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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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鄭浩承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포옹』 『밥값』 『여행』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당신을 찾아서』 『슬픔이 택배로 왔다』 등이 있음.

si7273@naver.com

 

 

 

패배에 대하여

 

 

나는 패배가 고맙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패배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패배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한때는 패배했기 때문에

분노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으나

분노도 가을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무조건 항복하지는 않았다

인생의 패배자는 없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패배했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마음을 먹었다

 

 

마음을 냉장고에 넣었다

증오하는 마음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냉장실 상단에 넣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한조각도 상하거나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유식빵 곁에 나란히 두고

마음에는 곰팡이가 피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음을 먹는 일이 밥이나 국수를 먹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줄을

봄비가 오는 오늘 아침에 처음 알았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실은 마음을 먹는 것이다

포스트잇 메모지에다 볼펜으로 써 당신 보라고 냉장고 문에다 붙여놓았다

 

마음을 먹으면 배가 고프지 않다

마음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당신이 보고 싶을 때 가장 배가 고팠다

마음을 먹을 줄 몰라 배가 고파도

수돗가에서 물배를 채우던 어린 시절처럼 물이나 한잔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이제 당신이 보고 싶어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 넣어둔 마음을 꺼내 먹는다

피자 조각 같은 용서의 마음도 꺼내 먹는다

사랑은 용서로써 완성되는 것이므로

용서할 수 없으면 사랑할 수 없으므로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피자 한판을 다 먹듯 용서의 마음을 가장 많이 먹는다

 

마음은 냉장고에 오래 넣어두어도 썩지 않는다

먹다 남은 김치찌개도 우유식빵도 오래 두면 썩어 곰팡이가 피지만

냉장고에 넣어둔 마음은 썩지 않는다

사람들이 늘 배가 고픈 까닭은 아직도 맛있게 마음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