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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승윤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문학동네 2024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최지인 崔志認
시인 youngerpoet@nate.com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것. 안 보려고 하는 것. 오늘날 진보라고 불리는 기술발전의 끝에는 소외된 인간이 있다.
기술은 누구에게 복무하는 걸까. 기술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왜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불안정해지는 걸까. 많은 전문가가 앞으로도 세상이 빠르게 변화할 거라고 내다보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말해주는 이는 별로 없다. 마치 멈추면 쓰러지고 마는 외발자전거에 탄 것 같다. 가령 플랫폼노동처럼 기술발전이 마련한 새로운 노동의 양상은 노동자를 보호의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다. 전통적인 고용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노동자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노동하는 것처럼”(10면) 보이지만 플랫폼의 통제 아래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불안정성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꿰뚫는 핵심어이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체제에 갇혀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기에 이르렀다. 표면적으로는 자율적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억압의 시스템에 더욱 종속돼간다. 바로 서기 위해서는 바로 봐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은 다양한 노동과 노동자를 바로 보게 돕는 책이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은 서로 연결돼 다양하게 관계 맺는다. 불안정노동은 이미 일상에 깊이 파고들었다.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에 수많은 노동이 깃든 것처럼. 그렇기에 누구든 박해자가 될 수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란 참 묘연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삶을 걸고 일하는 노동자들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어떤 노동이 우리의 편의를 위해 희생되고 있는지, 그 실체를 더욱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41면)
저자는 오늘날을 “노동자의 일이 전통적인 정의에서 벗어나고 기존의 제도가 한계를 드러내는 불확실한 시대”(61면)라고 진단한다. 소득과 시간이 모두 빈곤한 ‘이중빈곤자’는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환경에 처해 있다. 그가 제시한 비표준적이고 비전형적인 노동 형태인 ‘액화노동’(melting labour)이라는 개념은 일의 방식, 일터의 범위, 노동시간 등 변모하는 노동의 속성을 드러낸다. 구체적으로는 새벽배달 노동자, 가짜(종속적) 자영업자, 외주화된 청소노동자, 겉으로는 휘황해 보이는 유튜버나 크리에이터 등이 모두 이러한 액화노동에 속한다.
경쟁을 강요받는 한국사회는 겉으로는 선택지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경쟁하거나, 새 판을 짜거나. 그에 따른 책임은 개인의 몫이다. 성공과 실패는 손바닥의 앞면과 뒷면처럼 달라붙어 있다. 승승장구하는 사람도 실수하면 언제든 빈곤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 가령 예기치 않은 질병은 실수로 여겨진다. 사회가 제공해야 하는 안전망인 사회보장제도는 구멍 나 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자유와 공정이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돼 널리 퍼졌다. 세계화는 우리를 착취의 공모자로 만들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노동자는 쓰러진다. 이 책의 2부에서는 특히 이러한 산업재해와 질병, 해고와 빈곤 문제를 파헤친다.
이 책은 무엇보다 빈곤과 노동에 관한 기존의 서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일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나타나는 불안정성에 주목한다. 노동자는 불안정성으로 인해 이쪽저쪽으로 쉽게 미끄러진다. 정체성이 희미해진다. 많은 이가 노동자로 살고 있지만 자기를 노동자로 여기지 않는 이유이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기존의 통계나 숫자로 포착되기 어렵다. 저자는 숫자 뒤에 있는 ‘현실’을 지나치지 않는다. “이론은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도구일 뿐”(167면)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말처럼 “무지를 자각”(174면)하는 것은 변화의 첫걸음이다.
한국경제는 팽창하는 때를 지나 수축하는 시기로 들어섰다. 국가는 민생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기업 쪽에 선다. 에드워드 싸이드(Edward Said)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 쪽에 서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이다. 지식인에게는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억압에 저항할 책임이 있다. 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 책을 읽으며 인상적인 것은 저자 이승윤이 그러한 능동적 참여자이자,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먼저 살피는 연구자라는 점이다. “모순과 간극을 인식”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연구의 본질”(212면)이라며, 두 발을 땅에 딛고 세상을 바라본다. 4년제 대학에 소속돼 일하는 본인과 불안정노동을 하는 연구 대상자의 계급격차를 자각한다. 이는 그가 끊임없이 자기를 의심하고 점검하는 동력이 된다. “연구자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계의 일상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187면) 하는 질문은 문학인인 내게도 오래된 화두이다. 자기성찰이야말로 인문학자로서 갖춰야 하는 태도임이 틀림없다. 연구 대상자의 “삶을 대변하지도, 전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한다”(207면)는 사실을 인정할 때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세대를 단순히 세대론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는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다. 계급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청년 집단 내의 양극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내부의 복잡성을 이해한 뒤 따라오는, ‘변화하는 노동시장에서 다양한 고용형태로 일하고 있는 청년들은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청년세대는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청년노동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특히 청년에게서 계급을 지우지 말 것을 당부하는 이 책의 3부가 작은 실마리가 되어줄 듯하다.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상상력은 질문하게 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 틈으로 빛이 새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