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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시적 창조와 세상 만들기
역사의 몸, 장소의 시
대구-경북의 시인들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 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누군 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 다』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시론집 『비로 만든 사람』 등 이 있음.
97889788@daum.net
1. 흐르는 물, 돌아온 새 그리고 ‘사람의 자연’
인간은 결국 ‘그곳’의 인간일 수밖에 없다. 어디에 사느냐 혹은 살았느냐 하는 질문이 유력한 이유는 여기 당도한 그가 그곳에서부터 이어져 있다는 실감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장소’는 그에게 존재를 내어준 이 세계의 질서 자체이다. 아무리 강렬한 믿음이라고 해도 그것만의 장소를 가지고 있다. 지켜야 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것의 자리로 있거나 그 자리를 통해서 있기 때문이다. 현장이 없는 사건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끝없이 도래하는 ‘순간’이라는 사건 속에 위치한 이상 인간은 자신을 이루는 장소와 함께 있다. 매순간 우리는 ‘그곳’을 열고 이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장소를 ‘마음의 신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인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적벽을 마주한 이 마을에는 개를 전혀 키우지 않는다는데 그 까닭으로는 우선 개를 가져다 놓으면 어쩌다 한번 짖은 자기 목소리가 적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에 놀라 더 큰 소리로 짖고 그러면 그 소리는 더 큰 소리로 돌아와 결국 개는 밤새워 자기 목소리와 싸우다가 지쳐 사흘 밤을 못 넘기고 죽어 나자빠지기 때문이라는데 사실 그보다는 사람들이 당최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면 죽은 개들이 웃을지도 모를 일인 것은 섣달이면 숫제 강이 쩡쩡 얼어 몸 트는 소리가 밤새 쩌엉쩌엉 울려도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잔다는 말씀.
—안상학 「단천 마을」 전문(『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실천문학사 2014)
안상학 시에서 장소는 단지 고정된 배경으로 자리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서 사람들의 삶을 파고든다. 그곳에 깃든 ‘이야기’ 때문이다. 밤새 자신의 목소리와 싸우다 나자빠지는 개에 관한 이야기. 적벽이 있는 한 저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저 이야기가 있는 한 사람들의 삶에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 그들만의 삶의 방법과 형태가 깃들어 있다. 말하자면 공동의 감각은 사회적 과정 속에서 형성되어 우리 내면에 가라앉은 인식들을 거느릴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는 요약된 사건을 벗어나 일상을 감싸는 감각으로 변모한다. 이 시 표면의 정감 어린 풍경(보조관념) 이면에는 그것을 가시화시킨 사회정치적 인식(원관 념)이 숨어 있는 것이다.
가령, ‘단천마을’은 붉은 점토질의 산맥이 뻗어 있고 강가의 자갈도 붉다는 데서 얻어진 이름1인데, 그곳의 ‘적벽’에도 붉음이 보태어져 있다. 그 붉음을 향해 짖는 개의 맹랑한 행태는 ‘낙동강’ 상류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포함해 짐짓 색깔론에 사로잡힌 허망한 정치적 구호의 일면을 떠올리게도 한다. 벽에 부딪쳐 덧없이 돌아오는 제 목소리에 맞서며 자신의 분을 재생하다 맞게 되는 개의 비극적 결말에서 그 소란만큼이나 무색함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기만에 대한 은유를 짚는 것은, 비록 시인의 의도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독법일 것이다. 이러한 유추는 정작 그들이 ‘얼음 몸 트는 소리’에는 아랑곳없이 잠에 드는 식의 대비를 통해서도 상당 부분 그 타당성을 넘겨받는다.
