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이가인

이가인 李佳仁

숭실대학교 영화예술전공 4학년. 2000년생.

plenilune_0@naver.com

 

 

 

명랑함을 가져보라고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 날에는

슬픔이 가진 장악력을 믿는다

어린아이처럼

 

사거리 도로 한가운데

모두가 나를 본다 나만 사랑한다 믿으면

 

펭귄처럼 걷게 된다

전봇대가, 어지러운 간판들이 하나같이 귀여워진다

 

차들은 멈춰서고 타이어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멀리서 주차 안내요원이 뛰어온다

사방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좋아서 잠자코 서 있다

분노가 내는 다정한 불협화음

 

나를 데려가주세요

순순히 손 내밀기

아니면 손들고 걷기

 

언젠가 들은 적 있지

거리에서 사슴을 보면 멈추지 말고 쳐버려야 한다

 

눈이 마주쳤어도?

 

심장이 덜컥 흔들렸다고 해도

갑자기 뛰어든 생명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니

 

나는 사슴도 아니고

펭귄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기도 아닌데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이 믿는 말이지

 

질투를 하는 사람의 눈은 멀어버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던데

 

앞을 보지 않는 내가 차를 향해 손을 흔든다

 

미움도 사랑도 독차지하고 싶다

소리 없는 울음이 도로를 정체시킨다

 

 

 

가끔 영화를 보다 잠이 든다

 

 

거긴 내 자리예요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영화관에 앉아 있지만

 

무언가 시작되면 잠이 온다

빛나는 거미줄이

눈꺼풀을 아래로 잡아당긴다

 

영화 속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눈을 감은 사이에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떠났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사람들은 몰래 입을 맞추고 알람을 끄고

손톱을 물어뜯고 신발 끈을 묶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검은 화면에서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

 

내가 이걸 보려고 왔던 것 같아

기억나지 않는 장면을 붙들고 별점을 매겼다

 

가끔 잠에서 깨면

꿈에서 본 것들이 영화였기를 바란다

 

바다에서 고양이랑 나랑 살고 싶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물이 흐르는 거리

 

우리 지금 너희 집 앞에서 헤엄치고 있어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사람들이 잠든 바다

웅크린 고양이가 넘실거리는 바다

저 멀리서 파도가 흰 천을 벗어던지고

달려들었다

 

반짝이는 빛들은 저마다 혼자였고

손을 뻗으려고 하는 순간

영화관 안으로 파도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람들은 내가 놓친 장면만을 궁금해했다

영화가 어땠냐고 물으면

 

나 아까 저기서 고양이를 봤어

말했다

 

 

 

노크식 젤펜 3개입

 

 

노크를 하는 사람보다 노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과 만날 확률이 더 높다. 오늘은 이것을 가능성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가능성과 기능성. 겨울마다 장터에는 기능성이 등장했다. 기능성 패딩과 기능성 방한 내복. 따뜻함으로 무장한 물건들. 돈만 내면 내 것이 될 온기들. 그러나 행거에 걸린 패딩은 차가워. 손이 시릴 때면 아무 손이나 덥석 붙잡고 싶어진다. 아직 어린아이라면 할 수 있다.

 

어른의 심장은 뜨겁지만 눈빛은 차게 식었지. 숨을 쉬면 입김이 나온다. 숨을 안 쉬면 세상이 새까매지고. 온도의 단순한 등가교환이 좋다. 아지랑이. 무언가 흩어지는 모양이야. 아주머니.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한숨 쉬고 그러면 안 되지. 힘껏 한숨을 쉰다. 씩씩해진 마음으로.

 

걸을래? (다정해 보인다)

걸어. (재수 없어 보인다)

걸어주세요. (간절해 보인다)

ㄱ? (말 섞고 싶지 않다)

 

부탁하는 자세를 생활화하세요. 과거의 절망, 과거의 열망, 과거의 희망, 과거의 도망, 과거의 소망, 과거의 피망, 과거의 폭망, 과거의 과거의 과거까지. 한해가 지날수록 과거는 얼굴이 무궁무진해. 무럭무럭 잘한다. 과거의 이웃은 나에게 유창한 소음을 제공해주었다. 만나본 적 없는 얼굴을 생각하면 찌그러진 계단들이 저벅저벅 머릿속을 걸어다녔다. 뛰어다녔다. 당신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잠도 잘 수 없어요. 온종일 당신 생각만 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내가 해본 가장 멋진 고백. 그 사람 목은 두꺼운 나뭇가지 같아요.

