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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임현 林賢

1983년 전남 순천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 『그들의 이해관계』, 중편소설 『당신과 다른 나』 등이 있음.

dasimarvel@naver.com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1

 

민수는 내놓을 만한 게 하나도 없다며 냉장고에서 콜라비를 꺼내와 썰기 시작했다. 제주도산이고 5킬로그램에 이만원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혜는 속으로 이만원이면 너무 비싼 거 아닌가, 비싸진 않더라도 자랑할 만큼의 가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민수의 어머니는 마흔 중반부터 내내 당뇨병을 앓다가 작년 봄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새벽 무렵 등산을 하던 중에 다른 등산객으로부터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건강을 생각해서 시작한 운동이 오히려 심혈관에 무리를 준 모양이었다. 더욱이 가슴을 쥔 채 몸을 웅크린 자세가 꼭 수련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해서 몇명은 그냥 못 본 척 지나쳤다고도 했다. 그 바람에 초기에 대처했어야 할 적절한 상황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가족력이 무섭긴 무서워.”

여러 조각으로 투박하게 담긴 콜라비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민수가 말했다. 그러고는 장례를 치르는 내내 이모들도 외삼촌들도 하나같이 콜라비 이야기뿐이었다고도 했다. 아삭한 식감이 좋았고, 씹으면 씹을수록 은근하게 단맛이 올라왔다. 정혜는 그중 가장 작은 조각 하나를 오래 우물거리며 새로 이사했다는 민수의 집을 둘러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채 어수선해서 며칠 더 기다렸다가 올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어느 집에서 찌개를 끓이는지, 창문을 닫았는데도 청국장 냄새가 들어왔다. 듣던 거랑은 많이 다르네. 정혜는 몰래 그런 생각을 했고, 혈관 건강을 위해 매일 콜라비를 챙겨 먹는 민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환이나 즙으로 된 것도 있었을 텐데, 매번 깎고 자르고 하는 건 아무래도 귀찮지 않나. 그래도 그렇지, 냉장고에 오로지 콜라비뿐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집들이 선물로 화분이 아니라 먹거나 마실 걸 고르는 건데. 그러나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편의점도 청과물가게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상점이라고는 도로변에 있던 화원과 자동차정비소뿐이었다. 정혜는 왔던 길에서 십여분을 다시 돌아간 다음, 들고 가기에 무리가 없을 만한 작은 올리브나무 화분 하나를 구입했다. 처음에는 감당할 만했던 무게가 도착할 즈음엔 대단히 무겁게 느껴졌는데, 무엇보다 코앞에서 한참을 헤맨 탓도 있었다. 기껏해야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사오십 내외일 듯한 낡은 다세대주택들이 빼곡한 동네였다. 그 골목 어딘가에서 정혜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햇수를 셈해보기도 했다. 헤어지고 거의 5년 만이었다.

 

정혜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멀어졌다. 어떻게 멀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고, 거의 매일 점심을 같이 먹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조카의 성장과정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던 사람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과의 연락이 모두 끊겨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잘못을 따질 일도 누굴 탓할 일도 아니었다. 언젠가 정혜는 자신의 부고 소식을 받을 만한 사람들을 꼽아보았다. 그리고 그날, 저장된 전화번호 목록에서 상당한 수를 삭제해버렸다. 이따금씩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안부를 물어온 사람도 있었다.

—여기 강릉이에요. 여기 오니까 우리 그때 생각난다. 어떻게 지내요?

문자메시지를 읽자마자 정혜는 상대방의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1박 2일로 묵호항에 갔던 일을 떠올렸고, 거기서 먹은 것들, 운전하며 본 풍경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지워버린 번호였기 때문에 이전에 저장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되새기기까지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언제 한번 만나자는 말도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연락을 받는 순간, 거의 모든 관계가 그것으로 종료된다는 것을 정혜는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미뤄둔 일을 뒤늦게 끝마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쉬울 것도 서운할 것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가까워진 사이도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맺게 되는 당연한 관계였을 뿐이다. 졸업을 하거나 이직을 하거나 달라지는 건 내가 아니라, 잠깐씩 머물던 자리였을 뿐이라고 정혜는 여겨왔다.

