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24년 6월 5일에 회의를 열고 안미옥 안희연 유병록(이상 시 부문) 김나영 이주혜 전기화(이상 소설 부문) 및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기타 부문)를 예심위원으로, 김행숙 정지아 정지창 황정아를 본심위원으로 위촉해 심사진을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은 7월 10일까지 각 부문에서 그 성취가 인정되는 대상작을 선정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만해문학상 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한 예심에서 시집 4종, 소설 4종(총 8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이어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월 12일 1차 본심을 열고 다음 4종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선정했다. 이명윤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이영광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이상 시), 권여선 소설집 『각각의 계절』, 김혜진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이상 소설).

9월 9일 열린 2차 본심(최종심)에서 더 본격적인 논의가 재개되었다. 심도있는 토론을 거쳐 심사진은 권여선 소설집 『각각의 계절』(문학동네 2023)을 본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시대와 관계성에 대한 통찰이 한층 깊어지고 언어는 더욱 섬세해진 작품으로, 우리 문학이 충분히 돌아보지 못한 초로의 여성들이 각각의 얼굴과 목소리를 지닌 채 각각의 계절을 살아가는 모습을 장인다운 정교한 솜씨로 그려내는 동시에 그들이 간직해온 유토피아적 열망의 정동을 포착해낸 빼어난 작품이라는 데 심사위원 전원이 뜻을 같이했다.

 

 

 

심사평

김행숙(金杏淑) 시인

만해라는 이름의 문학상이 가질 수 있는 크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100년 전의 시집 『님의 침묵』은 한국문학의 미래를 멀리 비추고 있었다. 그의 언어는 감각과 사유가 첨단과 깊이라는 차원에서 동시에 운동하는 놀라운 시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만해라는 시점(始點이자 視點)에서 100년의 문학사는 세계를 감각하고 삶을 사유하는 문학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면서 지금 여기에 당도해 있다.

두달에 걸친 심사과정에서 읽은 작품들의 고투와 성취에 대해 만해의 이름을 빌려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이영광의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과 권여선의 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한 작가가 만들어가는 작은 문학사 안에서 이들이 어떤 경지에 다다랐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냈고, 대문자 한국문학 안에서도 기억할 만한 이영광적인 것, 권여선적인 것을 각인시킨 특별한 작품집으로 읽혔다.

이영광은 ‘그 역(반대)도 마찬가지’(vice versa)라고 말할 때 가장 섬세하고 사려 깊게 헤아리는 언어를 쓴다. 삶의 이면(裏面이자 異面)들을 동시에 투시하는 그의 시선은 삶의 불가해함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그는 그 불가해한 삶의 구덩이 속으로 기꺼이 내려가는데, 거기에 ‘살 것만 같던 마음’이 엉켜 있다는 것, 그리고 ‘살 것만 같던 마음’으로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해한 진실의 장소에서 그냥 산다는 것, 이 모든 면면들을 그는 몸으로 겪고 언어로 겪어서 보여준다. 그는 ‘우는 남자’일 때도 어떤 꼿꼿함, 씩씩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 역도 마찬가지지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남긴다는 것, 그는 언제나 그 섬세한 변별적 지점까지 파고든다.

권여선의 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놀랍게도 대표작들로만 묶인 작품집이라 할 만했다. 특유의 쉽고 부드러운, 거의 리듬에 도달한 문체는 이제 권여선적인 것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소설집을 읽고 나면 그 이후로는 잊히지 않을 어떤 얼굴들, 표정들이 장기기억 속에 깃들게 된다. 특히 한국문학에서 그다지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던 어떤 중년 여성, 초로의 여성들이 각각의 얼굴과 각각의 목소리를 가지고 각각의 삶의 계절을 살고 있다. 그의 소설에서는 시간이 만들어내며 길들인 얼굴이 아니라 새롭게 알을 깨고 나오는 얼굴의 사건이 벌어진다. 권여선은 그렇게 살아 있는 얼굴들을 삶의 그늘에서 꺼내어 보여준다. 그들은 ‘사슴벌레식 문답’을 익혀 유용하게 잘 쓰는 자들이 아니라 ‘사슴벌레식 문답’ 자체를 계속 질문하고 탐색하는 존재들이다. 삶을 아주 깊이 껴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끝끝내 쥐고 있는 질문을 듣게 된 자는 그걸 쉽사리 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해의 시를 빌려 말하고 싶다. 이제 우리의 마음에 잊히지 않고 맴도는, 권여선식의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돈다. 100년을 건너온 만해 문학의 빛이 이곳에 잘 닿은 것 같다.

