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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수린 白秀麟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여름의 빌라』『봄밤의 모든 것』, 짧은소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등이 있음.

 

 

 

장편연재 2

온통 부드러운 흰빛

 

 

3.

 

9월이 되자 날씨가 선선해졌다. C읍은 익어가는 깨의 고소한 냄새와 곡식의 풋내, 아직은 더운 열기에 데워진 흙냄새로 가득했다. 과수원에선 과일들이 탐스럽게 익어갔고, 슬레이트 지붕 위에 널어둔 붉은 고추들은 가을 햇볕에 반짝였다. 산책하다가 하천 위에서 분주히 날갯짓하는 물새들이나 배추밭에서 장난치는 강아지를 볼 때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처음에 이름을 댜댜라고 알고 있던 알렉싼드르가 우리 집 수도를 고쳐주고 간 뒤 봄밭식당에 갈 때마다 그를 찾았지만 한동안은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를 찾은 건 수도를 고쳐줬던 날 내가 이상하게 행동한 것을 사과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친척이나 마찬가지’라던 아르뚜르의 말이 무색하게, 단골손님들 틈에서 그의 얼굴은 통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가 오지 않을까 식당의 문이 열릴 때마다 긴장하며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쉬움인지 안도감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곤 했다. 나를 신경 쓰이게 한 건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었다. 나에게 괜찮냐고 묻던 그의 눈에 깃들어 있던, 비난이나 짜증이 아닌 염려의 빛. 그는 내게 아무것도 더 묻지 않았다. 고장 난 것을 능숙하게 고치는 전문가답게 어쩌면 그는 내가 어딘가 망가져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챘는지도 몰랐다.

 

그즈음 나는 그전보다 자주 봄밭식당을 찾았다. 빅또리아 할머니의 허리가 좀처럼 낫지를 않아서, 내가 식당 일을 몇주간만 전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돕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할머니의 일이었지만, 설거지를 한다거나 식재료를 다듬는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내겐 그곳을 찾는 그 누구보다도 시간이 많았다.

봄밭식당에서 가장 자주 손질해야 하는 채소는 단연 당근이었다. 그곳에서는 이틀에 한번꼴로 수십개의 당근을 채 썰었는데, 그건 마르꼬프차가 떨어지지 않게 늘 만들어두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마르꼬프차는 고려인들의 식탁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었다. 강제이주 당시 배추나 무처럼 한국에서 익숙한 채소를 쉽게 구할 수 없었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땅에서 흔히 나는 당근을 길게 채 썬 후 마늘과 식초, 고춧가루와 기름을 더해 무치는 방식으로 한국식 김치의 기억을 이어나갔다. 소금을 뿌려 숨을 죽인 당근채를 손으로 주물러 내며, 그들은 이국땅에서 뿌리내린 스스로의 삶을 곱씹었을 것이다. 빅또리아 할머니가 이틀에 한번꼴로 당근채를 써는 것은 마르꼬프차가 한국식 김치처럼 장기 발효하는 식품이 아니라, 짧게 냉장보관했다 먹는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갓 버무린 당근김치를 한입 입에 넣으면 생채의 아삭한 식감과 톡 쏘는 신맛, 기름의 고소함과 고수 씨앗의 청량함이 동시에 퍼졌다. 할머니는 내게 당근을 채칼로 써는 시범을 보이면서, 상큼한 맛이 기름진 고기요리나 빵과도 잘 어울려서 고려인뿐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물론 다른 구소련지역의 사람들도 고려인식 당근김치인 이 마르꼬프차를 즐겨 먹는다고 일러주었다.

식당에 오는 사람 중 마르꼬프차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단연, 아지즈였다. 아지즈가 오면 빅또리아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그릇보다 두배는 되는 양의 마르꼬프차를 접시에 담아 내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자주 리필을 해주어야 했으니까.

아지즈는 인근 농장에서 일하는 우즈벡인 노동자였다. 눈썹이 짙고 덩치가 큰 아지즈와 그의 아내 딜노자는 점심 도시락을 싸 오지 않은 날에는 언제나 봄밭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작업복 차림에 밀짚모자를 쓴 그들은 늘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식당에 들어왔다. 그들이 식당에 들어오면 항상 주위가 환해졌고,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아지즈의 몇마디 말에 가게에 있던 손님들은 곧잘 웃음을 터뜨렸다. 주말에 아지즈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을 찾기도 했다. 아지즈 부부에게는 열여덟살인 아들과 열네살 딸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각각 우미드와 말리까였다. 식당에서 말리까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나 어머니와 달리 말리까의 한국어가 너무나도 완벽했던 것이다.

