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이안 鄭璃岸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전공 1학년. 2003년생. 본명 정예은.
znpaaa0519@gmail.com
검은 강
차례대로 줄 서서, 차례대로 열을 재고, 차례대로 소독제를 바르자. 전염병이 돌고 나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줄 세우던 베트남어 선생님이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그가 전염병에 걸려서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사이 잘렸다 했는데, 점차 그게 정설로 여겨졌다. 우리 학교는 언제쯤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하냐며 친구들이 내게 묻기도 했지만, 우리 엄마는 축산과라 나도 모른다고 여러번 설명해야 했다.
엄마를 마중 나간 읍사무소엔 전염병 선별진료소가 설치돼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엄마는 그들보단 덜 피곤한 낯으로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엄마, 그거 동물들도 걸린대? 물으면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오늘 불고기를 안 샀겠지. 우리는 곧 있을 기말고사와 내년에 치를 자사고 입학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주공아파트에 들어섰다. 불고기와 갓 지은 밥과 김치, 외가에서 받아 온 나물들로 상을 차렸다. 엄마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고, 나는 거실 공기가 탁한 것 같아 베란다와 현관문을 열어두었다. 순간 강하게 맞바람이 쳤다. 현관에 놓아둔 아버지의 영정이 약하게 흔들렸다.
전화가 울렸다. 아파트 복도 저 끝 집에서 울리는 줄 알았던 전화는, 엄마의 손가방 깊숙한 곳에서 ‘김팀장님’이라는 화면을 띄운 채 디리리링 디리리링 울리고 있었다. 화장실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환풍기 소리에 묻힌 모양이었다. 내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통화 너머로 그는 흔한 인사말을 건네지도 않고, 퇴근 후에 전화한 것에 사과하지도 않고, 다만 이렇게 말했다. 연진씨, 그때 그 농장 신고 들어왔어, 자기들은 그동안 눈치 못 챘대, 숨긴 거면서…… 미안하지만 이번엔 연진씨가 감독을…… 나는 전화받은 사람이 다르다고 말하려다 사레가 들려 마구 기침했다. 마침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그치더니 엄마가 나왔다. 온몸으로 기침하느라 흔들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건넸다.
통화는 제법 길어졌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른다. 내가 먼저 밥을 떠먹기 시작했고 엄마는 드문드문 예, 예, 답하며 이마만 짚고 있었다. 맞바람이 또다시 강하게 쳤다. 훅 하는 바람 사이로 통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돼지, 이천마리, 죽이는 건, 그리고 침묵. 음소거해둔 TV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개그맨들은 서로 부딪치고 껴안고 가끔 넘어지고 벌떡 일어나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허우적대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이 뭐라 말하고 있을지 상상하며 물을 마셨다. 아무리 힘주어 삼켜도 목 깊숙한 곳이 여전히 간지러웠다.
통화가 끝났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서 엄마는 TV를 아예 꺼버렸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다. 엄마는 한술도 뜨지 않은 밥을 앞에 두고선 가만히 멈춰 있었다. 엄마, 좀 먹어, 김팀장님이라는 사람이 뭐래, 돼지가 뭐 했대? 나는 고기 한점을 올려주며 물었다. 옆집에서 틀어놓은 최신 가요와 아랫집에서 나는 청소기 소리가 몽롱하게 흘렀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고기가 담긴 그릇을 집어들었다. 엄마? 닿지 않는 먼 풍경에게 말 걸듯이 엄마를 불렀을 때, 엄마는 고기를 싱크대에 모조리 부어버렸다.
돼지 이천마리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
마스크 안으로 숨이 오래 머물러 얼굴에 열이 돌았다. 더운 머리로 생각하자니 통 떠오르질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에는 흙먼지가 고요히 깔려 있었다. 새는 뿌연 햇살을 가르며 느긋하게 날아다녔고, 관리되지 않은 화단엔 잡초가 무성했다. 그 사이로 작은 사슴벌레가 보였다. 지금 이 학교에는 몇개의 생명이 있을까. 미생물은 말고, 그러니까 자아가 있는 것들만. 전부 이천이 넘긴 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조례가 끝나 어수선한 가운데 투명 플라스틱 가림막 너머로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희라면 돼지 이천마리를 어떻게 죽일 것이냐고.
교수형하듯이 목을 매달기, 목을 자르기, 주사를 놓기, 굶기기, 불에 태우기, 물에 빠트리기, 차로 치기, 늑대를 풀기, 내가 비밀스럽게 속삭인다, 오늘부터 죽일 거래, 절벽에서 밀기, 누군가 묻는다, 왜, 정육점에 보내기, 나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답한다, 어디 아파서 그러는 것 같던데, 누군가 또 묻는다, 이천마리 전부 다? 누군가 또 묻는다, 전부 묻어버리면 되잖아?