 

정지아(鄭智我) 소설가

권여선의 소설은 한번도 독자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각각의 계절』은 그 이상으로 기대를 뛰어넘은 소설집이었다. 시대와 관계성에 대한 통찰은 한층 깊어졌으며 언어는 더욱 섬세해졌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권여선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의 독특한 시선에 매료당했다. 그의 인물들은 단호하지 않고 당연히 확고한 신념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늘 흔들리며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많은 작품에서 진실의 칼날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화자 자신이다. 이토록 서늘할 수 있다니. 한번도 엄마였던 적 없는 누군가는 비틀거리며 엄마가 되어가고, 또 누군가는 비틀거리며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간다. 때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그게 인생인걸. 권여선이 탄생시킨 엄마는 우리 소설사에 없던 이상한 엄마이며, 이상한 아줌마다. 그렇게 늙어 곧 이상한 할머니가 될 테지. 자기 자신조차 서늘하게 해부하는 권여선의 인물들이 어디로 나아갈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중이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이명윤의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가 마음을 뒤흔들었다. “멸치로 태어나 멸치는 서럽다”(「멸치는 힘이 세다」)라는 저 거친 직설의 시어 앞에서 나는 낯이 뜨거웠다. 직설의 언어가 사라지고 취향의 언어가 널을 뛰는 세상이지만 우리의 발밑은 여전히 지옥이다. 애써 지옥의 세계를 직면하려 하지 않을 뿐이다. 사뿐 뛰어오르면 누구나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오를 것 같지만 그것은 영리한 자본의 현혹에 불과하다. 현혹되지 않는, 현혹하지 않는 건강한 언어, 서럽고 아픈 제 발밑을 꿰뚫는 언어를 오랜만에 접했다. 우리는 이명윤 시인이 처한 현실을, 그의 현실이 빚어내는 언어를 더 제대로 들여다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 앞에서 최종 수상작을 오래도록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언어가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나부터 그의 행로를 눈여겨 지켜보련다.

이영광의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은 잘 벼린 칼날과 같다. 그 칼은 가볍고 얇지만 날카로워 베지 못할 것이 없다. 그 칼날은 종종 스스로를 향한다. “아픈 엄마를 얼마로/계산한 적이 있었다”(「계산」)와 같은 시구 앞에서 누군들 섬뜩하게 제 마음 베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영광의 시는 모순적인 인간의 마음을 예민하게 꿰뚫는다. 거짓말과 얇은 얼음장 같은 신념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그의 시가 있어, 그런 마음을 아는 예민한 자들이 있어 유효기간이 연장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집’은 오래도록 한국사회의 최대 화두였다. 아파트 한채 값이 수십억을 호가하는 최근에는 가장 뜨거운 화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집’은 단순히 가족이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천박한 한국식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김혜진의 『축복을 비는 마음』은 물리적이고 비물리적인, 그야말로 한국적인 ‘집’의 의미를 정면으로 파헤치는 소설집이다. 김혜진의 데뷔작부터 눈여겨봐온 독자로서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에 도전하는 이번 소설집을 흥미롭게 읽었다.

