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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벤저민 R. 타이텔바움 『영원의 전쟁』, 글항아리 2024

권력자의 수상한 멘토, 전통주의자는 누구인가

 

 

최지수 崔智秀

조지타운대학교 커뮤니케이션문화기술 석사과정 jchoi02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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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겨울, 로마의 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두 정치인이 은밀히 회동한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를 권좌에 올린 배후로 지목되는 스티븐 배넌(Stephen Bannon), 그리고 블라지미르 뿌찐(Vladimir Putin)의 고문으로 알려진 러시아 극우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Dugin)이다. 세계 권력의 양 극단에 자리할 것 같은 이 두 정치인은 왜 비밀스레 소통하고 있던 것일까.

트럼프의 책사 스티븐 배넌은 극우 미디어 브라이트바트 뉴스와 정치컨설팅 기업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를 공동 창립한 미국 대안우파(alt-right)의 주요 인물이다. 2016년 트럼프 대선 캠페인을 이끌었고 백악관에 입성한 뒤에는 수석 전략가 겸 고문으로 반이민정책, 공교육 및 환경보호 예산삭감, 기후협정 탈퇴 위협 등 여러 분야의 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알렉산드르 두긴은 러시아 극우정당 유라시아당의 지도자로 전세계 내셔널리즘과 민족주의운동의 상징적인 인사다. 뿌찐의 대외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뿌찐의 연설에 종종 등장하는 ‘유라시아’ ‘다극성 세계질서’ 등의 언어에서 그의 사상적 자장이 역력히 드러난다. 극우정치 연구자이자 인류학자 벤저민 타이텔바움(Benjamin Teitelbaum)의 『영원의 전쟁: 전통주의의 복귀와 우파 포퓰리즘』(War for Eternity: The Return of Traditionalism and the Rise of the Populist Right, 2020, 김정은 옮김)은 수년에 걸친 인터뷰와 연구를 통해 이 두 세계 핵심권력의 참모가 ‘전통주의’(Traditionalism)라는 사상적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은밀하게 이어온 교류를 추적한다.

전통주의? 대문자 T로 시작하는 전통주의는 단순히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 사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전통주의는 18, 19세기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비주류 철학사조로, 현대성, 계몽주의, 물질주의를 전면 반대하며 현대사회를 ‘파괴’해야 영적인 가치를 되살리고 사회의 전통적인 질서를 복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보기에 전통사회에는 올바른 위계질서가 있었다. 흰 피부의 아리아 민족이 인종적 질서의 가장 위에 있고, 남성이 여성보다, 북반구가 남반구보다, 영성이 물성보다 우월하다. ‘현대성’은 이런 전통사회의 위계와 질서를 타락시켰다. ‘진보’라는 미명 아래 민주주의, 글로벌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가 생겨났고(전통주의적 시각으로 보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죄다 비슷한 현대성의 산물이다), 인권 개념, 보편주의, 페미니즘과 세속주의는 문화를 망치고 인류를 하향평준화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 타락한 시대를 구원할 방법이 있다. 전통주의의 창시자 르네 게농(René Guénon)의 시간순환론에 따르면 인류의 시대는 금, 은, 동, 암흑의 시기로 나뉜다. 숙명론적이고 염세적인 이 사관에 의하면 역사는 이 네가지 시대를 영원히 순환하며 진행된다. 따라서 현대사회가 파괴되어야 다음 차례인 찬란한 황금의 시대, 올바른 질서가 살아 있는 전통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그래서 제목처럼, 이들의 투쟁은 ‘영원의 전쟁’이다). 말하자면 먼저 현재를 파괴해야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위험한 사이비 사상이 미국과 러시아 정권의 배후에 있다고? 음모론처럼 들린다. 하지만 배넌은 저자와의 대화에서 전통주의 사상을 유려하게 인용할 뿐 아니라 트럼프를 ‘파괴자’라고 지칭하며 전통주의의 영향력을 여실히 드러낸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먼저 혼란에 빠뜨려야 재건할 수가 있어.”(146면)

전통주의의 국제적 네트워크는 미국과 러시아를 넘어선다.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 배넌과 두긴보다 더 높은 위상을 지닌 “미치광이 사이비 철학자”(157면) 올라부 지 까르발류(Olavo de Carvalho)는 ‘열대의 트럼프’라 불리는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의 조언자다. 헝가리의 전 우익정당 대표 보너 가보르(Vona Gábor) 역시 공개적으로 본인이 전통주의자임을 밝히길 꺼리지 않는다. 제도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권력자들부터 유럽 내셔널리스트 운동가들, 인도 아쉬람에서 영적 수행을 하며 극우사상의 고전들을 출간하는 출판사 편집장, 극우정치판에서 목소리를 키워 한자리 차지해보려는 인문학 교수, 한탕 해먹으려는 로비스트까지 은밀하고 광범위한 전통주의의 네트워크를 추적하는 『영원의 전쟁』은 때로는 스파이 영화처럼, 때로는 탐사 저널리즘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겉보기에는 제도권과 동떨어져 보이는 전통주의가 현대 극우정치의 이념적 배후에서 세계 곳곳의 반이민주의, 반세속주의, 반페미니즘, 내셔널리즘, 포퓰리즘, 백인 우월주의를 결집하고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은 트럼프가 다시 권좌에 오른 지금 더욱 의미심장하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저자의 인터뷰 능력이다. 민족음악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타이텔바움은 북유럽 내셔널리즘 운동에서 음악이 수행하는 역할을 연구하다가 극우정치 연구자가 되었다. 스톡홀름 뒷골목 펍에 모여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표하던 스킨헤드 무리가 시간이 흐르며 양복을 차려입고 제도권 정치로 침투해가는 과정을 목격한다. 소멸위기에 놓인 문화를 기록하는 보존 연구(salvage research)의 일환으로 시작했던 연구는 어느새 소수집단이 아니라 권력계층을 연구하는 상층부 연구(studying up)로 변해간다. 방구석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네오나치든 배넌이나 두긴 같은 최고 권력자든, 저자는 연구대상과 라뽀를 형성하고 속내를 털어놓게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그 때문인지 저자가 연구대상과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나머지 이들을 합리화하는 서사를 제공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배넌과 두긴이 저자를 가교 삼아 소통하고, 저자 스스로도 자신의 작업이 전통주의나 극우 네트워크에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는 순간도 있으니 일리가 없는 비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서술이 그렇게만 읽힌다면 다소 섣부른 독해가 아닐까 싶다. 이같은 도덕적 모호함은 저자가 말하듯 권력집단이나 반사회적인 집단을 대상으로 “강렬한 사회적, 지적 얽힘”을 이용한 참여관찰 연구를 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스노그라피 작업에 따르는 모종의 ‘비도덕성’은 다른 형태로는 얻을 수 없는 민족지학적 지식을 생산하는 데 불가피한 인식론적 도구라고 반박한다(B. R. Teitelbaum, “Collaborating with the radical right: Scholar-informant solidarity and the case for an immoral anthropology,” Current Anthropology, vol. 60 no. 3, 2019).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 이 책은 기이하게도 익숙한 잔상을 남긴다. 트럼프에게 배넌이, 뿌찐에게 두긴이 있다면 한국에는? 수상하게도 영성을 중시하는 권력의 ‘멘토’, 뭔가 익숙하다. 한국에서도 이런 상층부 연구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