“한국말을…… 정말 잘하네요.”

내가 놀라서 말하자, 주말이라 식당 한구석에서 놀고 있던 아르뚜르가 웃음을 터뜨리며 외국어의 흔적이 있는 한국어로 참견을 했다. “당연하죠. 말리까 누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잖아요.”

아지즈는 19년 전 어린 아들과 아내를 모국에 두고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 딜노자와 우미드가 한국에 온 건 그로부터 4년 후였고, 이듬해 말리까가 태어났다. 아지즈가 아르뚜르나 빅또리아 할머니와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것과 달리, 딜노자와 남매는 늘 한국어로만 이야기를 나눴는데, 민족은 다르지만 그들 모두가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런 모습은 내 눈에 참 어색해 보였다.

“그건 아르뚜르나 빅또리아 할머니는 우즈벡어를 모르고 엄마와 우리는 러시아어를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의아해하는 내게 언젠가 말리까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빠는 대도시에서 학교를 다닐 때 러시아어를 배워서 조금이나마 할 줄 알지만요.”

구소련이 붕괴한 이후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자문화 중심 교육을 펼치면서 러시아어를 금지했고, 러시아어밖에 할 줄 모르던 고려인들은 좋은 교육이나 일자리를 얻을 기회를 점점 잃게 되어 또다시 러시아나 한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렇게 알게 됐다.

 

몇 안 되던 손님들이 일찌감치 떠나 평소보다 이르게 영업을 마감한 어느 주말 저녁이었다. 그날따라 허리가 더 아팠던 빅또리아 할머니가 뒷정리를 내게 맡기고 먼저 귀가해 혼자서 텅 빈 식당의 테이블에 앉아 당근채를 썰고 있는데, 식당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몇주 만에 다시 보는 거였지만 나는 그를 바로 알아봤다. 알렉싼드르의 큰 키와 길고 커다란 외꺼풀의 눈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러시아어로 내 쪽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던 그가 뒤늦게 나를 알아보았는지 한국어로 바꿔 다시 물었다.

“벌써 장사가 끝났어요?”

내가 우물쭈물 대답을 않자 그는 “할머니는요?” 하고 물었다.

그날 나는 할머니가 평소보다 일찍 귀가했다는 것을 알고 낙담해 집으로 돌아서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늦은 시간 허기져서 식당을 찾은 게 틀림없는 그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싸 가려고 챙겨둔 쁠롭과 당근김치, 가지샐러드를 덜어 그의 앞에 가져다놓았다.

“돈은…… 안 내셔도 돼요.”

그가 음식을 먹는 것을 확인한 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당근채를 다시 썰기 시작하자 조용한 식당 안에는 채칼질 소리와 그가 음식을 먹는 소리만 들렸다. 그렇게 말없이 있다보니 문득 주인도 없는 공간에 단둘이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이 조금 어색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궁금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뜻밖에도 그는 나를 보며 말없이 웃고 있었다.

“왜……요?”

“아니, 신기해서요. 여기에서 한국사람이 당근을 썰고 있으니까.”

이어서 그가 내게 물었다.

“여기서 일해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말하는 내내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보았고, 그 탓인지 그에게 또다시 무언가를 들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앞에선 감추려 애쓰는 불안이나, 나의 깨지기 쉬운 부분 같은 것을. 마치 우리 집에 그가 불쑥 왔던 날처럼. 나는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 허리가…… 나을 동안만요.”

이후 우리는 식당 문을 닫고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 한동안 같이 걸었다. 푸른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도로변에선 풀벌레 소리가 소란했다.

“집에 책이 많던데 그런 일을 해요?”

그가 불쑥 물었다.

“네?”

“책 말이에요.”

“아, 원래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어요…… 아이들에게…… 요즘엔 번역을 해요.”

밤공기에는 인근 과수원에서 익어가는 복숭아의 어지러울 정도로 달큰한 향이 가득했다. 나는 뭔가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 생활은…… 어때요?”

“좋아요.”