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을 들은 지 20년도 지난 것 같다. 1970, 80년대와 같은 문학의 시대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문학은 끝나지 않았다. 문학의 시대가 끝났음에도 지치지 않고 도전하는 작가들이 있어 문학의 수명은 불멸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오랜만에 좋은 시와 좋은 소설을 읽었다. 모든 작가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정지창(鄭址昶) 문학평론가

본심에 올라온 네분은 역량과 개성이 뛰어난 작가들이다. 모두 상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분들이지만 만해의 이름으로 주는 문학상에는 누가 가장 적합할까를 두고 치열한 토론을 거쳐 가까스로 당선작에 합의했다.

『각각의 계절』의 권여선은 작품을 꾸며내는 정교한 솜씨가 장인다운 경지에 도달했다. 체호프나 김승옥 못지않은 단편소설의 대가이면서 그만의 독특한 개성과 깊이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사슴벌레식 문답」과 「무구」 「기억의 왈츠」는 대학 시절의 경험을 반추하는 후일담식의 서사와 도시 중산층 여성들의 신산한 일상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하늘 높이 아름답게」 같은 작품은 여성들의 일상을 통해 역사적·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겪는 상처와 아픔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앞으로 장편소설에서도 빛나는 성과를 거둘 것을 기대한다.

김혜진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부동산 투자와 투기를 하는 소시민과 서민들의 일상을 손에 잡히듯 현장감있게 묘사한 점이 인상적이다. 강남 부유층뿐만 아니라 중산층과 서민들도 부동산과 아파트 투기에 얽혀 살아가는 기이한 시대의 풍속도이자 생활사로도 읽을 만하다. 생활현장에 밀착된 이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앞으로 부동산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들을 어떻게 조명하고 형상화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이영광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은 미세하고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진동을 지진계처럼 기록한 시편들이 매혹적이고 경이롭다. 「그해 세밑에는」 「마스크들」은 코로나 시대를 견디며 건너가는 시인의 정직한 기록이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렇지만 무언가 한층 근원적인 깨달음과 인식을 제공하거나 적극적인 가치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세상의 모든 생명과 사물과 현상들을 포착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반응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믿을 만한 최종적인 준거가 되기에는 빈틈이 많기 때문이다. 삶의 맥박이 느껴지는 섬세하고 정직한 이영광 시인의 다음 시편들을 기다린다.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의 이명윤 시인은 서울 쪽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른바 지역작가이다. 변두리 사람들이 살아내는 고달픈 일상에서 길어낸 「고라니가 우는 저녁」 「수의」 「김우순」 같은 시편들은 진정성이 있고 공감을 자아낸다. 변방의 시인은 서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다. 고립과 소외를 양식으로 삼아 앞으로 더욱 원숙하고 그윽한 시의 바다로 나아가기를!

 

황정아(黃靜雅) 문학평론가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다시 읽으며 심사라는 절차의 공식성을 어느새 잊었다. 작품마다 다르게 열어 보인 세계들 덕분에 삶이란 더 깊이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임을 또 한번 깨닫게 된다. 개별 작품의 세부에서 만해문학상의 의의에 이르기까지 진솔한 의견을 나누는 과정 역시 귀한 시간이었다.

김혜진의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빈곤을 지척에 둔 생계에 어떤 고난이 따르는지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고찰한 작품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온갖 불합리가 집약된 부동산이 욕망의 화신과는 거리가 먼 이들마저 포획하여 피폐하게 만드는 과정이 세밀히 그려진다. 부동산을 둘러싼 활활 타오르는 광기보다 그 광기가 남기는 실제 결과를 최전선에서 감당하는 사람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드보일드이되 흔히 동반되는 센티멘털을 잘라낸 김혜진의 스타일이 이 스산한 삶의 풍경을 더없이 실감 나게 전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의 ‘사정’이 곧 인간의 ‘삶’은 아니지 않을까, 때로 삶은 뜻밖에 입체적이어서 주어진 생계의 사정을 넘어서기도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라게도 된다.

