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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K민주주의의 약진
한국의 보수는 왜 민주주의와 접속하지 못하는가
한홍구 韓洪九
성공회대 석좌교수,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 저서 『대한민국史』(전4권) 『유신』 『역사와 책임』 『광장, 민주주의를 외치다』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공저) 『민주주의 역사 공부』(전2권) 등이 있음.
hongkoo@skhu.ac.kr
1. 계엄의 밤 : 퇴행에서 추락으로 간 보수세력
2024년 12월 3일 밤 대통령 윤석열의 느닷없는 비상계엄령 선포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선진국 문턱에 도달했다는 21세기의 한국에서 친위쿠데타가 발생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계엄군보다 빠르게 국회의사당에 도착한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이 웬만하면 성공하기 마련인 집권자의 친위쿠데타를 막아낸 것은 더 놀라운 일이었다. 국회의 결의로 계엄령이 해제된 직후에는 위헌적이고 위법한 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에 대한 비판여론이 치솟았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 이후 몰락을 경험했던 보수정당의 대다수 의원들은 윤석열과 거리를 두기는커녕 그를 가히 ‘결사옹위’하기에 이르렀고, 신뢰하기 어려운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바닥을 쳤던 윤석열에 대한 지지도가 상승하고 ‘내란동조당’ 또는 ‘내란공범당’이라는 비난을 받던 국민의힘 지지율이 야당보다 앞선다는 황당한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계엄령 이후 온갖 구질구질한 핑계를 대며 체포와 구속을 피하려 했던 윤석열이 마침내 구속되자 그의 열성지지자들은 구속영장을 발부한 서부지법에 난입하여 법원을 초토화했다. 해방 직후 서북청년단의 광기 어린 테러 이후 보기 힘들었던 광경이 서울 한복판에서 재현된 것이었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보수진영이 정권을 빼앗긴 이후 ‘보수의 위기’라는 말은 한국사회에서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1 2024년 12월 3일의 계엄령이 즉시 진압당한 직후 보수진영의 궤멸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 또는 기대가 우세했지만 이런 예측은 크게 빗나갔고, 한국의 보수세력은 ‘끈질긴’ 생명력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그러나 보수정치세력의 앞날이 밝은 것은 결코 아니고, 그들 생명력의 끈질김은 어쩌면 죽여도 죽지 않는 좀비와도 같아서 사회 전체에 암울한 그림자를 던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21세기에 들어와 치러진 다섯차례의 대통령선거에서 보수진영은 3승 2패로 민주진영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을 뜯어보면 그 성적이 꼭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07년 ‘잃어버린 10년’을 끝내고 정권을 탈환한 이명박은 임기를 마친 뒤 감옥에 갔고, 박근혜와 윤석열은 모두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탄핵을 당했다. 박근혜는 취임 3년 10개월 만에 국회에서 탄핵소추되었고, 윤석열은 더 짧아져 취임 2년 7개월 만에 탄핵소추되는 등 재임기간도 짧아지고 있다. 보수는 부패했지만 ‘유능’하다는 속설도 박근혜와 윤석열에 이르러서는 무참하게 무너져버렸다.
한국의 보수정치세력은 1980년대 이래 여러차례 민주진영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았다. 1980년대 말 6·29선언(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한 선언)이나 북방외교정책, 90년대 초 3당합당 등과 같은 방식으로 위기에 대처했던 보수진영은 왜 21세기에 들어와 혼돈과 퇴행을 거듭하는 것일까?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어쩌다가 보수정치세력은 자신들의 보수주의 이념을 정립하지 못하고 극우 유튜버들의 음모론과 선동에 휘둘리는 처지가 되었을까? 왜 한국의 보수정치세력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거나, 민주주의의 룰에 따른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분단과 학살과 전쟁을 거치며 가히 멸균실 수준으로 ‘박멸’되었던 진보세력은 되살아나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는데, 보수정치세력은 한국경제의 놀라운 팽창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채 왜 퇴행을 거듭하고 있을까? 그 원인은 단지 최근 20~30년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는 분명히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보수정치세력의 역사적 DNA의 형성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 해방 후 보수세력의 반민주적 탄생과 ‘앞잡이’ 유전자
한국은 보수적 전통이 매우 강한 나라였다. 이웃 중국과 비교해볼 때 왕조의 수명이 기본 500년으로 중국 왕조보다 2배 이상 길었다. 지배층의 성격도 한족 왕조와 정복 왕조가 뒤바뀔 때마다 뿌리째 교체되는 경험을 가진 중국과는 달리 신라의 귀족은 고려에, 고려의 귀족은 조선에, 조선의 양반은 일제강점기 사회에 비교적 무난히 연착륙할 수 있었다. 물론 어떤 왕조가 특별히 오래 지속된다는 것이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모두에게 꼭 좋은 일이라 할 수는 없다. 조선 역시 문제가 많은 왕조였지만, 이 나라가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지배층의 통치 기술과 윤리 또는 도덕적·정치적 헤게모니가 나름 작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은 유교 지식인인 양반 사대부의 나라였다. 그들은 유교의 경세학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려고 했고, 개인의 삶도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준수하려고 노력했다. 모순덩어리 조선이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정신적인 힘은 “전하, 아니되옵니다”로 상징되는 선비들의 기개였다. 사간원·사헌부·홍문관으로 이루어진 3사와 같은 특수한 기구와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발달된 ‘탄핵’ 시스템은 사회와 나라를 책임지는 양반 유생들의 주인의식을 제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뒤늦게 제국주의 시대에 강제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은 어떤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해내지 못했다. 일부는 반근대·반외세의 입장에서 유교문명을 고수하려는 위정척사에 입각하여 의병을 일으켰지만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2 일부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새 문명의 몇가지 요소를 도입하려는 매우 절충적인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웠고, 또 일부는 대세론에 편승해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했다. 그러나 양반의 다수는 일제가 강화해준 지주제의 덕을 보면서 일제가 기존의 향촌질서 속에서 양반의 지위를 인정해준 것에 만족하며 지냈다. 이 험한 시기에 유교는 속수무책이었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제국주의자들대로, 한때 유교 지식인이었지만 근대 민족주의자로 변모한 선각자들은 선각자들대로 ‘유교망국론’을 부르짖었다. 매천 황현의 자결, 이회영 일가나 안동 유림의 만주행 등과 같은 눈물겨운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 유교 지식인들의 근대로의 이행은 좌절되었다.3
