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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황정은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연년세세』 등이 있음.
문제없는, 하루
이듬해 영인은 다시 일자리를 구했다.
원단과 부자재를 한국과 중국에서 사들여 베트남으로 보내면 베트남 공장에서 옷을 제조해 다국적 유통기업에 납품하는 회사였다. 그 회사에서 면접을 보려고 영인은 오피스텔 건물의 12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나서자 길고 넓은 복도에 큼직한 문들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었다. 가정집 같은 문도 있고 장식을 덧댄 쇠살문도 네온사인을 붙인 유리문도 있었다. 보라텍, 더즌, 유니코, 콕스. 문에 붙은 상호로는 무엇을 파는 회사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면접 장소에 도착한 영인은 양개형 유리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영인을 맞았다. 활달하고 호전적인 인상에 호기심이 많아 보였고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그가 영인을 견본실로 데려가 벽에 걸린 옷들을 가리켜 보였다. 아노락 점퍼, 점프슈트, 셔츠 드레스, 골프 스커트, 패딩 점퍼. 우리가 만든 거예요.
김부장은 이 사무실에서 그동안 셋이 일해왔다고 말했다. 김부장, 함부장, 정과장, 모두 영업직이었다. 한국인 사장은 하노이에 사는데, 베트남 사람을 현지 대표로 내세우고 본인은 이사 직함으로 영업에 주력하며 공장 두군데를 운영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한국 사무실에서는 그보다 작은 규모로 내수 계약을 따내고 회계를 관리하는데, 작년까지는 영업하는 사람들끼리 어떻게든 굴려왔지만 더는 어려워서 사무직원을 뽑는 것이라고 했다. 김부장은 영인이 제과 제조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니 금방 배울 거라며 베트남 직원들하고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데 문제없겠느냐고 물었다. 영인이 문제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영인을 견본실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일할 자리를 보여주었다. 파티션 없이 책상이 네개, 그중 하나가 비어 있었고 원단이나 견본을 펼쳐 확인할 수 있는 넓은 탁자가 사무실 가운데 있었다. 영인은 사흘 뒤부터 그 사무실로 출근했다. 빈자리에 앉았다.
영인은 사무실 구석에 굴러다니던 법랑 컵에 물을 받아 금전수 화분에 천천히 부어주었다. 그렇게 큰 금전수를 영인은 전에 본 적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자리에, 한국 법인 이름을 새긴 가벽 앞에 거대한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영인의 키만 했다. 윤기 도는 잎 색이 짙고 시든 잎도 없었는데 넉달을 두고 보아도 누군가 물 주는 눈치가 없었다.
영인은 법랑 컵을 오피스텔에 딸린 싱크대로 가져가 물에 헹궜다. 매일 아침 김부장이 커피를 내려 마시는 지저분한 커피메이커 옆에 컵을 두고 딱히 누구에게랄 것 없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금전수에 방금 물 줬어요. 당분간 안 줘도 됩니다.
금전수?
그런 게 있느냐고 김부장이 묻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비볐다. 영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내민 그가 식물을 보러 갔다.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정과장도 그의 곁으로 갔다.
있었네.
이게 여기 있었네.
거래처에서 2년쯤 전에 선물로 받은 화분이라고 김부장이 말했다. 여태 있었네. 그러면 누가 물을 줬느냐고 영인이 묻자 있는지도 몰랐는데 누가 물을 줬겠느냐고, 김부장과 정과장이 서로를 멀뚱히 보았다.
영인은 함부장과 점심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두가지 생각에 잠겼다. 첫째, 거대한 금전수는 어떻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2년 동안 물 한모금 없이 생존했는가. 둘째, 영인까지 일손 넷으로도 부족한 일을 어떻게 셋이서 해왔는가. 김부장과 정과장은 오전 회의를 마치자마자 거래처로, 물류 창고로 각각 출장을 나갔고 아마도 오늘 점심을 제때에 먹지 못할 것이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일을 시작하고 한두달 동안 영인은 얼이 빠질 정도로 바빴다. 입출금과 복잡한 물류 흐름을 관리하는 게 영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베트남으로 가야 하는 화물이 있는가 하면 중국에서 바로 베트남으로 가도 되는 화물이 있고, 베트남에서 서울을 거쳐 횡성과 황간으로 쪼개졌다가 바이어 확인을 받고 다시 서울을 경유해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화물이 있었다. 보통은 배편으로 화물이 오가기 때문에 바다 날씨에 영향을 받았다. 영인은 자신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항구에 정박한 배에 짐을 실었고, 한번도 본 적 없는 그 배가 바다를 건너오길 기다렸다.
태풍으로 배가 항구에 묶이는 일이 가끔 있었고 다른 형태로도 사고가 빈번했다. 실이나 지퍼 색이 견본과 다르다거나, 속주머니에 바느질을 덜 했다거나, 겉주머니까지 박아서 마감했다거나, 바이어스가 조금씩 비틀린 채로 봉제되었다거나, 다 만든 가죽재킷에서 악취가 난다거나.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목요일까지는 베트남으로 가야 하는 화물이 화요일에도 서울에 도착하지 않았고, 중국에서 바로 베트남으로 가도 되는 무거운 원단이 항공편으로 서울에 와버렸고, 베트남 항구에서 화물이 뒤바뀌어 레깅스를 담은 상자 대신 방염장갑을 가득 담은 상자가 왔다. 오늘 오전에 영인은 그 레깅스 화물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로스앤젤레스항으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함부장은 종지에 담긴 수란에 뜨거운 콩나물국밥 국물을 떠 넣었다.
제조 중에 특히 봉제가 어려워.
그래요?
연결된 업체가 많아서 문제가 생기면 연쇄로 번지니까. 여기 사무실에서 나 혼자 애쓴다고 결과가 항상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컨트롤하기 어려운 상황이 늘 생기지. 이 일이 저 일로 연결되고 이 문제가 저 문제로 전이되고, 보통 그래요. 납품하고도 AS로 업체에 불려 다니고. 완료라는 개념이 없어, 이 일엔. 나 25년 했는데 아 끝났다, 그걸 느껴본 적이 없네.
아주우 피 말려요, 하고 덧붙이며 함부장은 깍두기를 부은 국밥을 떠 우적우적 먹었다.
그런데 영인씨는 이전 일을 왜 그만뒀다고요?
영인은 첫번째 헹굼이 끝나가는 세탁기를 바라보았다.