질문이 아니라 답변이었을 그 말을 꺼낸 건 재희였다. 이목구비도 피부색도 다른 아이들보다 진한, 캄보디아에서 왔다던 이웃집 아저씨를 더 닮은 아이. 재희는 동년배 사이에서 초경이 가장 빨랐고 장미향 향수를 뿌렸다. 성적 평균을 깎아먹는 베트남어 수업에서도 그는 이리저리 꺾이는 성조에 맞춰 노래하듯이 발표해 자주 칭찬을 듣곤 했다. 시내에 즐비한 동남아 슈퍼마켓 앞을 지날 때 들리는 소리와 같은 언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려하고 감미롭게 들리던 그 말소리. 창백한 마스크를 슬쩍 내려 드러낸 연갈색 입술에선 그때처럼 감미롭다기보단 차가운 선고가 흘러나왔다. 전부 묻는 거야, 돼지들.
수업 시작종에 다른 질문들이 묻혔다. 역사 수업시간에는 항상 선생님이 짚어주는 구간이 아닌 다른 페이지를 펴 읽고는 했다. 이성계가 어째서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는지를 배울 때 나는 6·15남북공동선언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읽었고, 제너럴 셔먼 호가 평안도 앞바다에 머문 이유를 배울 때 나는 나치가 어떻게 유대인과 장애인과 동성애자, 집시들을 죽였는지 읽었다. 모서리에 작은 흑백사진이 있었다. 구덩이 바깥으로 크고 작은 발들이 뒤엉킨 채 빼꼼 나와 있었다. 돼지 이천마리도 이렇게 묻히는 걸까. 그럼 도대체 얼마나 큰 구덩이며 무덤인 것인가. 그때 누군가 책상을 톡톡 쳤다. 재희였다.
학교 끝나고 같이 가자.
죽음이 나란히 묻힌 사진들 위로 재희는 그렇게 적었다. 어디로? 작게 물으니 눈썹만 들썩였다.
양돈장은 중학교를 지나고 주공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공장지대를 지나고 낡은 빌라들을 지나고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을 지나고 좁은 하천을 건너서야 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숲을 끼고 있어 많이 가려져 있었다. 우리는 한참 길을 걸었다. 학교생활과 관련한 이야기가 동나고 침묵이 찾아올 무렵,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매캐한 탄내와 가축 냄새가 섞인 와중에도 선명한 쇠 냄새. 고개를 들자 길이 꺾이는 모양새가 낯익었다. 또다른 공장지대가 보였다. 발이 멈췄다.
이 근처였구나……
여기 알아? 저기 옆길로 가면 우리 집이거든. 공장 옆에.
그럼 그때 있었던 일도 다 알겠네.
당연하지. 그때도 직접 봤어.
직접 봤다고? 우리 아버지를?
무슨 소리야? 전에도 여기서 돼지 묻었던 거 봤다고.
이전에도 같은 농장에서 돼지를 묻은 적이 있다니. 작년 이맘때쯤이라 했다. 처음 듣는 사실이었지만, 아버지가 죽었을 즈음과 겹쳤다는 걸 알고 나니 이해가 됐다. 그땐 나도 엄마도 경황이 없었으니까. 가요를 흥얼거리며 가볍게 걸어가던 재희가 우뚝 멈춰 섰다. 몸을 낮추더니 옆으로 틀어 손짓했다. 저 멀리 정면으로 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 두어명이 통행을 막고 있었다. 재희를 따라 숲길에 발을 내딛자 밟고 있는 풀에서 비린내가 올라왔다. 피부에 닿는 모든 것이 서늘했다.
양돈장 입구에서 돈사까지는 어느정도 걸어야 했다. 큼지막한 나뭇잎 사이로 내려오는 햇빛이 턱없이 가늘었다. 한낮이었는데도 어둡고 고요했다. 날벌레조차 소란스럽지 않게 날아다녔다. 돼지들이 이미 다 죽었나, 하고 말하니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넌 안 들려? 꿀꿀대는 소리가 나잖아. 더러운 냄새도 여전하고. 나로선 들리지도, 맡아지지도 않는 것에 그는 투덜댔다. 밤에도 시끄러워 죽겠고, 옷에 냄새 밸까봐 맨날 뛰어서 지나다녔는데. 이렇게 다 죽이니까 얼마나 좋아. 가냘픈 햇빛으로 본 재희는 입술 각질을 뜯고 있었다.
끼이이익, 돼지 비명이 머리를 꿰뚫고 지나쳐갔다. 나는 퍼뜩 재희의 팔을 낚아채 꽉 쥐었다. 방금 뭐야, 묻는다면서, 돼지 묻는다면서, 왜 저런 소리가 나. 나는 아까부터 재희에게 묻기만 했고, 재희는 답하기만 했다. 죽어서 묻는 게 아니니까. 산 채로 묻는 거니까. 역사 시간에 순장 배웠잖아, 그런 거야. 압사하는 거. 숨이 막혀서 죽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재희는 내 손을 헐겁게 잡아주었다.
