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신미나 申美奈

1978년 충남 청양 출생.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백장미의 창백』 등이 있음.

shinminari@naver.com

 

 

 

춘련

백석풍으로

 

 

세밑에 명동성당에 갔다 성모 앞에서 손을 모았다 삼일로극장 쪽으로

빠져나왔을 때 길바닥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천원짜리 세장을 부채꼴로 얌전히 펼쳐두고서, 잠든 건지 그저 눈을

감고 있었는지 그도 아니면

 

나는 그의 푸른 빛 도는 뺨을 외면한다

겁먹고 가난한 눈동자를

그만 떨치기로 한다 진눈깨비 몇점 흩날리다 말고 소문난 교자집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백년 전의 시인이라면 오늘 같은 날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비단을 끊고 증기선을 구경하러

통영의 선창가로 갔을지도 모를 일

 

이런 장면은 어느 영화에서 본 것 같다

세종호텔 앞 건널목에서 유령의 하얀 망토를 쫓다가 놓치는

영혼을 담은 비닐봉지가 높이 뜨는

 

시인은 언제까지나 죽지 않는 청년이어서 이마가 희고

나는 그처럼 시대를 위해 깨끗하게 울어본 적 없으나

백년 전이나 백년 뒤에도 비참은 시들 줄 모른다

 

내가 이 세상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싶은 까닭은

반성이나 비약으로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다

걸인이 가지런히 펼쳐놓은 삼천원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시에 현실을 데려오는 일은 좁고

 

눈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 어른거리는 삼천원

입춘에서 경칩까지만 이 시절을 근심으로 채우기로 한다

온면의 부드러운 면발을 목구멍에 넘기며

 

대만 요릿집 내부는 환하다

봄이 오면 주인은 붉은 글자로 새긴 주련을 밖에 걸어둘 것이다

春聯斗方(춘련두방)

 

 

 

빙점

 

 

본인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가 내 잔에 소주를 채우며 넌지시 물었을 때

 

탄로 난 사람처럼 눈물이 고였다

정신의 두터운 얼음장에 금이 쩍 갈라졌다

화들짝 불에 덴 것도 같았다

 

투명한 실금이 내부에서 뻗쳐나갔다

무언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사람이 말하는데 철렁하는 맛이 있어야죠

사람이 말하는데

 

몇년 뒤 술자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

여전하네요 그가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선량하다는 건 무엇일까

더는 사람의 말에 찬란하게 속지 않는 것

불에 덴 손을 바로 차가운 물에 식힐 줄 안다는 걸까

 

뜨겁고 차가운 것이 양손을 맞대고 있다

 

언제부터 얼음은 녹기를 결심하는가

형태는 어떻게 성질을 바꾸는가

 

눈 온다

비가 오는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