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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재종 高在鍾
전남 담양 출생.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꽃의 권력』 『고요를 시청하다』 『독각』 등이 있음.
kojaejong21@hanmail.net
걷는 사람
ambulo ergo sum1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때로 초록 숲길에선 맑은 바람을 일구며
쏙독새 울음에 어느새 그는 깊은 곳을 보는 자,
길을 알기 위해 먼 길을 우회하기도 하는
마을의 길들은 그의 커리어인 셈이다.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폐교의 빛
시간의 풍금소리에 맞춰
환해지는 빛을 듣는다
빈 운동장, 모래알로 이는
알알이 빛의 소리
청청 유리 하늘의 빈터와
지상의 정적 사이로는
운동화짝 솟구치는 꿈
잉잉거리며 빛을 읊는 벌나비
저 속에 거주하는 누군가는
라일락 향기를 세공하고
저 속에 여백으로 충만한 빛은
한가득 초록 침묵이다
학교 앞 서지 않는 시골버스
아이 하나 없는 텅 빈 구령대
포플러는 하늘과 내통할 뿐
시간의 풍금소리에 맞춰
빈 교실에 밀생하는 바람소리며
비껴드는 빛의 음률은
간간 멧비둘기 울음으로 떨린다
모든 공부가 끝났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다만 저 빛의 조율 속에 쉴 것이다
―
- 프랑스의 철학자 삐에르 가쌍디(1592~1655)가 데까르뜨의 ‘cogito ergo sum’에 대응한 말로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