압사, 무언가에 짓눌려 빠져나온 숨이 영영 돌아오지 못해서 죽고 마는 것. 그때 나는 그런 죽음을 상상하지 못했다. 찌부러지면 그저 터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통조림에서 뛰쳐나온 콩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 터트리는 플래시게임처럼. 그 직전에 멈춰두고 오래도록 비명 지르게 하는 죽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압사라는 단어가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압사당했다던 아버지는 정말 어땠더라. 아버지는 으스러졌을 뿐인가, 으스러짐과 터짐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버지의 시신을 제대로 보았다면, 지금도 나는 그를 잘 떠올릴 수 있었을까…… 볼 거야? 내 손을 쥐고 있던 재희가 물었다. 가까이에 빛이 몰려 들어오는 틈이 있었다.
커다란 구덩이였다. 움푹하게 파인 구렁에 투명한 비닐을 넓게 씌워 놓았는데, 반사된 빛이 눈을 찔러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손차양을 하고서야 구렁과 비닐이 돈사 입구와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미끄럼틀 같았다. 나올 수 없는, 영원한 미끄럼. 빌라 한채 높이로 하늘에 뻗어 있는 굴착기 옆에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웅성임이 커지더니 굴착기가 몸체를 돌렸다. 재희는 이제 시작이라고 속삭였다.
사람들이 돈사에서 돼지들을 끌고 나왔다. 언젠가 엄마가 말한 적이 있었다. 공무원들이 트라우마를 호소한 이후부터는 돼지를 직접 묻는 일을 업체에 맡기게 되었고, 높은 수당에 이끌린 이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이었다고. 저 사람들도 그런 걸까. 나는 그들이 낯선 행위를 이어가는 낯선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에는 돼지를 감싸안아 끌고 가다가, 더 빨리 하라는 신호가 내려오자 아예 내동댕이치거나 발로 찼다.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오늘 안에 적어도 육백마리는 묻어야 한다고 누군가 소리쳤다.
사람들이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돼지를 끌고 오면, 경사진 비닐 길에 미끄러진 돼지들은 바닥을 긁고 몸부림치면서도 느리지만 확실하게 구렁에 빠져버렸다. 내리막 중간에서 멈춘 돼지도 있었다. 하얀 손들에게서 빠져나온 돼지도 있었다. 굴착기 버킷이 돼지들의 등을 밀어 구덩이에 몰아넣었다. 돼지가 돼지를 밟고 평평한 땅에 발을 올리면 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머리통을 차서 뒤로 자빠트렸다. 각기 다른 소리가 나는 육백개의 울음에 굴착기 소리와 사람 말소리와 강물이 흐르는 소리와 바람이 부는 소리가 전부 묻혔다. 귀가 먹먹해지다가 아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돼지들은 무언가 외치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무얼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뭇가지를 치우고 나아가려던 순간, 목 안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럽더니 기침이 터져나왔다. 숨을 쥐어짜내서 콜록대고 나면 얼굴에 열이 몰려 뜨거워졌다. 모든 것이 아득하고 흐릿하게만 보였다.
서로를 밀치고 올라가려는 돼지들의 머리 위로 또다른 비닐이 씌워졌다. 사람들이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서서 비닐을 강하게 눌렀다. 틈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면 그 안으로 무언가가, 아마도 가스가 주입되었다. 돼지들의 모습이 점차 부예졌다. 한마리 한마리 다른 모양으로 뒤엉킨 것들이 점차 커다란 살구색 덩어리로 합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돼지들은 쉽고 간단히 또 조용히 죽지 않았다. 비명이 더 가늘고 날카로워졌다. 끼이이익, 깨애애액, 살덩어리, 창백한 살덩어리, 한 돼지가 머리를 들어올렸다, 얇은 비닐 막 너머로 선명한 살결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를, 아빠를 불렀고, 구렁 속은, 점차 고요해졌다. 가만히 비닐을 잡고만 있는데도 사람들은 헐떡였다. 아주 많이 헐떡였다.
방호복을 입은 누군가가 이쪽 숲길로 뛰어왔다. 나도 재희도 몸을 움츠리고 풀숲에 몸을 감추었다. 그는 비틀거리더니 나무에 손을 짚고 마스크를 내렸다. 엄마였다. 엄마는 헛구역질을 이어 하다가 얼마 없는 음식물까지 토해냈다. 또 한명이 우리 쪽으로 왔다. 그는 엄마의 어깨에 약하게 손을 얹고서 말했다. 연진씨, 일단 삼백마리만 현장 렌더링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돌아간 곳에는 공장에서 볼 법한 커다란 직사각형 기계가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아직까지도 굉음을 내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칼날이 돼지를 갈아버리기 위해 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계에선 하얀 증기가 흐릿하게 피어올랐다. 대부분 위를 향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도 가라앉아 돼지들의 머리 위를, 비닐 위를 이불처럼 덮었다. 또 그 위로 흙이 올라서겠지, 돼지들을 묻었는지 모를 정도로 평평하고 고르게 흙으로 덮겠지. 나와 같은 곳을 지켜보고 있는 엄마를 부르려던 그때, 재희가 내 어깨를 쳤다. 그는 뒤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곳에는 이미 죽어 옆으로 누워 있는 새끼 돼지가 있었다. 몸 군데군데가 썩어 드러난 뼈 위로 파리가 앉았다. 그래도 머리만큼은 언뜻 멀쩡해 보였는데, 오른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재희가 말했다. 전에 냄새 때문에 찾은 건데, 사람들 오기 며칠 전부터 여기 있더라. 너희 엄마 저기 계신댔잖아. 이것도 같이 묻어달라고 해봐. 여기 온 걸 들키긴 하겠지만.