현대 한국의 보수세력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를 계승한 세력으로서 조선의 전통적 보수세력과는 단절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세력에는 앞서 말했듯 양반 지주층도 상당부분 포섭되어 있지만, 심각한 차별을 당하던 서자들이나 역관·의관과 같은 다양한 중인층, 부를 축적한 평민이나 백정 같은 하층민 등 일본의 지배하에서 엄청난 신분상승을 이룬 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친일세력 내에서 한때 동학농민운동이나 독립협회와 같이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한 세력·단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름은 안타깝게도 너무 쉽게 발견된다. 이완용도 이용구도 최남선도 이광수도 모두 한때는 구국운동이나 독립운동에서 맹활약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일본제국주의는 침략세력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압도적인 근대문명으로 다가왔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불행히도 자신이 헌신했던 구국운동이나 독립운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 누구보다 빨리 좌절하고 누구보다 빨리 변절한 사람이 많았다. 제국주의에 대한 싸움을 포기했을 때, 제국주의는 열등한 우리 민족이 따라 배워야 할 모든 것을 가진 선망의 존재로 다가왔다.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이는 민중의 힘을 신뢰하지 못하고 민중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자들의 당연한 행로였다.
조선의 전통적 보수세력과 20세기 후반 이래 한국 보수세력의 뿌리를 이룬 친일세력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주인의식이다. 일제강점기 이 땅의 주인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었고, 친일파는 주인이 아니라 그 앞잡이일 뿐이었다. 주인이 아닌 자가 주인의식을 갖고 공동체 전체를 보며 그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고 나아갈 방향을 탐색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친일세력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가’뿐이었다. 주인의식을 갖고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어떤 고난이 있어도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었다면, 친일파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일본인들의 마음이 중요한 것(‘중일마’)이었다.
일본이 1931년 만주를 집어삼키고 1937년 중국 본토까지 침략하자, 국내에 있던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의 꿈을 포기하고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보수진영에 속한 이들 중 대중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는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의 보수세력에 걸어놓은 치명적인 저주였다. 분단과 좌우대립은 친일의 과오를 고백하고 사죄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비교적 가벼운 죄를 범한 사람들조차 침묵하게 만들었다. 격화되는 좌우대립 속에서 친일의 잘못을 지적하는 자들이 오히려 ‘빨갱이’로 몰리는 세상이 되었다.
해방 후 친일세력이 당당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분단된 한반도 남쪽의 새로운 주인이 된 미국 덕분이었다. 놀랍게도 미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귀축미영을 도륙하자(미국 귀신, 영국 짐승을 찢어죽이자)”고 외쳤던 친일파들을 벌주지 않았다. 오히려 2차대전 막바지에 잠시 손을 잡았던 김구나 광복군과 같은 민족주의자들 대신 친일파들을 하위 동반자로 선택했다. 미국은 민족의 이익을 추구하는 뻣뻣한 민족주의자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보장해줄 힘 센 자들에게 철저히 복무해온 친일파가 훨씬 유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보다 힘이 세고 여유가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자 밑에서 친일파들은 떡고물을 주워 먹는 신세였지만, 미국은 재빨리 친미파로 변신한 이들에게 떡판을 통째로 맡겨버렸다. 일본 패망 직후 불안한 몇주간을 보낸 뒤 친일파들은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친일세력에서 친미세력으로 거듭나면서 한국 보수세력의 앞잡이 유전자는 더욱 강화되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비추어볼 때 한국 보수세력의 특징은 민족보다 동맹을 우선시한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나 보수우파는 민족을 내세우고 좌파는 계급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국에서만큼은 진보세력이 민족을 내세웠다. 물론 박정희 시기 ‘민족적 민주주의’나 ‘민족중흥’과 같은 레토릭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민족이나 통일을 내세우는 것은 분단 한국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한국전쟁 정전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당한 사람들을 보면 진보당의 조봉암,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회당의 최백근, 통일혁명당의 이문규 김종태 김질락, 남조선해방전략당의 권재혁,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의 도예종 등 8인의 열사, 남민전사건의 이재문 신향식 등 모두 계급보다는 민족과 통일을 운동의 과제로 내세운 이들이었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천명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취임사를 기초한 교문수석 김정남에 대한 색깔공세와 그후의 북핵 논란과정에서 보인 김영삼의 태도 변화로 인해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3. 한국 보수세력의 반민중적 행태와 민주주의와의 불화
(1) 박멸의 기억
어느 국가나 성립과정에서 엄청난 조직된 폭력이 동원되기 마련이지만, 분단으로 인하여 동서냉전의 시험장 역할까지 떠맡은 한국의 경우 국가폭력은 대단히 참혹했다. 해방으로 청산의 위기에 몰렸던 친일세력은 전쟁과 학살이라는 극한의 폭력을 통해 살아남았다. 1948년 그 끔찍했던 4·3사건은 2년 뒤 본토에서 벌어진 대학살의 예고편이었다. 죽인 자가 죽은 자를 세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한국전쟁 전후에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는지 알지 못한다.4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학살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다른 나라의 학살과 구분되는 이유는 그 결과가 남은 사회에 미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남북분단이라는 조건하에 북쪽의 우익인사들이 대거 월남하여 서북청년단 등 강력한 반공테러세력을 형성하는가 하면, 남쪽의 진보세력 중 상당수는 북으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에 남한은 우익으로 북한은 좌익으로 저울추가 크게 기울어져버렸다. 전쟁 발발 후 남한의 90% 이상 지역이 공산군에게 함락되었다가 유엔군과 국군에 의해 수복되었기 때문에 전쟁 전까지 지하에 잠복해 있던 좌익세력은 모두 노출되어 처단되었다. ‘빨갱이’에 대해서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박멸이 이뤄졌고,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언급할 수 없는 시절이 계속되었다. 똘레랑스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을 때 그 죽이는 행위를 되돌아보는 데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박멸에 성공한 한국의 보수는 똘레랑스란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죽은 이들을 애도할 수도 그들에 대한 기억을 입 밖에 낼 수도 없던, 죽음조차 죽여버린 한국현대사가 시작된 것이다.