그가 이어서 말했다. 한국어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채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그날 저녁 나는 그가 외벽 관리 전문업체에 고용되어 있고, 전국의 병원이나 상가의 외벽을 청소하거나 도장하는 작업을 하다가 일이 끝나면 C읍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집을 수리하는 데 능한 것은 국가자격증을 따서 정규직으로 채용되기 전, 오랫동안 이삿짐센터와 건설현장에서 일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우즈베키스탄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했다는 그는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자재를 나르고 배관기술자들의 손을 거들거나 단독주택 보수 현장에 나가 벽의 금을 시멘트로 메웠고, 깨진 타일을 교체하는 일을 도우며 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처음 한국에 올 때…… 겁나진 않았어요?”

“겁났죠.”

짧게 답하는 그의 옆얼굴을 나는 돌아다보았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었는데 수염이 잘 나지 않는지 턱이 매끈했고, 턱선은 단정했다. 그는 주머니에 두 손을 넣더니 조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쑥스러워하는 듯한 말투로 낮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살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살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말이 내 마음을 건드렸다.

여전히 그를 댜댜씨라고 부르는 내게 그가 댜댜는 아저씨, 삼촌을 뜻하는 말이라고 알려준 것도 그날이었다.

“내 이름은 알렉싼드르예요. 최알렉싼드르. 가까운 사람들은 사샤라고 불러요.”

최알렉싼드르. 알렉싼드르는 나중에 우리가 조금 가까워졌을 때 내게 그의 이름이 외국인노동자에게 걸맞지 않게 너무 고풍스럽고 귀족적이라는 소리를 한국인으로부터 종종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한 말은 “뿌시낀처럼요?”였다. 내 말에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뿌시낀처럼요.”

그가 옥상 방수페인트 이야기를 꺼낸 건 내가 수도꼭지를 고쳐줘서 고맙고 그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하며 사실 그 집이 엄마의 집이었고, 낡은 집에서는 처음 살아 관리하는 법을 몰라 난감할 때가 많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더듬더듬 말했을 때였다.

“옥상에 방수페인트는 다시 칠했어요? 오래된 집이면 겨울이 오기 전에 한번 살펴보는 게 좋을 텐데.”

옥상 방수페인트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해줄게요.”

별일이 아닌 것처럼, 마치 주머니 속의 사탕 한알을 꺼내 건네주듯이.

그리고 그는 정말로 며칠 후, 일이 없는 날 이른 아침 우리 집에 장비를 실은 1톤 트럭을 타고 찾아왔다.

 

그가 옥상을 보러 왔던 날, 나는 그를 따라 처음으로 옥상에 올라갔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때까지 단 한번도 계단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가 성큼성큼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고 나는 앞장서는 그를 따라 계단을 한칸씩 디뎠다. 옥상에는 빈 장독 몇개와 잡초가 무성히 자란 화분 두어개가 있었다. 옥상 위에선 탁 트인 하늘과 저 멀리 들판의 끝자락이, 노란빛을 띠기 시작하는 논과 밭 사이를 가르마처럼 나누며 지나는 길이 만들어낸 부드러운 곡선이 보였다.

알렉싼드르는 정말 능숙한 전문가였다. 그는 옥상을 둘러보고 바닥의 상태를 점검하더니 사나흘 정도면 충분히 끝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사흘간 매일 아침 8시에 집에 와서 곧장 옥상으로 올라갔고, 점심쯤 잠시 내려왔다가, 해가 너무 뜨거워지기 전에 그날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옥상에서 일하는 동안에 나는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주로 집 안에 머물렀다. 하루에 두번 그에게 물을 가져다주기 위해 계단을 오를 때를 제외하고는. 일에 집중한 그는 매번 나의 방문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면 나는 그가 날 알아차릴 때까지 그를 부르지 않고 선 채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처음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옥상 난간을 뛰어넘는 그의 모습이었다. 내가 물을 가져다주러 간 첫날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렉싼드르는 옥상의 난간대 밖의 좁은 공간에 서 있었다. 내가 너무 놀란 마음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는데 그 순간 알렉싼드르가 난간을 훌쩍 넘더니 옥상 안쪽으로 가볍게 착지를 했다. 한마리의 새처럼, 두려움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그 모습이 감광지에 빛의 흔적이 찍히듯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그가 하는 일은 초가을 햇빛 속에서 허리를 숙이고 롤러로 리드미컬하게 바닥을 밀듯 칠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러고 있노라면 오후의 햇빛이 무용수의 몸을 비추는 무대 조명처럼 그의 움직이는 상반신을 비췄다. 페인트칠하는 사람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탄탄하게 다져진 어깨와 길고 아름다운 팔근육. 허리를 굽혔다 펴는 동작을 거듭할수록 땀이 이마와 콧등에서 떨어졌다. 그의 다갈색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땀에 젖은 그의 살갗은 밀랍을 바른 것처럼 윤이 났고, 그러다 나를 발견한 그가 몸을 일으키면 그의 등줄기는 여름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곧게 섰다.