나는 급하게 입을 막았으나 손 틈새를 비집고 토사물이 흘러내렸다. 재희는 자기 신발 코에 주황색 액체가 튄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서 두어걸음 멀어졌다. 나는 곧바로 일어나 푹 젖은 손으로 재희의 멱살을 잡았다. 빳빳한 셔츠가 금방 내 것처럼 더러워졌다.
왜 이러는 거야?
뭐가?
왜 이딴 걸 보여준 건데. 미쳤어?
미친 건 너지. 보겠다고 한 것도 너고. 더러워 죽겠으니까 빨리 손 놔. 너네 엄마한테 말해서 저거 묻으라고.
파스슥, 굴착기가 버킷에 퍼 담은 흙을 비닐 위로 뿌리기 시작했다.
흙 뿌리는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돼지를 갈던 도중 무언가 눈에 튀었다는 괴성이 있었다. 묻힌 돼지는 흙에 가려져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굴착기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 지금 아니면 못 봐. 여기 돼지 남아 있는 것도 우리 말고는 모를걸. 재희가 덧붙였다. 미친년아, 됐다고. 나는 재희를 힘주어 밀었다. 그러나 재희는 통 밀리지 않았고, 도리어 내가 밀렸다. 작은 돌을 밟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등이 묵직하게 아팠다. 나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석양이 지는 하늘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온통 금이 가 있었다. 문득 잠이 왔다.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렸더니 새끼 돼지가 나와 함께 누워 있었다. 그 작은 발굽이 내 어깨에 닿아 있었다. 경직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도망쳤다. 서너번 더 넘어져 집에 들어왔을 땐 피부가 베이고 쓸려 있었다. 피는 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자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다. 구멍 난 교복 치마를 보고서도 엄마는 이유를 묻지 않고 바늘을 들었다. 아버지의 양복 셔츠를 다리다가 얼룩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것처럼. 몇년이 지나 아버지의 식품공장 유니폼이 찢어져도 말없이 꿰매던 것처럼. 능숙하게 구멍을 메웠지만 천이 오그라들었다. 주글주글해진 주름을 재희가 흘낏 볼 때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귀마개를 꽂고 머리칼로 가리면 고요 속에서 금방 잠들 수 있었다. 오래도록 꿈을 꾸었다. 누구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이동수업을 앞둘 때면 보건실에 갔다. 생리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대고 침대에 누웠지만 오히려 잠들기 어려웠다. 하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뜨거운 숨이 나가지 못하고 머물러 열이 올랐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그때 또다시 기침이 나왔다. 먼지를 먹은 걸까. 연이은 기침 소리에 보건 선생님이 커튼을 걷고 너 괜찮니, 하며 다가왔다. 이불이 내려가고 드러난 이마에 차가운 손등이 닿았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잠깐 사레들린 거예요. 그러나 선생님은 단호한 태도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내게 말했다.
열도 좀 있으니까, 일단 조퇴하고 읍사무소 쪽 선별진료소 가봐. 담임선생님께는 말씀드려놨어. 짐 챙기고 부모님께 연락드려.
침대에서 내려와 복도로 나서는 순간까지도 열은 분명히 내려가고 있었다. 보건 선생님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누구와도 마주치지 말고 최대한 빨리 가보라고 했다. 점심시간 전 체육 수업. 각기 다른 가방과 아무렇게나 펴둔 책과 텅 빈 우유 갑과 물이 담긴 보온병만 남겨진 교실은 여름날 그림자로 썰렁했다. 창문에서 희미하게 더운 바람이 들어와 하얀 커튼이 얕게 흔들렸다. 문제집으로 가득 차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잠시 앉아 있었다. 빨리 가야 하는데, 혹시 모르니까 이러고 있지 말랬는데.
앞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재희가 들어왔다. 나를 보고선 뭐야, 했다.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기 자리로 간 재희는 들고 있던 문제집을 서랍에 넣고 시집을 꺼냈다. 나가는가 싶더니 뒤를 돌아 나와 마주했다.
어디 가.
아픈 것 같아서.
그거 아냐?
모르지. 검사받으러 가래.
오늘 돈까스 나오던데.
순간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나부끼는 커튼이 눈앞을 가렸다.
강재희, 너는 그게 들어가나보네.
들어가지. 넌 아직도 그거 때문에 그래?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을 막 나서는데 뒤로 재희가 따라 나왔다. 체육관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어차피 나중 되면 다 잘 먹혀. 배고프잖아. 너도 그럴걸.