이를테면 민수도 그렇게 비워진 자리 중에 하나였다. 재작년 대학 선배의 결혼식에서 민수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 그 자리에 없는 민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다른 누군가가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니더라고 했는데, 이십만원을 빌려준 사람도 있었고 이백만원을 빌려준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여유가 없어서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들 했다. “다들 그렇지, 요즘 안 힘든 사람이 없다니까.” 옆자리에 앉은 후배가 그렇게 말을 더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요즘 민수형한테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당연하다는 듯 물어왔을 때, 그 질문이 정혜를 몹시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뜬금없이 왜 나한테 그런 걸 묻나 싶어서 “너는? 그래서 너는 얼마나 빌려줬는데?” 괜히 딴소리를 해댔다. 후배가 왼손가락 다섯개를 모두 펼쳐 보이자 그게 오만원인지 오십만원인지 확인하려는 사람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정혜의 대답은 관심에서 멀어졌다.

정혜는 민수로부터 아직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날 밤, 정혜는 잠을 조금 설쳤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걔는 무슨 그렇게 큰돈을 빌려줬대? 그런 불평 아닌 불평을 하기도 하고, 이백만원은 아니더라도 이십만원쯤은 돌려받지 않을 생각으로 그냥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다짐을 하기도 했다. 다음 날에는 그보다 더 큰 돈을 부탁한다면 둘러댈 만한 핑계를 미리 생각해두기도 했으나 끝내 민수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게 정혜의 마음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다 하는 부탁을 왜 자기만 쏙 빼놓았는지 먼저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그러다가 자신이 민수와 아주 멀어졌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기억하고 있던 번호로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땐, 경상도 억양의 웬 낯선 여자의 목소리만 들려왔기 때문이다.

 

정혜가 민수의 모친상을 들은 것도 돌아가시고 몇달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간 선배로부터 뜻밖에 민수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다. 선배는 줄곧 난감한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은 정혜 자신인데, 왜 이 언니가 먼저 그런 말을 꺼내는 걸까. 늦은 시각에 불쑥 찾아간 것도 그렇고, 못 본 사이에 선배의 부른 배를 보며 깜짝 놀랐던 것도 그렇고, “형부는? 요즘에도 공부방 계속 하고?” 정혜가 물었을 때 어딘가 얼버무리는 대답이 돌아온 것도 그랬다. 몰랐네, 내가 너무 몰랐어, 그런 생각이 들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미안해, 정혜야.”

“언니가 왜. 내가 미안한 건데.”

선배는 얼마 전에 시댁에서 보내왔다며 얼린 쑥떡과 무화과를 종이가방에 담아 챙겨주었다. 정혜를 배웅하며 현관문 앞에서 등을 쓸어주기도 했다. 그 마음이 고맙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안한 마음을 미안함으로밖에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을 어딘가 구차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정혜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융통할 수 있는 여윳돈이지 누구에게 팔 수도 없는 쑥떡 같은 게 아니었다. 미안함은 더더욱 아니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혜는 아직 녹지 않은 쑥떡 하나를 꺼내 손에 꼭 쥐어보았다. 무화과의 온도는 쑥떡과 너무 달라서 없는 온기마저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사이 어딘가에 무심하게 놓인 봉투는 애써 못 본 척 했다. 한눈에 보아도 정혜가 부탁한 만큼에는 훨씬 미치지 못할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함부로 손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웠고 그 무엇보다 정혜를 서글프게 했다.

다음 날 아침에 정혜는 선배에게 쑥떡이 참 맛있더라고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지난밤 했던 말은 더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저녁 무렵이 되어서 선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혜야, 네가 하도 급하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민수한테 한번 부탁해봐.”

그러고는 정혜가 몰랐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민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민수가 물려받게 된 것들, 실은 어머니가 생전에 들어놓은 종신보험이 있었던 모양인데 유일한 직계가족인 민수가 그 보험금을 수령했다며 최근에 선배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오래전에 선배가 빌려주었던 돈을, 돌려받을 생각으로 준 것이 아니라며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얼마의 이자까지 더해 갚아주더라는 것이었다.

 

 

2

 

민수를 만나고 온 지 이틀이 지나도록 정혜는 이렇다 할 답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사이 원철이 있는 납골당을 다녀왔고 보장성 보험 몇가지를 해지했으며 처음에 들었던 것보다 적은 환급금 문제로 상담원과 오래 통화해야만 했다. 더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땐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걷다보면 꼭 모르는 누군가와 비슷한 속도로 나란히 걷게 되어서 일부러 더 빨리 걷거나 방향을 반대로 돌아 멀어졌다. 호주머니에는 비닐 랩에 싸인 쑥떡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정혜는 손으로 주물거리며 오래 천천히 걸었다.

