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이실비 李實備

1995년 강원 속초 출생.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rimgorim@naver.com

 

 

 

담금질

 

 

유람선에 차례대로 오르는 사람들

저마다 거울을 들고 서 있다

나는 나의 얼굴만 본다 너는 너의 얼굴만 보고

바다를 건넌다

배에 실린 것은 옥수수

사람들이 옥수수를 전부 먹어치울 때쯤

유람선이 옥수수 심지로 세워진 도미노 왕국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침 냄새가 진동하지 서로를 물고 빨았던 연인들은

이제부터 세상의 모든 사물이 몽둥이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온몸을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는 게 정말로 온몸을 얻어맞은 건 아니라서

연인들은 버틴다

 

선착장에는

한 사람이 남아 있다

뜨거운 바다 위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본다

그는 간혹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줄 알았다

온몸을 뒤흔드는 소원 숨구멍으로 튀어나올까 숨죽이며

조용히 옥수수를 먹을 때

갈매기가 선회하며 그의 소원을 낚아챌 궁리를 한다

갯강구가 버려진 슬리퍼를 뒤덮는다 조금씩 움직이며 방파제 사이로 사라지는

오렌지빛 석양

잠시 파도를 식힌다

조개를 줍던 아이들이 서로의 것을 탐내다 서로를 밀친다

 

유람선에 타지 않은 사람은

누구의 뼈도 부순 적 없지만 오로지 자신의 뼈만 부수며 살았지만

아이들은 손가락질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서

다른 사람? 위하는 마음? 그는 모르는 것을 알고 싶고 모르는 것을 여전히 모르고 싶어하며

열심히 옥수수를 허문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심지를 바닷물에 담근다

녹아 사라진다

 

 

 

절벽에서 닭장까지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눈물은 어떤 소리가 나는가?

너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닭장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잇몸에서 손톱이 자라고 있지만 손이 입속을 헤집도록 그냥 둡니다. 아주 오래 말없이 지냈으니까요. 잇몸을 드러내며 활짝 웃을 뿐. 치아 대신 박혀 있는 촘촘한 손톱. 핏방울이 동그랗게 맺혔다가

잡초 위로 똑똑 떨어집니다. 그 자리에 피어나는 맨드라미 빨갛게

발목을 조여오던

빨간

털실 양말을 벗어두었습니다.

 

양말 안에 넣어둔 것은 달걀

 

당신이 내게 주었던 달걀입니다. 당신 주머니에는 언제나 달걀이 들어 있었잖아요. 저는 그 주머니를 갖고 싶었어요. 달걀이 아닌, 달걀을 넣을 수 있는 바로 그 주머니. 내가 입는 옷의 주머니는 얕고 헐렁했습니다. 주머니에 넣은 것을 흘리면 잃어버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다녔는지도 모르게 살았으니까요. 절벽 위의 집에서 매일 문을 열고 발을 내딛고 추락했으니까요.

 

절벽 아래는 빽빽한 눈알 무덤

둥글고 축축한 그건

당신 눈알이었어요

 

입속에 손톱이 불어나는 나처럼. 눈알이 불어나는 당신. 새로 자란 눈알이 보고 있는 눈알을 밀어내 눈알이 똑똑 굴러떨어지는 당신.

낭떠러지에서

새로 보는 눈. 새로 봐야 하는 눈. 나는 당신 맨눈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주먹을 쥐고 절벽을 올라 매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먹을 펼치면 내가 가져온 당신 눈알. 괘종시계 추에 매달고 추락을 잊지 않기로. 잇몸에 달린 손끝으로 혀를 깨물며 다짐했습니다. 벼랑 끝으로 흩날리는 핏방울. 저 멀리 눈알들이 나를 보고 있었어요.

 

여전히 당신만이 나를 제대로 보고 있기를 원합니다

 

우물거리던 손톱을 뱉고 맨발로 닭장에 서 있습니다. 이곳엔 눈알 대신 닭똥이 굴러다녀요. 방금 태어난 병아리가 떨어진 손톱을 쪼아 먹어요. 잘 먹고 잘 자면 닭이 됩니다. 당신이 내게 주었던 달걀은 양말 안에서 따뜻해지는 중입니다. 더 기다릴 수 있어요. 다 자란 맨드라미를 꺾어 다 자란 닭 머리에 씌워줍니다. 닭이 가만히 나를 올려다봐요. 정오를 알리는 괘종시계. 추가 흔들려요. 길게 늘어진 눈알이 흔들려요. 손톱이 잇몸을 밀고 올라옵니다. 잇몸이 마르도록 내가 웃는 걸, 당신 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