신천동 산동네 사람들이 모여 나와
영세민 취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철새무리
장화를 신고 오물을 건지는 아저씨, 철새
수건 머리 쓰고 돌 나르는 아줌마, 철새
허접쓰레기 소각하는 할머니 철새, 할아버지
철새, 매캐한 연기는 바람부는 방향으로 누워 흐르고
하천둑에 붙박힌 녹색 깃발은 제자리 펄럭임을
하고 있다 정오 한때
낮은 하늘에 걸린 전투기 한 대 여전히
철새는 날아오지 않고 사람들이
—안상학 「1987년 11월의 신천」 부분(『그대 무사한가』, 한길사 1991)
기실 안상학은 자신의 장소와 그곳의 삶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 시인 중 한명이다. 1988년 시인의 등단작인 이 시는 대구 도심을 가로지르는 ‘신천’을 무대로 삼는다. “검은 물만 흐르는” 천변을 더는 찾지 않는 “철새”를 대신해 철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말하자면 자연은 시절을 잃고 삶은 시절처럼 떠돈다. 서로 다른 층위를 가진 ‘철새’에 대한 시선은 사람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에 대한 환기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검은 신천’이 상기하는바 제목에서 제시된 1987년 11월의 상황으로 파악된다. 유월항쟁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이루고 국민주권을 되찾은 해. 그러나 국민의 염원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고 12월 선거에서 군부가 다시금 정권을 이어받은 해이기도 하다. 그것이 국민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더 비극적으로 다가오는데, 11월은 민주진영의 분열과 여론의 행방을 통해 그 비극을 얼마간 예견할 수 있었던 시점이다. 시인은 ‘사람의 자연’이 계절을 빼앗긴 채 군부(“전투기”)의 지배 아래 놓이는 현실을 “취로 사업”으로 연명하는 ‘검은 신천’으로 보았을 것이다.
시인 장옥관의 최근 작업 역시 많은 부분 자신의 삶이 영위되는 자리와 그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지배하는 듯하다. 그는 “채널이 끊어졌다 변명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해, 1987년 둘째가 태어났다 최루탄이 펑펑 터지고 주식시장을 넘보고 아파트 평수를 넓혀갔다 한 방향의 채널, 공중에 따로 코드가 꽂혀 있었다”(「1987」,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고 말하며, 역사의 중력으로부터 비껴서 있던 자의 비애를 아프게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예의 그 ‘신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썼다
희망교 중동교 사이 오리 스물다섯마리, 백로 한마리 중동교 상동교 사이 오리 열마리, 백로 세마리, 왜가리 한마리 희망교 대봉교 사이 오리 여덟마리, 쇠백로 한마리 수달은 없다 수달이 산다는 신천인데 한번도 보질 못했다 그런데 희망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매일 오갔는데 모르겠다 혁명은 1960년 2월 28일에 일어났다 한평생 이 고장을 떠나 산 적이 없는데 모르겠다 오리를 세는 날이 많았다
—장옥관 「신천은 흐르고 오리는 떠 있다」 부분(『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안상학 시에 비추자면 37년 만에 신천에 철새가 돌아왔다. 다 합쳐 마흔아홉마리. 역시 안상학 시의 독법대로 보자면 사람의 자연, 곧 정치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고 해석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오리를 세는 것으로 자신 앞에 도래한 역사의 풍경을 확인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풍문과 풍경 사이에 차이가 있다. 수달의 유무를 둘러싼 이 괴리는 ‘희망’에 대한 의심(“희망교인지 아닌지”)으로 나아가는데, 그 의심은 이내 1960년 2·28항쟁에 대한 망각을 환기시킨다. 일상은 평온하게 전개되는 듯하지만 스스로는 그 평온을 믿을 수 없고, 그것이 희망에 대한 불신과 그 근원에 대한 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모르겠다”는 반복된 독백에는 현재를 구성하는 일상이 거짓과 허구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문이 깔려 있다. 때문에 오리를 세는 일은 일상의 확인이면서도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의 망각이 불러온 희망에 대한 불신과 삶을 휘감는 상실감. 그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시인은 재차 삶의 자리를 녹진하게 파고든다.
