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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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金杏淑

1970년 서울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1914년』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등이 있음.

fromtomu@hanmail.net

 

 

 

12월 3일부터

 

 

그러나 오늘밤부터 12월 32일이었습니다. 12월 32일을 우리는 모르지만 12월 32일은 우리를 다 아는 것같이 굴었습니다. 12월 32일이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맞혀봐! 맞혀봐! 스무 고개를 넘으면, 거긴 허허벌판, 누구라도 눈이 밝아지는 실외 사격장. 자칫하면 처형장으로 돌변할 수 있는

 

설원에서 군인들이 대테러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12월 32일이 묻습니다. 너는, 너의 용도를 아느냐? 내일 너는, 누구를 과녁에 세워놓을지 아느냐? 내일은 모르고 오늘은 아느냐?

 

오늘은 모르고 어제는 아느냐?

 

12월 32일은 밤이 깊어도 물러가지 않습니다. 12월 32일은 진지를 구축하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깊은 밤에 몰래 눈이 내리면 겨울 아침은 대체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눈이 쏟아지면, 그것은 눈폭탄, 백색의 계엄령1, 창살 없는 감옥, 하얀 비명, 바로 그때엔 아름답다는 말! 예술이 숭배해온 문제적인 그 말! 때문에 구토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구부러진 등으로

 

시여, 구토를 하라!2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습니까?3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만, 희극과 비극은 주인공의 품격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습니까?4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연극이 시작된 것도 모르고 있을지도, 그러다가 어느새 연극이 끝난 줄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2월 32일은 우리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12월 32일을 천천히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하 하 하, 이것이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인가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만……

 

 

 

서울, 2049년 겨울

 

하루 종일 줄을 섰는데 빈손으로 돌아왔어.

집이 얼음장 같아.

—최진영 「쓰게 될 것」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우리는 새해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것을 기다린다. 옥수수가루, 깨끗한 물, 아스피린, 건전지, 엄마…… 같은 것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낸다. 어젯밤 나는 꿈속에서도 기다렸다. 병원 대기줄은 담장을 두르고 골목으로 이어졌다. 그 골목 끝에서 노인이 걸어나와 내게 말했다. 얘야, 너는 줄을 잘못 섰구나. 여기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구호품은 죽음이란다. 엄마는 집에 가서 기다리렴.

 

30년 전에는 다른 나라, 먼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구나. 하루 종일 줄을 서서 먹을 것을 구하고 마실 것을 구하는, 너랑 닮은 꼬마 이야기. 하루 종일 거리에서 시체의 호주머니를 뒤지고 다닌, 너랑 닮은 꼬마 이야기. 훔칠 물건이 없어서 좀도둑도 되지 못하는, 작아지는 너의 뒷모습. 서울, 2049년 겨울에 다른 나라, 먼 나라는 없어. 날씨와 햇빛과 전염병과 바닷물과 산불을 막을 수 있는 군대는 없어. 모든 것은 이어져 있어. 노인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리워할 것을 가졌다고 우쭐대는 것 같다. 꿈에서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과거에는 널려 있었다고 말한다. 그때는 버리는 음식이 먹는 음식보다 많았단다. 벌들이 붕붕대는 꽃밭과 사과나무밭도 있었단다. 꿀벌은 달콤한 집을 짓는 신비한 곤충이었지. 그때도 걱정을 하긴 했어. 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어. 과연 30년 후에 내 딸이자 너의 엄마가 살아남아서 사랑으로 너를 낳고 키울까? 미안해. 나는 그런 소망을 품었구나. 그러나 30년 후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인 것만 같았어.

 

그러나 어떤 이야기는 꿈에서 들은 것 같지 않다. 죽은 할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하는 말과 생전에 나를 무릎에 눕혀놓고 들려주던 이야기가 마구 섞여 있다. 그때는 늙은이가 젊은이를 부러워했단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겼단다. 불쌍한 아이야, 미안해……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 아이에게

죽은 사람을 질투하는 아이에게

내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쓰게 될 편지를

지금 쓴다.

 

 

  1. 최승호 「대설주의보」.
  2.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3. 찰리 채플린.
  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