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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유나 金裕娜
1992년 안양 출생. 2020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내일의 엔딩』 등이 있음.
kgn0212@naver.com
물이 가는 곳
단장이 재킷을 걸치며 목요일 저녁에 있을 MBA 동기모임에 동석하지 않겠냐고 물어 좋다고 답했다.
“옷 좋은 거 입고 와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은 요즘 나를 눈에 띄게 아꼈다. 우수인증설계사 메달이 박힌 명함을 새로 파 건네는가 하면 어제저녁 회식자리에서는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건배사를 외치며 노골적으로 내 쪽으로 잔을 부딪쳐왔다. 단장이 그러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내가 어떤 파이프라인을 통해 지속적으로 실적을 올리는지, 모집은 물론 유지까지 탄탄하게 이어가는지 궁금한 거겠지.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이 일종의 아쉬운 소리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알려달라는 것이다. 내 방식으로 쟤도 살고 나도 살고 같이 좀 살자는 거다. 단장은 비밀을 당부하며 인센티브 요율을 높여주면서도 내가 다른 팀장들과 따로 만남을 갖지는 않는지 살폈다. 그는 내가 새로운 팀을 꾸려 떠나지 않을지 걱정할 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복잡한 짓을 할 생각이 없었고, 나만의 패러다임을 전파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내가 만든 왕국에서 나만의 전쟁을 이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고요한 전투를. 근 일년간 나에게 있어 보험을 파는 일이란 예시예종(禮始禮終),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나며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이 능히 굳셈을 이기는 유도의 근본과도 비슷했다. 소싯적부터 나의 몸과 마음을 키운 유도는 내 귀만 변형시킨 것이 아니었다. 엎어지고 메쳐진 지난날들이 내가 매트 밖에서도 우아하게 상대를 조를 수 있는 비결이었다.
“날씨가 미쳤네.”
단장이 말했다. 굵은 빗줄기가 어두운 유리창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엄청 쏟아지네요.”
“왕님 안 가? 태워다줄까?”
그는 내 이름 끝 글자를 따 나를 ‘왕님’이라고 불렀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나를 위하는 호칭이었다. 나는 저녁에 미팅이 있다고, 살펴 가시라고 말했다. 사실이기도 했지만 태워다준다는 말에 좋다고 따라나설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는 장난스레 내 자리를 훔쳐보는 시늉을 하고는 파이팅을 외치며 사무실을 나섰다. 모니터 아래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32분.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사무실은 거의 비어 있었다. 러시아워 전에 나가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 미팅 장소는 일찍 도착해도 기다릴 곳이 마땅치 않은 허허벌판의 공장이었고, 음습하고 구석져 귀신이나 살 것 같은 그 동네를 나는 훤히 알고 있었다. 아내와 두 딸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실수로 인해 갇혀 있는 그 동네를.
인스타그램을 열어 게시물 작성 버튼을 눌렀다. 사진은 군데군데 읽다 덮은 『모두가 지는 싸움』의 표지를 골랐다. 미국에서 16주간 판매 1위를 찍었다고 하는데 환경 관련 서적이었다. 내용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글쎄, 1위를 할 만한 책인가. 주제가 명확하지도 않고 결론도 없어 무책임했다. 빙하가 녹아서 시베리아가 펄이 되고 나라 몇개가 없어지면 뭐, 어쩌라고? 인도에 옷 공장을 폐쇄하라고 위협하고 중국에 공장 문을 닫으라고 한들 말을 들을까? 그건 개발을 끝낸 곳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여태껏 많은 것을 누려온 이들이나 바닥을 치며 ‘이제 그만’이라 외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어쨌거나 나에게 중요한 건 그 책이 1위를 찍었다는 사실이었다. 숫자엔 구라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나는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환경, 문제다 문제!
강렬한 첫 줄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부산에서 철강 수출업을 하시는 대표님의 말씀입니다. 리사이클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저희는 결국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만이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때아닌 폭우가 내리는 오늘…… 보험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표님힘내세요보험은 갑작스러운 재해와 재난 상황에 대표님의 자식 같은 업체가 흔들리지 않게 손을 잡아드립니다. 대표님들은 사업 걱정만 하세요. 다른 걱정은 국가 공인 종합금융투자 자산관리사이자 전문 보험인인 제가 다 하겠습니다.
샵, 지구온난화, 샵, 이상기후, 샵, 기후변화, 샵, 모두가지는싸움, 샵, 베스트셀러, 샵, 독서일기, 샵, 일상기록.
순식간에 좋아요가 눌리기 시작했다. 잠시 뿌듯함을 느끼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여섯시가 다 되어 있었다. 서둘러 재킷을 걸치고 가방을 챙겼다. 공대표에게 줄 4만 7천원짜리 마카롱 세트도 잊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젖은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바보 같으니. 우산을 두고 왔군. 14층 버튼을 누르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자리로 돌아가니 책상 위에 태블릿과 땀 억제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나도 참. 제일 중요한 걸.