너 왜 따라와.
체육 들어가기 싫어서.
어차피 다음주 기말이라 체육관에서 자습하잖아.
그건 너 같은 모범생이나 하는 거고. 애들 다 피구하던데.
그럼 피구해.
피구도 하기 싫고 자습도 하기 싫은 거라고.
옆 반은 영어 수업을 하고 있었다. 창문과 앞문을 활짝 열어놔 그들 중 몇몇과 눈이 마주쳤다. 대부분은 엎드려 자고 있었다. 가끔 무거운 구름이 지날 때면 급격히 어두워지며 공기가 달라지고는 했다. 그럼에도 비가 내리는 일은 없었고, 불온한 기운도 금방 가셨다. 재희는 아예 바래다줄 작정인지 나와 나란히 걸었는데, 내 걸음이 조금 빨라지나 싶으면 바로 어깨를 잡았다.
어제인가 알았어. 거기 옆에 공장에서 있었던 일.
너네 집 근처에서 있었던 일이잖아.
알아. 그건 아는데. 그게 너네 아빠였을 줄은 몰랐어.
그럼 그것도 직접 봤어?
응. 근데 어땠는지는 말 안 할게. 그것보다는, 좀 생각해봤는데.
뭘.
역시 좀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계단을 내려가면서 선생님들과 마주칠 때면 괜히 마스크를 고쳐 쓰고 고개를 숙였다. 한 선생님은 우리에게 지금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물었다. 몸이 좋지 않아 조퇴하는 길이라고 답하니 선생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재희가 배탈일 뿐이라고 둘러댔다.
현지 너는 자사고 간댔나.
그러려고. 옛날부터 가라고 하셔서.
엄마가?
아버지가. 근데 엄마도 그러긴 했다.
나였으면 숨 막혀 미칠 것 같은데. 넌 자신있나보네.
확진이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내일 수행평가랑, 다음주 기말고사 전부 못 보는 거잖아.
한껏 가라앉은 운동장 모래를 힘주어 밟으며 걸어갔다. 재희는 실내화, 나는 운동화. 그런데도 발자국은 비슷한 크기와 모양으로 찍혔다. 어렴풋하게 피어오른 모래먼지에 기침이 나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음에도 용케 들어왔는지, 자그마한 먼지들이 목 안에 달라붙어 긁는 듯했다. 오래도록 기침하는 내 등을 재희가 제법 강하게 토닥이면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많이 옮기는 건 어때. 다들 시험 못 보게. 아니면 미루게. 너네 엄마 공무원이니까 진료소 늦게 간 건 뭐 어떻게든 해주겠지.
그건 아니지. 옮았다가 입원까지 하면 어쩌려고. 그리고 우리 엄마는 축산과라니까.
그럼 일단 나한테는 옮겨주면 안 돼?
교문을 앞에 두고 재희가 멈춰 서서 그렇게 물었다. 일단 나는 좀 걸리고 싶어. 학교 안 나오게. 마스크를 내리자 연갈색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너편 편의점 안에도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나도 천천히 마스크를 내렸다. 오래 머물러 더운 숨이 빠져나가고, 탁 트인 새로운 공기를 마시니 코와 입가가 가벼웠다. 립밤을 바르지 않은 입술이 까끌거리는 게 이제야 느껴졌다.
괜찮으니까 아무 말이나 해봐. 빨리.
이거 진짜 비밀이다.
어렴풋하게 종소리가 들렸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었다. 재희는 진짜 비밀,이라는 것을 삼키려는 듯이 내 코앞에서 숨이랄지 침이랄지 있을지 없을지 모를 바이러스를 들이마시고는 만족스럽게 마스크를 올렸다. 내일 봐. 그렇게 인사하고서 그는 교문을 넘어 다시 학교로 들어갔고, 나는 한참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선별진료소에 가지 않기로 했다. 영어단어집을 꺼내 외우며 집으로 가는 동안 막 출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낯선 언어를 흘리며 옆을 지나쳐갔다. 김밥천국이나 한식집은 물론이고 동남아 국가들의 국기를 내건 이름 모를 식당도 이미 꽉 차 있었다. 그로부터 특이한 향신료와 탄 고기 냄새가 났다. 바로 옆에 있는 슈퍼마켓에선 조잡한 트로트만 틀어댔다. 배가 고파 어지러웠다. 사물과 풍경 간 경계선 같은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엄마는 그간 제대로 요리하지 않았다. 외가에서 가져온 나물은 동난 지 오래였다. 지난밤 우리는 컵라면을 먹었고 잠을 자지 않았다. 함께 누워 TV만 보았다. 연예인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관찰하는 예능이 나오고 있었다. 한 가수가 느지막이 일어나서는 집 안을 꼼꼼히 청소하기 시작했다. 문득 한없이 더러워진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레토르트 식품 껍질이나 제대로 묶어두지도 않은 쓰레기봉투, 한번 입고선 바닥에 던져둔 옷들. 단 사흘 만에 두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놨다니.
