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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슬픔 곁에 모이는 빛
소유정 蘇柔玎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이’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이제니의 시 읽기」 「관념에의 탈피와 ‘살아 있는’ 언어: 오규원의 시론 전반에 대하여」 등이 있음.
soyujj@naver.com
미야모또 테루(宮本輝)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코레에다 히로까즈(是枝裕和)의 영화 「환상의 빛」(1995)은 상실의 순간을 여러번 되짚는 작품이다. 주인공 ‘유미꼬’에게 상실의 기억은 두가지이다. 행방불명되기 전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멀어지는 할머니를 바라보던 장면과 어떤 기미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편 ‘이꾸오’를 배웅하던 아침의 장면. 비슷한 두번의 경험은 유미꼬로 하여금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죄책감을 남긴다. 이후 재혼을 한 뒤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난날의 기억은 어느 때고 불쑥 그녀를 찾아온다.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응시하며 유미꼬는 부재하는 대상을 향하다 결국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왜’라는 물음을 반복한다. 제목에서 짐작 가능하듯 이 영화에서는 빛의 쓰임이 중요하다. 빛은 기찻길을 따라 걷던 이꾸오를 끌어당겨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를 현혹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남겨진 삶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유미꼬에게는 어둠 속에서도 스미는 한줄기 볕이기도 하다. 한줌의 햇빛이 일렁이는 장면에 오래 멈추어 서서 그 빛을 그러모아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기를, 이것이 가능한 환상이기를 바랐다.
한 계절 사이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에서도 상실의 자리와 그 주위로 모여드는 빛에 대한 작품이 있었다. 이 글에서 다루는 두 소설 모두 개인의 아픔을 넘어 동시대적인 슬픔까지 끌어안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이 이태원참사 2주년을 맞았다. 기억하겠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억하겠다고 말하고 다짐하면서도 이즈음이 아니고서야 일년에 채 몇번 되지 않는 기억의 순간이 얼마나 유효한가를 반문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이럴 때 문학이 있어서, 이 계절에 문진영과 조해진의 소설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문학으로 인해 조금 더 많이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고, 구체적인 슬픔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슬픔 곁에 모여드는 빛을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가능성을 품게 하는 소설이 있어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진영 『미래의 자리』(창비)
문진영의 장편소설 『미래의 자리』는 친밀했던 이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그린다. 소설은 ‘미래’의 친구 ‘지해’와 ‘자람’, 그리고 쌍둥이 언니 ‘나래’를 번갈아 조명하며 그들의 일상을 파고든 상실의 자리를 가시화한다. 친구였던 세 사람에게 미래의 죽음은 모든 것을 서로 멀어지게 만든 우주의 빅뱅과 같은 일이었다. 커다란 구멍처럼 느껴지는 미래의 자리를 중심에 놓고 세 사람은 전에 없이 서로 거리를 두게 된다. 결코 메워질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모든 서사는 성장 서사라는 말”에 “저항감”(38면)을 느끼며 반복되는 일상에 갇힌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지만 진전시키지 못하고 인물처럼 정지된 듯 매일을 사는 지해, “어딘가 잘못된 곳에 놓여 있다는 느낌”(54면)을 지울 수 없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자람, 두 사람과 달리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자기가 느끼는 고통마저도 어느정도인지 가늠하려는 습관이 생겨버린 나래의 일상은 ‘살아간다’는 능동적인 행위보다 ‘견디는 상태’에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미래의 죽음 이후 이들이 매일을 살아감에 있어 공통적으로 어긋남을 느끼는 까닭은 단지 이들이 친구의 죽음을 인식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 또다른 의미로서의 미래의 자리, 즉 ‘오지 않은 시간’으로 넘어가는 동력이 되어준 존재가 더는 곁에 있지 않으며, 그렇기에 기대로 맞이할 내일이 아니라 “어제 살아본 오늘”(37면)의 반복일 뿐이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미래는 지해에게 “너 글 잘 쓰잖아”(112면) 하고 지해의 꿈을 만들어주었고, “다른 누구보다도 나래가 느끼는 감정을 섬세하게 알아”(98면)챘으며, 지해와 자신의 사이를 질투하는 자람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전히 이해받았다는 기분”(141면)을 선사했다. 그런 미래의 부재는 중의적 의미에서 미래의 ‘없음’으로 감각된다. 그들이 죽음이라는 미래의 선택을 다시 헤아리게 되는 것도 이 시점부터다. 미래는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사이, 누구에게나 있지만 망각되는 비일상적인 틈이 있다는 걸 오랫동안 잊지 않고 들여다본 사람이다. 그것은 세월호참사와 이태원참사처럼 동시대의 우리가 목격했던 시대의 상흔이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자는 “왜 나는 여기 있고, 누구는 없지?”(211면)라는 물음 속에 산다. 미래는 죽음으로 물음의 고리를 끊었지만, 이는 자신을 ‘없음’의 자리에 놓으려고 한 선택이 아니다. 끝내 지울 수 없던 “모르는 얼굴들”(같은 면)과 함께할 ‘있음’의 자리에 그는 새롭게 위치한다. 비로소 미래의 오랜 외로움과 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지점에서 문진영은 남겨진 이의 자리에 선 우리를 비춘다. 통감할 만한 사회적 참사로 희생되었던 이들을 기억하는 우리 역시 상실을 경험한 적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이 소설을 통해 다시금 환기된다.