이영광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에 실린 시들 대부분은 어둠과 그림자, 무엇보다 죽음을 응시하며, 특유의 거칠고 묵직하면서도 예민하고 비타협적인 감각으로 그런 존재들에 합당한 무게와 질감을 부여한다. 그 어둡고 두려운 것들을 자기 안으로 들이는 일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요소의 융합이라서 담담히 수행되는 순간에도 충돌의 에너지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아이러니와 반전은 그 에너지를 재차 진압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거나 깊어지려 하기보다 놓지 않고 침잠하려는 의지가 이 시집의 주된 정동이자 매력이다. 그런데 의지란 또한 어쩔 수 없이 스스로에게만 집중하는 속성을 갖는다. 자유롭고 활달한 운행을 충분히 허락받은 시적 사유만이 그런 일방향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을 듯하다.

이명윤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는 호들갑이나 장엄이 없는, 이를테면 슬픔이나 저녁처럼 순화된 시선으로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들, 곧 사라질 것만 같은 것들을 담는다. “우는 사람 옆에 우는 사람”(「억새들」)이 이 시집의 자리를 정확히 가리키는 구절일 것인데, 돋보이기 힘든 그 외진 자리를 지켜온 굳건함에 마음을 보태고 싶어진다. 서정시가 원래부터 일인칭만은 아니며 대상보다 자신을 앞세운다는 비난은 너무 안이한 오해라는 사실을 이 시들을 읽으며 다시 떠올린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당대성과 개성적인 스타일에 대한 요구를 시 본연의 소박함으로 돌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더 단호하고 의식적으로 정형성과 맞서는 싸움이 필요할지 모른다.

다소 긴장된 논의 끝에 수상작은 권여선의 『각각의 계절』로 결정되었다. 전체와 세부의 촘촘한 맞물림이 자아내는 이만큼의 밀도, 삶의 비평에 값하는 이만큼의 지적인 서사는 쉽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에 이 소설집에서 재차 확인되는 작가적 역량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권여선의 소설들은 자주 삶의 한 장면에 담긴 비인간적 정동을 포착하며, 그럴 때 인물들은 제어하지 못하고 때로 의식조차 못하는 힘에 사로잡힌다. 이 힘은 나날들의 안이한 궤도를 타격하고 삶과 기쁨의 토대가 다른 곳에 있음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또한 사회적인 것이다. 『각각의 계절』에 담긴 급진성의 핵심은 종종 오해받듯이 날카로운 비판이나 자기비판보다는 잠복된 유토피아적 열망에 있고, 그 열망은 한 세대의 여성들이 고유하게 간직해온 성격이라는 데서 권여선식 페미니즘을 말할 수 있다. 경의를 담아 축하인사를 드린다.

 

 

 

수상소감

 

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만해’의 마음

 

권여선

 

저에게는 통화기피증이 있습니다. 그게 언제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십여년 전쯤에 발병하여 조금씩 악화되어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수상소식마저도 문자메시지로 전달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창비의 전성이님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려 전화를 주셨는데 당연히 받지 않았/못했습니다. 다음 날 또 전화를 하셨지만 저는 또 받지 않았/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부득이 문자메시지로 수상소식을 전달하셨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분도 이분 나름대로 수상소식은 직접 통화로 전달하는 게 마땅하다는 소신이 있으셨는지 제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통화가 가능한 시간을 알려달라’고 마지막 고육지책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메시지를 보고 단호히 ‘긴한 말씀을 문자나 이메일로 주시면 재빨리 답변드리겠다’는 답장을 보냈지요. 그제야 전성이님도 기진맥진하여 어쩔 수 없이 문자메시지로 만해문학상 수상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자메시지에 찍힌 ‘만해’라는 글자를 화두처럼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萬海 또는 卍海라는 한자와의 연관 없이 한글로만 찍힌

만해

라는 글자는 퍽 순하고 낯익고 천진난만해 보였습니다. 그런 순하고 낯익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제게 무언가를 하도록 부드럽게 권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을) 해. 만(을) 하자, 만(을) 해도 돼, 그런 식으로요. 이 ‘만’의 자리에 들어갈 말은 ‘만가지 일’도 되고 ‘부처’도 되고 무엇이든 되겠지만, 저에게 그 자리에 들어갈 평생의 일은 ‘글쓰기’입니다. 그러니까

만해

라는 두 글자의 화두는 제게 그래, 글쓰기를 해, 글을 써, 글을 쓰자, 글을 써도 돼, 그렇게 속삭이는 것처럼 읽혔다는 얘기입니다.