땀 억제제의 뚜껑을 열어 이마와 목덜미에 롤링했다. 아무리 지구가 뜨거워졌다고 해도 2월 중순에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나에겐 달랐다. 땀 억제제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방에 태블릿을 넣었다. 다시 1층 버튼을 누르는 순간 번개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의 마음이 차올랐다. 어느 땐 되돌아가야만 중요한 것을 되찾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우산을 놓고 오지 않았다면 태블릿이 없다는 걸 몰랐을 거고 그러면 오늘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지난 일년 만에 전체 빚의 3분의 2를 털어낼 수 있었던 것도 되돌아간 덕분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회사 로고가 박힌 골프우산을 활짝 펴고 지하철역을 향해 기분 좋은 걸음을 옮겼다.
*
일년 전, 탐정사무소를 운영하는 용선배를 만나러 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직 깨닫지 못한 자였다. 지금의 GA사, 그러니까 모든 보험사의 상품을 취급하는 법인보험대리점에 발을 들인 지 반년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 팀장은 아침부터 나를 불러 앉혔다. 내가 간신히 성사시킨 경영인 보험이 해약된 걸 알고 있냐는 거였다. 모른다고 말하면 더 큰 화를 입을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떨궜던가. 고객이 보험을 해약하면 설계사는 기존에 지급받은 모집 수수료와 인센티브를 전부 뱉어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 돈으로 4금융 빚을 털어 끌어올 돈이 없었다. 화장품 제조회사 대표의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 한건의 보험을 위해 식약처 인증의 도사가 된 나였다. 경영인 보험은 무조건 댓가성 보험이었다. 나라에서야 불완전판매네 댓가성 보험이네 했지만 그건 업계 사정을 모르는 전형적인 탁상행정에 불과했다. 법인보험을 파는 설계사들은 준경영인이 되어 재무제표를 파악하고 당해의 순이익을 계산해 법인세를 들먹이며 돈 벌어서 다 세금 내실 거냐 으름장을 놓는 방식으로 경영인 보험을 팔았다. 국가지원사업의 요건에 맞게 직원 수부터 주식 배분, 때로는 대표이사의 성별까지 세팅해주는 댓가로 보험을 팔기도 했다. 물론 그 모든 걸 파악하기란 어려웠으므로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었는데, 나는 인증마크 전문으로 해썹(HACCP)과 식약처 인증을 받게 해주는 댓가로 보험을 파는 전략을 택한 즈음이었다. 해약은 내 계획에 없었다. 어떻게 사람 된 도리로, 온갖 인맥을 총동원해 자기 사업을 살린 설계사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해약을 하는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팀장은 방출을 말하는 대신 자존심을 긁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법인보험 기초교육을 다시 듣고 오라고 했다. 경영인 보험만이 아니라 다른 보험이라도 팔아 위기를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재보험 설계를 짜 용선배를 찾아간 건 그런 이유였다.
“김기왕이 근육 많이 빠졌는데. 고생깨나 하나본데.”
용선배가 주먹으로 내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
“선배는 좋아 보인다. 여긴 뭐, 변호사 사무실 같네.”
운동부 2년 선배인 용선배는 쫄딱 망해 유도장 문을 닫은 나에게 보험설계 일을 추천한 사람이었다. 작더라도 사업하던 놈은 절대로 월급쟁이로 못 돌아간다면서.
GA사로 들어가기 전, 나는 용선배가 소개해준 팀장 밑에서 3년을 일했다. 상해와 질병, 실비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기에 보장 범위를 잘게 쪼개고 보험료를 낮게 설계해 박리다매 형식으로 가입 승인을 쳐야 승산이 있는 곳이었다. 그만둔 건 능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나를 담기에 그곳이 너무 작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나는 주말에 까마득한 후배놈 체육관 개업식에 찾아가 찌라시를 나눠준 댓가로 보험을 팔았고, 신도 수를 채워야 권사인지 집사인지가 될 수 있다는 빌라 주인집 할머니의 요청에 교회에 가서 자기소개를 한 댓가로 보험을 팔았다. 그야말로,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팔 수 있을지 고민하며 보낸 나날이었다. 그렇게 해야, 아니 그렇게 해도, 까마득히 높은 이자의 장벽을 허물고 원금에 다다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게 왜 거길 왜 그만뒀어. 잘하고 있었다며.”
나에겐 전쟁터가 필요했으니까. 그곳을 박차고 나오던 점심시간이 떠올랐다. 모니터 앞에서 실효 건을 살피며 전화를 돌릴 준비를 하던 차였다. 갑자기 김치 얹은 수육이 입에 들이밀어졌다. 뭐 그리 심각하냐고, 이거나 먹어보라는 말과 함께. 강원도 배추, 젓갈이 두 종류, 그런 말들과 함께 까르르까르르 동료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쌈을 잡아채 바닥에 던졌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나는 소리치고 말았다. 장난해요? 인, 사가 장난이야? 회사가 장난이냐고 해야 했는데 인생이라고 말할까 회사라고 말할까 하다가 결국 둘 중 한가지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그게 분해 나는 책상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동료들은 물론 드문드문 앉아 있던 다른 팀 사람들까지 고개를 빼고 나를 쳐다보았다. 싸늘해진 분위기의 사무실을 빠져나올 때 뒤에서 ‘인사하라고 저러는 거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모멸감으로 한여름 뙤약볕 아래를 걷고 또 걸었지. 치열한 전쟁터가 필요했다. GA사는 필사즉생의 심정으로 옮겨온 곳이었다.