회전 속도를 견디지 못한 빨랫감들이 세탁조에 들러붙은 채 휘리리, 휘리리 돌아갔다. 영인이 그것을 멍하니 보는 동안 헹굼을 끝내고 멈춘 세탁조 속으로 다시 물이 차올랐다. 젖은 빨랫감들이 거품과 뒤섞여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통이 한번 돌 때마다 유리문에 거품이 흘러내리고 빨랫감이 위쪽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영인은 빨래방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세탁기 문짝에 어지럽게 찍힌 손자국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유령이 몹시 더듬은 흔적 같다고 영인은 생각했다. 타포린 가방에 세탁물을 담아 온 여자가 빨래방으로 들어서며 영인을 흘끗 보았다. 여자는 불룩하게 부푼 가방에서 베개 두개와 베갯잇을 꺼내 세탁기에 넣고 키오스크 버튼을 누른 뒤 활짝 열린 가방을 탁자에 두고 바깥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적금색으로 빛났다. 영인은 핸드폰을 열어 인범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접속했다. 맑은 날 대로변에서 찍은 사진에 눈을 두었다. 은행나무 가로수 곁을 지나는 시위대 속에 인범이 있었다. 저마다 다른 깃발을 건 깃대들을 향해 렌즈를 들어올린 구도였고 그래서 모자를 쓴 정수리 정도만 사진 아래쪽에 있었지만 영인은 그게 인범의 머리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두번째 사진엔 인범의 얼굴이 있었다. 위쪽에서 아래를 향해 찍은 사진. 영인은 모자를 깊이 눌러써서 코끝과 입만 드러난 인범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이백오십여덟번째,라는 메시지가 붙은 게시물이었다. 다섯개 댓글이 달렸고 그중에 광고 계정이 남긴 댓글이 둘이었다. 그리고 뻔한 응원 문구를 적은 댓글이 하나. 민주, 진보 하는 것들, 장애인, 퀴어, 날씨 좋다고 다 기어나왔네, 하고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하나. 인범의 브래지어를 두르지 않은 가슴을 지적하며 아 젖꼭지 신경 쓰인다고 킬킬대는 댓글이 하나. 인범은 마지막 댓글에만 대답을 달아두었는데 영인은 여러번 읽은 그 메시지를 다시 눈으로 읽었다. 그래요 신경 써, 지 좆같은 사람아. 그게 마지막 게시물로 두달 전이었다.
영인은 세탁기 문을 열고 뭉친 세탁물을 꺼내 털었다. 타월지로 만든 비치 판초들로 함부장의 말에 따르면 2년 전에 납품한 물건이라고 했다. 판매업체가 재고를 창고에 보관하는 동안 이염이 발생했다며 AS를 요청한 물건이었다. 2년이나 됐잖아! 전화를 끊고 비명하듯 외친 김부장은 손으로 얼굴을 몇번 문지른 뒤 영인을 돌아보았다. 물건이 오면 세탁기에 한번 돌려보자고 그는 말했다. 워싱을 한번 더 하는 거지 뭐. 건조기에 넣지는 말고요, 원단이 수축될 수도 있으니까.
영인은 젖은 판초를 여러번 뒤집으며 상태를 확인한 뒤 빨래 꾸러미를 안고 빨래방을 나섰다.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에도 땀이 흘렀다. 1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사람으로 붐볐다. 13층으로 올라가는 젊은 사람들이 플라스틱 컵에 담긴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빨며 농담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하고 웃는 소리가 너무 커 서로를 공격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며 자주 마주치는 이들이었다. 영인은 그들이 뭘 하는 사람들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때요, 좀 빠져요?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김부장이 물었고 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없어졌어요. 김부장은 다행이라며 입구 근처에 쌓인 박스 네개를 돌아보았다. 비치 판초 마흔여덟장을 나눠 담은 상자들이었다. 이날부터 영인은 사무실과 빨래방 사이를 오가며 판초를 날랐다. 빨래방에 머물며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젖은 판초들을 사무실로 가져와 널었다. 빨래를 널 공간이 부족해 마흔여덟장을 며칠에 걸쳐 세탁했다. 9월이 끝나갈 무렵인데도 더위가 기승이었다. 영인은 길 건너 빨래방으로 가며 뜨거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그게 사람의 체온과 같은 온도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라곤 했다. 바깥은 습하고 더운데 사무실에서는 너무 추워서 카디건을 입고 지냈다. 빨래들 때문에라도 에어컨디셔너를 끌 수 없었다. 베트남에서는 우기(雨期)라고 연락이 왔다. 우기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예년에 비해 유별나게 비가 잦아서 원단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이었다. 영인은 판초를 빨래방으로 가져가기 전에 쪽가위와 바늘을 사용해 공들여 태그를 떼어냈고 다 마른 판초에 다시 달았다. 빨래방에서 빨래가 다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동안엔 인범의 소셜미디어에 접속했다.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영인은 알록달록한 깃발들 아래 인범의 정수리에 눈을 두고 있다가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곤 했다.
일년이 넘도록 인범과 연락 없이 지냈다. 영인은 그걸 셈하며 인범을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를 생각했다. 둘 다 일로 바빠 한동안 만나지 못한 참이었고 모처럼이니 남들 다 간다는 곳에 가보자며 서울 망원동에서 만나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인범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다듬지 않은 머리를 목뒤에서 질끈 묶었고 움직일 때마다 옷에서 덜 마른 빨래 냄새가 났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인은 밥을 먹다 말고 인터넷 쇼핑앱에서 스포츠의류 세제를 주문해 인범의 주소로 보냈다. 그 앱 쓰지 마. 영인이 빨래할 때 섞어 쓰라며 주문 화면을 보여주자 인범이 말했다.
사람 죽이는 기업이야.
알았어, 알았어.
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볶음밥을 입에 넣었다. 음식이 짜고 달아 연거푸 물을 마셨고 밥을 다 먹은 뒤엔 까페로 건너갔다. 넓은 마당이 딸린 2층 양옥을 개조한 곳이었다. 영인과 인범은 마당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갔고 과거엔 누군가의 방이었을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둘이 마주보고 앉으면 그만인 작은 탁자가 네개 놓여 있었다. 마당을 내다보는 큰 창 쪽으로 느티나무가 가지를 뻗고 있어 영인은 인범을 그쪽에 앉혔다. 나무 가까이 앉으라고, 나무를 보라고. 인범은 편안하게 발을 뻗었다. 시나몬스틱을 머들러로 꽂은 커피 두잔을 탁자에 두고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먹는 이야기, 건강 이야기, 직장 이야기. 인범이 그즈음 보고 듣는 사악한 사람들 이야기. 수요집회에 참석한 아이들에게 너희들 창녀가 되는 법을 배우러 왔느냐고 묻는다는 노인들. 아들의 공천을 바라는 어미가 참사로 자식 잃은 부모들 앞에서 확성기로 떠들었다는 말들. 영인은 너무 사악해서 낯설고,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수도 없을 것 같은 그 이야기들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아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다시 직장 이야기, 사는 집 이야기, 살던 집 이야기, 어린 시절 이야기, 미국으로 이민 간 친척의 소식, 남의 나라 대선 이야기. 그러다가 ‘전쟁’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인범의 말투가 달라졌다.