엄마, 집이 완전히 돼지우리……
아버지가 화를 낼 때 자주 쓰던 말이었다. 무심코 내뱉었다가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옆에 있던 엄마는 느리게 일어나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그래, 청소 좀 하자. 정말 돼지우리네.
새벽 한시에 우리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 밖을 오갔다. 엄마는 또 내게 배고프지, 하더니 아파트 단지 앞에 트럭이 와 있었다며 다시 밖을 향했다. 돌아온 엄마는 전기구이 통닭 봉투를 세개나 안고 있었다. 마냥 신나 보여 이걸 정말 다 먹을 수 있겠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옛날부터 통닭을 먹을 때면 엄마는 입이 작은 나를 위해 가위로 조각내주곤 했다. 가윗날이 껍질과 살코기를 가를 때마다 바사삭 하는 소리가 났다. TV에선 한참 전에 끝난 예능 대신 애국가를 내보내고 있었다. 바사삭 소리가 멈추었다.
다 했어? 엄마?
엄마는 닭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조각난 통닭 안쪽이 새빨갰다. 안 익었잖아. 엄마는 그렇게 말하더니 가위를 든 채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일어나 엄마를 막았다. 가위 들고 어딜 나가냐고.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엄마는 계속해서 고개 저었다.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나는 뒤로 물러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통닭을 마구 뜯었다. 봐봐, 다 익었어, 먹을 수 있어. 익었든 익지 않았든 살코기를 무작정 입에 넣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지켜보다가 다시 신발을 벗고 내 옆에 앉았다. 정말 다 익은 게 맞는지 확인하듯 닭을 얇게 얇게 찢었다. 덜 익은 줄 알았던 새빨간 부분은 오히려 딱딱할 정도로 오래 익어 있었다. 그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그만하자. 지금 하고 있는 거, 못하겠다고 하자.
아침이 되자 간밤에 삼킨 것을 전부 토했다. 고기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부터, 입술을 지날 때부터 토기를 느꼈다. 헛숨을 삼켜가면서 욱여넣었다. 그런데 소화되기도 전에 기침하다가 갑작스럽게 구토로 전부 비워낸 것이다. 반나절이 지나자 고통스러울 정도로 허기가 졌다. 윗배를 죄는 통증보단 몽롱하고 어지러운 게 더 힘들었는데, 정말로 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선별진료소에 가봐야 할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지갑도 집에 두고 왔다. 변명거리가 생겼다. 진료소에 가기 전에 너무 배고파서 밥을 먹으려는데 지갑을 집에 두고 왔다, 그런데 집에 가서 깜빡 잠들어버려 진료를 못 받았다,라고. 내일은 아예 진통제와 소염제를 먹어서 증상이 없는 척 굴자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벽지와 바닥에 묻은 닭기름을 닦고 쓰레기를 마저 버렸다. 베란다와 현관문을 열어놓으니 공기가 선선했다. 시간은 어느덧 늦은 오후에 접어들고 있었다. 슬슬 초등학생들이 하교할 시간이니 아파트 복도가 시끄러워질 것이었다. 조금만 있다가 현관문은 닫아두자고 생각하며 식탁에 앉았다. 하얀 커튼이 휘날리는 모양을 눈으로 좇다가 그대로 엎드렸다. 내일은 국어 수행평가가 있고, 서술 답안을 생각해두기는 했지만 혹시 모르니 인터넷강의를 참고해 내용을 보강해야 하고, 기말고사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암기과목을 마지막으로 점검해보아야 한다. 혹시나 전염병에 걸린 게 맞다면 학교를 빠져야 할 테고, 내신이 망가질뿐더러 면접에서 질문을 받으면 어떤 답을 하든 다른 애들보다는 뒤처질 것이다.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숨길 것이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새끼 돼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왜 거기 버려져 있었을까. 이유를 따라가다가 잠에 들었다.
꿈에서 나는 하얀 비닐 가방에 싸인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오른쪽 얼굴과 가슴을 제외하고 전부 돼지였다. 삼분의 일쯤 사람이었고 삼분의 이쯤 돼지였다. 그럴 수밖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기계의 무딘 날과 날 사이에 낀 아버지는 찌그러진 채, 혹은 터진 채 발견되었다. 배두현씨가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나마 멀쩡한 오른쪽 부분만 볼 수 있었다. 전부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엄마는 그의 파열된 부분에서 무얼 보았을까. 장의사들이 애써 꿰매놓은 조각들에서 정말 아버지를 보았을까. 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말해야 할 것을 대신 말해주었다. 배두현씨가 맞아요. 배두현씨예요. 내 말에 비닐 가방의 지퍼가 머리끝까지 채워졌다. 상품가치 없음, 등외, 마커로 글씨가 쓰이면서 도장이 찍히고 들것에 실려 영안실 냉동고에 넣어졌다. 하얀 수증기가 싸안은 그것은 아주 천천히 저온의 천국에 들어갔다.
