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이현호 李賢浩
1983년 충남 전의 출생. 200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비물질』 등이 있음.
눈 내리는 오독
겨울에 겨울을 곱한 것처럼 눈 온다
이층집 창밖으로 내다보는 눈 내리는 광경은
내가 잠들지 않으면 가슴까지 묻힐 듯
눈이 내리니까 눈을 봐야지
함께는 아니지만 혼자보다는 낫게
추락하도록
두고 볼 수밖에 없는 눈 오는 밤은
넘겨도 넘겨도 빈 페이지가 끝없이 펼쳐지는 책을 읽는 듯
감기와 동전과 눈빛같이 가벼운 것만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심심한 시절도
폭설과 천둥과 소나기같이
바란 적 없으나 불쑥 찾아오는 것들 틈에 전단지처럼 끼어 있던 슬픔의 바겐세일도
가볍기에 가장 먼저 버리고도 버린 줄 몰랐던 마음도
이 밤의 강설 확률 같은 울음의 가능성으로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는 눈발의 처지로
내려 쌓인다
어둠 속에 방점을 찍는 듯
그러나 실컷 봤으니까 인제 그만 봐야지
낙엽이기만 했던 나뭇잎은 없고
눈은 하얀 마침표 같아서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창문을 닫고 돌아서는 나를 내버려두는 눈
내리는 새벽
내가 잠든 사이에도
죄를 짓고 지상으로 추방당하는 천사인 듯
하양을 지닌 것만으로도 무거운 듯
겨울에서 겨울을 뺀 것같이 방 안은 따듯하고
동안
올겨울은 늙지도 않은 것 같다 외출도 잘 하지 않는 계절에 김 서린 거울을 닦아가며 보는 거울 속에는
늙지도 못한 얼굴이 하나
눈 녹은 물을 폴짝 뛰어넘는 발길처럼
어떤 시간이 나를 건너뛰었나
겨울에는 겨울이면 찾아왔던 정말 늙지 못할 얼굴들이 있었는데, 올겨울에는 그런
얼굴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지금 기억했고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실종되는 눈사람처럼
버리지도 쓰지도 않는 냉장고의 얼음 틀처럼
텅, 빈 표정들만이 남아
샤워하는 동안 눈을 꼭 감고, 기억을 벅벅 문질러보지만
촛농을 흘리는 초처럼 발가벗은 몸으로 물을 뚝뚝 흘리며 돌아본 거울에는 귀신같이 흐릿한 한 사람이 있고
욕실에 서린 김을 날리려고 창문을 여니
폭설, 매년 죽지도 않고 다시 하얀 얼굴로 돌아오는
눅눅한 슈가파우더 같은 것을 보며
오늘까지 팔리지 않은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어떻게 되나
나는 차갑게 선명해지며
이젠 정말 홀딱 늙어버렸다고 생각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