“그거 때려치우고 나랑 사진이나 찍으러 다니자.”
뭘 믿고. 용선배는 경찰청에 있을 때 뒷돈을 받아 경질됐다. 내 몫의 돈을 후려칠 게 뻔했다.
“부탁할게. 하나 들어줘.”
보험계약 서류를 내밀자 용선배가 사무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도 요새 힘들어. 불경기라 사람들이 불륜을 안 해.”
“그거에도 경기 영향이 있어?”
“그럼 인마. 돈이 있어야 애인을 사귀지. 그래서 요즘엔……”
됐다, 아니다. 용선배가 말을 하다 말았다. 하다 만 말엔 진실이 있게 마련이었다.
“뭔데 그래. 불륜 소개팅이라도 주선해?”
나는 비죽비죽 웃었다. 선배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의자에서 등을 뗐다.
“안 기다리고 찾아가. 보험이랑 비슷한 거지. 평일 낮에 모텔이나 호수 근처 까페에서 기다렸다가 그냥 냅다 찍는 거야. 찍은 다음에 쫓는 거지. 근데, 다 백 프로야.”
“에이, 난 또 뭐라고.”
나는 차를 홀짝였다. 용선배가 더 흥분하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봐라. 평일 낮에 호숫가 까페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냐. 거의 사업하는 사람이야. 그중에 신발이 고급인 놈. 그놈은 백 프로 대표야. 대표가 좋은 게 뭐냐. 융통이 쉽잖아, 융통이.”
대표라, 나는 멍청한 말을 하는 것으로 용선배의 답답함을 자극했다.
“그걸 와이프한테 찌르는구나!”
“뭔 신소리야. 일부러 남의 가정 파탄 낼 일 있냐? 현상해서 조용히 퀵 보내지. 그놈 회사로. 그리고 요새 불륜에 성별 없다. 제수씨도 또 모른다.”
나는 웃음기를 거뒀다. 용선배는 내 표정을 살핀 다음에야 이혼당한 나에게 잘못된 농담을 던졌다는 걸 깨달은 눈치였지만 수습하지는 않았다.
“형 열심히 사는구나. 나야 힘쓰는 법밖에 모르는 무지렁이인데 그런 세상을 알 리가 있나. 보면 형이 늘 영리하고 눈썰미가 좋았어. 성공할 줄 알았다는 말이야.”
힘없이 칭찬하기. 진정한 부러움을 연기하기. 그러곤 가방을 챙기기. 나의 최종 조르기에 선배는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으로 자기가 버는 돈이 그래봐야 삼백 정도 되는 가상화폐라고 하더니 현실적인 금액이라야 협상도 쉽고 리스크도 적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신고한 인간은 없지만……
“사건이라는 게 반복될수록 적립이 된단 말이지. 쌓이고 쌓이다 터지면 나도 한방인 거라 외줄 타는 느낌이야. 됐고, 서류나 줘.”
용선배의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이 없었고, 덕분에 분수에 맞게 뛰어갈지 분에 넘쳐도 택시를 탈지 고민할 수 있었다. 불륜을 저질러 협박을 받는 대표라.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뒤돌아 계단을 한칸 한칸 오르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상 속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아파트의 거실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 용선배의 사무실이 있는 3층 문으로 가 방금 빠져나온 용선배 방의 문을 열었다. 용선배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 놓고 갔냐?”
나는 자리에 앉았다.
“형. 불륜한 대표들 사진 나한테 넘길래? 건당 현찰로 삼백 줄게.”
“미친놈. 날궂이하냐?”
용선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를 쳐다보곤 덧붙였다.
“오백이면 모를까.”
“그래, 오백 줄게.”
내가 곧바로 수긍하자 용선배는 아쉬운 듯 물었다.
“뭐에 쓸진 알려줘야지.”
“듣고 계속 외줄 타는 게 낫겠어, 아님 모르고 속 편히 오백을 받는 게 낫겠어?”
되돌아 나왔을 때 들리던 경쾌한 빗방울 소리. 핸드폰 판매점에서 울려퍼지던 요즘 노래. 비를 맞아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궁리해낸 건 모두가 이기는 방식이었다. 대표들은 협박을 당해 돈을 날리는 대신 보험을 들어 법인세를 아끼고, 5년 뒤엔 납입료의 90%를 환급받을 수 있다. 월 납입료가 최소 60에서 최대 2천까지 되는 대표님힘내세요보험. 나는 그들이 내는 월 납입료의 6배를 모집 수수료로 지급받고, 그중 오백을 용선배에게 떼어준다. 그리고 월 납입료의 6배인 유지 수수료가 13개월에 나뉘어 내 통장에 들어온다. 내가 택한 이 방식의 가장 좋은 점은 해약이라는 옵션이 없다는 거였다.