왜 그걸 전쟁이라고 불러.
인범이 영인을 향해 말했다. 전쟁 아냐, 학살이야. 어제까지 그 땅에 쏟아진 폭탄이 팔만 톤인데. 그 좁은 땅에 쏟아진 팔만 톤 폭탄이 군인하고 민간인, 아이와 어른을 구별할 수 있었겠어? 그게 어떻게 전쟁이야. 영인은 인범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그래, 그래. 그러네, 그러네. 인범이 무언가를 향해 분통을 터뜨리는 일은 늘 있었으니까. 인범의 수많은 관심사, 영인은 그걸 다 아는 처지도 아니었고 그 사악한 사람들은 영인 자신이 아니며 게다가 전쟁, 학살, 그런 말들은 너무 먼 시간과 먼 공간에 있었다. 영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고 대화가 얼마간 이어졌다.
나중에 영인은 그 순간을 여러번 곱씹었다. 영인은 이미 넘어갔다고 생각했고 인범은 넘어가지 못한, 바로 그 순간을. 인범은 좀 전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고 영인은 그걸 끝내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몇마디 말을 더 주고받다가 동시에 그걸 깨닫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영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느티나무에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부리가 크고 깃털이 반질반질한 검은 새가 머리를 돌려가며 주변을 탐색하다가 가지에서 날아올랐다. 영인이 그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인범은 가만히 커피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이 살짝 벌어진 시나몬스틱이 잔 받침에 기우뚱하게 얹혀 있었다. 인범은 찻잔을 더듬다가 검지로 코를 긁으며 언니, 하고 말했다. 심상한 말투였으나 영인은 얼굴 쪽으로 올라간 인범의 손가락들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요즘, 하고 말한 뒤 인범은 큼, 목을 가다듬었다. 말을 꺼내는 게 버거운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쉰 뒤 영인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영인은 놀라 눈을 깜박이며 인범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인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그대로 말랐다.
요즘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것이 어렵다고 인범은 말했다.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들이 있어. 내가 생각하기엔 사람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일들이거든. 그래서 나는 자꾸 그걸 말하는데, 말하면 시답잖은 일이 돼. 시답잖아져, 말하면서.
말하면, 내가 그걸 말하면, 사람들은 그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왜 여태 하느냐는 얼굴로 나를 봐.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 그 이야기가 왜 나와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곤란하고 안쓰럽다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면서 나를 봐.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그 일을 얼마나 신경 쓰지 않는지를 알게 돼. 그게 그 사람들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돼. 내게 너무, 너무 중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
그걸 보게 돼.
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
죽인다고?
영인은 생각했다. 혼자 있을 때, 혹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 있을 때. 조용히 되묻는 것처럼 혹은, 바람 속에서 외치는 것처럼.
잠을 떨치려고 애쓰며 침대 끝에 앉아 있을 때, 아침 세수를 하러 들어간 욕실에서 치약 거품이 얼룩진 거울을 들여다볼 때, 얼얼해질 때까지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출근길 지하철에서 앞뒤로 사람들에게 눌린 채 영인 자신도 어깨며 엉덩이로 옆 사람을 누르고 서서, 매일 똑같은 메뉴로 점심을 제공하는 식당에 식권을 내고 밥을 먹을 때, 양치질을 해도 마늘과 고춧가루 향이 가시지 않는 입을 다물고 파티션 안에 앉아 있을 때, 오늘 어쩌면 내일 안으로 마쳐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조절하려고 메모를 붙였다 뗄 때, 책상 서랍을 열고 정돈되지 않은 사물들을 눈으로 훑으며 무얼 꺼내려고 이걸 열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할 때, 퇴근길 지하철 출입문에 어지럽게 찍힌 손자국들에 눈을 두고 있을 때.
죽인다니.
뭘 그렇게까지 해, 왜 그렇게까지 말을 해, 하고 영인은 생각했다. 인범은 그날 이후로 연락이 없었고 영인도 인범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영인은 인범의 모든 것이 지겨웠지만 인범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이따금 들여다보았다. 일주일이나 열흘 주기로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왔다. 인범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거나 하고 있다는 소식은 아니었고 어디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언제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알리는 게시물이었다. 인범은 그런 게시물에 ‘집단학살, 식민지주의, genocide, colonialism’이라는 태그를 붙이곤 했다. 연락이 끊기고 한달쯤 되었을 때 영인은 인범의 계정에서 온라인 전단을 보았다. 여전히 상큼하고 달콤하냐고 묻는 질문 아래 ‘점령과 학살로 뒤덮인 땅에서 자란 딸기, 복숭아, 자몽’이라는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음료 사진이 몇개 실렸고 영인이 다니는 회사에서 만들고 판매하는 어린이 음료와 복숭아맛 음료도 그중에 있었다.
영인은 파티션으로 벽을 두른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온라인 전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한번 더 읽었다. 이스라엘 점령군이 팔레스타인 농지에서 어떻게 과실수와 물을 빼앗는지, 그 나무들이 자라는 땅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지를 애써 상냥한 어조로 알리는 글을 읽으며 영인은 인범의 얼굴을 생각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범의 마른 얼굴을.
너도 내 삶을 몰라, 내가 어떻게 일하고 무엇을 견디며 살아가는지 너도 몰라. 내게 보복하지 마. 영인은 인범을 향해 그런 메시지를 적었다가 지웠다. 인범을 향한 걱정과 원망으로 뒤죽박죽인 마음을 견디기 어려울 때에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적었다. 너는 그 일들 때문에 죽지 않아. 너는 그 일들로 죽을 수 없어. 그 일들은 너를 죽일 수 없어. 타인의 삶에 일어난 일이니까. 네 삶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니까. 영인은 메시지 창에 그런 말을 적어두고 거듭 읽었다. 그런 다음엔 가새표를 눌러 전부 지웠다. 전송 버튼에 손가락이 닿을까 두려워하면서.