한참을 걸은 뒤에는 잠깐 앉아서 쉴 만한 자리를 찾았다. 그러던 중 정혜는 검은 개 한마리를 보았다. 목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개였으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크기가 작고 얌전했다. 정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호자일 것 같은 사람을 찾았다. 배드민턴을 치는 젊은 남녀가 있었고, 줄넘기를 뛰는 교복 입은 학생도 있었다. 그밖에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개가 허공을 향해 캉, 하고 짖었다. 그 소리에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혜가 쑥떡을 조금 떼어 던져주자, 경계없이 다가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몸을 낮춰 개의 머리와 등을 고루 쓰다듬어주었다. 그런 다음 다시 떡을 조금 떼어 이번에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말캉한 혓바닥이 정혜의 손바닥에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그 느낌이 좋아서 이번에는 더 큼지막하게 떼어냈다.

“초코.”

배드민턴을 치던 남자가 말했다. 다시 한번 “초코” 하고 위엄있게 부르자 개는 그제서야 주인을 향해 달려갔다. 정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지는 개를 바라보았다.

“뱉어, 초코. 뱉어.”

라켓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여자가 말했다. 초코의 입을 억지로 열어 확인하는 동안, 옆에 있던 남자는 양손에 라켓을 쥔 채 정혜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이쪽을 향해 다가올까 싶어서 가만히 기다렸으나, 남자는 초코에게 목줄을 채워 철봉 기둥에 매어두더니 다시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했다. 여자에 비해 남자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며 정혜는 다시 걸었다.

 

하천에 가까워지자 어느 순간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

“비가 와야 해. 통 비가 안 와서 큰일이야.”

언젠가 원철이 저 물이 맑아 보이는 이유가 평소보다 수심이 얕아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원철은 제 나이보다 서른살은 더 많아 보이는 사람처럼 말했다. 실제로는 정혜보다 겨우 여덟살이 많을 뿐이었다. 이곳 어딘가에서 들짐승을 만나기도 했으나 다시 보지는 못했다. 아니, 여기가 아닌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풍경을 구분하는 것은 정혜에게 어려운 일에 속했다. 이런 순간마다 정혜는 자신이 원철에게 많이 의지해왔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함께 걸을 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들.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걸음은 저절로 맞춰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두 사람 모두일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몇해 전까지 정혜는 작은 까페를 운영하면서 원철의 로스터리에서 원두를 납품받았다. 거래를 하는 동안 원철은 대금일이 한달쯤 늦어도 재촉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고민을 들어줄 때도 있었다. 물건을 들이는 날이 아닐 때도 회사 로고가 새겨진 영업용 트럭을 몰고 정혜를 종종 찾아왔다. 두달쯤은 가벼운 마음으로 만났고, 얼마 뒤 가게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을 땐 원철이 도움을 주었다. 그게 벌써 두해 전의 일이었다. 끝내 버티지 못하고 정혜가 결국 가게를 내놓았을 때에도 그들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시작할 때 들었던 비용의 절반도 건지지 못했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은행 융자를 갚는 데 들었다. 그래도 다 나빴던 건 아니다. 정혜의 곁에는 자신을 응원하는 원철이 아직 있었으니까.

시간이 생길 때마다 두 사람은 멀리 가는 대신 주로 오래 함께 걸었다. 한번은 정비되지 않은 하천 쪽을 바라보며 원철이 말했다.

“저기, 고라니.”

그러고는 더 먼 곳을 가리키며 방금 저쪽으로 고라니가 사라졌다고 했다. 정혜가 돌아보았을 땐 부리가 긴 철새들만 보일 뿐이었다. 온통 갈대며 잡풀들로 우거진 그곳에서 어떻게 그런 걸 볼 수 있었나, 정혜는 신기하기만 했다. 계절이 바뀌면 풍향이 바뀌고 냄새도 바뀌었다. 원철은 매번 정혜보다 그걸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산책로를 걸으면서 뒤편에서 달려오는 라이더 무리를 수시로 확인하는 것도 원철의 몫이었다. 매사에 예민한 사람이었으니까. 물건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신중하게 따지고 비교하는 사람이었다. 영양성분과 유해성분을 확인하던 사람, 운전을 할 때는 답답할 만큼 좀처럼 차선을 바꾸지 않던 사람, 혹시라도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 어딜 가든 비상구의 위치를 먼저 알아두던 사람, 그런 사람이라서 가능한 관계였다는 것을 정혜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최선을 다해 그것을 모른 척해왔을 뿐이었다.

