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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송희일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삼인 2024

기후위기, 무엇과 싸우고 어떻게 춤출 것인가

 

 

윤은성 尹銀晟

시인 yescjdm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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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생태 위기를 다루는 저서들이 쏟아진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영화감독 이송희일이 쓴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기후-생태 위기에 대한 비판과 전망』은 지구적 기후재난과 기후위기를 야기한 구조를 수많은 사례를 통해 밝힌다. 파편적인 뉴스로만 사안을 접하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일상에서, 이 기막힌 재난의 맥락을 엮어 이해할 책이 나와 반갑다.

이 책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기후재난을 야기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는지 짚으며, 식민주의 역사와 기후위기 사이의 연계를 읽어낸다. 기후위기에서 파생되는 또다른 피해는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통계와 수치들이 숨기고 있는 불평등과 비대칭, 위선, 잘 보이지 않는 슬픔과 분노”(8면)에 관심이 있다고 밝힌다. 행간에 흐르는, 부정의를 목도한 데서 오는 울분의 정동이 이 책의 고유한 성격 중 하나라는 점이 자주 언급되면 좋겠다.

가령 서벵골의 ‘호랑이 과부’의 예를 보자. 기후위기로 농사짓기가 어려워지자 농부들은 위험지역인 숲으로 들어간다. 남편이 호랑이에게 희생당한 아내들은 사회의 편견 속에서 저주받은 존재로 여겨진다. 기후위기 상황에서는 아프리카, 남아시아, 중동, 남미 등 남반구 여성청소년들이 성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고, 빈곤한 이들은 더욱더 심한 빈곤으로 내몰린다. 기후위기가 격화한 생존경쟁에서, 취약한 이들은 가장 먼저 피해 당사자가 된다. 데이터나 파편적인 시선만으로는 온전히 해석되지 못하는 구조적 위계의 문제에 기후위기가 접속되어 있다.

2023년 리비아에 닥친 태풍 다니엘로 인한 참사는 군벌 카다피(M. Gaddafi)의 득세와 석유를 두고 벌인 각축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재난에 대응할 인프라가 붕괴한 상황에서 리비아에 강타한 폭풍우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이 참사는 과연 자연재해가 맞는가. 이 책은 전반부에 배치한 사례들과 질문을 통해 기후위기 상황을 바라보는 작업에 반드시 기입되어야 할 위계들을 거듭 짚어낸다.

선주민을 몰아내고 공유지를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모조리 바꾸어버린 식민주의는 지금까지도 남반구 국가들을 부채에 가둬두고 있다. 식민주의는 “순수한 야생의 미개간지”(142면)를 선점한 뒤 이곳을 문명화한다거나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수탈을 정당화해왔다. 이 맥락에서 남반구의 부채를 탕감하는 것은 단순히 빈곤의 문제를 넘어 기후정의에 부합하는 일이 된다.

이 책에서는 한국의 사례를 많이 언급하지는 않는다. 기후재난이 일국 단위 혹은 하나의 문화권만의 문제가 아니며 패권구도 속에서 모두가 깊이 얽힌 문제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대기업이 이익을 철저히 사유화하면서 배출한 압도적인 탄소량에 대한 책임과 개인에게 부여되는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 사이의 불균형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한국의 기업들이 호명된다. 포스코, 남동발전, 남부발전, 현대제철, 삼성전자를 비롯하여 한국 전체 기업의 1%도 되지 않는 수의 기업들이 전체 배출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기업과 정부, 환경단체마저 탄소중립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텀블러 사용이나 플로깅 같은 개인적 실천을 통한 만족감을 주면서도 자신이 지구를 파괴한다는 죄의식을 심어줄 따름이다.

이뿐이 아니다. 우리는 파국을 상상하는 SF적 이미지에 숱하게 노출되어 살아가면서 우주를 도피처로 여기는 데 익숙하다. 이는 착취와 파괴를 ‘미개척지’에 외부화해온 식민주의가 우주로 확장되는 것임에도 그럴듯한 전략으로 소비된다. 파국의 상상력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기술주의로 도약하는 해법에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결국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는 믿음은 파괴를 지속하는 개발주의와 지구상의 물질 추출을 정당화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적 실천을 넘어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기후위기 대응에 힘을 더할 수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들을 따라 읽다보면 자연을 순수한 영역으로 프레임화하는 일 또한 정치적 우경화일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권리투쟁과 생태적 감수성을 결합한 방식으로 자본에 의한 식민화에 대응하는 생태사회주의의 의의를 재발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생명이 깃든 몸으로써 함께 춤추고 구조를 바꿀 상상력, 그리고 자신의 빈곤을 자본주의적 빈곤으로만 이해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저자는 자본주의 바깥(또는 자본주의가 우선순위에 있지 않은 상태)을 상상하고, “관계의 무수한 겹침”(149면)을 기쁘게 확인하자고 제안한다. 거기서 비롯되는 환대는 곧 생태적인 일일 것이다. 기후재난이 더 빈번해지면 늘어나는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국가들의 폐쇄성이 커지고, 전쟁과 기아, 혐오의 정동도 늘어날 것이다. 종말보다 두려운 것은 어쩌면 이같은 상황일 테다. 환대가 없는, 폭력과 죽음의 나날들 말이다.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책의 후반부에서는 아래로부터의 운동 사례가 눈부시게 제시된다. 재생에너지 전환을 통해 탈식민화를 꾀한 푸에르토리코 풀뿌리 에너지운동의 예, 식량주권을 확보한 꾸바의 예가 그것들이다. “사회 정의는 땅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식량을 스스로 자급하는 민중의 힘으로부터 온다는 것”(433면)은 거듭 강조되어야 할 지침이다.

부패한 국가권력들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우리나라의 밀양 송전탑 투쟁과 같은 국가폭력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반면‘멸종반란’과 ‘저스트스탑오일’ 등 해외에서 일어났던 운동들의 경우 분명한 성과를 보였는데, 여기서는 심리적 기제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한계가 정리되고 있어 그 운동의 외연을 살필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한국의 멸종반란 및 여러 활동가와 단체가 직접행동을 통해 가시화한 기후재판 사례들은 어떻게 평가될지 자못 궁금하다.

연대를 조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저자가 일러주듯 극단적인 파국론으로 충격을 주는 방식, 착한 소비와 같이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에 더이상 속을 수 없다. 나는 이 책이 분석적이면서도 매우 실용적이라고 느꼈다. 이윤의 논리가 우리를 장악하게 두지 말고 생명의 춤을 추며 함께 어우러지는 상상 속에서 좀더 용기를 내보자는 제안이 반갑다. 부조리한 문제를 정확히 판단하고 해결하기 위한 에너지를 일깨우는 용기의 말은 언제든 더하고 나눌수록 좋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자리는 비교적 명확하다. 자연의 일원이자 자연의 균형에 동참하는, 공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동물권으로의 세밀한 확장을 위해 다른 책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