솥두꿍에 꾸버야 제격이제 타작하고 난 말린 콩깍지를 부섴아구리 깊숙이 밀어 넣고 불 지피면 벌린 가래이, 종일 들일로 축축해진 사탈구지가 차츰 바상바상해지는 기라 단물 올라온 늦가실 배추를 주걱으로 두드려 밀가리 반죽을 얇게 입혀 구으면 그만인 음식 그 전에 들지름을 낫게 둘러야 하제 재료도 조리도 소박한 이 찌짐을 지대로 묵을라 카믄 길게 쭈욱 찢어가 조선지렁에 찍어 묵어야 되는 기라 무슨 맛이냐고? 솔직히 불맛 말고는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맛의 맛, 맨밥처럼 덤덤한 이 맛이 실은 경상도의 맛인 기라 며르치 비릉내도 싫어 맹물에 끓이는 안동국시나 흐늘흐늘 얇게 삭아 거친 잎맥만 남은 콩잎 짠지에 사족 못 쓰는 여게 사람들 그라고 보이 경상도의 맛은 혀 돌기가 아니라 이마에 가차븐 기 아닐까 싶은데 족보 적는 묵은 한지 같은 그 맛 말이제 말 해놓고 보이 배추적을 억수로 묵고 싶네 불로막걸리 한잔 따라놓고 자분자분 내리는 눈발을 지그시 바라보마 을매나 기막히겠노 그쟈
그런데, 누가 굽노?
—장옥관 「배추적」 전문(『형평문학』 12호, 2025)
시에는 배추전에 대한 소회가 주를 이루지만 생활사라고 부를 만한 일상의 면면이 녹아들어 있다. 지역어의 사용은 전략적인데, 정서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삶의 생동감을 적극적으로 되살린다. 지역어는 단순히 어법이나 말씨 중 하나로 선택된 요소에 그치지 않고 삶의 현장을 언어로 가시화하며 발화자의 정체성을 그 지역과 결합시켜 구현한다. 도무지 지울 수 없는 근원의 지문처럼 말이다. 지역음식의 일반적 특성을 경상도 사람들의 기질인 양 그려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맨밥처럼 덤덤”하고 “맹물” 같은가 하면 ‘흐늘흐늘 삭은 맛’이 그렇다. 마침내 화자는 경상도의 맛은 혀끝에서 휘감기는 게 아니라 “족보 적는 묵은 한지 같은” “이마”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맛’은 강렬한 무언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무던하게 비워내고 듬직하게 지켜내는 것에 가까운데, 음식이 몸을 이루듯 그 맛에 “사족 못 쓰는” 경상도 사람들의 본성 역시 그와 연결된다.
1연 마지막에 “그쟈”라는 부가의문문을 통해 재차 확인되는 ‘기막힘’은 눈 내리는 풍경(시간)과 경상도의 맛(장소)과 그 속에 위치한 자신(사람)이 하나되는 순간의 황홀감일 것이다. 완벽한 조화를 뒤로하고 불쑥 묻는다. “그런데, 누가 굽노?” 유쾌한 풍경을 현실적 과제로 돌려놓는 이 질문은 지역어 특유의 타박의 느낌까지 포함하여 해학적이다. 그리고 해학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경상도 본래의 무던함과 듬직함을 살릴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반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을매나 기막히겠노 그쟈”라며 동의를 묻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신천은 흐르고 오리는 떠 있다」에서 ‘모르겠다’는 말이 자기질책을 포함하고 있듯이 말이다
2. 정치의 겨울과 ‘쇠비름풀’의 추위나기
안상학과 장옥관 시에 나타난 ‘장소’와 삶을 연이어 이야기할 때, 공교롭지만 TK(대구·경북)지역의 특수성을 에두르기 어렵다. 강도의 차이와 세대, 성별에 따른 편차를 감안하더라도 사유의 환경으로 놓인 정치색이 언어를 구성하는 정서적 기제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백년의 시간을 오롯이 대구에서 시를 써온 이 중 하나가 이하석이다. 시집 『기억의 미래』(문학과지성사 2023)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면발 휘저으며, 우리는 비탈에 모인 산양들처럼
모처럼 안부 묻기로 소란해진다.
바깥의, 물소리가 방해할 뿐.
오래전, 처형의 일기를 써 내렸던 물.
