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미래를 꿈꾸는 서정시는 현재의 삶을 구할 수 있는가
성현아 成炫兒
문학평론가. 2021년 『경향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공저서 『아직 오지 않은 시』 『한강을 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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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로 인한 지구 멸망의 시나리오는 이제 더는 황당한 괴소문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종말은 우리 곁에 바투 다가온 예측 가능한 결말이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반려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 더해 2024년 말 우리는 45년 만에 다시 계엄을 경험하게 되었고 참사를 반복적으로 목격해야만 했다. 현재 우리에게 일상이란 반복되는 보통의 나날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수호해야만 누릴 수 있는 놀랍도록 운수 좋은 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해답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따져보는 일만큼이나 어떠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것인지, 그 구도의 자세를 설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전력을 다해 살아남되 생존에만 매몰되지 않고서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뒤집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되었다는 한강 작가의 말에 힘을 얻어, 지금 물어야 하는 문학적인 질문을 해본다. 도달하고 싶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미리 체험하게 하는 문학이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는 양경언과 인아영의 비평을 읽었다. 두 평론을 만나면서 미래를 새로이 구축하는 서정과 그에 대한 논의의 갱신이 현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그러한 긍정적인 예측이 극복되어야 하는 낡은 장르로 여겨졌던 ‘서정시’의 가능성을 재탐색하면서 도출될 때, 과거-현재-미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선순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평론가들이 미래로 뻗어간 시가 현재를 어떻게 바꾸어나갈지 논의하며 치열해지는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양경언 「노래가 들리는 곳」
양경언은 「노래가 들리는 곳: 서정시의 변혁성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에서 전운이 감돌고 기후위기가 심화된 현사회에서 삶을 ‘사는 일’이 아닌 ‘살아남는 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더욱 공고해졌음을 지적한다. 그는 생존 이외의 선택지를 차단하여 삶을 죽음의 대타항으로만 사유하게 하고 “더 나은 삶으로의 진전이나 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정치적인 맥락을 비판한다. 살아남기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살 만한 삶을 향한 욕망 자체를 소거해버린다는 분석에 동의하게 된다. 양경언은 “우리 시대가 놓치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구상과 내용”(79면)을 회복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해왔던 분투의 역사를 참조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전환의 노정에서 우리가 다시금 들여다보아야 할 문학형식은 생생한 발화를 통해서 변혁의 비전을 제시해온 서정시라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서정시는 “‘사는 일’을 ‘살아남는 일’로” 축소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80면)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러므로 서정시와 그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갈망하는 다음 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이행의 역량을 고취한다.
가령 양경언은 신경림 시 「상암동의 쇠가락」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대행자의 역할을 하기보다 “지배적인 체제의 승인을 얻지 못할지라도 주관적인 시선을 진솔하게 가꾸어” “같은 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의 편으로 다가가는 태도를 취한다”(84면)고 해석한다. 「상암동의 쇠가락」은 산동네 사람들의 생기와 자력을 존중하면서 그 각각의 삶이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살핀다. 그것은 타자의 고유함을 보편으로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함부로 자아와 동일시하려는 움직임과는 다르다. 양경언은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에 종속시켜 타자성까지 동일화하고 만다는 기존의 다소 도식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주관’을 지킴으로써 ‘대상’을 돌보는 관계를 성립시”(같은 면)키고 이로써 다양한 삶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감각을 길러”(86면)내 생의 전망을 길어올린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서정시에서 발현되는 주관성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뚝심있게 보살피면서 이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노래로 울려퍼지도록 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85면)
양경언의 글을 읽으며 폭압적인 동일시의 토대로 간주되고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온 ‘주관성’이 비대해진 자의식, 혹은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성의 동의어로 취급되어온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자아를 비워내야만 타자를 들일 자리가 존재하리라고 믿음으로써 주관성을 소거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산출해낸 것이 어쩌면 윤리적인 여백이 아니라, 개성적인 목소리들이 지워지고 남은 허무한 공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사유는 한편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인간을 배격하는 일로 귀결되는 흐름을 저지하는 기능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트휴머니즘 담론 및 신유물론이 활성화됨에 따라 ‘인간답게’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휴머니즘적 요청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고 이는 긍정할 만한 변화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도덕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이기도 한 ‘인간다움’을 해체하려 애쓰다 인간이 지닌 타자에의 감응력과, 존엄하게 살아가려는 의지까지 허물 위험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문제적으로 언급되는 문학적 경향을 개선하는 일이 꼭 그것을 소거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서정시가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던 것은 그것이 타자를 자아(화자)로 수렴시키는 장르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라는 테제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그간 서정적 경험이란 객체에 대한 주체의 일방적 동일시로 이해되어온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에게 침투(interpenetration)하여’1 동화되는 과정에 가깝다. 시적 자아에 부여되는 과도한 권력을 해결하기 위해 다성성, 분열적 주체 등을 고안해왔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서정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재논의해볼 만하다.