(2) 군사주의와 힘의 숭배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뒤 잠시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열리는 듯했으나 곧바로 육군소장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반란(1961)이 일어났고, 30여년에 걸친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한국뿐 아니라 2차대전 이후 독립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슷한 시기에 군사정권이 출현했는데, 이는 총칼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많은 나라에서 군은 교육을 가장 많이 받은 집단이었고, 그 나라의 가장 발전된 과학과 풍부한 자원을 점유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경영학·행정학·조직관리술 등이 민간보다 군을 통해서 먼저 유입되었고, 민간의 해외 유학이 극도로 제한되던 시절, 군부의 엘리트들은 매우 광범위한 해외 유학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5 초기 한국의 군부 엘리트들은 함경도·평안도 등 북한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박정희 집권 이후 영남 출신들의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유교 지식인이 지배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던 조선시대와 달리, 20세기 후반 한국의 지배 엘리트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힘을 숭상하는 군 출신들이 차지했다. 1979년 12·12사태로 군부 내의 유혈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지기 전까지 한국 군부 상층부의 압도적인 다수는 일본군 또는 일본의 괴뢰 만주군 출신이었다. 5·16 후 박정희는 군 장교 다수를 예편시켜 정부 각 부처의 고위직이며 경찰, 국영기업, 기타 사회단체 곳곳에 배치했다. 예컨대 포항제철을 이끈 핵심 경영인들을 보면, 10년 남짓한 군생활 뒤에 자리를 옮겨 20~30년간 군대식으로 포항제철을 이끌었다. 이들을 통해 군대식 문화와 일처리 방식은 한국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군 출신들, 특히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경멸했다. 박정희는 군사반란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전복했지만, 민주공화국이라는 헌정체제 자체를 내버릴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이 수만명 젊은이의 목숨을 바쳐 지킨 나라였고, 동서냉전에서 미국이 내세워야 할 중요한 진열품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민정 이양 이후 박정희는 민주헌정의 틀 내에서 움직이는 불편함을 감내하는 시늉을 했지만, 1972년 유신 친위쿠데타로 끝내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애초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외래 민주주의는 천황의 나라에는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박정희 역시 민주주의는 한국의 전통과 맞지 않는 것이며, 그같은 비효율적인 제도로는 김일성 유일체제하의 북한과 대결할 수 없다고 자기 자신과 국민들을 세뇌시켰다. 박정희는 민주적인 방법으로는 국정을 운영해갈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박정희 통치 18년의 절반 이상은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또는 비상사태로 점철되었다. 민주적인 3권분립 대신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공안검찰, 대공경찰 같은 공안기구들의 적나라한 폭력에 의존하는 정보정치를 통해 나라를 다스렸다.
한국 보수세력의 공고한 카르텔 중 군사독재 이래 주목해야 할 것은 ‘육법당’, 즉 육군사관학교 출신들과 서울법대 출신들의 견고한 동맹이다. 1980년대 전두환이 창당한 민정당(민주정의당) 국회의원에 군 출신과 판검사 출신이 갑자기 늘어난 것을 야유하며 등장한 이 말은 국가가 가진 강제력을 운영하는 엘리트집단, 즉 총칼을 다루는 군 출신과 법전을 관장하는 법조인의 굳건한 결합을 상징하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국가의 운영에서 군을 동원한 문제해결 방식이 퇴조하자, 군 출신과 법조인의 역학관계도 군 출신 우위에서 법률가 출신 우위로 바뀌게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에 군과 법조인의 결합이 반체제인사들을 공안기관이 수사하고 검찰관료들이 기소하고 사법관료들이 판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 12·3 계엄령 사태는 법을 통한 기소와 사법적 단죄에 의거한 국정운영이 벽에 부딪히자 법률가 출신 대통령이 군을 동원한 어처구니없는 사례였다. 군사독재 시절 이래로 법률가와 군인들의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과거에 검사나 판사 등 법률가들이 정치군인들의 하수인이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정치군인이 정치검사 출신 대통령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정치군인과 정치검찰은 모두 대화나 타협 대신, 힘을 통한 의지의 관철을 추구한다는 강력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정희는 민주적 절차나 방법에 따른 국정운영을 기피하고 피곤해했는데, 이 점에 관한 한 윤석열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의회에서의 논쟁이나 대화나 타협 대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은 공통적이지만, 박정희와 윤석열의 국회를 보는 관점은 매우 달랐다. 박정희에게 국회는 정치적 야심으로 가득 찬 정치인들이 비효율적이고 백해무익한 정쟁을 일삼는 곳이었으나, 윤석열에게 국회는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이 모인 곳으로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는 곳이었다.6 국회에 대한 인식을 놓고 본다면 5·16군사반란과 유신친위쿠데타로 두차례나 내란을 일으킨 육군소장 출신 박정희보다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이 훨씬 더 흉악하고 위험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3) 반민중성과 엘리트주의
