭 걷기』는 절벽에 서 있는 사람이 등장하는 「밤 가위」로 시작한다. 지난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에서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지만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고 말하며 ‘절벽’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덕’을 오르는 중이라고 바꿔 생각해보기를 독자에게 권했던 그는, 여전히 이같은 말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절벽에 남아 있다. 이번 시집에서 이런 행위는 특별히 “서로의 목격자 되어주기”(「긍휼의 뜻」)라는 표현을 통해 구체화된다. 최근 문학장에서 종종 들리기도 하는 이 말1은 서로의 ‘친구’나 ‘동반자’가 되는 일과는 어떻게 다를까. 목격은 무엇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이는 서로가 세상에 있음을 확인해주자는 말이면서도 서로 있었던 일을, 혹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봐주고 상대의 고통에 기꺼이 연루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또한 목격은 대상의 근처에 있을 때 가능해지는 터, 여기에는 서로의 곁에 있겠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녹아 흐르는 슬픔을 참아낸 뒤 서로의 “굳은 모양”을 가만히 바라봐주는(「간섭」)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안희연의 화자는 이를 행하는 자귀와 가는잎향유와 율마 같은 식물의 이름을 제목에 밝혀 적고 “슬픔이 작동하는 회로를 아는”(「율마」) 일을 관계의 중요 요소로 내세운다.
그렇다면 ‘서로의 목격자 되기’가 필요한 것은 왜일까. 안희연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동률」)고 안도하는 세계에서 자신을 따듯한 눈으로 지켜봐주는 이가 없다면, 사는 데 작은 기쁨조차 없다면, 생을 포기하는 일은 어쩌면 쉽게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안희연은 알게 된 듯하다. 그러므로 안희연의 인물들이 서로를 목격하는 가운데 살아 있는 일에는 의미가 있다고 여러번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일상의 아주 사소한 순간에도 숨겨진 새로운 면이 있다고, 그것을 살아서 함께 알아가자고 그들은 말한다.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가 뭔지 궁금하지 않나요?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를 살아서 알아내고 싶지 않나요? “딱따구리의 부리” “잔물결이라는 말”(「굉장한 삶」)은 신비롭지 않나요? 죽기 전에 “개의 머리/저 축축한 코”를 “한 번은 쓰다듬고 싶”(「물결의 시작」)지 않겠어요? 나는 “지금껏 내가 파랑을 몰랐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나랑 같이 “파랑을 배워요”(「파랑」).
그간 안희연의 화자를 두고 ‘착하다’는 말이 오고 간 데에는 이같은 다정함이, 생을 아름답게 보려는 시선이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달랠 때 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이는 착한 성품을 지닌 자라기보다 자신의 말이 아이에게 온전히 전해지길 바라는 한편 그 말의 파장을 염려하는 자에 가깝다. 그렇기에 안희연의 시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다정함의 배면에 있는 절박한 마음이다. “밀가루 포대를 보면 뼛가루가 떠오”(「북극진동」)를 만큼 생의 너머로 가버린 이들을 수없이 목격한 그는, 흐르지 않는 슬픔의 시간이 매순간 남기는 자국을 움켜쥔 채 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시간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벌어질 “광활”한 “미래”(「반건조 살구」)가 우리에게 있다고 달래듯 말한다. 필사적일수록 더 다정해지는 목소리로.
이것이 화자의 부드러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다 읽고 난 독자가 단단한 열매를 손에 쥔 듯 느끼는 이유다. 돌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슬픔이 전해질 때마다 시인은 그보다 더 단단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반복하며. 그런 말들이 모여 만든 “당근”처럼 단단한 믿음이 밭을 이룬 시집, 그 “무해한 것”을 수확해 모두에게 나눠준 후에도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담아 가”도록 다시 “당근밭”(「당근밭 걷기」) 위에 선 그를 보며 나도 함께 목소리를 내어본다. “죽지 마 살아 있어줘”(「자귀」). 그 말이 구원할, 함께 포개져 있는 사람들을 나는 본다.