용선배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나는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
지하철은 언제나처럼 만원이었다. 빗물에 젖은 우산과 사람들의 몸이 찝찝하게 밀착됐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어렵사리 핸드폰을 꺼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대표였다.
—가고.있습니다
자꾸만 오타가 나 힘겹게 답장했다.
인스타그램 앱을 열었다. 방금 전 올린 게시물에 좋아요가 478개나 찍혀 있었다. 기껏해야 100개 안팎으로 찍혔는데, 역시 숫자엔 구라가 없다고 다시금 생각하며 핸드폰을 넣었다. 고개를 바로 하고 시선 둘 곳을 찾던 중, 앞에 선 아이의 핸드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둘째 하윤이 또래로 보이는 학생이었다. 하윤이처럼 교복 치마가 짧고 하윤이처럼 파마를 한 그애는 핑크색으로 칠한 손톱을 놀려 핸드폰을 터치했다. 하윤이는 그래도 손톱은 안 칠하는데…… 아내는 가끔씩 전화를 걸 때마다 하윤이 때문에 미치겠다고 했지만 내 생각엔 그다지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애가 운동 관두고 마음 붙일 데가 없어서 그러지.”
“나중에 만나면 당신이 말 좀 해. 난 이제 포기야.”
포기는 무슨, 애 잡는 게 일인 사람이.
그애는 랭킹 상단의 뉴스를 눌렀다. 헤드라인은 “녹은 빙하 속 고대 바이러스로 추정”이었다. 그애는 빠르게 화면을 스크롤해 댓글창으로 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안 봐도 알 만했다. 환경오염이 문제라는 둥 망조가 들었다는 둥,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겠지. 지하철 문이 열리며 다시금 사람들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핸드폰을 꺼내려다 관뒀다. 좋아요가 많이 찍힌 이유가 짐작됐다. 기어이 날씨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났나보구나. 사람들은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해보려 애쓰겠지만, 그게 될까. 날씨는 품을 벗어난 자식처럼 우리가 행한 것을 되돌려줄 뿐일지도 몰랐다.
몸을 웅크린 채 사람들 틈을 비집고 문 쪽으로 이동하며 나는 생각했다. 역병이 돌면 어떤 보험상품이 개발될까. 어떤 회사가 흥하고, 어떤 회사가 흔들릴까. 달러는, 기름값은 또 얼마나 오르려나. 이럴 때일수록 멀리 봐야 하니 금을 사둘까. 환승역에 이르러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지하철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
지하철에서 내린 동시에 마을버스로 환승한 나는 차고지 바로 전 정류장에서 내렸다. 비는 그쳐 있었고, 도로엔 흙냄새가 진동했다. 우산을 정리해 접었다. 찬바람이 개운했다. 이제야 좀 2월 같군. 나는 왼편의 비닐하우스들과 멀리서 빛나는 아파트 불빛을 번갈아 보며 어둑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몸이 기억하는 건지,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에게 이득이라고 해서 이 일이 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대체로 수월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미 아내나 자신이나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우기는 이에겐 혼기가 찬 자식을 빌미 삼아야 했고,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이 없다는 이에겐 대출을 알아봐주며 보험을 팔아야 했다. 대놓고 모욕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얼마를 버냐고 조롱하는가 하면 네 업보가 대대손손 쌓일 거라고 위협했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침을 세번 뱉는 이도 있었다. 나는 진정 의문이었다. 당신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업보를 운운하고 침을 뱉을 자격이. 사진은 보험 만기와 함께 폐기될 거고, 그때가 되면 그들도 알게 될 거였다. 보험이 얼마나 이득인지.
나는 떳떳했다. 그런 일들에 흔들리지도, 긴장을 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땀이었다. 땀은 내 몸의 일부가 아니라는 듯 줄기차게 흘렀다. 처음엔 겨드랑이와 손이 젖는 정도였지만 세번, 네번, 계약이 이어질수록 오금과 이마가 젖었고, 여덟번, 아홉번, 두피에서 흐른 땀이 턱 밑으로 떨어졌다. 한겨울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삼십분 남짓한 미팅 시간 동안 하늘색 와이셔츠가 짙은 파란색으로 물들 만큼 땀이 흐르면 창피한 것보다도 기력이 달렸다. 한여름에 인터벌 트레이닝을 마쳤을 때처럼 전신의 근육이 처졌다. 이것도 저것도 다 때려치우고 산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면 나는 지내고 있는 원룸이 아닌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낡은 빌라가 있는 이 동네에 오곤 했다.