원철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장례식장에서 정혜는 그의 아내와 중학생 아들을 처음 마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가족을 향해 맞절을 하고 위로를 했다. 자신도 똑같은 사람을 잃었지만 그들보다 더 슬퍼할 수 없었다. 사진으로 볼 때와는 또다른 기분이었다. 원철 모르게 열어본 핸드폰 사진첩에서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몰래 훔쳐본 적이 있었다. 정혜와는 가본 적 없는 나라로 여행을 가고, 아들의 피아노 연주회에 참석하고, 어두운 밤길에서 나란히 선 세 사람의 그림자를 찍은 사진도 있었다. 화목한 가정이라고 정혜는 생각했다. 그것을 빼앗았다거나 망가뜨리고 있다는 자책은 들지 않았다. 그때는 오히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는 원철이 부러웠고, 또 무서웠다.

원철을 만나는 동안 정혜는 이따금씩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가 두려웠다. 낯선 사람이 찾아와 현관문을 두드리거나 자신의 뺨을 힘껏 때리는 상상도 여러번 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죽은 남편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올 거라고 예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원철의 사십구재가 지나고 얼마 뒤 걸려온 전화였다. 무엇보다 정혜는 왜 여태껏 그 번호를 지우지 않았는지 스스로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멀어진 사람이었고, 절대 정혜의 부고를 들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사무적이지만 공손하게 그간에 알게 된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내심 기대했던 모욕적인 말은 없었다. 대신 평소 원철이 꼼꼼하게 기록해둔 거래장부가 있다고, 거기에 적힌 목록 중에 정혜 앞으로 된 미수금이 제법 크다고만 말했다.

“그이가 누구한테 큰돈을 빌려주고 그러는 사람이 아닌데…… 사장님을 무척 믿었었나봐요.”

그뒤로 원철의 아내와는 두어번 더 통화했을 뿐, 이후에 오는 연락은 일부러 피하며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주가 지났을 때 정혜가 변제해야 할 구체적인 금액과 연체 시 추가로 산정될 수 있는 이자율, 앞으로의 법적인 절차 등이 적힌 내용증명이 우편으로 송달되었다. 그것을 받아 쥔 정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자신을 믿어준 것은 원철이었지, 그 여자가 아니었다. 어디 원철뿐이었을까. 정혜 역시 다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원철을 믿고 의지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떤 종류의 믿음이었나. 언제든 멈출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신앙보다는 가벼웠고, 그걸 누가 먼저 결정하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평범한 신뢰보다는 두터운 줄 알았다. 적어도 사랑이나 소망에 견줄 만한 정도는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원철이 믿고 있던 것은 고작 정혜의 신용이었던 걸까. 한동안 그 믿음이라는 한 단어가 정혜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매번 긍정적이고 호의적이기만 할 것 같던 그 마음이 왜 이토록 자신을 부끄럽고 비참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정혜는 아주 오래 생각해야만 했다.

 

 

3

 

사흘째 되는 아침에서야 민수가 이번주 일요일에 시간을 좀 비워둘 수 있느냐고 전화로 물어왔다. 요즘 들어 날짜 감각이 무뎌진 탓에 정혜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부터 확인했다. 실은 오늘이 화요일이든 금요일이든 일요일에는 아무 일정이 없다는 걸 이미 알면서도.

“일요일엔 왜?”

정혜는 자기 목소리에 어떤 기대감이 묻어나지 않을까 조심했고, 무엇보다 그것을 민수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급하다며.”

그러고는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잠깐 지방에 내려와 있는데 일요일쯤 다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부탁한 일은 그때 다시 이야기해보자는 말도 덧붙였다. 정혜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일어나 쌀을 씻었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늘상 하던 규칙적인 습관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해야겠는데 마땅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죽은 원철을 원망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정혜 자신이 너무 불쌍해졌다. 현미와 검은콩을 조금 섞어 불려두었고, 기다리는 동안 일부러 지루한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을 찾아보았다. 오래전 민수가 좋아한다고 말한 감독의 영화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보았나 싶어 중간중간 검색을 해보기도 했다.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이력이 있었고, 개봉 당시 관객 수가 3천명밖에 되지 않았다. 유명한 영화평론가의 칼럼도 읽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누구보다 사랑받는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게 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사랑받는 사람은 가진 것이 오직 사랑밖에 없어서 다시 사랑으로 보답할 수밖에 없다’라고 쓰여 있었다. 영화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영화에 대한 설명은 마음에 들었다. 저장을 해둔 뒤, 적당한 곳에 다시 옮겨 적고 싶을 만큼 좋았다. 한때 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던 민수가 좋았던 것처럼.