 

그가 옥상 페인트를 칠해주고 난 뒤 나는 번역작업을 하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면 옥상에 자주 올라갔다. 청명한 9월에 작은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가져다놓고 옥상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조는 고양이들과 우듬지 부분부터 천천히 불그스름한 색이 번져가는 활엽수들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이따금 저 멀리서 하얀 1톤 트럭이 지나가는 것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가을볕 속에 앉아 있노라면 어디선가 마음까지 흔들 것 같은 바람이 불어와 단정하게 빗은 내 머리카락을 헝클고 지나갔다.

 

*

 

내가 아르뚜르와 말리까의 공부를 도와주게 된 것은 알렉싼드르의 부탁 때문이었다. 옥상 페인트칠 작업의 재료비만 받으려는 알렉싼드르에게 사례를 또 하지 않을 순 없다고 말하자 알렉싼드르는 그렇다면 돈을 주는 대신 아르뚜르와 말리까가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게 한달만이라도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카같이 생각하는 아이들이라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데, 내 주변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나는 어떤 형태로든 아이들을 다시 가르치게 되는 것이 조금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말을 하려고 하면 숨이 차고 더듬거리게 되는 증상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어차피 이따금 만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호준을 제외하면 C읍에서 만나는 사람 중 거침없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도 몇 없었다. 그런데 한국어가 서툴러 수업시간에 잠만 잔다는 아르뚜르는 그렇다 쳐도 왜 말리까에게까지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까? 그 점이 의문이었는데 며칠 후 내가 식당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 할머니의 허리가 나았는지 걱정하며 식당에 들른 딜노자를 통해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식당 여는 날을 조금 줄일라고.”

빅또리아 할머니와 딜노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 근처에서 열탕소독한 수저들을 마른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사샤가 부탁해가지고 세원이가 말리까 공부 도와준다는데, 어때?”

빅또리아 할머니의 질문에 딜노자는 환히 웃더니 “너무 좋아요” 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말리까 꼭 대학 보내고 싶어요.”

“우미드도 공부 너모 잘했는데 아까와.”

“우리 다 생각했어요. 우미드 대학 못 간다고.”

딜노자가 떠난 다음 나는 아지즈 남매에 대한 이야기를 빅또리아 할머니에게서 조금 더 들을 수 있었다. 둘 다 공부를 무척 잘했는데 우미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서 고등학교를 그만두었고, 말리까 역시 오빠를 따라 공부에 손을 놨다가 최근에 대학에 갈 수 있는 희망이 보여 다시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였다.