나가보니 그 물소리로 삭은 기억의 숲이 어둠을 짓뭉개고 있다.
—이하석 「가창댐 아래서」 부분
이 시는 숲이 시작되는 곳, 한 칼국숫집에 모인 이들을 “물소리”가 에워싼 풍경으로 시작된다. 물의 투명함이 ‘소리’를 통해 그 공간까지 청량하게 씻어주는 보통과 달리 여기서 물소리는 안부를 방해하고 숲을 삭게 하며 그로써 어둠까지 짓뭉갠다. 시 제목에 달린 시인의 주석이 이유를 설명한다. “1950년 여름, 대구 가창골에서 민간인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다. 이후 이 골짜기는 댐으로 수장됐다.”2 이후 댐으로 수장되었지만 한국전쟁기 그곳에서 자행된 비극의 기억을 지닌 “산양들”에게 물소리는 여전히 “처형의 일기”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모스끄바로 불렸던 곳. 지금의 대구를 떠올리면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1956년 전국 70%의 지지율로 이승만 후보가 제1·2대에 이어 다시금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될 때 대구시민 72.3%가 진보정치인 조봉암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3 1907년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선 국채보상운동을 시작으로 1946년 미군정에 맞선 10월항쟁이 그랬고, 4·19의 도화선이 된 1960년 2·28학생의거가 그랬듯 대구는 항쟁의 도시였다. 이후의 변화를 두고 혹자는 경북고 출신을 비롯한 TK 인맥들이 정치권에 대거 등용되었던 사실에 기반해 ‘권력의 단맛’을 본 자들의 패권주의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작 박정희가 남로당 경력을 감추고 반공투사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영남지역의 좌익 청산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는 사실은 뒤로 밀렸다. 모두가 하나의 방향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그곳에 여전히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쉽게 잊힌다.
5·16쿠데타 직후 탄압의 대상이었던 진보정당 13개 중 경북사회당 등 5개가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관련 사건 3건과 보도연맹 피학살자 유족회 사건 8건이 모두 영남지역이었다. 박정희정권의 첫 공안사건인 1964년 제1차 인혁당사건의 주요 피의자들은 서울 아니면 영남권에서 활동한 이들이었으며, 1974년 제2차 인혁당사건에서 목숨을 잃은 사형수 전원이 영남 출신이었다.4 말하자면 대구에는 세속적 성공과 정치적 죽음이 격렬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자신들의 지역이 권력의 중심이자 국가의 중심이라는 착각을 지탱한 것이 생각이 다른 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얼룩진 끔찍한 공포와 불안이었다면 어땠을까? 인용한 시(「가창댐 아래 서」) 끝에 나오는 “오랜만에 맞춘 저녁이나마 짐짓 새로 간 보듯이.”라는 표현에서 ‘간 보는 행위’는 현재까지 좀처럼 감가상각되지 않는 불안과 공포에 처해진 자의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구의 탕’으로 읽히는 “대구탕”이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시는, 폭설의 밤처럼 자신들의 장소에서조차 떠돌 수밖에 없는 삶 속으로 정치를 소환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읽히기도 하는 것이다.
실내엔 총선을 앞두고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는 정치 얘기들이 자욱하고
창밖에는 삐라처럼 분분하게 날리는 게 있다.
나는 대구탕이 피어 올려 김 서린 창을 손바닥으로 그어서
갑자기 눈으로 환해진, 캄캄한 밤을 내다본다.
후륜구동이라 눈이 오면 내 차는 젬병이다.
시 외곽 지역은 이미 눈이 쌓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시내에 갇힌 신세라 어쩔 수 없이 여관에서 자고 가야겠지.