어느날 영인은 인범의 계정에서 짧은 영상을 보았다. 지면 높이로 내려앉은 건물로 다가가는 영상이었다. 포개진 시멘트 판 사이로 아동용 신발을 신은 발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열쌍,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영인은 무심코 발을 세다가 수를 놓쳤다. 짧은 종아리들이 시멘트 가루를 뒤집어써 재색이었다. 두번째도 무너진 건물로 다가가는 영상이었다. 하늘을 향해 곤두선 철근에 관통당한 사람의 몸이 늘어져 있었다. 다른 날 다른 계정에서 영인은 주저앉은 잔해 위에서 손으로 바닥의 가루를 쓸어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회백색 얼굴이 야트막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마와 감은 눈. 시멘트 가루와 섞여 먹색이 된 피가 그의 머리에 말라붙어 있었다. 그다음에 영인은 소리를 지르며 병원 복도를 달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건물 바깥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듣고 비명을 지르는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를 보았고 수염이 거칠게 돋은 얼굴을 문지르며 우는 남자를 보았다.
처음에 영인은 무슨 일인지, 내용을 파악하려고 애쓰며 몇번이고 반복되도록 그 짧은 영상들에 눈을 두었으나, 곧 그 영상들을 통해 어딘가로 흘러들었다. 인범의 계정을 방문하려고 로그인하면 짤막하게 움찔거리는 영상들이 화면에 모여 있었다. 영인이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만든, 영인이 모르는 사람들이 선택한, 영인이 선택하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은 영상들이었으나 영인은 매번 그 가운데 하나를 눌렀고 그런 다음엔 또 다음으로 미끄러졌다. 영인은 그래서 토네이도와 쓰나미에 휩쓸리는 해안을 보았고 바위가 많은 해안에서 막대로 무언가를 건지려고 애쓰는 군인들을 보았다. 항구 도시가 폭발로 터져나가는 순간에 사이렌을 편집해 넣은 영상을 보았고 활주로에 느리게 처박히는 항공기 위로 FAKE, FAKE, FAKE라고 점멸하는 자막을 붙인 영상을 보았다. 느리게 돌아가는 파쇄기 속에서 무언가가 으깨지는 장면에 비명과 신음을 입힌 영상이 있었고 끝까지 보라고 경고하는 자막이 붙었으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밤거리 영상도 있었다.
영인이 가장 나중에 다다른 것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다른 영상들이었다. 물렁한 반죽을 손으로 주무르며 시험 결과를 한탄하거나 도마 위에서 식도로 감자를 끝없이 조각내며 차분한 목소리로 직장 상사, 동료, 교수, 친구, 가족, 이웃에게 상처받은 일을 고하는 영상. 그런 걸 만들어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인은 그런 것을 잠들기 전에 보았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달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영상들. 그러다 보이는 것에도 들리는 것에도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안심하게 만드는 영상들. 쉽게 잠의 배음이 되는 소리들.
영인씨, 나 좀 봐요.
영인의 상사인 윤과장이 영인을 자기 자리로 불러 모니터를 보여주었을 때 영인은 당황했다. 거래처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띄운 화면이었다. 윤과장을 비롯해 몇 사람을 참조로 두고 영인이 보낸 메일이었는데 그걸 왜 새삼 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영인이 영문을 몰라 서 있기만 하자 한번 읽어보라고 윤과장은 말했다. 아니 아니, 자기가 쓴 것만, 딱 자기가 쓴 것만 읽어봐. 윤과장은 인쇄물 몇장도 영인의 앞으로 밀어두었다. 두주 사이에 영인이 쓴 이메일들이었다. 이걸 읽는 사람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느냐고 윤과장은 물었다. 영인은 거기서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다시 읽으니 조금 어렵기는 했다. 말 순서가 뒤집힌 부분이 몇군데 있었고 주어나 목적어가 사라진 부분도 일부 있었다. 그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알 수 있을지 없을지를 영인은 전혀 말할 수 없었다. 영인이 창백해진 채 서 있는 동안 윤과장은 검지로 책상을 두들기며 영인을 관찰하다가 영인씨, 하고 불렀다.
대체 뭐가 문제예요?
영인은 우산을 펼치고 빗속으로 들어섰다. 바람 때문에 우산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천을 팽팽하게 받친 우산살이 휘어질 정도로 비바람이 불었다. 아침 출근길에 젖은 신발과 바짓부리가 다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발등이 젖고 있었다. 영인은 우산을 머리 위로 바짝 당기고 걸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안과를 들렀다가 사무실로 돌아가야 했다. 영인은 사무실 건너편 건물로 올라가 짙은 색 천을 씌운 소파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진료실로 들어가 현미경 앞에 턱과 이마를 대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빛을 바라보았다. 기계가 쏘아낸 밝은 빛이 영인의 눈 속을 들렀다 나갔다. 현미경에서 물러난 의사가 가운 주머니에 주먹을 넣고 모니터를 향해 돌아앉았다. 먼지 많고 건조한 데서 일하느냐고, 잔 생채기들이 있어서 눈이 시리고 따가운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영인은 처방받은 인공누액과 소염제를 쥐고 다시 빗길을 건너 사무실로 돌아갔다. 잠깐 사이에 빗줄기가 더 거세져 우산 속에서도 몸이 젖었다. 영인이 젖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사무실로 들어서자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사무실에 남아 있던 함부장이 영인을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난리야 진짜.
비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 이례적으로 동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비가 한국에서는 117년 만에 최고 우량을 기록했다. 산사태가 일어나고 저지대 집과 거리와 농장과 과수원이 물에 잠겼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영인은 함부장을 따라 창에 붙어 섰다. 낭떠러지에 서서 굽어보는 것처럼 아래쪽을 내려다보았으나 유리로 된 외벽을 폭포처럼 쓸고 내려가는 빗물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공장에서는 어제 대피 중이라는 메시지가 왔다. 중국에서 발원해 베트남을 가로지르는 홍강이 곧 범람할 테니 대피하라는 당국의 명령이 있었다고 했다. 베트남에도 중국에도 며칠째 폭우가 이어지고 있는데 불어나는 강물을 버티지 못해 중국 쪽에서 댐을 여는 바람에 홍강의 수위가 크게 올랐다고 했다. 공장이 강 근처라서 이백여명 남짓한 직원들이 다급히 공장을 빠져나왔다는 메시지 뒤에 곧 통킹만으로 진입할 태풍의 규모가 더 커졌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함부장과 김부장은 공장이 물에 잠긴다면 이 비가 다 지나간 뒤로도 납기일에 맞추지 못할 계약이 수두룩하다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괜찮아? 어젯밤 영인은 잘로(Zalo)에 개설된 채팅방에 처음으로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남겼다. 영어로 업무 메시지와 메일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거기 모여 있었다. 린, 짱, 로버트, 능억, 괜찮아?