유도장 문을 닫고 아내와 서류 정리를 하기 전 우리 가족은 여기서 다섯 정거장쯤 떨어진 도심의 구축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내는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 기록이 급격히 떨어진 하윤의 대학 진학을 걱정하며 오전엔 빙상경기장, 오후엔 입시설명회장을 오갔고, 그러는 중간중간 차 안에서 수공예 머리핀을 만드는 부업을 했다. 한켤레에 140만원이나 하는 스케이트화 값을 감당하려면 이거라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공부벌레 첫째 성윤이 망막박리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은 걸 제외하면 집안은 그런대로 평범했지만, 나는 하윤이 툭하면 스케이트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이나 성윤이 병원에 가야 될 것 같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 아내가 퇴행성관절염으로 밤마다 앓기 시작한 것 모두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더 열심히 살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돈만이 돈을 불려준다는 생각에 재테크에 매달렸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성공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나니까.
고액 예치자에게만 주어지는 채권 구매의 기회였다. 텔레그램 방에 있는 사람들 중 전문직이 아닌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도 나보다 그들의 선택을 믿었던 것이 패배의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배운 사람들.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 처음 체육관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했던 투자는 성공을 거뒀다. 매달 600만원의 이자가 꼬박꼬박 들어왔다. 장모님을 만났다. 장모님 앞으로 근저당 설정이 돼 있는 우리 집을 담보로 추가 대출을 받기 위함이었다. 설득은 통했다. 이자는 장모님 통장으로 들어갔다. 3개월간은 그랬다.
가족들이 지내고 있는 빌라 3층에 불이 켜져 있으면 미안해지고, 불이 꺼져 있으면 더 미안해졌다. 거기 가만히 서 있다보면 정신이 들었다. 수육 쌈을 패대기치던 순간처럼 분노 비슷한 것이 끓어오르기도 했다. 투지. 그래, 투지를 다질 수 있었다. 가끔은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아빠?”
유일하게 나를 상대해주는 막내 하윤을 만나는 일 같은.
“달리기했어? 왜 그렇게 젖었어?”
“근처 지나다가, 답답해서 좀 달렸어. 이제 갈 거야.”
“버스 타지? 데려다줄게.”
아내의 골칫거리인 하윤이 속없이 히죽거렸다. 귀여운 놈이었다.
“엄마는 공장 계속 나가고?”
“그렇지 뭐.”
“언니는? 공부 잘해?”
“걔 대학 안 가고 공무원 할 거래. 성질 존나 부려.”
“존나가 뭐냐 존나가. 그나저나 대학을 왜 안 가. 네 엄마가 시켰어?”
“왜 엄마 탓을 해? 지가 철들어서 그런 거지.”
철이 들었다라. 나는 빌라 골목을 걸으며 다음달에 돈을 보낼 때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성윤의 진로에 대해 상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들어가라 하윤아. 여기부터 어둡다.”
하윤이 미적거렸다. 나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만원짜리 두장이 들어 있었다.
“네가 돈 복이 있다.”
하윤이 돈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엄마는 아빠 무섭대.”
“내가? 왜?”
“카톡 상태메시지 보고.”
“뭐, 뼈에 새긴 결심?”
“응. 무슨 결심을 뼈에 새겼나 무섭대. 그래도, 나는 응원해.”
그렇게 말하고 하윤은 돌아섰다. 빠이 아빠. 한마디를 남긴 채. 나는 밝은 곳을 향해 멀어지는 하윤을 바라보며 이제부터 지갑에 오만원은 챙겨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들에게 최소한 서른까지는 실패할 기회를 주고 싶다는 결심. 그 결심을 지켜야 했다.
*
골목을 돌아 공장으로 들어섰다. 두번째 방문이었다. 오늘 만날 공대표는 인형 및 장난감 제조업체의 대표. 비상장 중견기업 대표인 그에겐 유튜브 채널에 자회사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업로드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계획도 실천하고 외주사 직원이랑 바람도 피우며 바쁘게 사는 공대표는 사진보다 더 젊고 더 잘생겼으며 키도 컸으나 짙은 팔자주름 탓인지 얼굴에 그늘이 져 좀 안쓰러워 보였다.
처음 방문하던 날 공대표는 내가 내민 서류봉투 속 사진들을 그 자리에서 살펴보곤 나를 귀신 보듯 바라보았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대표들을 만나면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돌아나왔다. 허둥지둥 뛰어나와 붙잡는 사람이 절반이었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공대표는 후자였다. 쉬운 상대라는 뜻이었다. 그날 공장을 빠져나오며 하얀색 포르쉐를 발견했다. 사진에서 본 차였다. 멍청하고 불쌍한 놈. 뭐라도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져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등신. 공대표는 그런 인간이라고 주주 명부가 말해주고 있었다. 지분의 칠십 프로는 와이프, 나머지 삼십 프로는 장인. 이름만 대표인 공대표는 처가가 일군 탄탄한 기업의 바지대표일 뿐이었다. 기 한번 못 펴고 살아온 인생, 선망하고 인정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대표실은 공장 오른편에 크게 지어진 단층 건물 안에 있었다. 증축공사를 하고 있는지 비계와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기억하기로 내부가 무척 넓고 깨끗했다. 문을 열면 직원들이 사용하는 공간이 나왔고 더 들어가면 대표실이 나왔다. 대표실 벽면엔 유리 진열대가 있었고, 그 안에 온갖 솜인형과 장난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윤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해뒀던 아이돌 인형도 있었다. 나오면서 하나 달라고 해볼까. 짐작하건대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약서에 싸인할 거였다. 십분? 아니, 그것도 긴가. 대표실 앞에 선 나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몸이 굳었다. 몸이 아니라…… 머리가 굳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없었다. 별꼴을 다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들어오세요.”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나에게 들어오라고 말한 사람은 공대표가 아니었다.