알렉싼드르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아지즈네 가족은 우리 집과 봄밭식당의 중간쯤에 있는 과수원 노인 집의 별채에 살았다. 시내에 있는 말리까의 학교까진 버스를 타고 한시간이나 가야 했지만 그들이 말리까의 다른 친구들네처럼 시내에 있는 공동주택을 얻어 살 수 없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합법적인 체류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지즈 가족이 미등록상태에 놓이게 된 건 남편이 너무 그리워 아들과 함께 관광비자로 한국에 왔던 딜노자가 말리까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한국에 남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아지즈 역시 이제 막 임신한 앳되고 아름다운 아내를 어린 아들과 둘이서만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가족동반 체류가 안 되는 외국인노동자 신분으로 이미 4년이나 홀로 사는 동안 외로움 탓에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아지즈는 매일 밤 불안한 미래 때문에 울먹이는 딜노자의 젖은 속눈썹에 수도 없이 많은 입을 맞추어주었다. 점점 부풀어오르는 딜노자의 배에 대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랑과 축복의 말을 속삭였다. 그는 종교심이 깊은 남자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몸이 떨려올 때면 비닐하우스 철선을 조이거나 쌓아둔 볏단을 옮기다가 신의 가호를 빌었다. 딸이 무사히 태어났을 때, 아지즈와 딜노자는 아이를 보는 순간 동시에 이름을 떠올렸다. 한국의 서류에도 우즈베키스탄의 서류에도 그 존재가 기록되지 못한 아이의 이름은 ‘여왕’ 또는 ‘고귀함’을 의미했다. 몇년 동안 조금 더 고생해서 목돈을 모으면 고국으로 되돌아가려던 아지즈 부부의 계획이 틀어진 건, 아이들 때문이었다. 우즈벡어보다 한국어를 훨씬 더 잘하고, 우즈벡 음식인 쏨싸나 하눈보다 떡볶이와 양념치킨을 더 좋아하며, 살구꽃과 아몬드꽃이 만발하는 우즈베키스탄의 봄보다 벚꽃잎 흩날리는 한국의 봄에 더 익숙한 아이들은 해가 갈수록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을 뿌리가 뽑히는 일처럼 두려워했다. 모든 친구들이 한국에 있어서, 자신들의 키를 키우고 살을 찌운 모든 것이 한국에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말리까와 우미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일 뿐이었다.

 

할머니가 장사를 쉬기로 한 어느 일요일, 딜노자의 손에 이끌려 말리까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말리까는 시선을 내리깔았고 두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이가 처음부터 내게 마음을 열진 않았지만, 어느날 히잡을 쓴 그 아이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1 라고 속삭이듯 외우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아이를 예뻐하지 않을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공부하기보다는 장난을 치고 싶어만 하는 아르뚜르와 달리, 말리까는 언제나 미간을 찌푸린 채 집중해서 문제집을 풀고 영어단어를 암기했다. 어릴 때부터 쪽지시험을 보면 만점을 맞곤 했다던 말리까는 이해력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자기 명의로는 휴대전화를 개통할 수도 이메일주소를 만들 수도 없고, 청소년 할인 교통카드조차 가질 수 없는 처지 때문에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포자기하고 있던 말리까의 마음이 바뀐 것은 한국에서 태어난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 체류를 허가해주는 제도가 한시적으로나마 생겼다는 소식을 알렉싼드르가 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추방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데도, 엄마 아빠가 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체류 허가 신청을 해줬으니 나는 꼭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에도 가야 해요.”

대학에 가면 무엇을 공부하고 싶냐는 나의 질문에 문예창작과에 가서 소설이나 시 쓰는 법을 배우고 싶다던 말리까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거예요. 내가 대학 졸업한 뒤에도 한국에 체류하려면 연봉 3, 4천을 버는 회사에 바로 취직을 해야 한다는데 소설이나 시를 써서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우리가 이런 대화를 소곤소곤 주고받으며 공부를 하고, 아르뚜르가 마지못해 숙제를 하는 동안 딜노자는 식당 한구석에서 빅또리아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말리까를 보는 딜노자의 눈에는 언제나 자부심이 일렁였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의 빛이 뒤섞인. 그건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눈빛이었다.

 

내가 미국에 살았을 때, 엄마는 나를 한인타운 내 학교가 아니라 유태인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에 보내기 위해 무리를 했다. 그 학교가 교육열이 높은 명문학교라는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미국에 간 첫 해, 내가 영어를 제법 하게 되기 전까지 엄마는 엄마 자신도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서 매일 내게 단어를 외우게 시켰다. 두꺼운 프라임영어사전에서 관사 a에 대한 설명부터 aa와 aardvark를 거쳐 abandon과 abandoned까지, baa와 babble을 거쳐 baboon과 bachelor까지. ‘관사’나 ‘아프리카개미핥기’ ‘개코원숭이’가 무슨 뜻도 모르면서, 나는 사전 속 글자들을 외웠다. 엄마는 한인식당에 다녀와 지친 몸으로 매일 밤 내게 단어시험을 보게 한 뒤 다 외운 것을 확인하면 사전의 그 페이지를 찢게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 단어시험이 내 영어실력 향상에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가 강세도 틀리게 불러준 단어들을 나는 나중에 전부 다 새로 배워야 했으니까. 그 시간이 내게 남긴 것은 영어 어휘보다는 엄마에게 내가 미국에서 잘 정착하는 것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실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시험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백지를 내고, 수업시간에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했다는 이유로 같은 반 아이들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나는 미국에서 살아남으려 애썼다.