정치도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이하석 「눈 내리는 저녁」 부분(『연애 間』, 문학과지성사 2015)
한편 적극적으로 지역의 역사와 대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한 고투를 아끼지 않는 시인 중에 이중기가 있다. 그는 10월항쟁 시기 가장 피해가 컸던 영천의 참상을 본격적으로 다룬 시집 『시월』(삶창 2014)에서부터 『영천아리랑』(만인사 2016),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한티재 2018)까지 지역의 근현대사를 시로 써왔다. 3부작이라 할 세권의 시집을 통해 인민군 9월 총공세와 영천전투의 참혹함,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영천 사람들의 아픔을 담는 데 역량을 쏟아부었다. 탈영병이 되어 북으로 간 형의 이름으로 형수와 가족을 꾸려야 했던 이(「재와 재가 만나서 불이 되었다」,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 다』)부터 소작농의 딸로 일본인 곡물상에게 팔려갔다가 서북청년단의 해코지를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이층 적산가옥 그 여자」, 같은 책) 등을 망라한 작업은, 방대한 자료수집과 증언을 바탕으로 시로 쓴 민중사이자 끝나지 않는 ‘진혼가’라 할 만하다. 연작의 시작은 「서시」이다.
붉은여우가 이단으로 몰아 살처분을 했다는
그해 ‘시월’ 아작골,
삼백 명 죽음 자리 파헤쳐놓은 구덩이에다
인간들은 죽을힘 다해 소 떼를 생매장하고 있었다
이단으로 몰려
우사 아래 억새밭 구릉지로 끌려와
한사코 뒷걸음치는 소 떼들 뱃구레를 툭,
포클레인 삽날이 툭툭툭툭 치면서 지나갔다
(…)
저 인간들이 그해 시월 경찰을 빼다박았군
아니지, 서북청년단이 저기 있잖아
살피듬이 쩍쩍 갈라지는 대한 추위 속에서
짧은 지팡이 하나로 견디는 노인
자작나무 숲 백발을 바람이 마구 헝클어놓았다
청정국 위상 하나 지키겠다는 저 짓거리에서
나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들 절망을 보네
예로부터 인간들 절망은 너무 장엄해서 탈이야
뿔 몇 개,
최후진술처럼 삐죽이 드러나 있는
소 떼들 무덤에는 여진이 잦아들고 있었다
—이중기 「서시」 부분(『시월』)
인터뷰에서 “영천은 46년 7월 빨갱이 동네로 소문”났지만, 훗날엔 “반공투사들밖에 없었”5다고 한 데서 보이는 것처럼, 그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참혹한 과거가 아니라 그 고통이 내성화된 현재일지도 모른다. 참변 후에도 오히려 희생자가 후환을 두려워해야 하는 시대, 세월호의 슬픔 가운데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자들 앞에서 그는 “분노하지 않으려 했으나 흙탕물은 채 가라앉지 않았고 콧김도 여전합니다”(「시인의 말」,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 다』)고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성 없는 색깔론과 편 가르기가 지속되는 한 ‘학살’의 고통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고발과 과거의 극복에 그치지 않는다.
위 시는 구제역 살처분과 미군정기인 1946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기까지 이어졌던 민간인 학살을 겹쳐놓고 있다. 언뜻 단순한 이 비교는 그러나 역사적 경험이 현재성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킨다는 당연한 진실을 넘어, 주체와 대상의 자리바꿈(군인-민간인/인간-동물)을 통한 인식의 전환까지 이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다시 말해, 1946년 10월 학살의 현장인 “아작골”은 비극의 현장이자 고발의 증거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증언의 자리로 기능한다. 기억의 이유가 새삼 그러하듯,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주체’의 강고한 확립이 아니라 지난날들의 지속적인 ‘여진’을 통해 스스로의 자리를 돌아보고 그 장소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의지임을 시인은 보여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인의 분노와 격정이 삶에 대한 융숭한 사유와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다음 시에서 알 수 있다.