더불어 김승희의 시 「호텔 자유로」에서 자아가 세계와 이미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 한 양경언의 해석을 살펴보자. 꽉 막힌 자유로에서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시적 자아의 감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밀고 가는 자유”를 수행했던 전봉준의 의지와 “공습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간절함과 맞닿는다.(88~89면) 물론 이같은 연결 역시 화자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창출될 때 여전히 자아가 우위에 놓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는 점은 더욱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화한다는 식의 단선적인 이해가 세계와 자아를 분리하여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었음은 확실해진다. 습관적으로 전제되는 이같은 대립 구도는 자아가 역사성과 계급성, 사회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진공 상태의 개인처럼 느껴지도록 종용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에서 “만인의 몸짓”(89면)이 감지되고, 각자의 바람이 여러 존재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는 이유는 자아라는 단위가 근본적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자아의 일방적인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양경언이 말했듯 ‘누가 말하는가’를 ‘누구와 함께 말하는가’로 바꾸어 쓰고 ‘누구와 함께 나아가는가’로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미래를 불러들이는 서정시는 현재를 구하는 노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인아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인아영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역시 지극한 주관성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인아영은 실제 현실과 거리가 멀다 해도 분명히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내면의 풍경을 말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해 “내 마음이 바라보는 풍경으로부터 현실을 이해”하고 “꿈속의 장면으로부터 거꾸로 세계를 재구성”(111면)하는 방식이 2020년대 한국시에서 자주 목격되는 조류라고 이야기한다. 화자의 마음과 세계를 일치시키고 그 세계를 믿기로 결심하여, 현실의 논리에 근간한 사실주의적 접근보다 내면에서 출현하는 세계 및 그에 대한 애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성을 인아영은 ‘내향성’이라고 명명한다.
인아영의 적극적인 해석에 보태어, 시적 세계의 협소화, 비개연적이고 자의적인 세계관, 현실감각의 결여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최근의 시편들이 독해될 때의 효과를 덧붙여 논의해보고 싶다. 시인-화자가 꿈꾸는 환상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마음껏 탐닉하고 그 내밀한 세계관을 자세히 정립해나가는 2020년대의 시가 펼쳐 보이려는 것은 자기유폐적인 망상이 아니다.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와 같은 거대한 시류 앞에 일상이 무너져가는 현시대에서 개인적인 노력이나 개개인의 영향력에 대한 믿음은 거의 소멸한 상태다. 모종의 개별적 행위가 어떤 변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 어려운 때, 이와 반대로 ‘나’라는 개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나’의 마음에 따라 세계가 구축되는 최근 시의 방식은 독자에게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매력적인 세계의 주조 원리가 된다.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원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꿈꾸는 일이 그 가능성과 무관하게 가치롭다는 판단이자, 극도의 주관성을 응원하면서 자기만의 특수성을 가꾸고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독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일 것이다.