 

 

 

이열치열

 

 

열대우림에서는 무슨 결심을 해야 하나.

 

남자의 핏줄 선 두 발. 흰 피부를 뚫고 나오는 강렬한 파란색. 뜨겁게 달구어진 불구덩이 모래. 사막은 어디에나 있었다. 부르튼 남자의 입술 위에. 각질이 비늘처럼 일어난 남자의 손등 위에. 빗방울 하나 스며들 수 없이 메마른 남자의 마음 안에.

 

환기부터 시킵시다. 남자는 살면서 한번도 마음을 열어본 적 없다. 그 안은 퀴퀴하고 냄새나고 비밀스럽다. 우리끼리의 소식입니다. 당신의 냄새, 당신의 게으름. 오아시스! 미지의 탐험. 콜럼버스. 너무 오랜만에 환기된 마음은 덩어리다. 크지만 정갈하지는 않은 덩어리. 이마가 부글부글 끓는다. 용광로에 넣어야만 할 것 같아.

 

불태워서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요. 몸이라고 믿었던 허물을 모두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조각을 모아 퍼즐을 맞춰볼까요? 덩어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덩어리. 아스팔트가 끓기 시작했다. 그 위에 누워 천사처럼 양팔을 휘저어볼까요. 아니요. 계란프라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고백에 비는 끓어오르고

둥지가 불탄 새는 방황하고

덩어리는 어른어른 흩어지는데.

 

연기가 피어오르는 우림. 어딜 밟아도 용광로.

 

뚝뚝 녹아내리는 이파리.

 

차갑다.

겪어본 적 없는 녹색의 사막.

 

 

 

우리씨

 

 

질문과 동시에 대답을 한다면

혼자서도 시소를 탈 수 있다

 

꿈이요?

마술사가 되면 모자 속에서 뭐든 꺼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당신은 팝송을 듣는군요

음정의 높낮이가 언어인 세계

나도 영어를 몰라서 좋아해요

 

거미가 그어놓은 외줄에 걸려

햇살이 넘어진다

 

가끔 미끄럼틀 구석에 죽어 있는 거미를 건드려요

누구라도 오길 기다리다 잠든 걸까봐

반짝이는 건 다 눈물일걸요

 

꿈에서 나는 사이좋은

여러갈래의 그림자

 

새로 산 흰색 치마를 입은 날

나란히 시소 위를 걷던 거미를

몇번이나 깔고 앉았다

 

계단에는 사람보다

그늘이 더 오래 앉아 있고요

 

어릴 적부터 즐겨 듣던 노래는

사람을 죽였다고 절규하는 가사였어요

매일 밤 그 노래를 들으며 잠들었는데

웃고 있었는데

 

꼬리처럼 길어지는 그림자

나로부터 드리운 것들을 내가 밟는다

 

허리 없는 그네를 바람이 떠밀고

나는 온종일 흔들린다

 

녹슨 철제 기구로 가득 차 있다

 

낯선 얼굴이 길을 물어올 때

사람들은 늘 건너편에 있다

 

빛 아래 하얗게

그을린 거미줄

 

시소 위에 그림자가 나란히 앉아 있다

 

 

심사평

 

2024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에는 상당한 수련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작품이 많았다. 안정적인 문장 운용을 통해 다채로운 감각을 펼쳐내는 투고작들을 읽으며, 무엇보다 시를 사랑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 기뻤다. 시를 통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기쁨, 세계와 마주하는 즐거움을 잘 누리고 있음이 읽혔기 때문이다. 다만 대학생 작품에서 주로 나타나는 좁고 작은 세계 안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쉬웠다. 좋은 문학이란 이질적이고 낯선 것에 몸을 기울이고, 바깥을 향해 나가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번 심사에서는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시를 펼치는 작품을 찾고자 했다.

심사위원 3인이 작품을 나누어 1차 심사를 진행했고, 2차 심사에서는 「중심과 테두리」 외 4편, 「밤마다 어깻죽지에서 깃털을 뽑아 잉크를 찍다가 미쳐버린 새에게」 외 4편, 「뒷면」 외 4편, 「제 자리」 외 4편, 「챔피언스리그」 외 4편, 「명랑함을 가져보라고」 외 4편, 「밤의 유리창의 앞에 서는 일」 외 4편, 「너를 지키려고 지구를 지켰어」 외 4편, 「유리 구두」 외 4편, 총 9명의 작품을 검토하였다. 이 가운데 중점적으로 논의된 3명의 응모작은 다음과 같다.