밥이 익어가는 동안 정혜는 민수를 생각했다. 민수의 낡은 빌라에서 맡았던 냄새와 잘 깎인 콜라비 한 접시와 정리되지 않은 그 집의 다른 짐들처럼 여전히 식탁 위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을 올리브나무 화분 같은 것들. 그리고 스물일곱살, 어느 여름밤에 민수가 “나는 너를 용서할 거야”라고 말했을 때 정혜가 느꼈던 당혹감을 떠올렸다.

“네가 나를? 왜?”

정혜는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느냐고 따지듯이 물었고, 민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없지, 아직은.”

그러나 혹시 있을지도 모를 앞으로의 모든 잘못들에 대해서 민수는 정혜를 미리 용서한다고 했다. 그것으로부터 이전에 없던 감정이 샘솟았던 순간을 정혜는 기억했다. 그러다 금세 “비겁하다, 비겁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마음들을 떠올리는 자신이 몹시 야비하고 속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번 떠오른 기억은 뜻대로 멈춰지지 않았다. 어떤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다른 기억은 불현듯이 떠올랐다가 머릿속에서 오래 머물기도 했다. 끝이 좋았던 건 아니었으나 정혜는 민수와 6년을 만났다. 이십대를 보내고 삼십대를 맞이하던 대부분의 시절을 민수와 함께했다. 만나는 동안은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나서는 아쉽고 미안한 일들도 더러 생각이 났다. 한때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민수가 좋았고, 민수를 사랑하는 정혜 자신도 좋았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들은 대체 언제 다 닳아 사라져버린 것일까. 아무 이유 없이 용서를 받는 사람은 무엇으로 그 마음을 돌려줘야 했던 걸까.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으로, 미안한 마음은 미안함으로, 용서하는 마음은 용서로…… 이제 와서 누군가에게 잘못을 따져 물어야 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정혜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대체 민수의 무엇을 용서해야 했던 걸까.

그런데 원철아.

정혜는 갓 지은 밥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너는 나의 무엇을 미워했길래 나는 네가 이토록 미운 거니.

 

한번은 민수의 어머니를 정읍까지 모셔다드린 일이 있었다. 민수는 모르는 먼 친척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다고 했다. 그 무렵 민수에게 낡은 중고차 한대가 생겨서 정혜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였다. 민수는 운전이 능숙했는데, 면허를 따기 훨씬 전부터 아버지의 차를 몰고 다녔다는 말을 정혜는 자주 들었다. 민수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들려준 것은 겨우 그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민수의 어머니를 처음으로 보았다. 민수와 통화할 때 옆에서 목소리를 들은 적은 몇번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마른 체구였다.

목적지까지 막히지 않는다면 네시간쯤 걸릴 거라고 했다. 가는 동안 정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민수와 민수 어머니만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린 시절 민수는 고모의 손에 맡겨졌다고 했다. 고모부는 초등학교에서 평교사로 정년을 채운 뒤 오래전에 퇴직했는데, 은퇴 이후에는 땅을 조금 사서 거기에 무도 심고 배추나 고추도 심어서 소일거리 삼았다가 지난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이런 얘기를 하다가 민수가 “구구단을 못 외워서 고모부한테 맞기도 참 많이 맞았었는데”라면서 웃었다.

“어디 그것만 그랬냐, 다른 건 더 못했지.”

민수의 어머니가 뒷좌석에서 혀를 차며 거들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무얼 꺼내더니 불쑥 두 사람에게 깎은 밤 한알씩을 건네주었다.

“어떠냐?”

민수의 어머니가 정혜에게 물었고, 입에 넣은 것을 다 씹지 못해서 정혜는 고개만 여러번 끄덕거렸다.

“입맛에 맞으면 나중에 더 보내주마.”

“집에 아직 많아요.” 민수가 마다하자 “너 말고, 얘” 하고는 정혜 앞으로 하나를 더 내밀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다시, 누군가의 자손이 태어났고 누군가의 부모는 병을 앓았으며 그 누군가는 암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런 소식들을 두 사람은 무심하게 나누었다.