“제 아내예요……”
공대표가 말했다. 알고 있었다. 나의 왕국에 등장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
“들어오시라니까요.”
여자가 채근하듯 말했다. 나는 문을 닫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섰다. 계약이 어그러질 것임은 분명했지만, 이대로 도망쳤다간 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앉으세요.”
대표실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공대표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아내 옆에 있는 보조의자에 굽은 허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대표실 책상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을 마주한 채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배가 남산만큼 불러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물로 드릴게요.”
나는 대꾸하지 못한 채 품에 안고 있던 가방과 마카롱 세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눈치를 살피려 해도 공대표는 도통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제 아닌 거 알았지?”
책상에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여자가 말했다. 공대표를 향해 묻는 거였다. 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맥락 없이 사진을 던져 두려움을 키운 뒤 두번째 만남에서 보험이라는 카드를 내미는 건 내 영업 방식이었다. 뭐야, 보험이었어? 대표들은 대개 허무해하다가 홀가분하게 싸인했다. 하지만 공대표는 다른 상상을 한 것이다.
“이 사람이 다 고백한 게 그저께 일이에요. 사진은 안 봤어요.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잠을 못 자더라고요? 내가 자길 죽일 것 같대요. 다 내가 시킨 거라는 거야.”
여자는 이르듯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여자가 불쌍했다. 공대표라는 인간은 내 생각보다 훨씬 유약한 인간이었다. 너무 유약한 나머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마저 임신한 아내에게 떠넘기고 만 것이다.
“뭘 요구할 생각이셨어요?”
여자가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크게 뜬 눈이 희번덕였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럴 만한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내용은 다 아신 것 같으니 모쪼록 가정의 일은 가정 내에서 원만히 해결되기를,”
탕탕탕탕. 여자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저씨, 내 말 안 들려요? 물었잖아요.”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달라는 걸 내어줘야 끝이 날 싸움이구나. 나는 재킷 속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여자가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공대표도 여자 곁으로 가까이 가 명함을 확인했다. 그사이 나는 가방을 열어 태블릿을 꺼냈다. 몇번 터치해 서류 파일을 활성화했고, 스마트펜과 함께 책상에 올렸다. 나는 공대표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깨달은 눈치였다. 여자는 굳은 얼굴로 태블릿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이 말하고 있는 건 경멸이었다. 유도 경기에서 깃을 잡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기운을 읽는 것이었다. 여자가 전하는 것을 고스란히 받은 나는 분명한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손바닥에 흐른 땀을 무릎에 훔쳤다.
“비트코인이나 현찰로 받으시지 왜 이런 수고를 하세요?”
“저는, 보험설계사니까요.”
공대표가 목소리를 높였다.
“말장난하십니까? 보험 팔겠다고 협박을 해요?”
나는 공대표를 노려보았다. 여기에 당신의 자리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했다.
“바람을 피운 건 대표님이고 저는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사진은 저희 사이의 브릿지일 뿐이고, 보험을 들고 말고는 대표님 선택이었겠죠. 저는 강요한 게 없는데요.”
나는 종이컵을 들어 입을 축였다. 이제 목소리를 낮출 타이밍이었다.
“좋은 상품입니다. 5년 만기, 월납 천만원으로 설계한 대표님힘내세요 상품이고요, 비용처리가 가능해서 법인세 절감의 효과가 있고 5년 뒤 만기 시 90%가 환급됩니다. 재무제표상으로 직전년도 이익금이 상당하더라고요. 어떻게든 컨설팅받으셔야 했을 거예요. 여기엔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보험을 팔면 저는 수수료를 받고, 대표님은 절세합니다. 내신 금액을 거의 그대로 돌려받아요. 그게 답니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상품을 권하러 온 것뿐입니다.”
“우와, 되게 좋은 상품이네요. 그래서, 아저씨한텐 얼마가 떨어져요?”
듣기 좋은 투는 아니었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대표님 건 같은 경우엔 도합 1억 2천이요. 반은 일시금, 나머지 반은 13개월에 나눠서.”
내 말을 들은 여자가 손을 뻗어 갑티슈를 스윽, 끌어왔다.
“땀이나 닦으세요.”
나는 여자가 내민 갑티슈를 옆으로 치웠다. 궁금증을 해결해줬으니 더 농락당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일어날 때였다.
“뭔데 마음대로 일어서요? 보험 안 팔 거야?”