「밤마다 어깻죽지에서 깃털을 뽑아 잉크를 찍다가 미쳐버린 새에게」 외 4편은 시가 거느리는 에너지와 호흡이 좋았다. 정서는 다소 과잉되어 있으며 문장 또한 때로는 잘 조율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도, 그런 불안함과 과잉까지 포함하여 이미 하나의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지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가 바라보는 세계가 다소 좁게 느껴진다는 점, 결국 이 모든 상상력의 범주와 방향성이 다소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쉬움을 남겼다. 시가 품고 있는 칼날이 조금 더 예리하게, 그리고 외부를 향한다면 좋겠다.

「중심과 테두리」 외 4편은 장면과 상황을 잘 다루며 시의 레이어를 풍부하게 만들어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나’와 타자 사이의 긴장감이 때로는 감각으로, 때로는 내러티브를 통해 구성되는데 그 긴장을 쉽게 해소하지도 않고, 폭발시키지도 않은 채로 절묘하게 시를 잘 이어가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정교한 장면의 구성과는 달리 언어가 다소 늘어지는 면이 있었다. 또한 이 긴장을 끌고 어디에 도달하는가 하면 달리 가는 곳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 시가 항상 이동이나 도약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지점을 향해 나아갈 힘을 남겨두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논의 결과 「명랑함을 가져보라고」 외 4편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수상작이 결정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시라는 점이 좋았다. 어색하거나 억지스러운 점 없이 문장이 흐르는 가운데 그것이 쉽고 익숙한 방향으로 기울지 않았다. 이미지의 자유로운 연결이 돋보였으며 그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문득 낯설고 이상한 자리에 도착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침범하지 않고,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시적 주체의 결기는 어쩌면 오늘날의 젊은 시에서는 익숙한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펼쳐 보이는 방식만은 익숙하지 않았다. 이 섬세한 예민함이 앞으로 우리 시의 지평을 더욱 넓히리라 기대해본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그리고 작품을 투고한 모든 이에게는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김소연 이현승 황인찬

 

 

당선소감

 

처음 시를 좋아하게 됐을 때를 떠올려본다. 매일 왕복 세시간 거리를 통학하면서 가방 안에는 꼭 시집을 넣어 다녔고, 그중 하나는 꺼내서 품에 안고 있었다. 시집을 안고 창밖을 바라보면 스스로 시가 된 것 같았다. 아무것도 인정받지 않았음에도 그저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벅찼던 순간이 있다.

‘무의미(無意味)’. 붙여서 읽으면 정 없지만 ‘무(無)의 미(美)’로 띄어 읽으면 다정하다. ‘무의미’가 커다란 그림자가 되어 드리울 때마다 고개를 젓고, 안쪽을 서성거리며 ‘무의 미’를 감각해보고자 했다. 그 안은 깜깜하고 숨 막혔다. 이상하고 설렜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암실에서 흑백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어둠을 견디던 때처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무의 미’를 느끼기 위해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숨이 막힐 때면 밖으로 뛰쳐나와 선명한 빛을 찾았다. 빛 아래 서 있으면 그림자로나마 나를 볼 수 있었다. 모두를 볼 수 있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제자리에 있었다. 안정감을 쫓아가는 하루가 괜찮을 때도 있었지만, 어떤 날에는 내가 평생 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지루했다. 어둠 속에서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무언가가 자꾸 생각났다. 그럴 때면 시라는 암흑으로 들어가 손을 휘저었다. 아무 곳에나 가서 서 있고, 아무것이나 떠올리며 놀았다. 아무도 내가 그 안에 있었다는 걸 모른다. 이제야 밝힌다. 계속 시를 썼다는 사실을. 여전히 좋아한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시를 쓰던 나날에 선명하게 빛나는 손을 내밀어주신 김소연, 이현승, 황인찬 시인님께 명랑한 마음을 담아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 작았던 나를 크게 기억해주는 가족들. 무엇에 도전하든 응원해줬던 친구들. 끝까지 가고 싶게끔 지켜봐주셨던 인생의 선생님들. 함께 글을 쓰거나 영화를 만든 동료들. 나의 마음을 이루는 건 언제나 나보다는 당신들입니다.

 

모르는 미래를 사랑하며 나는 계속 쓴다.

곧 우리가 된다.

이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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