김민지 『잠든 사람과의 통화』(창비)
앞의 두 시집이 특정한 ‘있음’을 가리킨다면, 김민지의 시에서 ‘있음’의 대상은 도처에서 포착된다. 그런 의미에서 김민지의 첫 시집 『잠든 사람과의 통화』는 무수히 적힌 ‘있는 것들의 목록’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들러리”(「대기실」)와 같이 그 존재가 잘 포착되지 않는 이들만이 아니라 “흐르는 기분”(「생육 조사」)이나 “마음”의 움직임(「테라포밍」) 같은 순간적이고 비실체적인 것까지도 포함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떠한 대상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듯 김민지의 화자는 “고이면서 멀리 가는 것”에서도 끝내 “형체”(「인부의 말」)를 탐색한다. 물론 시에 적힌 것만이 그가 감지한 전부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말로는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낱낱이 밝혀 적지는 못한다는 듯 행과 행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간을 벌린다. 이 자리는 그가 놓쳤을지 모르는 ‘있는 것’들을 위해 예비된 자리이자 단어들이 뻗어나갈 사유와 감각의 공간이기도 해서, 독자는 저마다의 상상으로 빈 공간을 채우면서 시가 쓰인 속도만큼 천천히 그의 시를 읽게 된다.
김민지가 이처럼 ‘있는 것’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추게 된 것은 이 시집의 주체들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어떤 기억을 견뎌왔다는 점과 관련되어 보인다. “자는 엄마 코끝에 손을 얼쩡거리며”(「불릿의 시」) 엄마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화자의 불안은 그런 기억이 지난날 그의 가족에게 닥친 죽음과 관련된 것은 아닌지 추정하게 하는데, 끈질기게 지속되는 이러한 기억으로 그는 “뛰지 않고도 넘어지는 상상”(「향미증진제」)을 할 정도다. 말하자면 불우한 지난 기억은 실체 없는 일들을 수없이 증식시키며 화자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는 또다시 찾아올 불행의 기미를 알아차리기 위해서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하는 센서처럼 수많은 ‘있음’에 예민하게 열려 있었던 듯하다.
김민지의 화자가 다른 이의 어려움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며 “힘에 부치면 말해” “슬프면 말해”(「실키」)라고 말을 건넬 때 우리에게 돌연 쓸쓸한 감정이 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소극적인 그가 드물게 꺼낸 유년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다른 이를 다독이느라 자기 상처는 아문 척해야 했으며(“나는 딱지 같은 검정을 매만지면서//전면이라는 말을 배웠다”) “전면전”(「회문(回文)공작소」)을 치르는 듯한 삶 속에서 기억과 걱정과 싸우며 생존하느라 정작 자기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꽃”을 “오래 보고 싶”은 이들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잘리는 “줄기 같은 사람”(「디디스커스」)들에 대해, 애써 보려 하지 않으면 목격되지 않는 이들을 가리키며 모두가 “분홍색 형광펜을 제 몸에 그은 듯/죄다 중요”(「포트홀」)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간 자신이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냈던 ‘나’의 서늘한 그림자가 저런 말들에 드리워져 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던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한다는 그의 산문 한 구절을 빌리자면,2 어쩌면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수없이 발견함으로써 이제는 누군가로부터 발견되고 싶다는 기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런 ‘나’의 모습은 김민지의 화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10여년 전, 한 철학자가 진단한 ‘성과사회’3라는 말이 여전히 통용되는 지금,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다시피 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정작 잊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이기에. 우리의 무딘 “큰 손으로는 닿을 수 없”을 만큼 좁은 “구석”(「구석을 내밀면」)에 놓이게 된 우리가 스스로에 가닿을 수 있도록 시인은 시의 사이 공간을 꾸준히 벌린다. 이렇게 그가 만들어놓은 시의 ‘포트홀’에서, 우리는 사유하고 감각하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행위를 하는 ‘나’라는 유일무이한 존재를 새로이 감지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이 지면의 공간을 벌려 김민지라는 새로운 시인이 있음을 가리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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