괜찮아.
집인데, 창이 깨졌어.
버텨.
나는 아직.
괜찮아.
영인은 어둠 속에서 메시지를 읽고 창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센 바람을 탄 빗방울들이 누군가 내던진 쌀알처럼 창을 두들기곤 했다.
밤이 지난 뒤 대피 경보가 해제되었고 침수는 면했지만 하노이 전반의 물류 흐름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납품일자를 미루는 일을 피치 못하게 되었고 김부장과 정과장은 그 때문에 바이어들을 만나러 아침부터 외근을 나간 참이었다. 한국인 직원들이 사용하는 채팅방에 사진이 몇장 올라왔다. 공장 가는 길,이라는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 붉은 흙을 끌어안은 뿌리를 드러낸 채 가로수들이 아스팔트 거리에 쓰러져 있었고 구겨진 간판과 나뭇가지, 건물 외벽에서 떨어져나온 마감재 들이 젖은 거리 곳곳에 처박혀 있었다. 마지막에 올라온 메시지는 2분 남짓한 블랙박스 영상이었다. 먼지 쌓인 대시보드에 놓인 불독 인형이 고개를 까닥이고 백미러에 걸린 묵주가 달랑거렸다. 짐칸에 와이어를 실은 트럭이 앞서 달리고 있었고 오토바이 몇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달렸다. 태풍이 휩쓸고 간 도로를 느릿느릿 나아간 자동차가 강을 건너려고 다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먹구름이 가시지 않은 하늘과 탁한 강 사이에 솟아 있던 트러스교가 중심부터 서서히 내려앉았다. 느리고 아무런 소리가 없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모래로 만든 두꺼비집이 주저앉는 것처럼, 그쪽이 가라앉은 것이 아니고 이쪽이 상승한 것처럼 그렇게 바닥이 사라졌고 앞서 다리에 진입했던 트럭과 오토바이도 고개를 넘어가듯 사라졌다.
몇발짝 간격으로 추락을 면한 오토바이 한대가 머뭇거리며 후진하는 부분에서 영상은 끊겼다. 외근 중인 김부장이 영상 아래 메시지를 붙였다.
그러게 물 불어났을 때는 강 근처에 가는 게 아님다.
영인은 소염제를 누점 근처에 떨구고 눈을 감았다.
시큰한 통증이 눈 뒤쪽으로 번졌다가 사그라들었다. 어제도 비 엄청 왔잖아요.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김부장이 시무룩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녁 먹을 때가 다가오는데 점심도 먹지 못했다며 은박에 싸인 김밥을 손에 쥐고 한입씩 먹고 있었다.
비가 그렇게 오는데 내가 황간까지 바이어 만나러 가서요, 간 김에 백만원어치 상품권을 주고 왔단 말이에요. 그러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비가 정말 호되게 내리는 거야. 겁이 더럭 나더라고. 그 빗길에서 죽을 고비를 몇번 넘겼는데, 어떻게 어떻게 서울에 당도하고 보니 너무 죽겠어서요, 집까지도 못 가고 사무실로 도로 올라왔거든요. 그 날씨에 혼쭐이 난 채로 여기 이렇게 혼자 앉아 있는데 눈물이 나더란 말이에요. 외롭더라고. 뭐를 하자고 내가 이렇게 사나 싶고.
영인은 김밥을 먹는 김부장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볼이 불룩해지도록 김밥을 입에 물고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견본실에서 거래처와 통화하는 정과장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화기를 붙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김부장이 김밥을 마저 먹고 은박을 뭉쳐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자아, 자아, 하고 말하며 두 손으로 뺨을 착착 두들긴 뒤 다시 눈을 부릅떴다. 오후 다섯시 반이 되었다. 베트남 사무실과 공장의 일이 중단되어 영인으로서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영인은 슬리퍼를 벗고 젖은 신발 속으로 발을 넣었다. 퇴근합니다, 월요일에 뵐게요. 금요일엔 늘 야근을 하는 함부장이 커피를 사러 간다며 영인을 따라나섰다. 영인은 함부장 곁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13층에 한참 머물렀다가 내려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이제 막 웃음을 터뜨린 사람들 사이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린 다음 거 탑시다. 엘리베이터를 그대로 보낸 뒤 함부장이 다시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위층 말이야, 다단계인 것 같아.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영인이 묻자 젊은 애들이 떼로, 저렇게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다니는 일이 요즘은 글쎄, 사이비하고 다단계 말고 뭐가 있나, 하고 함부장은 말했다.
영인은 냉장고를 열고 얼려둔 밥을 꺼냈다. 밥을 담은 플라스틱 그릇이 영인의 손안에서 쩍 소리를 냈다. 그릇에 랩을 씌워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동안 영인은 인범의 계정에 접속해 새 소식이 없는 걸 확인했다. 인범은 간밤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인은 이날 밤 꿈을 꾸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리를 오토바이로 달렸다. 부러진 노랑불꽃나무 가지와 찢어진 싸꾸나무 이파리, 찬 빗방울이 바람에 섞여 이마로 눈으로 들이쳤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리던 영인은 바닥을 잃고 몸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앞바퀴부터 천천히, 완만한 곡면을 따라 끝없이, 끝없이 미끄러졌다. 기울고 기울던 앞바퀴가 마침내 잠자리에 누운 영인의 이마를 툭 쳤을 때, 영인은 눈을 떴다.
몇시쯤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이마를 만지며 누워 있다가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끌어당겼다. 시간을 확인하고 가슴 위에서 핸드폰을 쥐고 있다가 인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번 가고 인범이 음, 하며 전화를 받았다.
언니.
영인은 그 말까지 듣고 숨을 죽였다. 인범은 어디에 있는 걸까. 잡음이 별로 없었다. 바깥은 아닌 것 같았다. 영인은 가만히 인범의 침묵을 듣고 있다가 전화를 끊었다. 시큰하게 쑤시는 눈을 감고 도로 잠들었다.
우산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영인은 다시 깼다. 어둑한 방 안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불 켠다. 놀랄 틈도 없이 인범이 말했다. 영인은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눈을 감았다. 인범이 전등 스위치를 등지고 서서 영인을 내려다보았다. 뭔가를 담아 팽팽하고 묵직하게 늘어진 비닐봉지를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영인이 그저 누워 눈만 깜박이자 인범이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아파?
