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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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鄭一根

1958년 경남 진해 출생. 19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경주 남산』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소금 성자』 『혀꽃의 사랑법』 등이 있음.

siinj@naver.com

 

 

압록에서 압록까지

 

 

오리 머리 빛 닮은 푸른 강물 흘러

그 압록이 국경의 강 이름 되었는데

내게 어떤 전생이 있어 한번 가보지 못한

강의 물빛 너울너울 이리 눈에 선명한가

다하지 못한 꿈이 이토록 안타까운가

압록 압록 중얼거려보면 환히 보이는 안부

하마 지금이면 우라지오1 쪽에서 날아와

남을 향해 가는 하늘 덮은 기러기떼 그림자

그 강물 위에 회오리물보라 이는 듯 자욱하겠다

내 아낙은 첫얼음이 얼기 전에 끝내야 할

두툼한 겨울옷 누비 바느질로 밤을 새우겠다

강에 나간 내 착한 아이들은

얼음이 얼었는지 돌멩이를 던져 살펴보고

강 건너 이국 친구의 이름 힘껏 불러보겠다

나는 언 잉크병 호호 입김 불어 녹이며

낡아 뭉툭해진 펜으로 어떤 시를 쓰고 있는가

압록이란 말에서 기억의 장면 장면이 찾아왔다가

신기루인 듯 사라지는데 잡을 수 없다

오늘 곡성 섬진강 지나며 오곡면 압록리에서

물소리에 국경 압록의 강물 소리가 겹친다.

남 압록 북 압록의 물길이 하나로 이어지며

사방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터져나오지만

남쪽 압록은 강 밖으로 한걸음만 물러서면

이미 개 한마리 짖지 않는 적막한 한촌이다

어두워지는데 불 밝히지 않고 마을은 졸고 있고

동으로 서로 이어지던 압록역은 폐역이 되었다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 스산한 마을에서 나는 왜 통곡이 터지는가

먼 국경의 압록인들 저녁 등불 하나 켜지겠는가

붕어곰국에 술잔 나누는 친구들이 있겠는가

통일되면 압록을 찾아가리라는

이제 그런 덧없는 결심은 하지 말아야지 해도

오늘 남쪽 압록에서 물을 베고 하룻밤 청하며

북쪽 압록에서 못다 한 꿈을 꾼다

압록에서 압록까지 이어지는 뱃길을 내고

남에서 북으로 단풍놀이 배 띄워 찾아가고

북에서 남으로 꽃놀이 배 띄워 찾아와

남 압록 북 압록 거대한 하나가 되는 꿈

그 물빛 모두 오리 머리로 되살아 날아올라

한반도를 푸르게, 짙푸르게 뒤덮는 꿈일지라도

그 꿈 또한 부질없는 꿈일지라도

깨고 나면 더 황망한 꿈일지라도.

 

 

 

추분(秋分) 지나며

 

 

어언간(於焉間) 북위 35도에 밤이 슬슬 길어지는 시간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듯 나 또한 고개 숙이고

그 사람 골똘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길어지는 밤의 반을 잠자지 못하고 고래처럼 깨어 전전반측하며

내 잠의 꽃잎 말라 가벼워지다가 점점이 바스러지다가

 

나는 내 속에서 발화한 불로 살과 뼈 다 태운 뒤

하얀 재로 날리며 하루 흰죽 한그릇으로 사위어갈 것이다

 

마침내 큰 눈 내리는 밤 지나 두꺼운 얼음 어는 새벽 건너

나는 두 눈만 남는다 한들 너를 바라보며 살고 싶다

 

내 왼눈에서 동쪽 바다 따라 해 지고

내 오른눈에서 서쪽 강 따라 달 뜨는 사이

갈증에 젖 먹고 피를 마시는 끝으로 졸졸 봄 물소리로

너는 오려니 기어코 밤을 이기고 올 것이니

 

죽는 일이 사는 일에 있듯이

사는 일도 죽는 일에 있어

시시각각 길어질 볕에 꽃 활짝 피며 여기저기서

나는 부활하듯 일어서 달려가려니

 

한 계절 살다 간들 단 하루 살다 간들

종일 해를 따라가는 키 작은 해바라기가 된들

티베트 어린 라마승마냥 손뼉 치며 웃으며 즐거울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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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라지보스또끄. 이용악의 시에서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