보수세력과 지배세력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보수세력은 기층민중보다는 지배층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옹호했다. 보수세력이 어쩌다 새롭고 민주적인 주장을 편다 해도 그 이면을 살펴보면 반민중적 엘리트주의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례로 독립협회나 독립신문은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사조인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의회 개설을 요구했다.7 그러나 독립협회 간부들은 “조선 민중은 무지하여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없다고 분명히 전제”하면서 의회 역할을 할 중추원 의관의 반수를 독립협회가 차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8 전통사회의 보수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근대의 새로운 보수세력도 등장부터 반민중적 엘리트주의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1948년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이 땅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 민주주의 문화가 자리잡고, 사회구성원들의 체질 속에 민주주의가 육화되기까지는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강점기에 실험적으로라도 민주주의를 겪어보지 못했던 한국사회에서 보수적 지배세력에게 봉건적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단순히 봉건적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군주로 군림하고자 했다.9 이승만은 반민주적일뿐 아니라 반공화적이기도 했다. 비단 이승만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권좌에서 축출되고 50여년이 지난 뒤 유신 공주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여왕처럼 군림하다 탄핵된 비극적 사건은 한국의 보수세력 내에 봉건적 정서가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12·3 계엄 사태는 윤석열이 손바닥에 ‘왕’ 자를 쓰고 등장했을 때 우리가 무속에 사로잡힌 그의 허황된 봉건성을 그저 비웃고 넘어간 결과였다.
역설적이지만 보수세력 내에 한때나마 혁신의 기운을 불어넣은 것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이승만보다 무려 40년 이상 젊었고, 이승만은 개혁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청렴한 군인이었던 박정희는 5·16 후 몇가지 면에서 의미있는 개혁을 실시했다.10 리영희 교수가 인정하듯이 박정희의 개혁은 “사회정의를 생각하는 지식인들 사이에 군사정권 반대의 입장에서 최소한 협조하는 태도”를 이끌어냈다.11 1963년과 1967년 두차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와 맞붙었던 윤보선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강조했던 박정희와는 달리 대표적인 양반귀족으로 나이도 20살이나 많았다. 더구나 1963년 대통령선거 당시 윤보선 측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박정희의 좌익 경력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나 김대중 대통령도 인정하는 것처럼 오히려 박정희에게 진보성향 유권자들의 표를 몰아주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박정희와 그보다 9살 아래인 김종필의 등장으로 강제된 세대교체는 한국 보수엘리트 진영의 지형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제 군 출신들이 보수세력의 중심을 차지했으며 군 출신 엘리트 내부에서도 무게중심은 서북에서 영남 출신으로 변화했다. 재벌들도 자유당 시대의 재벌 일부는 살아남았지만 큰 변화를 겪었고, 관료들도 고시제도를 통해 새롭게 충원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강남개발이나 부동산투기를 통해 경제발전의 성과를 과점하면서 현재의 기득권세력의 주력부대로 성장했다.
20세기 초 이래 한국사회의 보수세력에게 매우 중요한 이데올로기는 무한경쟁과 우승열패, 약육강식을 당연시하는 사회진화론이었다. 세계 최악의 입시지옥이 형성된 한국에서 교육과 학벌은 보수세력의 성취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해왔다.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 중에서 한국은 백정, 노비, 광대 등을 차별하던 전통사회의 신분제가 거의 말끔히 사라진 보기 드문 경우다. 그러나 그 결과가 평등사회의 출현은 결코 아니었다. 구신분제가 거의 힘을 못 쓸 정도로 약화된 것은 돈을 기준으로 하는 강력한 새로운 신분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초반 노무현정권의 출현은 한국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부자 아버지 없어도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사장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되고 대통령도 될 수 있는 나라! 그러나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고 젊은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던 노무현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노무현의 꿈, 아니 노무현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꾸었던 꿈이 깨진 자리에 들어선 것이 바로 ‘헬조선’ ‘흙수저’론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자, 가방끈 짧은 자, 비정규직, 장애인 등 온갖 흙수저들을 ‘개돼지’로 여기는 엘리트주의는 한국사회 보수세력의 새로운 신분증명서이다.
4. 지성의 퇴락과 편가르기
(1) 보수세력을 결집시킨 힘은 이념 아닌 기득권 수호
윤석열의 계엄 사태 이후 한국사회가 받은 충격 중의 하나는, 신뢰하기 어려운 수치이고 여론조사마다 결과가 들쑥날쑥하지만, 2020년과 2024년 국회의원선거와 2022년 대통령선거가 부정선거였다고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전국민의 30%를 훌쩍 넘을 정도로 치솟았다는 점이다. 계엄 이전에 부정선거론을 믿는 사람은 보수진영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이 주장은 소수의 광신자들에게만 유통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미 대법원에서 검증이 끝났을 뿐 아니라, 상식을 가진 사람이 조금만 생각해보면 절대 성립할 수 없는 허접한 주장으로 가득 찬 부정선거론이 내란 수괴 윤석열의 체포가 지체되는 사이 보수진영 전체로 확산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극우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한국의 ‘극우’가 극단적 우파〔極右〕일 뿐 아니라 유시민 작가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극단적으로 어리석인 자들〔極愚〕임을 보여준다.