“방앗간 하던 정복이 삼촌 기억하냐?”

그 집 둘째 딸이 이번에 결혼을 하는데 삼만원을 해야 할지 오만원을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하자, “아이고, 요즘에 누가 삼만원을 해요. 하고도 욕먹어”라며 민수가 정색을 했다.

“그러냐, 너는 누가 삼만원을 주면 욕부터 하고 보냐. 어디 나한테 그 삼만원을 줘봐라, 내가 업고 다니지.”

어머니가 서운하다는 듯이 삐죽거리자 민수가 다시 어머니를 달랬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정혜는 옆에서 가만히 웃기만 했다.

“자, 이것도 먹어봐라.”

민수의 어머니는 이번에도 정혜에게만 양파즙 한포를 건넸다.

“잘 먹네. 잘 먹어서 좋다, 너는. 우리 민수는 통 뭘 먹지를 않아.”

그러고는 가늘고 마른 손가락으로 정혜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주었다. 곧이어 “고모가 많이 늙었어. 안 늙을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들도 이제는 다 늙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예정에 비해 이른 시간에 도착했으나, 저녁을 먹고 늑장을 부리느라 해가 다 지고 난 뒤에야 서울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혜는 그날, 민수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자꾸 보여주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개량된 한옥으로 지어진 그 집 앞마당에는 말린 고추가 널려 있었다.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한그루씩 있었으며, 집 뒤편에는 마른 우물도 있었다. 우물 위에는 크고 너른 양철 골판이 덮여 있었는데, 민수가 그것을 열어 정혜에게 구경시켜주었다. 우물은 생각만큼 깊지 않았고 기대했던 음침함도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어떤 생활감과 분위기 같은 것들이 그 집에는 있었다. 사진 속 민수의 아버지는 지금의 민수만큼이나 젊고 건장했다. 그 옆에 한복을 입고 선 민수의 어머니는 그보다 훨씬 어리고 왜소했다. 그러니까 민수는 굳이 그런 것들을 정혜에게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서너번쯤, 정혜는 민수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보다는 더 자주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안부를 물어왔고, 말린 감이나 절인고추 같은 것을 보내오기도 했는데, 그걸 받고 나면 정혜의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부분은 먹지 못하고 받은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민수의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집의 냄새와 그녀의 걸음걸이 같은 것들도 함께 떠올랐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으나, 걸을 때는 왼쪽으로 치우친 채 다리를 조금 절었다. 다정하지만 부드럽지 않았고, 무언가를 자꾸 주는데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호의가 정혜를 답답하게 만들 때가 더 많았다. 정읍에 갔던 그날도 그랬다. 민수가 보여주는 것들이 부담스러웠고, 어딘가 느긋한 태도에 괜히 짜증이 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혹시라도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하룻밤을 자고 가라는 배려를 받지는 않을까, 초조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 대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이유로 조금 다투었을 뿐이다. 정혜는 며칠이 지나 같은 문제로 다시 언성을 높였는데,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다그칠 만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만약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모진 말로 민수에게 상처를 줬을 거라고 정혜는 생각했다.

헤어질 무렵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큰소리로 다투지도 않았고 서로를 원망하며 지긋지긋해하지도 않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다만 무뎌지고 무뎌져서 서로에게 다른 모양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민수가 자신에게 화가 났다고 느낀 적은 여러번 있었다. 민수의 어머니가 보내온 음식은 대개 냉장고에 오래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먹을 수 없을 만큼 상한 다음에야 한꺼번에 모아 버렸는데, 어느날은 민수에게 그것을 들킨 일도 있었다. 서운하다거나 섭섭하다거나 하다못해 평소보다 날 선 목소리로 자신을 다그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민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정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다가, 함께 있으면 지친 사람처럼 늘 무기력해졌으며, 누구도 그것을 먼저 달래거나 위로하려 들지 않았다.