 

그 시절의 기억 덕분에 나는 말리까의 절박함과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 공부를 싫어하게 된 아르뚜르의 어려움을 이해했다. 그리고 나는 영어학원에서 일하던 시절, 한국어로 오두막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cabin이라는 단어를 외우고, 가본 적도 없는 미국의 50개 주의 스펠링을 외워가며 레벨테스트에 합격하려 애쓰던 아이들의 마음도 어느정도는 이해했다. 한국어로 말하면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제 뜻을 표현할 수 없어 바지에 오줌을 싸고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 아이들의 마음도.

내가 이해할 수 없던 것은 레벨테스트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보다 더 초조해하는 엄마들의 눈빛이었다. 어째서 그들의 눈빛 속에는 나의 엄마나 딜노자와 같은 불안과 절박함이 담겨 있었을까? 그들은 모두 자기 나라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아는 대부분의 한국계 이민자들은 자식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그것만이 자신들을 낯설고 불친절한 세계에서 살아남게 해주리라고 믿었으니까. 빅또리아 할머니는 내가 알고 있는 이민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혈육의 교육에 목숨을 걸지 않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손주인 아르뚜르의 공부를 내가 도와주길 바랐지만 아르뚜르가 오후 내내 장난만 치고 놀아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할머니는 아르뚜르에게 성공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았고 부모의 인생을 대신 살아야 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 가을볕이 좋았던 오후, 나는 식당 앞 평상에 널어둔 들깨를 뒤섞는 할머니 옆에 앉아서 말했다.

“할머니는 왜 아르뚜르의 공부에 욕심이 없어요?”

마당의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할머니의 손길에 따라 고소한 들깨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날 할머니는 한참의 침묵 끝에 연이 끊긴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고 성공을 위해 온갖 뒷바라지를 했던 장남은 할머니가 열망했던 대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아주 인정받는 엔지니어가 되었고 이제 상류층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치만 걔는 나를 끔찍하다 했어.”

할머니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걘 나를 용서 아이할 거야.”

 

*

 

빅또리아 할머니의 아들에겐 할머니가 끔찍한 사람일지 몰라도, 봄밭식당의 단골들에게 할머니는 누구보다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손주를 대신 돌봐주는 것을 보면 딸에게도 나쁜 엄마는 아닌 것처럼 보였고. 할머니는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법을 배웠던 걸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할머니가 사랑을 베풀 줄 모르는 끔찍한 사람이었다면 한국인 농가에서 배추와 무를 수확해 김장을 할 즈음에 식당에서 300여개의 무청을 손질하려고 계획하는 할머니를 돕겠다고 너도나도 자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가을이 깊어지면서, 시골은 도시보다 더 빨리 어두워졌다. 나는 저녁에 나가던 산책을 오전 시간대로 옮겼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면 밤새 차가웠던 공기가 햇살에 서서히 데워져 걷기에 알맞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옅은 입김이 희미하게 번졌고,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빈집의 후락한 담벼락 안쪽에서 익어가는 다홍빛 감들. 길가에 피어 있는 키 큰 코스모스들. 추수를 마쳐 거무스름한 흙빛을 드러내는 논바닥 곳곳에서는 볏짚단이 얌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들판에는 개망초와 씀바귀 꽃들이 하얗고 노란 점처럼 박혀 있었고, 톡 쏘는 향을 풍기는 청갓과 보랏빛 쑥부쟁이가 흐드러졌다. 그리고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이나 봄밭식당을 오가는 길에 알렉싼드르와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추워져서 일이 줄어든 걸까? 대부분은 어딘가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나 그가 몰고 가는 트럭을 보는 것이었지만 가끔은 외로워 보이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서 있던 걸까? 나와 눈이 마주치면 방금까지는 추위에 얼어붙은 듯 보이던 그의 얼굴선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볼 때면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속에 파랑이 일었다.

 

 

4.