강수를 두면 의외의 성공이 따라오곤 했다. 마음은 정말로 일어나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강권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자가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팔,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당당하네.”
공대표가 놀라 내 눈치를 살피곤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희 두 것들 말이야. 한놈은 내가 시켰다면서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서 생쇼를 하고, 한놈은 회사 걱정해주는 척 협박해서 보험 팔고. 제정신들이야? 지금 여기서 내가 제일 멀쩡한 게 말이 돼?”
“보험은 협박이 아닙니다.”
나는 여자의 불손한 태도에 잠시 이성을 잃고 불쑥 대꾸했다. 하지만 여자는 태연했다.
“그럼 상품이 좋으면 아저씨 방법도 좋은 거야?”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곤 공대표 앞에 태블릿을 들이밀었다. 공대표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올렸다. 공대표가 스마트펜을 쥐었다.
“됐고요, 이거 다 끝나면 볼일 다 본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몇차례 심호흡 한 뒤 배를 소중히 감싸안았다.
“아저씨. 우리 아빠한테 걸리면 아저씨 죽어. 두번 볼 일 없게 하라는 말이야. 알겠어?”
으름장을 놓은 뒤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훌쩍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여자는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협박이라기엔 간절함에 가까운 목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 귀엔 여자의 말이 이 등신 같은 남편의 외도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걸리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걱정하시는 일 없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공대표는 ‘설계사에게 상품 설명을 들으셨습니까?’ 란에 ‘설명을 들었습니다’라고 따라 적으며 훌쩍훌쩍 코를 마시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턱 아래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훔쳐내다 태블릿을 넘겨 서명 페이지를 띄워주기를 반복했다.
“보험료 통장 내가 관리해요.”
여자가 말했다.
“애초에 이 사람이 가진 것 중에 이 사람 거 없어요.”
나는 공대표가 내려둔 스마트펜을 챙겼다.
“이 사람 족칠 자격도 나한테만 있어요.”
여자가 티슈를 뽑아 코를 풀었다. 나는 계약 체결이 끝나 하얀 화면을 띄우고 있는 태블릿을 챙긴 뒤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하나같이 웃고 있는 인형들을 지나 몇걸음이나 뗐을까. 공대표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그는 빌고 있었다. 왜 그 소리를 들으며 도망치듯 공장을 빠져나온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뛰고 뛰고 또 뛰었다. 변수 속에서도 모든 게 계획대로 됐는데, 달라진 건 없는데,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 들어가 2리터짜리 포카리스웨트를 사 그 자리에서 반통을 들이켰다. 편의점 앞에서 왼쪽으로 몸을 돌려 지대가 낮은 동네로 가면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이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갈 수도 있었다. 전처럼 집 앞에서 땀이 식기를 기다리며 전봇대 아래 누군가 마련해둔 고양이 밥그릇을 바라보거나 핸드폰 앱을 열어 주변 아파트의 전세 시세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알고 있는 건 일을 오래 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다. 나에겐 그 일이 그런 일이어서, 돌아올 즈음이면 땀 같은 건 아주 작은 문제가 되곤 했다.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여자가 말했던 자격,이라는 말이 뜬금없이 내게 꽂혔기 때문일까? 계단에 앉아 있던 나는 잠시 몸을 떨다 그래도 걸음을 옮겼다. 아는 방향으로.
비가 내리면 애들 걱정이 됐다. 침수를 걱정할 동네는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오늘도 동네는 고요했다. 코너를 돌며 고개를 들자 방충망 너머로 담배 연기를 내뿜던 외국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 공장지대가 있어 외국인이 많은 동네였다. 그는 이제 나에게서 시선을 옮겨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나도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곤 필로티 뒤로 몸을 숨겼다. 살금살금 가서 놀래줄 심산이었다. 하윤이 늘 그렇게 하듯이.
녀석은 또 교복 차림이었다. 옷이 없나? 파카가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데다 몸통에 딱 달라붙어 좀 작은 것 같았다. 키가 자랐나? 좋은 겨울 파카를 하나 사줘야 하나. 주머니에 손을 찌른 하윤인 배회하듯 걸으며 골목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아홉시가 넘었는데 누굴 만나러 가나, 아님 혹시 담배를 피우나?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나도 몰래 조용히 하윤의 뒤를 밟고 있었다. 뾰족한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부모의 느낌이라는 것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윤이 걸음을 멈춘 곳은 가로등이 사라지는 등산로 입구였다. 거기서부터는 어두운데, 그쪽으로 가면 안 되는데.
하얀색 무쏘인지 구형 스포티지인지 경유차 특유의 소음을 내며 멈춰선 차 안을 바라본 하윤이 핸드폰을 살짝 들어올리곤 조수석에 올라탔다. 나는 차가 사라진 등산로 방향을 향해 뛰고 또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등산로 오른쪽을 따라 길게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공회전을 하고 있는 하얀색 차를 발견했다. 나는 뒷좌석 쪽으로 가 조심스레 얼굴을 갖다 댔다. 하윤이 보였다. 조수석에 앉은 하윤인 다리를 꼬고 뚱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보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운전석 쪽으로 몸을 틀었다. 모자 쓴 머리통이 보였다. 조금 더 왼쪽으로 가야 했다. 조금 더 왼쪽, 조금 더 왼쪽.