중복 무렵 콩밭머리 청석바우에
쇠비름 한아름 뽑아 던져두었다
한 이레쯤 지나 물꼬 보러 가다
청석바우에 무심코 눈길 주는데
어따, 몸살 한번 독하게 앓았네
이제 슬슬 내려가볼까
쇠비름이란 놈 청석바우에 뿌리 박고
몸 한번 휘청 흔들어본다
—이중기 「쇠비름풀」 부분(『밥상 위의 안부』, 창비 2001)
시인은 『다시 격문을 쓴다』(작가마을 2005) 서시에 “나는 논과 밭을 경전으로 삼았다”고 선언하며 “물소리 바람소리 다 말라버린 가뭄을 건너//슬픈 남루를 액자에 담아 거는 극지의 노을까지//농사짓는 일이 명부전 같다”(「나의 경전」)고 쓴 바 있다. 간명한 어투에서 흙과 함께하는 시련까지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뿌리내린다’는 것은 공동체적 공간에 대한 참여이면서 몸과 장소가 정서를 매개로 결탁하는 연대를 형상화한 말일 것이다. 장소에 깃든 기억의 복원과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구성원들의 현재이자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중기의 작업은 장대한 진혼가를 연상시킨다 하더라도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향해 보내는 미래의 보증서처럼 느껴진다. 담보는 저 “쇠비름풀”의 생명력이다. 뽑혔으나 바위 위에서도 뿌리내리는 힘. 오늘날 대구와 영천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에게는 “청석바우”에 던져진 쇠비름풀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은 “몸살” 중인 그 몸을 깨우기 위한 시인의 언어는 청석바우 위에 퍼붓는 비처럼 차갑다.
3. 시인의 장소와 ‘뻐꾸기 둥지’ 짓기
장옥관은 대구라는 도시에 흐르는 ‘광기’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듣자면 정말 그리 느껴지기도 하는데, 광기라는 것이 조금씩 처연한 발원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생경한 이야기 끝은 대체로 쓴맛을 안은 짧은 침묵을 남긴다. 시인의 어느 산문에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던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문학써클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지 않더라도 기형도가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6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는데, 내가 궁금했던 에피소드는 말미에 덧붙여져 있었다.
그는 김원일, 김원우 두 형제 소설가의 막내 동생.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술로 자신의 삶을 탕진하다가 25세의 나이로 자진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시의 제단에 자신의 모든 것을 갖다 바친 대구 문청의 표상이 김원도였다. 그의 죽음이 당시 문청들에게 얼마나 극적인 사건으로 다가왔는지 알려주는 사례가 있다. 그가 간 뒤 얼마 뒤 향촌동에서 가졌던 술자리에서의 일이다. 어떤 문청이 술을 마시다말고 잠바 안주머니에서 무릎 뼈 하나를 꺼내더라는 것이다. “이게 원도 뼈다.” 그러자 앞에 앉은 한 인물도 ‘원도 뼈, 나도 있다’며 주섬주섬 꺼내는 거라.7
그 뼈는 1975년 등단한 해에 스물다섯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원도의 것이지만, 이제 남은 친구들의 것이 되었다. 진의를 알 수 없다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 끌렸다. 이상한 소유의 이동과 중첩이 서로를 결박한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뼈를 통해 남은 자들이 김원도의 처소가 되고, 그의 뼈는 남은 자들이 기댈 거처가 되었다. 그들에게 김원도가 ‘시인의 표상’이었다면, 저 행위는 스스로 시라는 장소를 품는 것이면서 시가 그들의 장소로 변하는 일인 셈이다. 공포와 불안이 대구를 휩쓸었던 시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 거처가 아니었을까? 장소는 선형적 시간을 도려낸다. 과거를 현재에 덧댈 뿐 아니라 현재를 과거의 심연 속에 맡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를 지켜낸다.
홀딱 벗고 대곡 사거리에 서 있어보았다
1972년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담대함 또는 무지함으로
이제부턴 미국인과 나이 세는 법이 같아진다는데
아무도 내가 홀딱 벗은 것에 놀라지 않아서 놀란다
서너 대 정도는 예의상이라도 멈칫거릴 줄 알았는데
차들은 유유히 나를 지나쳐 자기들끼리 교행한다
어쩌다 나는 가드레일보다 못한 지경까지 왔는가
그때 나는 우리로 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그때
나 홀로 사는 것이 우리에 대한 험담이던 시절 그때
나의 알몸에 반응하지 않던 차들이 갑자기 경적을 울린다
좀 더 큰 소리로 그때! 라고 외쳐본다
그러자 차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끽끽- 멈춰 서며
당장 그 입을 닥치라는 듯 경적을 높인다
그제야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나는 기분으로
대곡 사거리 한복판에서 알몸으로
그때! 그때! 뻐꾸기처럼 노래 부른다
난 절대 잘못 떨어진 뻐꾸기 새끼가 아니다
여기는 나의 둥지, 너의 둥지, 우리의 둥지가 아닌가
그때! 그때! 내가 날뛰자 차들은 덜컹! 덜컹!
