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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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백낙청 외 『세계적 K사상을 위하여』, 창비 2024

지금 왜 한반도 개벽종교 공부가 필요한가?

 

 

김용휘 金容暉

대구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not-tw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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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무너진 삶을 두달 넘게 살고 있다. 이번만큼 정치적 사건이 신체적 통각으로까지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마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와 안삼환의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솔 2024)를 읽은 지 얼마 안 된 탓인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두 소설은 모두 극우적 광기가 가져온 국가폭력과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다루고 있다. 게다가 지금 우리 시대는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생태계의 절멸적 위기, 신자유주의의 승자독식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 그리고 각자도생의 미친 경쟁교육으로 인한 정신적·도덕적 빈곤 상태를 상시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한편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낳은 불평등이 세계화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이는 가진 자와 자본에 대한 대항보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와 여성·소수자·이주 노동자·난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 배제와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양상이다. 분단체제인 우리 사회의 경우 이것이 반공·반중 정서와 결합되고, 다시 광신적 세력과 만나 극우 파시즘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엄중한 시기에 왜 한가롭게 종교공부인가, 그것도 왜 한반도의 개벽종교를 공부해야 하는가?

『세계적 K사상을 위하여: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2』는 백낙청 선생이 여러 전문가들과 진행한 대화를 풀어서 2024년 2월 출간한 『개벽사상과 종교공부』(창비)에 이은 두번째 책이다. 첫 책에서는 동학, 천도교, 원불교 등 한반도 개벽사상의 출발과 확장을 살피고 그 변혁운동적 성격을 확인하는 한편, 개벽과 기독교 신학을 접목하려 했던 한국의 토착신학자들도 소개하고 있다. 이번 책은 그에 이어 개벽종교의 시대적 가치와 세계화의 가능성에 대해 더욱 심도있는 논의를 펼친다.