토독, 토독, 빗방울이 떨어지나 싶었는데 하얀 우박 알갱이들이었다. 나를 발견한 건 운전석에 앉은 놈이 아닌 하윤이었다. 나는 주먹으로 운전석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잡고 열리지 않는 운전석 문을 흔들었다. 차가 틀어지며 나는 그 자리에 넘어졌다. 뒷바퀴가 오른발을 밟고 지나가 빠르게 등산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고물차는 엄청난 연기를 뿜으면서도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나는 하윤이를 부르짖으며 차를 향해 달렸다. 부를 수 있는 게 하윤이 이름밖에 없었다. 겨우 200미터나 됐을까? 다리가 무겁고 숨이 차올랐다. 차가 멈춘 건 그 순간이었다. 하윤이 튕기듯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차는 다시 등산로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하윤이 나를 향해 뛰어오는 것을 본 나는 기듯이 왼쪽의 인도로 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다. 귀가 먹먹해지며 이명이 들렸다.
“아빠.”
하윤이 우박을 피하려 털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너 인마. 아빠 다 봤어. 사실대로 말해.”
한마디 한마디 뱉기가 너무나 힘들다. 운전석에 있던 놈이 바지를 무릎까지 내린 채 자위하던 모습이 선명하다.
“다 봤는데 뭘 사실대로 말해요……”
하윤이 멋쩍다는 듯 웃었다.
“이 새끼가, 웃어?”
나는 벌떡 일어나 하윤의 머리통을 후리려다 손을 거뒀다. 놀란 하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때리는데.”
나는 이제 입을 벌리고 하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너 이 새끼 아주 그냥 머리를 싹 다 밀어야 돼.”
어깨를 잡아챈 내 손을 뿌리친 하윤이 나를 밀치곤 더 멀리 물러섰다.
“그냥 변태한테 돈 번 거라고. 앉아서 봐주기만 한 건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는 하윤이 이가 부딪힐 정도로 떨고 있었다. 나는 내 뺨을 갈기기 시작했다. 왼손과 오른손으로 미친놈처럼 뺨을 갈겼다. 그러곤 주저앉았다. 차가 밟고 지나간 발이 땅을 디딜 수 없을 만큼 아파왔다. 하윤이 주저앉은 내 곁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아빠. 진정해. 나 진짜 아무것도 안 했고, 그냥 보이는 걸 본 게 다라니까? 이거 처벌도 안 될걸? 나 진짜 괜찮아 아빠. 그리고 이런 것도 가지고 다녀.”
하윤이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혀를 깨물고 싶었다. 모든 게 내 탓이었다. 모든 게. 하윤이 답답한지 자기 가슴을 치더니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언제는 돈 잡아먹는 귀신이라며. 아빠는 보험 팔고 엄마는 공장 다니고 김성윤은 공무원 하면, 나는? 나는 아무 쓸모가 없잖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하윤이 핸드폰을 꺼냈다. 퇴근한 아내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은 하윤이 짜증을 냈다. 괜찮다고, 안 춥다고, 하나도 어둡지 않다고.
“아빠. 나 간다?”
고개를 들어 하윤을 바라보았다.
“이제 안 그럴 테니까,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요.”
나는 하윤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쇳소리 섞인 공허한 말이었다. 우박이 비로 바뀌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윤인 내리막을 통통 튀듯 뛰어내려갔다.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처럼. 그 나이보다 훨씬 어린 아이처럼.
“아빠, 비는 어디에서 와?”
“하늘에서.”
“비는 이렇게 많은데 다 어디로 가?”
“낮은 데로.”
“낮은 데로 간 다음에 또 어디로 가?”
산을 경계로 둘러놓은 낮은 철조망을 보다가 왜 그때가 떠오른 건진 모르겠다. 체육관 유리창에 코를 대고 있던 하윤이 묻고, 나는 답하던 오래전 어느 순간이었다. 굵어진 빗방울이 이마를 때렸다. 나는 왼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오른발을 딛는 순간 다시 고꾸라지듯 주저앉았다.
“몰라 인마.”
하윤인 내 입에서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주먹으로 몸통을 지르는 꼬마였지만, 그날은 어쩐 일인지 너그럽게 말해주었다.
“아닌데. 아빠는 다 아는데.”
태블릿이 들어 있는 가방이 젖지 않게 끌어안고서, 나는 다시 왼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오른발 뒤꿈치로 살살 땅을 딛고 걸음을 떼는 데 성공한 다음 왼발, 또 오른발, 다시 왼발. 절룩이며 내리막을 향해 갔다. 주택가 너머의 큰길이 걸을수록 멀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전조등 불빛이 도로를 환하게 비췄고, 하얀 차가 소음을 내며 내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