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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관후 『압축 소멸 사회』, 한겨레출판 2024

소멸의 위기 앞에서 정치를 묻는다

 

 

조형근 趙亨根

동네 사회학자 remineur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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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1일 기준 한국의 주민등록인구는 5121만 7천여명으로 2020년 이래 5년째 감소하고 있다. 감소 속도는 갈수록 빨라질 것이다. 인구통계학자 폴 몰런드(Paul Morland)는 최근작 『최후의 인구론』(이재득 옮김, 미래의창 2025)에서 인구감소라는 재앙을 다루면서 위기의 전형으로 한국을 꼽는다. 앞으로 두세대 만에 한국 인구의 84%가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막상 초저출생, 세계 최고 자살률, 가속화되는 지방소멸 같은 뉴스가 한국사회에서는 그리 충격적이지 않다. 위기는 이미 정착해버린 현실로 여겨질 뿐이다.

사회는 냉소하고, 정치는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반응성을 잃었다. 정치학자 이관후는 이 책 『압축 소멸 사회』에서 우리가 ‘대한민국 공동체’의 소멸로 향하는 임계점을 이미 넘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기댈 유일한 희망은 ‘정치’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정치 말고는 출구가 없다고.

한국이 직면한 이 압축소멸의 위기는 지난 수십년간 성취한 ‘압축성장’의 결과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결과이기에 성공의 방정식이라 믿어온 기존의 경로를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경제성장, 민주주의, 문화적 성취 등 한국이 거둔 성공은 예외적으로 눈부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성공의 정점에서 “한국은 자살을 결심”한 것처럼 보이고, “더 이상 공동체를 지속시키지 않기로 결정”(43면)한 것처럼 보인다. 왜 이런 기이한 일이 일어났을까? 요컨대 저자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앞으로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압축소멸은 희망소멸의 다른 이름이며, 희망소멸은 정치소멸의 다른 이름이다. 이 책 전체의 주장이 이러한 삼단논법, 즉 ‘정치가 없으면 희망이 없다. 희망이 없으면 압축소멸한다’로 요약된다. 이 삼단논법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먼저 희망소멸의 일단부터 살펴보자. 1990년대 출생자를 기준으로 대기업·공공부문 신규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는 사람은 10% 남짓에 불과하다. 나머지 “90%의 청년에게는 ‘실패’가 예정”(46면)되어 있다. 10%의 좋은 일자리와 나머지 일자리 사이에 불평등이 너무 크다. 일단 비정규직으로 출발하면 그 처지를 벗어나기 어렵다. 더욱이 이 각자도생 무한경쟁 사회에서는 승자인 10%조차 행복하지 않다. ‘공정한 경쟁’은 더는 대안이 아니다.

희망 잃은 이들 중 누군가 스스로 삶을 마친다.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급속히 상승한 한국의 자살률은 2000년대 초부터 오래도록 OECD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특히 출생률과 직접 관련이 있는 10~30대의 자살률은 지금도 계속 높아지는 중이다. 한국은 ‘자살이 많은 나라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공식이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다.

압축소멸은 지방소멸에서 가장 적나라하다. 지방에는 좋은 일자리도, 문화·보건 인프라도 없다. 지방을 살리자며 공항을 짓고 도로를 놓으면 진보진영에서는 환경파괴라고, 보수진영에서는 예산 낭비라고 비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균형은 잡자. 인천공항의 활주로 증설 역시 환경을 파괴하지만 진보진영은 지적하지 않고, 서울 집중화에서 발생하는 낭비를 보수진영은 따지지 않는다. 이미 서울·수도권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정치권력도 그만큼 수도권에 더 집중됐다. 프레임 자체가 서울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제 “서울 사람들에게 지방은 풍경”이다, 인도네시아의 발리나 베트남의 다낭처럼(105면).

“소멸을 막을 책임, 소멸 속도를 조정할 책임은 전적으로 정치에 있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갈등을 조정하는 정치 자체가 소멸해 버렸”(136면)다. 오늘날 정치에서는 대화와 설득도 없고, 옳고 그름에 대한 성찰도 없다. 상대는 반칙하는데 왜 이쪽만 룰을 지키느냐는 항변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대신한다. 그렇게 정치가 사라진다. 정당의 풍경은 폐허에 가깝다. 검찰공화국을 탄생시킨 여당 국민의힘에서는 민주주의가 아예 사라졌고, 더불어민주당도 야당 탄압 비판 프레임을 넘어서지 못했다. 저자 이관후가 지적하듯 저출생, 고령화, 수도권 집중, 지방소멸, 청년의 미래, 기후위기, 교육개혁, 일자리 문제를 놓고 사생결단의 정책 대결을 벌이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책이 논하는 주제는 이외에도 많다. 정당에서 가치와 노선 경쟁이 사라지자 왜 정치마저 사라지게 됐는지, 진보정당은 왜 독자적인 지지층을 얻지 못하고 원외로 몰렸는지, 우리가 고민해야 할 여러 의제가 진지하게 검토된다.

저자는 정치의 복원 말고 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민주주의자로서의 품격과 공동체 전체에 대한 책임을 가진 정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그래도 정치가 스스로 복원되지 않는다면? 시민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공론장을 만들고 새로운 미디어도 만들어야 한다. 정치혐오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정치의 만연이 아니라 정치의 부재가 문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 그 자체”(232면)인 것이다.

저자는 정치를 “국가가 당면하거나 미래에 준비해야 할 주요한 일에 대해, 문제 해결의 비전과 방식을 달리하는 정치적 세력 간에 일어나는 경쟁과 협력”(78면)으로 정의한다. 특히 ‘경쟁과 협력’에 방점이 찍히는데, 내게는 이것이 기존 정당정치 차원에서의 ‘경쟁적 협력’ ‘협력적 경쟁’으로 읽혔다. 기성 정치세력의 역할에만 주목하기보다는 그 바깥으로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그리하여 ‘불화’를 도입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고 믿어온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접근방식이다. 결론의 추상성이 다소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분석과 주장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긋고 별표를 여러개 달았다. 무엇보다 정치가 ‘잘 듣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협력이 불화를 배제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불화에 대한 지지 역시 협력에 대한 고민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얼마 전 학자의 자리에서 국회입법조사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뒤 곧바로 계엄을 빙자한 내란이 터졌고, 그는 경찰을 뚫고 국회의 담을 넘어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한몫을 다했다. 이 내란의 태풍을 건넌 다음, 정치에 대한 저자의 성찰이 제도 속으로 좀더 깊이 투영될 수 있기를 바란다. 참으로 정치 말고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