 

쉽게 글을 쓰는 작가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저도 조금은 순탄치 못한 과정을 거쳐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저는 제가 워낙 게으르고 마음을 안 먹어 그렇지 마음먹고 집중만 하면 뭐든 빠르게 학습해 빠르게 성과를 내는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소설을 쓰면서, 아니 소설을 못 쓰면서, 죽도록 못 쓰면서, 인류의 팔할 이상이 갖고 있었을 법한 저 유아론(唯我論)적 에고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마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그런 착각에 사로잡혀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시절, 소설을 쓰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시절의 유아론이 그립습니다. 제가 요즘 늦복이 터져서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다닌다는 말씀을 드리면 어떨까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으시겠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작년에도 큰 상을 받았고 올해도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니, 평생에 이렇게 비중있는 문학상을 이년 연속 받은 적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런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기에, 제가 다소 흥분 상태라는 걸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온갖 방정을 떨고 싶은 마음이 솟구칩니다. 원래 수상소감이라는 게 우울한 글쓰기 환자의 유일한 조증 발현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어지간하면 겸손을 떨며 이 모든 영광을 저 아닌 다른 곳에 돌리겠지만, 방금 설명드렸다시피 지금 제 상황이 워낙 비상하게 기고만장할 만하니, 이 모든 게 내가 참 잘나고 내가 참 잘 쓰고 내가 다 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겠느냐, 결국 내가 그동안 덜 부지런하고 남보다 마음을 덜 먹어 그렇지 마음먹고 집중을 딱 하니 상이란 상은 떡하니 다 휩쓸고 다니지 않느냐, 이렇게 인생에 마지막으로 한번은 오래전의 그 유치한 유아론에 빙의되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지금 의기가 소침합니다. 예기치 않은 상찬이 과도하게 몰아닥치니 기고만장은커녕 의구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앞으로 뭘 더 쓰고 어떻게 더 쓰고 한단 말인가, 이 빌빌한 몸과 변변찮은 정신으로? 여기까지가 아닐까? 그런 회의가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다시 오래전의 어느 시절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유아론에 젖어 살던 그 시절 말고 그다음 시절, 유아론이 산산이 깨지고 폐허 위에 서 있는 것 같던 먼지의 시절, 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지독히 못 쓰던 불모의 시절, 청탁도 없고 재능도 없어 이제 영영 소설을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그 시절로 말이지요. 그때 저는 그래, 이번 한편만 쓰고 그만 쓰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쓰고 그만하자, 결심했었지요. 그 한편 한편이 징검다리가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글을 쓰는 매 순간순간과 매 작품 작품이 저에게 ‘그만해’가 아닌 ‘만해’라는 따스한 격려를 해준 덕분에 지금껏 소설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두려워도 다시 한편만 더 써보고 그만할지 만할지 결정하는 게 맞겠지요. 그리고 아마 만해 선생님은 이봐, 그만하지 말고 만해,라고 조용히 일러주실 테지요. 아, 그런데 제가 통화기피증이 있어 그 말씀은 문자메시지로 주셔야 할 겁니다, 만해 선생님.

 

이미 문자로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만해’의 마음으로 한편 더 써보겠습니다.

 

權汝宣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안녕 주정뱅이』 『아직 멀었다는 말』 『각각의 계절』,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 『레가토』 『토우의 집』 『레몬』, 산문집 『술꾼들의 모국어』 등이 있음.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승옥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