돼지 울음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발작적으로 눈을 떴지만 어둠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어 있었다. 더듬더듬 전등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집 안은 맞바람에 이리저리 날아간 잡동사니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열한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안 왔다니. 엄마는 어젯밤 통닭을 실컷 찢고 나서, 하루만 더 버티면 일이 끝난다고 했다. 전화를 해도 엄마는 받지 않았다. 몸이 으슬으슬해서인지 소름이 끼쳤다. 내팽개쳤던 겉옷을 주워 입고서 현관을 나섰다. 거세게 닫힌 문 너머로 현관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주공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불 켜진 공장지대를 지나고 아무도 없는 낡은 빌라들을 지나고 어둠이 고인 밭을 지나고 좁은 하천을 건너야 양돈장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밭을 지나서부터 슬그머니 엷은 안개가 끼더니, 하천에 다다랐을 땐 총총히 박힌 돌다리조차 겨우 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어졌다. 손을 휘휘 저어가며 까마득한 강물 사이로 돌을 찾아 밟았다. 열이 올라 이마가 홧홧했다. 그러고 보니 외출할 때마다 쓰던 마스크를 잊고 나왔다. 허전한 입가를 매만지는데 왼발이 하천에 빠졌다. 미지근한 물이 순식간에 신발 안으로 들어찼다. 밟아야 할 돌다리는 내 발 바로 옆에 있었다. 아예 오른발도 강물에 담갔다. 철벅거리며 하천을 건넜다.
작업이 전부 끝난 모양인지 정문엔 바리케이드와 팻말만 놓여 있었다. 방역으로 인한 통행금지. 몸을 숙여서 바리케이드 아래에 난 틈으로 지나갔다. 돈사를 향해서, 구덩이를 향해서 뛰어갔다. 똥오줌과 피와 하수와 날것의 모든 비린내가 진해졌다. 그리고 지독한 썩은내가 그것들을 묻었다. 엄마, 엄마, 나는 닿지 않는 먼 풍경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서라도 내게 답을 주길 바랐다.
저 멀리 매립지에는 뿌연 김과 함께 돼지의 부푼 몸통과 다리가 삐죽삐죽 올라와 있었다. 그 위로 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죽은 돼지의 다리를 잡고 열심히도 끌어올리고 있었다. 엄마, 하면서 그에게 뛰어갔다. 발을 내디딘 땅 아래가 물렁거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뒤로 돼지가, 돼지 다리가, 몸통이,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장기들, 하염없이 벌리고 있는 입, 머리가 보였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거기 있었다.
방호복 끝자락을 꽉 쥐고 뒤로 뒤로 더 뒤로 물러났다. 물렁거리는 땅에서 벗어난 후에도 바리케이드가 보일 때까지 계속 그를 잡고 물러났다. 내가 한걸음씩 옮길 때마다 그는 현지? 현지야? 네가 왜 여기 있어? 하고 물었다. 나는 지금 그걸 물을 때가 아니야, 지금 말고 나중에, 하면서 그의 마스크를 벗겼다. 오물이 묻은 비닐 소재의 방호복 지퍼도 내려주었다. 더러운 가죽을 벗겨내자 익숙한 얼굴과 옷이 드러났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알고 있을 엄마의 모습이었다. 나는 엄마를 안았고, 잠시 그러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엄마, 다음에 온 사람이 제대로 묻어줄 거야. 나도 같이 할게. 양돈장 너머 먼 곳에 있는 한 민가에서 불이 켜지는 게 보였다.
안개는 여전했다. 나는 이미 발이 젖었으니 아무래도 좋다며 하천에 들어가 엄마에게 돌다리를 찾아주었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돌 위를 지나며 나아갔다. 그러고는 잡은 손이 뜨겁다며 내게 열이 있냐고 물었다. 어디 아픈 것 같긴 해, 웅얼거리고선 돌다리를 다 건넌 엄마를 따라 하천에서 나온 순간이었다. 물이 찍어낸 발자국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뒤를 돌아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을 흘겨보았다. 달빛이 녹아든 강물이 새까맸다. 다가가 보니 알 수 있었다. 땅에 스며든 돼지 피가 강물에 섞여 흘러가고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비린내가 아래에서부터 강하게 올라왔다. 이제 보니 무릎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붉었다. 강물에는 창백한 살덩어리가 부옇게 비쳤다.
심사평
올 대산대학문학상에 응모된 예심작들이, 심사를 맡은 우리들에게 무척 즐거운 독서의 시간을 선물했음을 고백한다. 소재뿐 아니라 주제에 있어서도 참신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획득하고자 애쓴 패기와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이에 더해 거의 모든 응모작이 고른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 전체 응모작을 고르게 관통한 주제는 ‘세습되는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 ‘너무도 이르게 영혼과 미래를 잠식해버린 무기력과 권태’ ‘올가미처럼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주는 패배감과 압박감, 그로 인한 대상 없는(혹은 있는) 분노’ ‘성정체성을 가족과 사회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 상처와 분열’이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총 9편이었다. 「그 물을 마실 거야」 「당나귀 귀」 「플라스크 속의 오빠」 「벽의 시작점」 「검은 강」 「비둘기극」 「멜팅 구두」 「너구리 죽이기」 「바꿔치기」.