먼저, 1장 「세계종교에 담겨 있는 개벽사상」은 비교종교학의 세계적 석학인 오강남과의 대담으로 동학과 개벽사상의 의미를 보편적 종교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오강남은 개벽이 ‘궁극적인 변혁을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면, 종교 전반에 존재하는 공통 요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도 개벽과 유사한 개념이 존재한다. 흔히 ‘회개’로 번역되는 메타노이아(metanoia)의 개념도 단순한 회개가 아니라 근본적인 의식개혁, 정신개벽을 의미한다. 오늘날 기독교를 비롯한 세계 종교들은 기복적이거나 표층신앙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표층신앙을 넘어 심층신앙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내적이고 심층적인 회심(回心), 즉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한다. 오강남은 종교가 서로 다른 교리로 다툴 것이 아니라 협력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에 백낙청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종교간 대화가 아니라 라이몬 빠니까르(Raimon Panikkar)가 언급한 ‘종교 내적 대화’를 통해 서로의 깨달음이 높아지고 깊어지는 대화라고 화답한다. 우리가 종교를 깊이 공부해야 할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이 외적 대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속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성령(聖靈), 성신(聖神)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데 두 석학은 의견을 같이한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을 각자가 자신의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와도 결을 같이하여 K종교와 만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백낙청은 개벽적 사유가 모든 종교에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개벽종교와 기성 종교의 차이점에도 주목해야 하며,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동아시아 신학을 창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개벽사상에서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두 사람의 고품격 대화를 통해 오늘날 종교가 세상을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종교의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2장 「물질개벽 시대, 유교의 현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는 유학 연구자 백민정과의 대담이다. 백민정은 유교적 근대성론을 비판하면서 가부장적인 질서와 신분차별, 위계적 상하관계로 고착된 예치질서를 벗어나지 못한 데서 전통유학의 한계를 찾고 있다. 반면 동학은 유교의 민본성을 대중적으로 구현한 사상이며 특히 해월의 향아설위(向我設位)는 ‘예’의 근본정신을 돌이키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평가한다. 한편 백낙청은 기존의 유학자들이 동학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원불교의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과 다른 점은 바로 물질개벽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던 것이라고 언급한다. 특히 원불교는 물질개벽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통찰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을 이룩하자는 게 핵심이며, 물질개벽에 대한 공부가 빠지면 결국 고담준론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鼎山)의 도치(道治)·덕치(德治)·정치(政治) 이 세가지 다스림이 같이 가야 함을 소개하는 부분과, 정산의 ‘건국론’에 대한 언급이 인상적이다. 이에 백민정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교가 현대적 가치를 띠며 제대로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유학의 중요한 자산들, 즉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 선한 가능성과 배움의 가능성을 잘 살리면서도 수운과 소태산이 깨달음을 통해 도달한 경지와 합쳐져야 한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3장 「K사상의 세계화를 모색하는 원불교」는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총장인 전도연 교무와 나눈 대담이다. 이전 책 『개벽사상과 종교공부』에서 원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자상하게 소개했다면, 여기서는 개벽종교인 원불교가 불교와 융합하면서 어떻게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는지를 논한다. 특히 원불교 사은(四恩)의 의미를 백낙청이 네가지 은혜(Four Graces)라기보다 네겹의 은혜(Fourfold Grace)로 번역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전도연은 사은 신앙은 개인의 마음의 평화에서 시작하여 개인·가정·국가·세계의 평화를 만드는 근본이라고 강조하면서,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는 것이 원불교 신앙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사은에 대한 해석을 들으면서, 이는 동학의 ‘천지부모’나 ‘경물(敬物)’,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사유와도 상통하면서, 우주만유가 ‘모심’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시천주의 근본사상과도 연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장 「인간해방의 논리와 개벽사상」은 만화가이자 백낙청TV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보현과 나눈 대화로, 1979년에 간행된 백낙청 평론집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합본개정판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에 이미 개벽적 사유가 엿보인다는 점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인류 역사를 이끌어온 위대한 종교의 가르침들도 모두 인간해방을 내세운 것이었으며, 개벽사상의 실천은 결국 진정한 자기해방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제기한 서양 형이상학의 극복문제를 ‘복수(復讎)로부터의 해방’으로 논한 부분도 흥미롭다.

보론 「하이데거와 후천개벽사상의 만남」은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고명섭과의 대담이다. 이 장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하이데거가 니체의 ‘초인(超人)’을 허무주의가 극단에 이른 기술시대의 인간상으로 이해하면서, 이 기술시대를 제대로 감당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인간은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다고 진단한 지점이다. 그러면서 이 지구의 “주인노릇 하고 왕노릇 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고, 더 겸허하고 더 평범한 삶을 살더라도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하이데거 표현에 의하면 ‘존재의 부름’을 경청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존재를 불러내려고 하는 사람”(260~61면) 즉 인간중심주의의 오만을 떨쳐낸 ‘빈 중심’으로서의 인간을 논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이 책의 미덕은 이 땅이 산출한 개벽사상이 세계적 수준일 뿐 아니라, 이 시대의 복합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소중한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잘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종교 내적 대화’를 통해 종교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백낙청이 서문에서 언급하듯 “우리 시대의 누구나에게 권할 만한 일종의 국민교양서”(5면)로서 성공적인 책이라고 본다. 다만 개벽사상에 합당한 새로운 주체,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 다뤄지지 못한 점은 아쉽다. 물질개벽의 공부는 결국 자본주의의 폐해가 초래한 근대문명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넘어서는 공부이다. 따라서 개벽사상에 입각해서 어떻게 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 정치·경제는 물론 교육·노동·복지 그리고 여성·농업·과학·기후와 에너지 등 각 분야에서 구체적인 비전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1947년 천도교 청우당에서 통일국가의 비전으로 내놓은 ‘조선식 신민주주의’, 그리고 정산 종사의 ‘건국론’에 대해서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갈수록 천박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정신적·도덕적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시대의 위기를 돌파하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이 책의 내용을 깊이 연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김용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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