아니라고 대답하자 인범은 뭐야, 하고 어깨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왜 말없이 끊어 전화를.
영인은 놀랐다고 중얼거리며 부엌 쪽으로 터덜터덜 가는 인범을 바라보았다. 인범은 부엌과 욕실을 오가며 큰 그릇이나 대야가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릇을 덜걱이는 소리, 비 냄새, 바깥바람 냄새가 났다.
비 안 와?
그쳤어.
인범은 영인이 밀가루를 반죽할 때 쓰는 둥근 볼을 영인의 곁으로 가져와 내려두었다. 회갈색 작은 물고기 몇마리가 부유물 섞인 물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구피야, 인범이 말했다. 몇마리만 길러봐. 누가 줘서 받았는데 자꾸 늘어나서, 어쩔 수가 없네. 영인은 지느러미로 그릇 바닥을 쓸며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을 보다가 검지를 물에 담가보았다. 물고기들이 재빠르게 그릇 가장자리를 향해 달아났다. 다섯마리. 물은 미끈했고 아주 차지는 않았다. 욕실 대야에 수돗물을 담아뒀으니 하루나 이틀 두었다가 그리로 옮기라고 인범이 말했다. 염소를 날리고 찬 기운이 가신 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밥도 가져다놨어. 영인은 곁에서 그런 말을 하며 물고기들을 들여다보는 인범을 보다가 다시 구피를 구경했다.
어항이 있어야겠네.
그렇지. 산소 발생기도 있으면 좋아.
어릴 때 집에 구피를 키우는 어항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느냐고 영인은 물었다. 꽤 컸는데 어릴 때 인상이니 지금 보면 그렇게 크지는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갓 태어난 새끼를 먹는 성어들 때문에 치어를 담는 격리통을 따로 마련해 수조에 걸어두었는데 하룻밤 만에 수위가 푹 꺼질 정도로 물이 말라 치어들이 몽땅 죽은 적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새끼들이 격리통 벽에 붙어 말라 있었지. 하룻밤 만에 그렇게 될 수도 있나. 너는 기억하니? 너는 봤니?
나도 봤지. 나도 기억해. 내가 언니 옆에서 울었는데.
그렇구나. 내가 잘못 기억하는 줄 알았어. 그렇잖아, 하룻밤 만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숨 쉬는 입이 갑자기 늘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새끼들까지 엄청 늘었으니까.
비 그쳤어?
이제 그쳤어.
베개를 내줄 테니 잠을 좀 자겠느냐고 묻자 인범은 고개를 흔들었다. 영인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잠을 더 자기도, 뭘 하거나 먹기도 애매한 시각이었다. 영인은 인범이 금방이라도 일어나 가버릴까 불안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게 시간을 좀 준다면 너는 좀 어떠냐거나 너의 일은 요즘 어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별로 좋지 않다거나 좀 괜찮다거나 그럭저럭 좋다거나, 하는 대답을 듣고 그러냐고 내가 대꾸하고. 그러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조금 있다가. 조금 더 있다가.
금방 해가 뜰 거야.
인범이 아직 어둑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영인은 말하지 않은 무언가에 대꾸를 들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인범아, 왜 그렇게 빤한 말을 해, 거짓말하는 것처럼.
진심이야?
뭐?
인범이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미간을 찌푸리느라 눈을 가늘게 뜨고 영인을 돌아보았다.
해 뜨는 데 뭐 진심이 왜 필요해.
두어시간 뒤면 해가 뜰 거라고, 그걸 보러 가자고 인범은 말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영인은 냉장고에서 사과를 두알 꺼냈다. 구피들에게 밥을 주고 가야 할지를 묻자 인범은 금방 돌아올 테니 괜찮을 거라고 했다가 혹시 모르니 주고 가자고 했다. 영인은 종이 냅킨으로 감싼 사과를 바람막이 점퍼 주머니에 넣고 물병을 챙겨 인범을 따라나섰다. 오년 전에 인범이 중고로 구입한 소형차가 길 아래쪽에 주차되어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열자 문틈에 끼어 있던 단풍잎이 영인의 발등으로 떨어졌다. 영인은 진흙이 묻은 매트에 발을 올리고 벨트를 맸다. 핸들을 쥐고 돌리는 인범의 손끝이 노랗고 검게 착색되어 있었다. 콩테나 목탄을 쥔 흔적일 것이다. 인범은 예전부터 콩테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영인은 인범이 그리는 그림을 잘 몰랐다. 크라프트지에 그린 목화 그림을 한장 받아서 액자에 넣은 적 있었는데 윗집 누수로 액자를 걸어둔 벽이 젖는 바람에 곰팡이가 피었다. 오래전 일이었다. 영인은 인범의 어릴 적 그림을 더 많이 기억했다. 노트를 칸으로 나누고 이야기를 그려 넣은 만화였다. 실처럼 길고 구불구불한 다리를 타래로 뭉쳐 치마 속에 숨기고 다니는 여자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그의 다리가 짧다고 놀리거나 비웃으면 그는 다리를 묶은 리본을 풀고 깔깔거리며 사람들 사이에서 솟구쳤다. 이제 보기 좋으냐, 보기 좋으냐고 물으면서. 영인은 그 만화를 특히 좋아했다. 인범이 별것 아니라는 듯 버리려는 노트를 주워 앨범 사이에 끼워두었다. 영인이 고등학생이고 인범이 중학생일 때.
인범이 모는 차가 남동 방향으로 도시를 빠져나갔다. 도(道) 경계를 넘을 때 누군가 흩뿌리듯 비가 내렸지만 곧 멈췄다. 영인은 사과를 무릎에 올리고 열매자루 쪽으로 엄지를 넣어 반으로 쪼갰다. 반을 인범의 입에 물리고 나머지를 베어 먹으며 고속도로 너머 어둠에 잠긴 산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어딘가 마을이 있을 테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불빛을 흘려보냈다. 멀리 떨어진 불빛일수록 천천히.
영인은 생각했다. 산자락은 마을로 이어지고 마을은 논과 밭으로 이어지고 밭이며 논에서 물은 서서히 빠져나가고 개천으로 모인 빗물은 아직 소용돌이치며 하류로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복숭아며 배며 과실수들은 젖은 바닥으로 열매를 떨궜을 테고 벼는 쓰러져 물에 잠기고 축사 바닥은 진창일 것이며 닭과 돼지는 죽고 소들의 배도 젖고 새끼 고양이들은 떠내려가고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할 것이다.