 

빅또리아 할머니는 매해 겨울이 오기 전 봄밭식당에서 시래기를 말렸다. 가을이 깊어지면 우선 할머니가 하는 일은 이웃의 농가에서 싱싱한 무를 사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엔 무청을 잘라냈고, 삶은 후 그늘에 말렸다. 그렇게 할머니가 11월마다 무청을 말리는 것은 어머니에게 배운 방식이었다. 할머니는 1년 내내 시락장물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이 연례행사를 거를 수가 없었다. 시락장물은 어머니에게 배운 음식 중 빅또리아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는데 ‘시락’이 ‘시래기’를 가리키고 ‘장’이 된장을 뜻하니 시락장물이란 우리식대로 하면 시래기된장국을 의미했다. 시락장물을 끓이기 위해서 빅또리아 할머니의 어머니는 그 어머니가 그랬듯 메주를 쒀서 된장을 담갔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빅또리아 할머니가 놀란 것 중의 하나는 된장을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슈퍼마켓에는 서로 다른 상표를 단 된장들이 넘쳐났고, 빅또리아 할머니는 조상의 나라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우즈베키스탄에 살던 시절, 빅또리아 할머니는 식구들에게 먹이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시락장물을 끓였다. 이제 할머니는 한국에서 시락장물을 끓였다. 멸치육수를 내서 시래깃국을 끓이는 한국사람들과 달리 돼지고기를 크게 썰어 넣고서. 빅또리아 할머니의 어머니가 빅또리아 할머니에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알려주기 위해 끓였듯, 빅또리아 할머니는 한국에서 자라나 우즈베키스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손자에게 고려인의 역사와 정체성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시락장물을 끓였다.

빅또리아 할머니에게 시래기 말리는 일이 이렇게 중요했기 때문에 나와 딜노자, 네팔 출신의 수니따는 식당이 문을 닫은 어느날 할머니를 돕기 위해 모였다. 오가며 안면이 익은 사이였지만 나와 말을 해본 적이 없는 수니따는 한국에 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어가 몹시 서툴렀는데 그 탓인지 본래 성격인지 몰라도 얌전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십대 초반 특유의 밝은 기운이 있었고, 그 모습이 내 눈에는 예쁘게 보였다.

우리 셋은 빅또리아 할머니의 지휘에 따라 평상에 둘러앉았다. 무청을 다듬은 후에는 손질된 잎사귀를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마당에는 빅또리아 할머니가 일찌감치 내놓은 두개의 버너 위 큰 솥에 담긴 물이 끓고 있었고, 아르뚜르는 우리 사이를 오가며 참견을 했다. 바구니가 다 찰 즈음 솥에서 김이 솟아올랐다. 솥 안이 궁금해 기웃거리는 아르뚜르에게 빅또리아 할머니가 말했다.

“불 가까이 가지 마라.”

그러면 아르뚜르는 시무룩해져서 우리가 앉아 있는 평상 곁으로 돌아왔다.

알렉싼드르가 마당에 들어선 것은 정오쯤 되었을 때였다. 아르뚜르가 그를 반기며 달려가자 알렉싼드르는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주었고 우리를 향해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가 올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나는 뜻밖의 등장에 생각보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조금 놀랐다. 그 역시 내가 있을 줄은 몰랐던 듯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오늘 장사 안 하나봐요.”

그가 우리 쪽을 향해 말했다.

“네. 오늘 시래기 말려요.”

딜노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거의 끝났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같이 밥 먹어요.”

그가 오자 일이 조금 더 수월해졌다. 그는 익힌 무청을 식히기 위한 찬물을 들통에 받아왔고, 솥을 번쩍 들고 가 뜨거운 물을 수돗가에 버렸다. 우리는 지붕 아래 줄을 매달았다. 그런 다음 한 김 식힌 무청의 물기를 짜낸 후 그늘에 널었다.

일이 어느정도 끝났을 때, 계속 부산하게 돌아다니던 그가 평상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옆에 걸터앉았다. 다시금 그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우리 집 옥상에 페인트를 칠해주러 다녀간 이래 처음이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있을 뿐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팔이 내 팔에 닿을 듯 우리의 몸은 가까웠고,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그의 몸에서 나는 열기가 내게로 전해졌다.