세명의 초점화자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는 가운데 미래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건 그가 남긴 블로그 글에서뿐이다. 각자의 이야기로 구성된 장과 장 사이에 삽입된 미래의 글은 과거에 남겨진 기록이지만 지금의 인물들을 내일로 건너가게 만들고 또 하루를 견디며 살게 하는 분명한 힘이 된다.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유효한 다정함으로 마련된, 남은 이들을 위한 자리가 읽는 이마저 품을 정도로 넉넉하다. 그곳에 서서 다시 마주하는 빈자리는 여전히 공허하고 아프지만 더이상 서로를 멀어지게 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말미에서 나래가 말하듯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서로의 인력에 단단하게 붙들려버린다는 것을. 우주가 팽창하고 제멋대로 멀어지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애써, 힘껏,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217면)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관계를 헐겁게 만들었던 상실은 외면해야 했던 저항하기 어려운 힘이 아니라 망각되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기억이며 사랑이다. 그 덕분에 서로의 손을 맞잡아 만든 우리 안에서 미래의 자리가 고스란히 남는다.
『미래의 자리』는 구원처럼 느껴질 만큼의 빛을 단번에 손에 쥐여주는 소설은 아니다. 인물의 일상 역시 이전과 눈에 띄게 다른 변화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서는 고요하지만 뜨겁게 빛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침내 세 사람에게 다시 찾아온 빛은 우리 안의 빛의 행방을 묻게 한다. 수많은 상실과 아픔으로 잃어버린 혹은 잊고 있던 빛은 어디로 갔나. 그러한 물음을 가능케 함과 동시에, 이 소설은 여러개의 작은 빛이 모였을 때 더 큰 빛을 이룰 수 있고 그것이 우리를 미래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주지하게 한다.
조해진 『빛과 멜로디』(문학동네)
조해진의 『빛과 멜로디』는 단편 「빛의 호위」(『빛의 호위』, 창비 2017)를 확장시킨 이야기이다. “태엽이 멈추고 눈이 그친 뒤에도 어떤 멜로디는 계속해서 그 세계에 남아 울려퍼지기도 한다”(「빛의 호위」, 31면)는 말처럼 소설이 끝난 뒤에도 흘러나온 멜로디가 장편소설로 이어진 셈이다. 「빛의 호위」에서 주인공 ‘권은’이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현장이자 서사의 배경이 시리아 내전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기록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2022년 시작된 러시아와 우끄라이나의 전쟁이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동시대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빛의 호위」로부터 7년 후를 그리는 이 소설은 ‘승준’을 비추며 시작한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앞두고 있던 어느날 그는 선배로부터 우끄라이나 여성 ‘나스차’를 인터뷰해볼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에도 여전히 우끄라이나에 살고 심지어 임신 중인 나스차의 존재는 우리가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동안 누군가는 지구 어딘가에서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을 받고 폐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나스차와의 인터뷰를 통해 승준은 내전 현장을 오가던 권은을 떠올린다. 승준에게 받은 카메라로 삶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했던 권은은 분쟁지역 전문 프리랜서 사진작가가 된다. 그는 영국인 ‘애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레스보스 섬에 머물던 난민 ‘살마’를 영국에 정식 초청될 수 있도록 돕지만, 그러던 중 시리아 난민 캠프에서 왼쪽 다리의 절반을 잃는 사고를 당한다. 당시의 충격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도 문제였으나 무엇보다 이전처럼 분쟁지역을 찾아가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은 그에게 아주 오래전 느꼈던 “고요히 소멸하고 싶은 욕망”(26면)을 일깨운다.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그간의 작업에 있어서도 회의감이 든다. 권은에게 자신이 “사람을 살리는 사진”을 찍는다는 확신은 “내가 사는 이유”(128면)라고도 말할 만큼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중심축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정말로 그러한 역할을 해왔는지 자문한다면 이전과 같은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예컨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우는 살마를 두 팔 벌려 곧바로 안아주지 못하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부둥켜안은 채 함께 우는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119면) 했던 건 피사체를 대할 때 언제나 자신이 그러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진을 찍고 있지 않은 지금,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한 순간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보며 그녀는 타인을 위한다고 단언했던 날들의 마음이 실은 자기만족에 불과한 오만이 아니었을지, 그 진실성을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스스로와 갈등하던 어느날, 승준의 연락을 계기로 권은은 사진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타인을 살린다. 애나의 초청으로 영국에서 새로운 삶을 꾸린 살마가 이번에는 나스차에게 이어지는 연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준 것이다.
이전까지 권은은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반드시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러나 한장의 필름에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피사체와의 일정 거리가 필수적이었고, 그러한 거리 유지는 카메라가 없는 순간에도 유효한 습관이 되어버렸다. 『빛과 멜로디』에서 권은은 카메라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눈에 모든 것을 담고 기억하고자 한다. 셔터를 누르고 조리개가 닫힐 때 빛이 모여드는 순간을 좋아했던 것처럼, 더이상 혼자가 아닌 권은 곁에 모인 다정한 사람들이 빛이 되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빛의 호위」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살린 이야기였다면 『빛과 멜로디』는 그렇게 살아난 한 사람, 권은으로부터 이어지는 관계 속의 인물들이 서로를 살리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확장과 더불어, 『빛과 멜로디』는 조해진의 사려 깊은 시선이 한층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카메라를 통한 기록이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권은이 혹여 그 생각이 시혜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지 돌아보는 과정은 소설 내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작가에게 10년 전에 쓴 소설의 인물을 다시 살피는 일은 그때 자신의 쓰기를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할 테다. 이 소설은 끝나지 않는 멜로디처럼 계속되는 호위의 순간에 대한 기억이자 기록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를 기억하고 그 손길을 이어받았으면 하는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는 편지이기도 하다. 그 수신인은 승준의 백일 남짓한 딸 ‘지유’로 아직은 적극적인 ‘호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녀가 이 글을 읽고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게 될 때 누군가에게 빛을 나눠주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