어쩌다가 한국의 보수세력은 저 지경에 이르렀을까? 원래 한국의 보수세력은 지성이나 이념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한국에서 보수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욕망’”12이었고, 보수세력은 “이념적 성향이나 유대감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생성, 소멸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명확한 이념체계를 형성하지 못했”13다. 이것은 비단 한국의 보수주의나 보수세력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한국이 그 정도가 심했을 뿐, 전세계적으로도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분명하지 않은 정신상태”이며 비논리적이다.14
한국의 보수세력은 어떤 이념에 따라 모인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결집했다. 그들은 현재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지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일정한 양보와 타협이 불가피한 법이다. 사실 한국의 보수세력은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이라는 대타협을 통해 대한민국을 출범시키고 살아남았다. 지주세력을 대변하는 한민당(한국민주당)의 지도자 김성수는 처음에는 농지개혁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토지개혁을 약속했고 북한도 토지개혁을 단행한 상황에서 남한이 이조차 받아들이지 않다가는 공산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고 농지개혁에 동의했다. 농지개혁은 모든 토지를 내놓으라는 급진적인 토지개혁 주장에 대하여 지주들이 논과 밭은 내주고, 대지와 임야는 지키는 선에서 대타협을 이룬 것이다. 이후로는 1987년 6월항쟁 직후 폭발적인 노동자대투쟁 당시 노동자들의 힘에 밀려 구조적인 분배를 피하지 못했을 뿐, 한국의 보수세력은 기층민중과 타협한 적이 없다. 재벌들의 방만한 외자유치와 문어발식 기업합병이 초래한 IMF 외환위기 당시, 길바닥으로 내몰린 서민들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 재벌들은 오히려 ‘이대로!’를 외치며 몸집을 불려갔다. 외환위기 탈출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던 김대중정부는 재벌이 무너지면 한국경제 전체가 무너진다는 공포감 속에 재벌들과 재벌에 물린 부실금융기관에 150조원이라는 막대한 공적 자금을 퍼주었다.15 이익이 발생하면 재벌이 독식하고, 손해가 발생하면 온 국민이 부담하는 구조 속에서 재벌공화국이 건설되었다. 한국이 냉전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분단체제 속에서, 비록 보수적인 경로를 걸었지만 민주화를 이루고 1997년 정권교체까지 이룰 수 있었던 것은 3저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과 199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의 구조적 분배로 인해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에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휘몰아치면서 진행된 양극화는 중산층을 급격히 해체했다. 중산층의 감소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세력의 위축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이 어떤 이념이나 가치보다 기득권 수호를 위해 똘똘 뭉친 집단이라는 것은 과거청산 문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 죽이거나, 수십일간 불법 감금하고 고문하여 없는 죄를 뒤집어씌운 것을 바로잡는 데 어찌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진보나 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을 떠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보수세력은 과거청산과 관련된 여러 문제에서 정치적인 유불리에 집착하여 한결같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민주개혁진영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체결, 평택 미군기지 문제, 4대 개혁 입법의 포기에서 ‘대연정’에 이르기까지 진보적 지지세력의 기대를 저버리고 보수세력을 향해 타협의 손을 내밀었다. 이처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보수진영의 아젠다를 수용했지만, 그가 보수세력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받은 이유는 과거청산 문제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일문제, 제주4·3에서 광주에 이르는 민간인 학살, 각종 고문조작사건 등 과거청산과 관련된 여러 사안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기본적인 인권문제였지만, 보수세력으로서는 도덕성과 정치적 입지에 치명상을 가하여 기득권의 기반을 흔들 수 있는 문제였다. 과거청산이야말로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근본 문제였다.16
(2) 지성의 퇴행을 가져온 편가르기: 색깔론과 지역감정
한국의 보수세력은 해방 후 미국의 주도하에 친미·반공·반북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재편되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남로당 등 좌익세력과 투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경 민족주의적 입장의 백범 김구와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하면서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이승만 아래 집결한 보수세력이 반공 입장의 김구 세력을 제거한 것을 보면, 보수진영을 결집하게 한 동인이 이념문제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민간인 학살로 진보세력을 박멸하고 멸균실 수준의 반공사회를 구축한 보수세력은 체제유지를 위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 사회안전법 등 각종 분단법제와 중앙정보부, 보안사, 공안검찰, 대공경찰 같은 방대한 공안기구를 가동하여 독재체제를 유지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한국사회가 민주화의 경로를 밟게 된 이후 보수세력의 색깔론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독재정권 시기에는 공안기구가 불법연행과 고문조작으로 관제 빨갱이를 양산했다면, 이에 제동이 걸린 민주화 이후에는 보수권력의 하위동반자로 변신한 보수언론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빨갱이나 친북 딱지를 붙이는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다.
