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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석영중 『눈 뇌 문학』, 열린책들 2024
눈길에서 눈길로
류신 柳信
중앙대 유럽문화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pons@cau.ac.kr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작업과정을 이렇게 비유한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의 단계.”(『일방통행로』, 1928) 부연하자면 글 전체를 주도하는 창의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글의 줄거리를 유기적으로 구성하고 그에 부합되는 텍스트를 짜 맞춰나가면 ‘좋은 글’을 탈고할 수 있다는 말인데, 러시아문학 전공자 석영중 교수의 『눈 뇌 문학』이 그 실례로 읽힌다. 그럼 이 책에서 구축된 세 계단을 찾아보자.
계단 1. 이 책은 시각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원대한 서사다. 문학전공자로서 쓴 난해한 학술이론서나 작품해설서라기보다 인문학자로서 작가의 펜을 빌려 창조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각과 인지를 매개하는 눈〔目〕이라는 기관이 인간 지식의 근원이라는 가정 아래, 고생대 바다생물 삼엽충의 눈에서부터 인간의 눈을 거쳐 신의 눈에 이르기까지 ‘시각의 인류문화사’를 흥미로운 이야기로 전달하는 박학다식한 문필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다. ‘눈의 탄생’을 추적하기 위해 돛을 올린 지적 모험은 ‘진리를 보는 눈’이라는 종착점에서 닻을 내린다. 태고에서 AI 시대에 이르는 장대한 시공간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시각의 대서사’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선율은 간명하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본다.”(23면)
계단 2. 이 책은 지적 쾌감을 선사한다. 6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지만 한번 붙잡으면 놓기 어렵다.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에서 모종의 극적 긴장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이야기가 농밀한 짜임새를 갖추려면 기승전결의 흐름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 책은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시각의 독보적 탁월성을 초학제적으로 설명한 제1장 ‘인간의 위대한 눈’은 책의 서곡으로, 시각의 상실이라는 주제를 다룬 제4장 ‘실명’은 간주곡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전자는 시각의 문화사를 추적하는 “장거리 여행을 위한 준비 운동”(124면)에, 후자는 이 대장정에서 “한숨 돌리는 의미의 막간극”(377면)에 해당한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1장과 4장을 차치하면 나머지 4개의 장은 기승전결의 창작원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제2장 ‘눈의 윤리’는 눈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발단이다. 여기서 저자는 태초에 생존과 포식을 위해 생겨난 눈에 잠재된 반윤리적인 시각성, 즉 타인을 노예로 포획하는 시선,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는 시선, 타인을 사갈시(蛇蝎視)하는 시선,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시선, 인간을 감시하는 시선 등을 ‘시선의 윤리’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결부해 설명한다.
제3장 ‘실재와 환상’에서는 앞장에서 발아된 문제의식이 여러 갈래로 가지를 치며 자란다. 저자는 뿌시낀, 도스또옙스끼, 체호프, 디킨즈 등 고전문학에 나타나는 불안, 질병, 중독 등이 초래한 다양한 시각현상들, 즉 꿈, 환각, 환시, 섬망 같은 “가상 현실의 윤리”(249면)를 집중적으로 살핀다. 특히 체호프의 단편 「검은 옷의 수도사」에서 주인공이 겪는 섬망을 분석함으로써 ‘인간은 눈이 아니라 뇌로 본다’는 책의 명제를 입증하는 저자의 핍진성이 돋보인다.
제5장 ‘창조하고 감상하는 눈’에서는 참신한 전환이 이루어진다. 인간은 환상을 체험하는 피동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발적으로 환상을 창조하고 그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임이 부각된다. 저자는 시각의 가장 고차원적인 기능인 “능동적인 환상 창조”(417면)의 실례로 착시, 왜상, 원근법, 역원근법 등을 설명한 후, 문학(문자)과 회화(이미지)의 상호매체성을 해명하는 데 집중한다. 예컨대 큐비즘의 다중시점 원리가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학에 어떻게 침투했는지, 미래주의 회화 문법이 마야꼽스끼 시에 어떻게 수렴됐는지, 그리고 똘스또이, 고골, 도스또옙스끼 문학에 나타난 그림에 대한 언어적 재현(ekphrasis, 에크프라시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득력있게 분석한다. 아울러 보이는 현실에 짓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투시하는 위대한 견자(見者)들의 예술작품도 소개한다. 이 책에서 단연 압권으로 평가되는 부분이다.
제6장 ‘신의 바라봄, 신을 바라봄’은 책의 내용 전체를 묶어서 여운이 깃들도록 마무리한다. 삼엽충의 눈에서 시작된 여정이 사악한 눈, 병든 눈, 계몽의 눈, 창조의 눈을 거쳐 “영혼의 눈”(595면)으로 귀결된다. 저자는 인간을 향한 신의 눈길과 신을 향한 인간의 눈길이 조응할 때 ‘영혼의 눈’이 빛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신의 눈은 곧 사랑과 생명을 상징한다. 따라서 신의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회와 구원의 종교적 표식이자, 공존과 연민의 윤리적 각성이다. 결국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상대방의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상호 이해의 궁극은 사랑이다. 이 책의 결론은 신의 나라를 여행하는 단테가 원동천에 올라 신의 실체를 목도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저자가 단테의 『신곡』 「천국」편의 다음 구절을 책의 모토로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그 깊숙한 곳에서 보았다. 사방으로 흩어진 우주의 조각들이 한 권의 책 속에서 사랑으로 묶인 것을.”(5면)
계단 3. 저자는 텍스트 직조의 장인이다. 인접 학문의 선행연구 문헌에서 직간접으로 인용한 텍스트들과 이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맥락에 따라 씨줄과 날줄로 엮는 길쌈 솜씨가 남다르다. 요컨대 이 책은 방대한 인용문들의 정교한 모자이크다. 자연과학(생물학·광학·신경과학·인지과학 등)과 인문과학(문학·철학·신학·사회학·심리학 등)을 심층 횡단하는 통섭적 상상력도 인상적이다. 아울러 러시아문학뿐 아니라 세계문학을 망라하는 혜안, 인류 지성사를 통찰하는 식견, 예술 장르(문학·미술·음악 등)의 경계를 넘나드는 심미안을 통해 이 책의 텍스트가 촘촘히 짜인다.
발견한 계단을 따라 『눈 뇌 문학』의 내부로 들어가면, 책의 심연에서 미지의 섬광이 보인다. 이 빛을 ‘책의 영혼’ ‘책의 눈짓’이라고 부르고 싶다. 책이 세상에 타전하는 이 눈길에 이제 우리의 눈길이 응답할 차례이다. 괴테의 시 「눈길에서 눈길로」(Blick um Blick)를 이 책에 헌정한다. “나 오직 이 두 눈 속에 살고 있기에/너는 내게 준다. 내가 네게 주는 것을./다 주어버려 나는 아주 없어진 것 같은데/지금 나는 늘 새롭게인 듯 태어났다.” 그렇다. 시선이 교환되는 접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