「멜팅 구두」와 「그 물을 마실 거야」는 계층 간의 허물 수 없는 벽(거리)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저 무거운 주제에 앞 작품이 경쾌하고 가볍게 접근했다면, 뒤 작품은 진지하면서도 순박하고 건강하게 접근했다. 두 작품 다 미끄러운 완성도를 획득했지만 대립을 이분법적으로 풀어낸 점과 그것이 신선함을 반감시키며 결정적인 장면에서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쉬움을 주었다.
「바꿔치기」는 한 청년의 무기력과 권태를, 잊힌 동물원을 배경으로 천연덕스럽게 전개한 작품이었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며, 직립보행을 할 것 같은 염소와 ‘나’가 몸과 영혼을 바꿔치기하는 결론이 압권이었다.
「비둘기극」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설을 쓰고자 하는 패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본심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좀더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확장시키는 퇴고의 과정을 한두차례 더 거치면 훨씬 좋은 작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다.
「너구리 죽이기」는 드물게 농촌의 현실과 생태, 청년 후계농을 고민 중인 청년들에게 시선을 둔 작품이었다. 지금의 농촌 현실을 제대로 체화해 한편의 귀한 작품을 완성했다는 흐뭇함을 주었다. 결론을 너무 급하게 서둘러 끝낸 것 같은, 그래서 문학적으로 승화하지 못한 날것의 문장과 대화가 내내 아쉬움을 주었다.
「검은 강」은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소설이었다. 이미 다른 소설들에서도 진지하게 다뤄진 적 있는 ‘돼지 살처분’을 소재로, 자신만의 목소리와 시선을 담은 소설을 써내려간 점이 높은 점수를 샀다. 소재주의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가 낳은 끔찍한 비극 중 하나인 돼지 살처분 현장 앞으로 나아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는 살아 있는 돼지들을 직시했다. 꽤나 정교하고 집요한 묘사가 읽는 우리의 시선까지도 끌어당겨 함께 직시하게 하는 힘이 놀라웠다. 당선작으로 손색없는 다른 작품들이 있음에도 이 작품을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심사를 맡은 우리 모두 흔쾌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선자께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한다. 그리고 모든 응모자들의 건필을 빌며 이 짧은 심사평을 마무리한다.
김숨 김희선 심윤경
당선소감
소설은 늘 세레나데 혹은 구조 요청의 형식으로 제게 다가와요. 눈짓을 보내기도, 이따금 속삭이기도 하면서. 그럼 저는 그에 무심코 이끌리며 답해요.
흔쾌히, 기꺼이……
당신들 역시 그런 태도로 살아가더군요. 온갖 사람과 상황에 무작정 이어지겠다고 선언하는 묘한 당신들.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한담. 그러면서도 때로 버거워하지 않을까 싶어 오래도록 지켜보게 되었던 당신들. 활자와 서사에 한눈팔고 있다가 현실에 부딪칠 때에도 눈앞에 당신들이 보여 버틸 수 있었어요.
예린과 민주, 혜빈, 채영을 비롯한 오랜 친구들. 강은 언니와 선배들. 속절없이 정들어버린 소중한 동기들, 주희와 종호, 나윤. 나를 생활로 이끌어준 버드나무 식구들.
소설의 시작이었던 최민경 선생님, 서진연 선생님, 김기형 선생님, 신진 선생님. 신희문 선생님과 조민영 선생님. 이장욱 교수님과 문지혁 교수님.
언젠가 제게 주먹만 한 귤을 건네주셨던 소설가 J님.
이 행운을 나눠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일찍이 손 놓는 법을 알려준 엄마 아빠 오빠.
22년 만에 화해한 예은.
친애하는 어른들과 존경하는 어린이들.
모든 문자와 목소리에 감사드려요.
당선 발표가 있던 2024년 겨울, 12월의 최후반부. 감당하기 어려운 기쁨과 슬픔으로 마음이 어지럽기만 했습니다. 심사평에서 언급되었듯 ‘올가미처럼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주는 패배감과 압박감’이 몸에 배다 못해 영혼에 깃든 것만 같았어요.
그때 내가 마주한 당신들은 어떻던가요. 내가 무너지기 전에 눈짓해준 당신. 오래도록 함께하자고 속삭여준 당신. 그렇게 같이 읽고 써가자던 당신들. 도리어 내가 도와달라고 소리치거나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말을 고르는 그 순간을 영원히 기다려주던 나의 소설들.
당신의 기쁨을 흔쾌히, 우리의 슬픔을 기꺼이……
약속할게요. 많이 미흡하더라도 쓰겠어요.
우리가 검은 강을 함께 건너왔음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따라갈게요. 한없이 감사합니다.
정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