색깔론과 함께 한국 보수세력의 지성과 이성을 마비 또는 퇴행시키는 요인으로는 보수진영이 조장하고 스스로 빠져든 지역감정을 들 수 있다. 언제 어느 시대나 지역감정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지역감정이 정치의 최대변수로 작용하게 된 것은 이를 선거에 이용하려 한 보수진영의 적극적인 선택 때문이었다. 1980년대 이래 지역대립의 중심 구도는 영남 대 호남이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서북에 대한 차별이 지역갈등의 주된 문제였다. 1963년 대통령선거 때만 해도 박정희는 고향인 경상북도에서 55.84%의 득표율을 올린 반면, 전라남도에서 이보다 높은 57.22%의 득표율을 올렸다. 당시 박정희와 윤보선의 표차는 겨우 15만표였는데, 박정희는 전라남북도에서 윤보선보다 무려 35만표를 더 얻었다.17 원래 한민당이 강세였던 호남에서 박정희가 압승을 거둔 것은 1963년 박빙의 선거에서 그가 당선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정권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영호남 지역감정을 적극적으로 선거에 이용했다. 1980년 광주학살로 악화된 지역감정은 중선거구제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잠복해 있다가 1987년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폭발했다. 그후 지역감정은 최근에 다소 약화되었다 해도 역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역감정의 폭발력은 이를 처음 정치에 이용했던 박정희정권이나 다시 선거에 불러낸 전두환·노태우 일당도 미처 다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피지배세력을 이렇게 저렇게 갈라쳐 힘을 약화시키는 분할통치는 역사적으로 어떤 지배세력이나 즐겨 쓰던 수법이었다. 한국에서 지역감정이 분할통치의 대표적인 수단으로 채택된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이 종교, 인종, 언어 등의 갈등이 심각하지 않은 매우 동질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분단국가 한국에서 계급이나 이념 갈등은 한국전쟁 이후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억압되고 봉인되어왔기 때문에, 지배세력이 기층민중들을 갈라치려 할 때 가장 손쉬운 틈새가 지역감정이었던 것이다. 후천적으로 갖게 되는 이념이나 정치성향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색깔론에 비해, 출생으로 결정되는 지역감정은 훨씬 더 원초적이다. 문제는 색깔론과 지역감정이 자주 결합한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보면 호남지역을 빨갛게 칠하고 ‘전라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명명하거나, 아예 지도에서 파내어 평안도 옆에 갖다 붙인 이미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편가르기에 빠질 경우,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다. 우리 편은 무조건 옳다는 극심한 편가르기는 지성과 이성뿐 아니라 도덕적 기준마저 무너뜨린다. 처녀들을 군‘위안부’로 끌고 가도,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해도, 고문과 조작으로 없는 죄를 만들어내도, 아닌 밤중에 위헌적인 계엄령을 선포해도 그 행위를 한 자가 ‘우리 편’이면 맹목적으로 그 행동을 지지한다. 과거에는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지 않고 정보가 차단되어 있어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성인의 80%가량이 대학교육을 받고 스마트폰과 AI를 통해 누구나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보수세력은 스스로 더 우매해져가는 길을 택했다.
20세기 후반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편화되며 정보화시대가 열리자 많은 사람들은 온라인 공론장을 통해 ‘네티즌’이 주역이 되는 ‘디지털 민주주의’의 시대로 진입하리라 예측했다.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투표 전야에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가 깨졌음에도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때, 젊은 세대에 의한 디지털 민주주의가 구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톡방’이라는 새로운 세계는 다양한 의견의 만남보다는 끼리끼리 모여 끊임없는 동종번식을 가능하게 했고, 망망대해일 줄 알았던 인터넷의 공론장은 잘 조직된 소수의 댓글부대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특히 유튜브가 일반화되면서 어느정도 검증된 지식인들이 주도하던 공론장의 판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정확한 사실보다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을 계속해서 제공해준다. ‘탈진실 시대’에 들어서면서 ‘대안적 사실’이라는 이름하에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의 사회가 전세계적으로 열린 것이다.
이런 변화는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덮친 것이지만, 지난 20여년간의 변화를 보면 보수진영에 훨씬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보수진영에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사회발전의 흐름 속에서 그 나름 대한민국의 진로와 미래에 대해 구상하는 보수정치인이나 이데올로그가 존재했다. 개인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노태우정권 시기 북방정책에서 큰 역할을 한 박철언이나, 김영삼정권 시기 세계화정책을 이끈 박세일 같은 사람은 이제 보수진영 내에서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1997년과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연달아 패한 뒤 낡은 보수를 대체하겠다며 사상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뉴라이트는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뒤 이권 추구의 집합소로 전락하며 존재 의의를 상실했다.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가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들고나오며 기대를 모았지만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공동체자유주의를 내세우며 보수진영의 싱크탱크가 되고자 했던 박세일의 한반도선진화재단은 현재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를 개발하는 단체로 전락했다.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지만원이나 일부 탈북자의 주장은 처음에는 신군부측 인사들도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했지만 세월이 지나자 전두환의 회고록에 버젓이 기재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 사망 후 30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북한붕괴론과 북한악마화는 보수진영으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어떤 유효한 대비책도 세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중국개입설이나 ‘형상기억투표용지’라는 주장으로 무장한 최근의 부정선거 주장에 이르러서는 지성과 이성의 추락에 끝이 없음에 놀라게 된다. 이렇게 지적 능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떨어진 상태에서 보수세력은 계엄령이 ‘계몽령’이라는 주장까지 펴고 있다. 누가 누구를 계몽한단 말인가?
5. 나가며: 민주화에 적응 못한 보수의 퇴락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많은 경우 적대적이기까지 한 세력들이 하나의 정치공동체 안에서 제한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며 공존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제도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2022년 대통령선거에서 겨우 0.73%의 차이로 집권했음에도 정치검찰을 동원하여 경쟁자였던 이재명을 샅샅이 털고 무차별 기소를 통해 죽이려 했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압도적인 의석 차이로 의회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은 공존을 위한 대화와 타협, 설득과 양보는커녕 이재명을 만나는 것조차 꺼리고 피했다. 2024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잇따른 압승에도 불통의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은 윤석열은 22대 국회 개원 6개월 만에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자멸하고 말았다.
윤석열이 이렇게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말살시키려 한 것은 한국의 보수세력이 진보세력에 대한 박멸을 통해 권력을 확립했던 역사적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보수독재정권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진보세력이 다시 등장하자 진보당사건, 인혁당사건 등 사법살인, 광주학살, 온갖 고문조작 등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상황이 변하여 비록 각종 공안기관과 국가보안법 등 분단법제는 철폐되지 않았지만, 권력은 전처럼 민주화운동가들을 함부로 잡아다 탄압할 수 없었다. 또한 방송사 노동조합의 설립과 방송민주화, 전교조의 설립과 교육현장의 민주화는 과거와 같은 권력의 일방적인 정치선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는 1997년 정권교체의 중요한 환경을 이루었다.