비가 너무 많이 왔다고 영인은 말했다.
베트남에도 비가 많이 왔어.
그랬어?
가로수가 뽑히고 유리창이며 간판들이 부서졌어. 그런데 그렇게 파괴된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어. 여기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어. 여기하고, 그런 일을 겪었을 때 우리하고 닮았어. 베트남 아니고 여기 어딘가라고 해도 믿었을 거야. 그렇게 보였을 거야.
그래.
인범이 사과를 다시 베어 먹느라 핸들에서 한 손을 떼는 걸 영인은 바라보았다. 인범은 빨리 먹어치우려는 듯 사과를 덥석덥석 먹더니 남은 속을 조수석으로 건넸다. 영인은 종이 냅킨으로 그걸 받아 둥글게 뭉쳤다. 인범은 도로를 바라보며 사과를 꾹꾹 씹었다. 인범아, 하고 영인은 말했다.
너는 악(惡)을 얼마나 생각해?
글쎄.
요즘 나는 악을 많이 생각해.
어떤 악.
그냥 악, 평범하게 있는 악.
영인은 손에 쥔 사과를 내려다보았다. 베어 먹은 자리가 벌써 갈변해 있었다.
네가 말한 악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 같은 것도 자주 생각해. 그런데 그걸 계속 생각하니까, 어렵더라.
어렵지.
마음도 생각도.
그래.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닌데 내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은 아니야. 난 요즘 어딜 봐도 그런 생각을 해. 안전한 데가 없어.
인범이 방향 지시등을 켜고 오른쪽 차선으로 들어갔다. 낙석방지책이 자동차 앞등 불빛을 받아 희게 번득였다. 검은 나무들이 선 비탈과 창백한 축대벽이 번갈아 이어졌다. 스무살에 서해로 놀러 간 적이 있다고 인범은 말했다.
나까지 넷이었나, 친구네 외삼촌이 해안에 방갈로를 하나 빌렸는데 다른 일정으로 못 가게 되어서, 우리가 대신 갔거든. 도착하고 보니 옆 방갈로에 머무는 사람들이 테라스에서 기름을 끓여 뭔가를 튀기고 있었어. 칠게래. 칠게가 있대.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도 개펄이었는데 거기 많이 산다는 거야. 우리도 당장 나가보자고 친구가 말했어. 숙소 관리인에게 양동이하고 호미를 빌려서 나갔지. 우린 개펄과 바위 사이를 돌아다니며 칠게를 주웠어. 재미가 있더라고. 자꾸 나오고, 자꾸 눈에 띄니까. 호미를 펄에 거듭거듭 꽂아가며 우린 칠게를 캤어. 양동이를 절반 넘게 채우고도 계속했어. 그러다 한 친구가 이것 보라며 손바닥을 내밀었어. 새끼 낙지였고 아주 작았어. 머리부터 다리 끝까지 쭉 뻗어도 사람 약지 길이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았지. 너무 신기했어. 그렇게 작은데 낙지야, 낙지 꼴을 갖추었어. 신기해서 한참 봤지. 그러고 그 친구는 손바닥을 펼쳐서 낙지를 떨궜어. 우리가 칠게를 모으던 양동이 속으로.
화가 나 집게를 치켜든 칠게들 위로.
우리 중에 누가 아,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어.
혼비백산한 게들이 낙지를 찢어발겼어.
다 잘려나갔어.
우린 멍하니 양동이 속을 들여다보았어.
나는 양동이를 그대로 엎어서 안에 든 것을 전부 개펄에 두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어. 무릎이며 엉덩이며 개흙으로 젖어서 춥고 무겁고, 끔찍하고, 몸이 덜덜 떨렸지. 이제 그만하자고, 이미 너무 많다고 내가 계속 말했는데도 친구들은 개펄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어. 이것 봐, 여기 봐, 하며 계속 호미로 펄을 뒤졌지. 결국 분위기가 좋지 않아졌어. 왜 그러냐고 한 친구가 나한테 말했어. 다들 이런 거 오랜만이라 더 놀고 싶을 뿐이라고. 그만 놀고 싶으면 너는 숙소로 돌아가라고.
저녁엔 칠게를 튀겼어. 옆 방갈로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버너와 밀가루와 냄비를 관리인에게 빌려서. 나도 칠게를 먹었어.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우린 그걸 다 튀기지도 못했어. 남은 칠게들은 기운이 다했는지 발을 몸통에 딱 붙이고 있었어. 양동이가 기울 때마다 젖은 자갈처럼 잘그락거렸지. 우린 그걸 양동이째 관리인에게 넘겼어. 나중에 한 친구가 여행기를 블로그에 올렸어. 얼마나 즐거웠고 맛있었는지를 기록한 글 속에 나도 있었어. 그 친구는 ‘얼굴 탈까봐 자꾸 숙소로 돌아가자고 투덜거린 친구’라는 글을 붙여서, 개펄을 밟고 있는 내 발 사진을 올려뒀어.
양동이에 낙지를 떨군 친구한테 악의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아. 무슨 악의가 있었겠어? 낙지가 조각나는 동안 손 놓고 보기만 한 우리한테 무슨 악의나 적의가 있었겠어? 우린 그냥 다같이 멍청했고, 그뿐이었어. 언니, 세상이 언제고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면 사람의 악의나 적의 때문은 아닐 거야. 그보다는 멍청함 때문일 거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음, 그런 거 때문에.
난 그걸 다시 하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양동이를 칠게로 욕심껏 채워 거기에 작은 낙지 털어넣는 거, 자동으로 그게 되고,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 그런 척 구는 거, 그런 거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할 뿐인데, 하며 인범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요즘 좀 지쳤나봐.
그래서 그런 거야. 언니한테 못되게 말했어. 미안해.
도시로 진입하는 인터체인지를 두번 지나는 동안 차는 도로에 오래 머물렀다. 가다가 서다가 새벽을 맞이했다.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해가 완전히 뜰 테지만 영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인범도 아쉽다는 말이 없었다. 바닷가에 좀 앉아 있다가 커피나 먹고 오지 뭐. 영인이 콘솔박스를 열었다가 비스킷 봉지를 발견했는데 인범은 그게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영인은 비스킷을 먹으며 희붐한 바깥을 내다보았다. 단풍 들기 시작한 산이 먼지로 덮인 것처럼 칙칙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올해 단풍은 선명하지 않을 것 같다고 인범이 말했다. 어디서 들었는데, 단풍 직전에 비가 많이 오면 그렇다는데.