헤어지고 난 뒤에도 정혜는 이따금 민수를 생각했다.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서 과거의 민수와 다른 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민수의 얼굴을 상상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보단 드물지만 정읍의 그 집과 민수의 어머니를, 오래전 민수에게 미리 받아버린 용서들을 떠올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원철을 만나는 동안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혜에게 원철은 온전히 원철 한 사람이었고, 더없이 원철일 뿐이었으니까. 적어도 서로를 용서하거나 서로에게 용서받을 만한 사이는 아니라고 믿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면, 그것은 서로가 아니라, 두 사람 모두 공평하게 같은 한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4

 

토요일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일요일까지 이어졌다. 오후가 되어서도 그치지 않았는데 호우에 의한 피해 상황이 속보로 속속 전해졌다. 지대가 낮은 곳은 침수되었고 높은 곳은 무너졌다고 했다. 정혜는 창밖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주차된 차들 중 떠내려갈 만큼 위험해 보이는 것은 아직 없었다. 그러나 비구름이 북상하고 있었고, 내일쯤 저 차량들이 뉴스의 자료화면으로 보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약속시간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이제라도 취소하는 게 좋지 않을까.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대신 정혜는 약속을 미룰 수밖에 없는 이유를 문자메시지로 남겼고 연락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굳이 보겠다고 하면 어쩌지? 잠깐 빗줄기가 가늘어졌을 때에는 초조한 기분마저 들었다. 꼭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수를 만나고 온 뒤로 정혜는 줄곧 후회하고 있었다. 어젯밤 민수와 짧게 통화를 한 뒤에는 그런 마음이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오후쯤 먼저 편한 시간과 장소를 나눈 뒤에, 한참이 지나 민수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밖이었는지 주변의 소음이 심했는데, 술에 취한 발음도 꽤 어눌했다.

“솔직히 나는 네가 나를 찾아와서 좋더라. 나는 네가 진짜 잘 살 줄 알았는데, 그게 엄청 무서웠거든? 근데 아니잖아. 나 때문에 네가 불행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니라 그냥 너라서 불행한 거잖아. 그런 네가 나한테 돈을 빌리러 왔어.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런 걸 부탁해? 그런데 정혜야, 나는 왜 그게 또 반가운 거니.”

정혜가 그 말을 다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다 알아듣지 못한 척해야만 했다.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부탁을 한 쪽은 정혜였고, 민수는 아직 거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민수 역시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고민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결정을 미루고 회피하려는 사람에게 사나운 날씨는 정당한 핑곗거리가 될 수 있었다.

민수는 모르지만, 헤어지고 그의 어머니가 정혜를 찾아온 적이 한번 있었다. 정혜는 그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도 모른 척 그 말을 외면해야만 했다. 별다른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민수의 어머니가 정혜를 붙잡고 설득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같이 저녁을 먹었고 함께 조금 걸었으며, 늦은 시각이라 정혜가 버스터미널까지 배웅한 것이 전부였다. 거기서 그녀의 근황을 조금 들었을 뿐이었다. 몇달 전부터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위장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증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서 대학병원에서 이것저것 검사를 받았는데, 아직 민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고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못다 한 사람처럼 입을 뗐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혹여 무얼 묻는다고 해서 정혜가 선뜻 답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었다. 정혜는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가 온전히 자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딱히 무얼 잘못했는지 짚어낼 수는 없었으나, 그렇게 생각해야지만 덜 미안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민수의 어머니는 오히려 정혜에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나 때문이니?”

왜 그 질문에 답하기를 주저했을까. 더구나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왜 하필 그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는지, 정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약속시간이 벌써 한시간쯤 지났으나, 민수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그사이 멀지 않은 도시에서는 불어난 강물로 인명피해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도 정혜는 손에서 전화기를 놓지 못했다. 연락이 되지 않을 만한 여러 가능성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통화를 시도해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지난번 전화에서 민수는 지방에 있다고 했다. 혹시 무리해서 올라오는 동안 사고가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괜한 염려가 아니었다. 원철도 그렇게 죽었다. 그러니까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고,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라면 분명 민수일 수밖에 없다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앞에 선 여자를 보고 정혜는 잠깐 당황했다. 원철의 아내였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여자는 빚을 받으러 온 사람답지 않게 점잖고 차분해 보였다. 더구나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입고 있는 캐시미어 소재의 원피스는 전혀 젖지 않았다. 여자의 크고 멋진 우산은 현관 벽에 기댄 채 세워져 있었다. 금세 바닥이 빗물로 흥건해졌다.

“화과자예요.”

가지고 온 종이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여자가 말했다. 그제서야 정혜는 아끼는 찻잔을 꺼내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평소 웬만해서는 꺼내지 않는 것이었으나, 이 여자에게만큼은 이 집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위축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당황했을 정혜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변호사를 통해 보내온 내용증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도 그랬다. 여자가 손바닥으로 식탁을 쓸며 말했다.