보수진영은 민주화 이후 진보진영의 급속한 진출이라는 상황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해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간 진보진영이 너무나 억눌려 제도권 내에서 보수세력과 경쟁할 수 없었던 것도 보수세력이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하는 역량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보세력의 부재는 보수세력으로 하여금 성찰과 혁신을 게을리하게 만들었다. 보수세력이 진보세력 또는 민주진영의 도전에 대응하여 의미있는 응전이나 개혁을 한 것은 1987년의 6·29선언, 1990년의 3당합당, 1993년 김영삼 집권 초기의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로부터 30년, 보수세력은 유의미한 개혁을 시도하지 못한 채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고, 국민의힘은 극우에 사로잡힌 전광훈당으로 전락한 것이다. 전광훈이 국민의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로 올라선 것은 보수세력 내에 자정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광훈은 입에 담기도 민망한 ‘빤스목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초특급 신성모독을 자행한 자였다.18
반면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박멸당했던 진보세력은 두 세대 만에 놀라운 회복력(resilience)을 보이며 되살아났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나라 중에서 첫번째로 일어난 시민혁명인 4월혁명(1960)은 민간인 학살로 점철된 한국전쟁이 끝난 지 채 7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4월혁명의 싹은 5·16군사반란으로 짓밟혔지만 다시 살아났다. 박정희는 1972년 또다시 친위쿠데타를 자행하여 민주의 싹을 잘라버렸으나 한국의 민중들은 7년 만에 부마항쟁으로 폭발했고 독재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사살되었다. 유신정권의 마지막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5·17내란과 5·18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했지만, 광주에서 장엄한 패배를 당했던 민중들은 7년 만에 6월항쟁을 통해 민주화의 물꼬를 텄다. 노태우정권은 1990년 3당합당이라는 보수대연합을 통해 정권을 유지했지만, 한국의 시민들은 또다시 7년 만에 민주정권을 탄생시켰다. 이후 민주진영은 10년 만에 정권을 내주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라는 비극을 겪었지만 또 7년 만에 촛불항쟁을 통해 박근혜를 탄핵했다. 촛불로 출범한 문재인정권은 5년 만에 어이없이 보수진영에 정권을 내줬으나, 집권 3년차에 자행한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를 진압하고 새로운 민주정권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처럼 한국전쟁 과정에서 궤멸되었던 진보세력은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패배와 좌절을 겪었고, 최근에만 해도 세월호참사와 이태원참사 같은 아픔을 겪었다. 진보진영 또는 민주개혁진영이 여러 제약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해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해원하고 계승·발전시키려 해왔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의 기억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 있고,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열사들이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들을 불러모으며 애도받지 못한 죽음 앞에 오래전에 이루어졌어야 할 애도를 뒤늦게나마 바치는 작업, 그리고 이런 억울한 죽음이 다시 없도록 만드는 일은 민주화운동의 매우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령을 시민들이 막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자행하는 친위쿠데타란 실패하기 어려운 법인데 한국의 시민들은 그 쿠데타를 막아낸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윤석열의 계엄령 두달 전 노벨상을 수상한 한강의 작품을 읽으며 한국의 시민들은 제주와 광주에서 자행되었던 계엄령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며 이것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여의도에는 1980년에 희생된 광주시민들과 4·3사건 당시 희생된 제주도민들이 함께 있었다. 그 추운 밤 남태령에 모인 젊은이들이 물대포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백남기 농민이 지켜줬기 때문이고, 시위에 나서도 최루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이한열과 김주열이 있었기 때문이고, 윤석열의 공안기구에 잡혀가도 고문당할 일을 걱정 안 해도 되는 것은 박종철과 김근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폭력을 자행한 자들로부터 국가기구를 되찾아오는 민주화운동은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시작해서 죽은 이들 도움을 받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보수세력은 불행히도 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75년의 역사 속에서 보수세력에 속한 사람들 중에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진보세력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반성할 점이 허다하지만, 그래도 역사의 중요한 굽이굽이에 감동을 만들어냈다. 2024년 12월 3일 밤의 여의도, 12월 21일 밤의 남태령, 2025년 1월 5일 ‘키세스 시위대’가 등장한 한남동에서 벌어진 광경은 놀랍고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남태령에 모인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사회에 흩어져 존재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모였기 때문에 감동을 주었고, 이들의 목소리에 반응한 진보적 국회의원들이 결합하자 ‘남태령 대첩’이라는 새로운 힘을 만들어냈다.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결집한 보수세력은 이런 감동을 만들어낸 적이 없다. 감동은 새로울 때만 찾아온다. 구리구리한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을 이길 수 없다.
윤석열의 내란은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모두에게 중대한 변신의 계기이다. 박근혜 탄핵 직후 2017년 대통령선거 당시 문재인 후보의 유세현장에 무지개 깃발을 든 성소수자가 뛰쳐나와 구호를 외쳤을 때 청중들이 외친 구호는 ‘나중에!’였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문재인 집권 5년 동안 이 ‘나중에!’는 오지 않았고, 정권은 윤석열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시민들은 남태령에서 다시 만났다. 남태령은 한국 민주주의의 ‘지금 여기’이지 ‘나중에’가 아니다. 계엄령을 해제한 국회나 더불어민주당은 이같은 에너지를 지금 이 순간 한국 민주주의의 동력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진보정당의 종가격이었던 정의당이 원외정당으로 전락한 것은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난 20년 진보정당의 실험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태령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주체들은 어떻게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낼 것인가?