그렇대?
넓게 퍼진 구름 사이로 차가운 빛을 뿜으며 해가 떠올랐다. 막히는 구간을 벗어난 인범은 다시 속도를 냈다. 영인은 핸드폰에 내비게이션을 띄우고 손가락으로 죽죽 당겨 갈 길을 살폈다. 작은 마을 곁을 지난 뒤엔 느른하게 늘어진 이무기처럼 구불구불한 도로가 이어졌다. 아주 긴 고개를, 산을 넘는 것 같았다. 아까 한참 막혔던 도로는 붉은색, 그다음엔 노란색. 그들은 이제 초록색으로 표시된 구간을 지나고 있었다. 저 앞은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영인은 말했다. 이런 거 본 적 있어?
난 본 적 없어. 도로가 파란색으로 표시된 게 무슨 뜻이지?
막히지 않는다는 뜻이지. 완전 빠르다는 뜻이지.
그들은 오가는 차가 드문 도로를 달려 터널로 진입했다. 폭이 좁고 천장이 높고 제법 긴 터널이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티가 났다. 중반쯤 들어갔을 때 인범이 핸들 쪽으로 상체를 붙이며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영인은 인범보다 나중에야 그 차량을 보았다. 터널 벽에 우측 앞등을 박은 차가 차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터널이 어둑해 얼른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무슨 이유에선지 비상등도 켜두지 않아 멀리에서는 흐릿한 후미등 한점으로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었다.
인범은 사고 차 뒤편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어쩌지. 영인과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벨트를 풀고 나갔다. 영인도 인범을 따라나섰다. 시멘트 냄새가 나는 바람에 머리가 흩날렸다. 인범을 따라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인범이 문을 두들기자 조수석 쪽으로 꺾어진 듯 상체를 기울이고 있던 운전자가 휘청대며 등을 세웠다. 인범이 바깥에서 문을 당겨 열었다. 뺨에 검버섯이 핀 노인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영인과 인범을 보았다. 괜찮으냐고 물어도 대답 없이, 난데없는 귀신을 보는 것처럼 그는 낯선 이들을 보고 있었다. 영인은 그의 옆 좌석에 농기구를 잔뜩 담은 궤짝이 놓인 걸 보았다.
인범이 그에게 움직일 수 있느냐고 묻는 동안 영인은 핸드폰을 꺼내 구조대에 전화를 걸었다. 녹투성이 보닛에 달라붙은 젖은 낙엽들을 바라보며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잘 연결되지 않아 다시 버튼을 눌렀을 때 노인이 더듬더듬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낡은 소렌토가 가가각, 소리를 내며 터널 벽을 긁었다.
안 돼.
인범이 문짝을 잡은 채로 몇발짝 끌려갔고 영인은 인범의 허리를 붙들었다. 인범이 문짝을 쥐고 놓지 않으려 해 영인은 겁을 먹었다. 인범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멈춰, 시동 꺼, 끄라고.
노인은 몇번 더 가속 페달을 밟아 차를 움직이려고 애쓰다가 기력이 쇠한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인범이 운전석 안으로 상반신을 들이밀어 열쇠를 빼내는 광경을 노인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간헐적으로 가슴을 부풀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오른쪽 머리 어딘가에서 흐른 피가 관자놀이를 타고 턱 끝으로 떨어졌다. 인범이 자꾸 핸들을 더듬으려는 그의 두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나 봐요. 나 보고 있어요.
영인은 웅웅거리는 제트팬 소음과 바람 소리 때문에 한쪽 귀를 막고 구급대와 통화했다. 터널 이름을 알지 못해 조금 전에 지나온 도시 이름을 말하고 사고차량 번호를 불러주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여러번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통화를 마치고 터널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매우 밝았다. 저렇게 밝은 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어둑한 터널 속에서 사고차량을 단번에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영인은 생각했다. 이 길은 막힌 데가 없어 차들이 빠른 속도로 터널로 들어설 것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뒤에 오는 사람이 제때 속도를 늦추지 못하거나 멈추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영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첫번째 차가 네모난 앞등을 밝히고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멀리 그 불빛 두개가 보였다. 영인은 비상등을 켠 인범의 차 곁에서 팔을 흔들었다. 첫번째 차가 차선을 넘어 그들 곁을 스쳐가며 바람을 일으켰다. 두번째 차가 지나가고 세번째, 네번째 차가 지나갔다. 그들은 멀찍한 곳에서 차선을 넘어 사고현장을 피해 갔지만 다섯번째 차는 아주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지 않았고 옆을 스치며 경적을 길게 울렸다. 영인은 그의 분노를 이해했다. 그리고 방금 지나간 찰나를 이해했다. 그 짧은 순간에 몇번이고 이어지는 충돌을 영인은 보았고 사고로 뒤죽박죽된 몸들을 보았다. 먼저 영인, 그다음 인범과 노인, 다가오는 운전자, 그다음 사람을, 그 연쇄를. 그들 모두가 찰나에 그 가능에서 다른 가능으로, 그 순간이 아닌 다른 순간으로 넘어왔다는 걸 영인은 이해했다. 하지만 다음엔 어떨까.
내가 울고 있나.
영인은 생각했다. 내가 믿고 있나. 지금 지나간 사람과 이다음에 오는 사람을 내가 믿고 있나. 그가 멈출 거라고, 속도를 줄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나. 영인은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이만큼 두려운 거라고 생각했다. 인범은 노인의 얼굴을 차분하게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고 노인은 운전석 바깥으로 두 발을 내놓은 채 인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손을 잡은 인범의 손에도 피가 묻었다.
영인은 팔뚝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인범의 차로 다가갔다.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쩔 수가. 이런 마음으로도 무언가를 일으키거나, 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까. 영인은 운전석 문을 열고 팔을 뻗어 경적을 울렸다. 사람, 있어, 사람. 인범이 이쪽을 흘긋 돌아보았다.
콰아아아.
터널에 굉음이 일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불빛을 향해 얼굴을 돌린 채 영인은 경적을 눌렀다. 바람이 쉼 없이 불어왔다. 터널에 들어선 차들이 실린더 속 피스톤처럼 공기를 밀어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 “여전히 상큼하고 달콤하냐고 묻는 질문 아래 ‘점령과 학살로 뒤덮인 땅에서 자란 딸기, 복숭아, 자몽’”—팔레스타인평화연대가 제작한 팸플릿 ‘비디에스마트’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