인아영은 이러한 내향성의 성행이 “서정적 아름다움의 귀환”이거나 “현실과 긴밀하게 연루된 시적 흐름에 대한 반동”(같은 면)일 수 있겠다고도 이야기한다. ‘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이성중심 세계의 논리에만 얽매이지 않겠다는 저항의 움직임으로도, 서정의 창조적 계승으로도 보인다는 말이다. “‘미래파’의 실험적 성격보다는” “서정의 계보에 한층 가까운 느낌”을 주는 미래파 이후의 시 경향성을 ‘서정의 귀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최근의 서정이 지닌 차별성을 희석해버릴 위험이 있어 동의하지 않는 고봉준 평론가 역시 그러한 경향성이 시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서정의 역사성과 가능성을 환기할 수 있음을 긍정한다. 그는 서정이 시인의 진솔한 감정표현 정도로 환원되는 일을 경계하면서 서정시의 정서적 호소력은 시인의 자기고백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이 시인-개인”이라는 주관성을 지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 그러므로 서정적 주관성 역시 개인사로 한정되지 않으며 공동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확장성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필자 역시 201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시적 경향이 억압적 동일시로 퇴행하거나 과거의 유행이 되돌아오는 흐름이라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시인과 화자의 분리와 시적 주체의 분열을 전제하는 시가 주류였던 시기를 거쳐, 가상이라 하더라도 속아주고 싶은 단일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화자-시인-시민’이라는 하나의 통합체를 확인하고 싶은 갈망에 대한 새로운 응답으로 보인다고 해석한 바 있다.3 박소란의 시들을 분석하며, 서로의 안녕을 묻는 모두가 헤어짐 없이 평온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에서만큼은 선명하게 그리고 실현시킴으로써 불가능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 변화된 서정의 방식일지 모른다고 추측했었다. 이처럼 내향성이자 달라진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시를 쓰고 읽는 일은, 각자의 주관을 지닌 개인이 공통된 미적 경험으로 만나 변혁의 주체로 기능할 수 있다는, 행여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최소한 소망해볼 수는 있다는 역능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과정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가 보여주는 내향성은 혼란한 세계를 등지고 자기폐쇄적인 몽상으로 잠기고자 하는 소극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자아의 주관적인 체험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현실적이지 않기에 무시당하곤 하는 내밀한 세계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하고, 타자인 독자 역시 시와 시에 드러난 주체 내부에 접속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어쩌면 새롭고도 낯익은 얼굴의 ‘환상적 서정’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인아영은 현대예술에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미적인 것’은 종말했다고 하더라도, 미적이라는 감각 자체는 “보편성에 대한 예감”을 지니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자기동일성으로부터”(112면) 벗어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주관적인 감상에 가까운 특수성을 지향할 때도 여전히 다른 이들 또한 이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예감은 남는 것이다. 인아영의 논의는 주관성이 보편성 및 객관성과 대립하는 성질이라기보다 타자에게 있을 주관성을 함께 인지하게 만들어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보편, 객관과 연루된 특성임을 생각하게 한다.
『문학동네』 3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문학비평 키워드 1994-2024’ 특집에 속한 이 글에서 인아영은 미학성에 초점을 맞춰 감성적인 자질로서의 ‘미적인 것’이 한국문학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발전되어왔는지를 톺아본다. 이때 인아영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시편들에 나타나는 미적 범주를 ‘귀여움’(cuteness)으로 명명한다. 귀여움이란 대상이 되는 사물의 위험성을 제거하고 무해하게 만들어 소비하려는 욕망에 근거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증상적인 미감이지만, 자본가치로 환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존재를 교환논리에서 지켜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성이 2020년대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진단에 동의하지만, 이를 ‘귀여움’으로 범주화하는 것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단어가 본래 지니고 있는 약소한 뉘앙스가 부각되면서, 애정하는 대상 혹은 세계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게 수호하는 소극적인 대응만이 지금의 시가 지닌 정치성인 것처럼 축소되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귀여움과는 다른 결을 지닌 동시대 미학적 경험의 한축으로 ‘언캐니’(uncanny)를 꼽는다. 방대한 데이터가 쏟아지는 시대에 달라진 인지방식을 반영하여 “자동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응답하는 기계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시편들은 독자에게 “무언가 비인간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끼어”(115면)드는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비확정적인 상태에 걸쳐 있으므로 “미래에 대한 열려 있는 감각을 동반”(116면)하는 시는 우리가 인간이기를 그만두거나 인간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질문하게 한다. 이러한 논의는 주관적인 미적 체험이 결코 ‘타자를 향해 열려 있음’과 대립하지 않으며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맞이하고 싶은 미래세계와 되고 싶은 미래상을 집요하게 꿈꾸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일은 반대로 그러한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에서 중단되어야 할 것들을 비추면서 지금-여기를 구한다. 바라는 세계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 서정시는 현재로 온다. 이것이 서정의 귀환인지 지속인지, 창조적 계승인지 변혁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새롭게 쓰이는 우리의 미래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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