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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데브 JJ 리 『외꺼풀』, 창비 2024
흩어진 자아와 회복하는 몸
김지은 金志恩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aldo211@daum.net
데브 JJ 리(Deb JJ Lee)의 자전적 그래픽노블 『외꺼풀』(In Limbo: A Graphic Memoir, 2023, 이주혜 옮김)은 미국의 어느 바닷가에서 비치발리볼을 하는 건강한 십대 소녀 둘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서브한 배구공은 시원하게 그물을 건너가고 곧이어 스파이크로 되돌아온다. 그 장면 위로 “열심히 노력하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인다고 자신을 속일 수 있다”(7면)라는 독백이 흐른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몇발짝 떨어진 곳에 한 동양인 소녀가 서 있다. 이 독백은 그림 속 클로즈업된 두 소녀가 아닌 제3의 소녀 ‘데버라’의 목소리다. 그는 외꺼풀을 잡아당기며 가는 눈을 어떻게든 그들처럼 크게 만들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데버라가 좌절하는 건 겉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경기에서든 외부 관전자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이런 자신을 “비-미국인이면서” “동시에 비-한국인”(98면)이라고 부른다. 경계를 오가며 만성불안을 겪던 데버라는 삶을 스스로 허물어뜨릴 위기를 맞지만 결국 자신을 구해낸다. 이 책은 “그 사이”(같은 면)의 생존자 데버라의 분투기다.
한국 이름이 ‘이정진’인 데버라는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저지주 서밋(Summit)에서 성장한 작가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투영한 인물이다. 서밋은 부유한 백인들의 거주지로, 그는 물리 영재학급에 선발된 우등생이지만 그 학급 안에서는 뒤처진다. 토요일마다 한국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테너플라이(Tenafly)의 한글학교에 다니는데 정작 한국어는 빠르게 잊는 중이다. 서밋에서는 데버라에게 중국인 아니냐고 묻고 테너플라이에서는 같은 인종이 아닌 애들과 사귀는 기분이 어떠냐고 질문받는다. 이민 1세대의 초조함과 기대에 감정이 극과 극을 오가는 그의 어머니는 교육에 쓴 돈을 수시로 계산하며 정서적·신체적 학대를 서슴지 않는다. 거듭된 학대를 견뎌내며 무기력에 빠져 있던 데버라는 자해를 시도하고 그동안 의지했던 백인 친구 퀸과 멀어진다. 상처 입은 관계를 회복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매순간이 힘겹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깊은 우물에서 자기를 끌어올릴 출구를 찾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 2018년부터 트위터에 네컷씩 올리기 시작한 자전적 만화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겪은 많은 사람의 지지와 응원을 받았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외꺼풀』은 언뜻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입체적인 얘기다. 지극히 솔직한 데버라의 내면을 통해 독자는 청소년의 감추어진 분노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겨누게 되는지 목격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10대 청소년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7.9명이며 2011년 이후 내내 10대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수능 시험은 똑똑한 애들을 걸러 내는 거야. 네가 어느 쪽이 될지는 너한테 달려 있고. 알았어?”(30면), “5분도 집중을 못 하더라고. 도대체 뭐가 문제니?” “그걸 노력이라고 해? 그게 열정이야?”(53~54면)라고 퍼붓는 데버라 엄마의 폭언은 우리 청소년들이 겪는 일상의 학대와 놀랄 만큼 닮았다.
데버라의 시선을 통해 독자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독립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국면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민자로서 겪은 지독한 외로움과 불안을 자식에게 투사했던 데버라의 엄마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결함이 있다. 물론 이 책은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의 내면에 담긴 화를 그린 한국계 미국인 작가 태 켈러(Tae Keller)의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강나은 옮김, 돌베개 2021)이나 중국계 미국인 가족의 혼돈을 다룬 『황금성』(리사 이 지음, 송섬별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3)과 『프런트 데스크』(켈리 양 지음, 이민희 옮김, 다산어린이 2023), 『물냉이』(안드레아 왕 지음, 제이슨 친 그림, 장미란 옮김, 다산기획 2022) 같은 이주배경 서사의 맥락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선명한 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엄마를 증오하고 거부하면서도 가해자인 엄마의 상태를 추적하려고 애쓰는 데버라의 양가감정이다. 데버라는 한국에 있는 할머니와 대화하면서 엄마의 젊은 시절과 이주여성으로 겪었을 불안을 상상한다. 작품에서 데버라를 일으키는 것은 음악과 그림인데, 이 과정에서 예술적 경험이 청소년의 부서진 상태를 어떻게 회복시키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찍어낸 듯한 묘사력으로 학교에서 벌어지는 미세차별을 묘사한다. 이 대목에서는 제리 크래프트(Jerry Craft)의 걸작 만화 『뉴 키드』(조고은 옮김, 보물창고 2020)가 겹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아시아계 미국인보다 더 두툼한 존재감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데버라가 겪는 차별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더 미세하고 더 아프다.
이 작품에서 ‘외꺼풀’은 데버라의 중첩된 혼란과 정체성 실종의 상태를 상징한다. 가는 눈에 대한 데버라의 열등감은 쌍꺼풀수술로 해소되지 않는다. 그는 기술력에서 월등하다는 한국의 성형외과 진료실에 앉아서 이렇게 살을 자르고 꿰매는 일로 자신의 상처를 지울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타인의 시선으로 해석된 몸을 돌아본다. 데버라가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재발견하는 이러한 과정은 이주와 학대로 흩어진 자아를 하나로 끌어모으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는 미국 공영 라디오 NPR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버림받은 존재였고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항상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날 미워한다고. (…) 그런데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를 미워하고 있지 않았다. (…) 어쩌면 내가 별로 초대받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게 됐다. 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깨달음은 이 책을 읽는 청소년들에게 작가가 전하는 소중한 진심이다. 데브 JJ 리는 중요한 것은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스스로 확신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내 단점을 보여줄 수 있는 용기는 그러한 확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추운 겨울날, 머리카락이 마르고 정전기가 일어나고, 햇빛 때문에 공기 중에 먼지가 떠다니는 풍경”(스쿨라이브러리저널 인터뷰, 2023.7.18)을 그리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청소년기는 그런 혹한 속에 있다. 겨울은 봄을 준비하는 회복의 시기이며 겨울의 땅은 회복력을 간직하고 있다. 『외꺼풀』은 겨울을 그리지만 우리를 봄으로 이끈다. 지금 이 시대에 너무나 간절한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