부딪치고 멈춰 서며 사거리는 조금씩 엉켜 든다
—황성희 「사거리 옛날 뻐꾸기」 부분(『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 아침달 2024)
황성희 시인은 등단 20주년에 맞추어 발간한 시집(『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 유』)에서 “취팔선 진천점”(「취팔선에서 생긴 일」)이나 “효목동 어전 회국시”(「김 의 탄생」) 등 대구의 장소나 가게를 직접 노출시키곤 한다. 이 시의 화자 역시 “대곡 사거리”에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알몸”이다. 그러나 “나이 세는 법”마저 세계화·표준화된 세상에서 한 사람의 일탈은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다. 화자는 “그때!”에 대한 적극적인 환기를 선택하는데, 그제야 반응이 나타난다. 자기네들끼리 유유히 오가던 차들이 경적을 울리다가 마침내 뒤엉킨다. 우리 혹은 우리의 시절은 배척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교행하는 곳. 그 질서를 교란시킨 것이다. 이 시의 ‘그때’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탁란의 뻐꾸기처럼 객으로 취급되었던 시절에 대한 호명. 이는 관계의 파멸과 그에 따른 소외에 대한 폭로일 수도 있으며, 타자화되었던 여성과 그 삶에 대한 처절한 항변일 수도 있다. 다만, 알몸을 향해 차들이 뒤엉켜 있는 저 끔찍한 풍경이 잔가지와 지푸라기로 이어낸 둥지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저 둥지 속 소리치는 화자가 객이 아니라 삶의 진짜 주인이 아닌가 하는 것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공동체가 어떤 모양이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재고하게 만든다. 언제고 시인은 역사의 복판에 알몸으로 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안과 고통과 헛된 열망으로 가득 찬 세계를 잠시나마 멈춰 세울 수 있다면 말이다. 삶에 뿌리내리면서, 자신의 장소를 일구면서, 끝없이 외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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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홈페이지 ‘단천리’ 참조(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151).↩
-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50년 여름 군경에 의해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 등 1,400명 이상이 가창댐과 김천 등지에서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희생된 형무소 수감자들은 대부분 1946년 10월항쟁 때 잡혀온 이들이었다. 쌀값 폭등과 굶주림에 분노한 대구시민들이 10월항쟁을 일으키자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을 진압했던 것이다. 대구형무소의 환경은 다른 형무소보다 특히 열악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1950년에는 가창골 학살을 포함해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에 대한 대대적 처형·학살이 벌어졌다. 「트럭에 실려 사라진 사람들: 대구·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웹페이지 참조(jinsil.go.kr/KoreanWar/29.do).↩
- 「1956년 조봉암 72%, 대구… 1946년 10월항쟁, 대구의 과거와 현재」, 평화뉴스 2025.10.4.↩
- 윤정원 「1차인민혁명당사건과 도예종의 활동」, 『대구사학』 133호, 2018; 「좌파도시 대구는 어떻게 반공과 지역주의의 첨병이 되었나」, 한겨레 2017.1.11; 「인혁당 사건 억울한 희생·유족 고통은 누가…」, 매일신문 2007.1.24;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5·16 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서』, 2009 참조.↩
- 「복숭아 키우며 고향 영천을 ‘인문학 도시’로 만드는 시인」, 한겨레 2025.9.21.↩
-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296면.↩
- 장옥관 「간절함이라는 문학의 뼈」, 태동기문학동인회 엮음 『그리고, 우리는 쓰기 시작하였다』, 모악 2018, 5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