앞길이 첩첩이지만 진보세력이 남태령에서 희망을 보았다면, 보수세력은 서부지법에서 절망을 보았다. 박근혜가 4년 만에 무능을 보였다면, 윤석열은 3년 만에 무능에 더해 무모를 보였고, 보수정치세력은 그로부터 한달 반 만에 서북청년단이 재림한 것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박근혜 시절에는 그래도 어떤 컨트롤타워에 의한 조직체계, 예컨대 청와대와 전경련과 어버이연합 등의 연결고리가 보였는데, 지금은 극우 유튜버들끼리 서로 ‘코인팔이’라 비난하며 지리멸렬한 모습이다. 보수엘리트들이 당장 열성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부정선거론을 받아들이자 보수 대중 전체로 그같은 허접한 주장이 퍼져버렸다. 극우의 재등장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 계속 퇴행을 거듭해온 보수세력이 통째로 극우파쇼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너무나 불행하고 끔찍한 일이다. 민주화 이후 현재까지의 추세로 볼 때 보수세력 내에서 스스로 재생의 길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불행하게도 그다지 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선거 이후에도 한동안 혼돈은 계속될 것이다. 극우세력은 남태령 이후 펼쳐질 ‘다시 만난 세계’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응원봉의 찬란한 불빛이 상징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바로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죽어가는 공룡들은 불안과 공포에 싸인 채 고통 속에 비틀거리며 몸부림칠 것이다. 마침내 그들이 쓰러지면 이제 토끼와 다람쥐와 사슴들은 포악한 공룡에 짓밟히거나 잡아먹힐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이런 작은 동물들이 파묻어버리기에 너무 큰 공룡의 사체들이 여기저기서 푹푹 썩어가며 오랫동안 악취를 뿜어낼 것이며, 심지어 역병의 근원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사회는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이 고통스럽고 불편한 시기를 견뎌내며 다시 만날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의 보수정치세력이 극우와 합리적 보수로 분화하고, 더불어민주당 역시 당내에 뒤섞여 있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인자들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인자들이 분리되고, 더불어민주당 바깥의 여러 세력들도 재편되면서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헤쳐 모이는 길만이 극우를 고립화·주변화하면서 민주주의의 룰을 재건하는 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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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덕률 「한국적 보수의 위기: 구조적 요인과 전망」, 『황해문화』 2004년 봄호; 필자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 한국에 건강한 보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졸고 「현대 한국에 보수주의는 있었나?」, 이정우 외 『노무현이 꿈꾼 나라』, 동녘 2010.↩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에서 유진 초이(이병헌 분)은 의병에 나선 애기씨 고애신(김태리 분)에게 냉정하게 묻는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살 수 있소?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 민영규 교수가 쓴 『강화학 최후의 광경』(우반 1994)은 자기 시대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자 했던 전통사회의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사라져갔는가에 대한 장엄한 진혼곡이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도 민간인 학살의 전체 피해규모를 추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피해자 단체나 진상규명 단체들은 1960년 4월혁명 이후 국회에 신고된 ‘양민학살’ 피해자 규모를 토대로 희생자를 최대 113만명까지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과장된 숫자로 보인다. 필자가 연구책임을 맡았던 행정안전부 연구용역에서 매우 보수적으로 추산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 규모는 한국전쟁 이전 6만, 보도연맹과 재소자 학살 11만, 부역혐의 4만 5천, 군경토벌 4만 5천, 미군 관련 및 폭격 4만, 국민방위군 사건 6만,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 4만 등 약 40만명이었다. 성공회대 산학협력단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센터 조성 방안 연구』, 2018, 1,588면.↩
- 1953~66년 해외유학인정 선발시험을 통과해 해외 유학한 사람은 모두 7,398명인데 그중 6%만이 귀국했다. 반면 한국군 장교는 1950년대에만 무려 9천여명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받고 돌아왔다. 유영익 「1950년대를 보는 하나의 시각」, 『한국근현대사론』, 일조각 1992, 233면 참조.↩
-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담화문.↩
- 신용하 『신판 독립협회연구(상)』, 일조각 2006, 443~60면 참조.↩
- 주진오 「우리역사 바로알자: 교과서의 독립협회 서술은 잘못되었다」, 『역사비평』 1989년 겨울호 159면.↩
- 이승만의 퍼스낼러티와 정치행태, 이데올로기에 내재한 봉건적 성격에 대해서는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역사비평사 2005)를 볼 것. 그의 군주의식에 대해서는 178~81면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 현재 보수진영은 이승만이 깐 레일 위로 박정희의 기관차가 달려 오늘의 번영을 이룩했다는 가공의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구악일소(舊惡一消)’로 상징되는 박정희의 개혁에서 그 대상이 되는 ‘구악’이란 겨우 9개월밖에 존속하지 못한 장면정권이 아니라 이승만 시대가 남긴 것이었다.↩
- 리영희·임헌영 대담 『대화』, 한길사 2005, 283~89면.↩
- 이나미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 2001, 11면.↩
- 조찬래 「한국현대사에서 보수와 진보」, 한국정치학회 『한국정치연구의 쟁점과 과제』, 김유남 엮음, 한울 2001, 337면.↩
- 피터 비레크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김태수 옮김, 태창문화사 1981, 21면.↩
- 박승호 『한국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나름북스 2020, 245면 참조.↩
- 졸고 「다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속에서」, 『황해문화』 2009년 가을호 324면.↩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 대통령선거 상황』, 1971, 82면.↩
- 「전광훈 “하나님 까불면 죽어”…이번엔 ‘신성모독’ 논란」, 연합뉴스 2019.12.9(2025.2.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