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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클레어 키건 『푸른 들판을 걷다』, 다산책방 2024
상실의 땅, 꿈의 갈퀴
성혜령 成慧玲
소설가 eve_adam@naver.com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의 이야기는 언뜻 인물보다 배경이 두드러지는 듯 보인다. 삭막하고 불가해한 아일랜드의 자연뿐 아니라 인물이 감각하는 공기의 온도와 사물의 밀도까지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문장으로 묘사된다. 어디든 있는 벽과 천장조차 그저 ‘벽’이나 ‘천장’으로 지칭되는 법이 없이 ‘장미가 그려진 노란’ 벽과 ‘슬레이트가 떨어져서 얼룩덜룩’한 천장으로 존재한다. ‘금속처럼 견고하고 영원해 보이는’ 풍경은 동판화처럼 작은 결절까지 드러낸다. 자연은 결코 감탄이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며 때 이른 서리로 농사를 망치거나 순식간에 높은 파도가 사람을 집어삼키듯 불현듯 움직인다. 인물들은 구체적인 사물들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에 둘러싸인 채 먹고 마시고, 자고 노동한다. 이별과 화재 같은 극적인 일이 일어나도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반추하며 감상에 빠질 만큼 누구도 한가하지 않다. 할 일은 끝이 없고, 일상은 지속된다.
때로는 인물들의 삶도 마치 정물처럼 느껴진다. 사건을 복잡하게 꼬아놓는 플롯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일상의 틈에서 어떤 예감과 슬픔이, 불운과 악행이 불쑥 솟아올랐다 가라앉을 뿐이다. 서사는 사실 외부인의 시선으로만 가능한 서술일지 모른다. 자기 삶을 살아내는 인물들에게 모든 장면은 순간이며 경계 없이 지속된다. 키건의 문장은 이렇듯 정적으로 보이는 인물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간다. 밖에서는 잔잔한 수면처럼 보였던 인물들의 삶에 한번 발을 들이면 그 안에서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를 맞게 된다. 척력과 인력이 팽팽하게 맞부딪히며 거품이 일고, 부서지며 사라졌다 다시 솟아오른다. 그 치열한 균형이 만들어내는 균열을 알아차리는 순간, 키건의 문장은 마법을 부린다. 이처럼 사소하고 구체적인 풍경 안에서 지속되는 삶은 관성 때문이 아니라 더 멀리 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잃어버린 것을 관조하는 듯 보이는 인물들은 실은 그 상실을 계속 되살려내 살아내고 있음을, 우리는 앎이나 이해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 모두 ‘당신 문제 있어요’라는 말을 끝없이 듣고 있음을.
『푸른 들판을 걷다』(Walk the Blue Fields, 2008, 허진 옮김)에 실린 일곱편의 이야기들에는 가족이라는 자장 밖으로 벗어나려는 여성들과 성소수자 주인공, 스스로 사랑을 떠나보냈거나 운명에 ‘굴복’해버린 남자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무심한 듯 삶을 영위하고 있으나 실상 누구보다 거센 소용돌이를 견뎌내고 있다. 이 책의 풍경은 그저 소설의 ‘리얼’함을 더해주는 장치가 아니다. 인물이 하지 못한 말과 잃어버린 것들과 후회와 체념이 잘못 떨어진 나뭇잎이나 빠져나온 전선처럼 풍경 곳곳에 던져져 있다. 표제작 「푸른 들판을 걷다」의 ‘사제’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하는 밤의 푸른 들판은 그 자체로 그의 내면의 풍경이 된다.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것을 스스로 버렸음을 그는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억지로 되새김질하지도, 차단하지도 않은 채 성직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 들판을 걸어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그 어쩔 수 없는 삶으로의 복귀에 동행하면서 우리는 그의 마음속 풍경을 가까이 지켜보게 된다.
일곱편의 이야기 중 「삼림 관리인의 딸」은 특히나 인상적이다. 자신에게 더는 결혼을 청하는 남자가 없을까봐 적당히 결혼한 ‘마사’와 그녀를 사랑하지만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물려받은 땅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친 ‘디건’ 그리고 자신의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히 꿰뚫어보는 ‘막내딸’은 각자의 현실에 매여 있다. 각자가 매인 현실의 무게 때문에 이들은 서로 빈정거림을 주고받거나 깊은 침묵에 빠질 뿐, 어떤 서사도 쌓지 못한 채 시간은 분절된다. 이 인물들에게 현실은 너무 단단하고 딱딱하여 무른 손짓 같은 것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다. 이 단편에서 키건의 문장은 인물의 내면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데 그치지 않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이 한집에 사는 일이 얼마나 큰 기만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지 가만히 되묻는다.
현실의 완고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은 꿈과 이야기를 통해서나마 그들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떠받치고 있는 진실을 만난다. 발 디딘 땅과 물려받은 튼튼한 집을 믿어 의심치 않는 디건이 아내가 떠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꿈을 통해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음을 예지하는 장면에서, 진실과 거짓이, 신화와 현실이 한데 얽힌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우리는 꿈은 현실의 반대이거나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같은 면의 음각과 양각일 뿐이며,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삶에는 현실의 원심력과 똑같은 힘으로 꿈의 구심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이제 꿈을 꾸는 것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107면)이 된 디건과 자신의 부정을 ‘이야기’라는 허구적 형식을 통해서 남편에게 시위하듯 발설하는 (고백이 아닌 발설에 가깝다) 마사. 이들을 통해 독자는 허구의 겹을 입고서야 온전히 드러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이는 소설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푸른 들판을 걷다」에서 풍경이 내면과 조응하며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면, 「삼림 관리인의 딸」은 꿈과 현실이 엉켜 있는 삶을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고요한 듯 보이는 삶에 달린 무시무시한 무게의 꿈, 그 꿈을 밀어낼 수도 쫓아갈 수도 없는 인물들은 저마다 푸른 들판을 걸어가고 있다. 상실이 단단히 뿌리박힌 땅은 그러나 결코 폐허도 이상향도 아니며 그 단단함을 거스르려는 꿈의 갈퀴가 부지런히 할퀴고 지나가는 역동적인 현장이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다시 흙을 덮고 땅을 다질 수밖에 없으나 꿈의 흔적을 통해서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잃어버린 것을 예감할 수 있다. 내게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모든 좋은 소설이 그렇듯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