“많이 놀랐을 거예요. 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으니 우리 쪽에서도 어쩔 수 없었어요. 나는 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됐으면 해요.”

정혜를 추궁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 차분한 태도가 정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탁은 원목을 흉내 낸 가공목재일 뿐이었다. 여자가 그것을 만지고 있다는 것이 어딘가 불쾌했다. 그런 생각과 마음들이 정혜의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났을 텐데도 여자는 내내 온화해 보였다. 오히려 여유롭게 안을 둘러보기도 했다.

“결혼 전에는 그이도 이런 집에서 살았어요.”

한 손에는 뜨거운 찻잔을 들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던지거나 정혜를 향해 부을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정혜가 더 노골적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건데요?”

“그 사람에 대해 듣고 싶어할 거 같아서요.”

여자는 차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정혜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혜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다 알고 있었어요?”

정혜의 질문에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밝고 편안한 표정으로 정혜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는 그냥 정혜씨에게 받아야 할 것만 받으면 돼요. 다음달에 아들과 캐나다로 갈 거예요. 그전까지는 정리가 좀 됐으면 해요.”

정혜는 원철을 만나면서 종종 이런 순간을 상상해왔다. 그의 아내가 자신을 찾아와 비난하고 화를 내는 장면들을, 그때 해야 될 적절한 변명과 비굴한 자세들을…… 어떤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괜찮았다. 겨우 그 정도의 앙갚음이라면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무엇보다 정혜의 상상 속에는 늘 원철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이 정혜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곤 했다. 심지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어쩌면 두 사람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심 기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원철은 곁에 없었고, 정혜만 홀로 남았다. 이토록 평화로운 장면을 바란 적도 없었다.

정혜는 여자를 마주 보는 동안 내내 궁금했다. 왜 이 여자는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 걸까. 여자가 원하는 것이 정말 그뿐일까. 아니, 오히려 지금 무언가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정혜 자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걸 왜 꺼내지 않는 걸까. 할 말을 모두 끝낸 뒤, 자리에서 일어서는 여자의 팔을 정혜가 붙잡았다.

“욕하고 싶으면 욕해요. 참지 말고 욕하라고요, 그냥.”

여자는 끝까지 소리를 지르지도 주눅 들지도 않았다. 조금 놀라긴 했으나, 붙잡힌 팔을 뿌리치지도 않은 채 정혜를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에도 정혜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 이 여자를 어떻게든 울리고 싶었다. 자신과 똑같이 슬프고 안타까운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도 나한테 사과받을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나는 하나도 안 미안하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미안한 일이 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으로, 미안한 마음은 미안함으로. 더이상 용서받고 싶지도 않았고 부끄러워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혜에게는 오로지 원철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이 분명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여자가 자신을 노려보기 시작했을 때에야 정혜는 잡은 팔을 놓아주었다. 그뿐이었다. 여자는 금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버렸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행동했다. 다만, 정혜를 향한 경멸감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현관 앞에서 구두를 신던 여자의 얼굴 위로 아주 잠깐 알 수 없는 표정이 지나갔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도 같았고, 숨기려는 것도 같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우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정혜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해 뭘 알아요? 혹시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나 순진할까.”

정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도 닫힌 문을 도로 열어 당장 여자의 뒤를 쫓아가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어떤 믿음은 노력을 필요로 하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믿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관에는 여자의 우산이 쓰러진 채 놓여 있었다. 침착했던 모습과는 달리 여자가 방금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정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날씨에 미처 우산을 챙길 정신도 없을 만큼 여자는 서둘러 빠져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가 없었고, 민수와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어쩌면 약속한 장소에서 정혜를 줄곧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식으로 정혜의 간절함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기대보다 더 망가진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에게 사정하고 애원하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걸어서 가기에는 아주 먼 거리였다.

정혜는 여자가 두고 간 우산을 집어들었다. 두 사람쯤은 안전하게 가려줄 만큼 크고 넓은 우산이었다. 아마도 여자는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이 비를 그냥 맞을 만큼 무모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겨우 우산 하나 때문에 다시 돌아올 만큼 아쉬울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여자를 찾아, 정혜는 이 우산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혼자서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버릴 것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어떤 것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온몸이 흠뻑 젖어 모든 것들이 씻겨가도록, 원철에 대한 모든 마음과 기억 들이, 내가 나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정혜는 무작정 걸어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