날씨가 좋아서, 일을 끝마친 우리는 은행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무를 잔뜩 넣어 국을 끓였고 배추를 큼직하게 썬 뒤 생고추를 갈아 만든 양념을 넣고 겉절이처럼 버무렸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엔 수니따가 앉아 알렉싼드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렉싼드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몇번이나 되묻던 수니따가 끝내 알아들을 수 없었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종소리처럼 청량하고 맑았다. 수니따의 웃음소리에 알렉싼드르의 광대가 솟아오르고 눈꼬리가 슬며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마른 잎을 거의 다 잃은 은행나무 아래 앉아 있는 그들은 생기 있어 보였다. 몇번이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나이. 그들을 보는데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 같은 슬픔이 밀려왔다. 알렉싼드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아 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밥을 먹기 전, 신이 난 아르뚜르가 다 같이 셀카를 찍자고 해서 우리는 단체사진도 찍었다. 찍히고 싶지 않아 처음 몇번은 내가 찍어주겠다며 거절해봤지만 아르뚜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결국엔 나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날씨도 좋고 흥 나는데, 보드까 100그램 할까?”

사진을 찍고 나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빅또리아 할머니가 말했다.

“100그램이요?”

내가 되묻자 빅또리아 할머니와 딜노자가 웃었다. 할머니는 들깨꽃이 피었을 때 따다가 병 속에 담가둔 보드까를 가지고 나왔다. 딜노자와 수니따는 술을 마시지 않아서 할머니는 알렉싼드르와 자신의 잔에만 술을 따랐다.

“마셔볼래요?”

온종일 내게 말을 건네지 않던 알렉싼드르가 불쑥 내게 잔을 내밀었다.

“네.”

나는 나를 응시하는 알렉싼드르의 시선을 느끼며 보드까가 든 술잔을 받아 코끝에 가져다 댔다. 잔을 가까이 대니 은은한 들깨꽃 향이 코끝에 스쳤다. 한모금 삼키자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불길처럼 흘러내렸다.

“어때?”

빅또리아 할머니의 질문에 내 반응이 궁금한지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뜨거워요.”

인상을 쓰며 대답하자 모두가 웃었다.

“뜨겁다니. 술은 차가운데!”

아르뚜르가 까불거리며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날 저녁, 나와 알렉싼드르는 또다시 시골길을 함께 걸었다. 그렇게 된 것은 내가 술에 취한 것 같다고 빅또리아 할머니가 걱정하자 알렉싼드르가 데려다주겠다고 자청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해가 짧아져 사위가 조금씩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누군가 잔불을 피워 짚단을 태우는지 연기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초가을까지 시끄럽던 풀벌레 소리들도 잦아져 사방은 우리의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취하지 않았는데…… 고마워요.”

그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나 역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말하는 것이 아주 편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왜요?”

그는 대답하는 대신 그저 빙긋 웃었다.

그가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아르뚜르가 다 같이 셀카를 찍자고 했을 때 왜 거절했느냐고 물은 것은 우리 집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내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쳐다보자 그가 “아까 사진 안 찍어도 된다면서 우리를 찍어주겠다고 그랬잖아요”라고 덧붙였다.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늘 그랬듯 얼버무리는 대신 농담을 가장해 진심을 흘려보내고 만 것은 어쩌면 술을 마신 탓일지도 몰랐다.

“이 정도 나이를 먹으면…… 사진 찍히는 게 싫어지는 거예요. 하나도 예쁘지 않으니까.”

농담처럼 가벼운 투로 말하려 했는데 실패한 것 같아 민망해져 나는 열쇠를 찾는 척 고개를 숙였다.

“예뻐요.”

그의 낮은 목소리가 여름날의 빗방울처럼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예뻐요.

그는 나의 전 남편인 S도 내게 해주지 않은 말을 했다.

 

*

 

예쁘다는 말.

그즈음 예쁘다는 말을 달고 사는 건 아르뚜르였다. 아르뚜르가 예쁘다고 늘 감탄하듯 말하는 대상은 말리까였다. 말리까와 함께 있을 때 아르뚜르는 수줍어졌고, 이제 아르뚜르에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말리까 누나와 함께 식당에서 공부하는 일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말리까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요일에 식당에 오지 않으면 아르뚜르의 얼굴은 먹구름처럼 시무룩해졌고, 말리까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면 연등처럼 빛났다. 아르뚜르는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년이었다. 그런 아르뚜르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빅또리아 할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을 때야, 좋을 때.”

빅또리아 할머니가 아르뚜르와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주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놀리지 말라며 심통을 부리던 아르뚜르가 식당 한구석에서 까무룩 낮잠이 든 어느 오후였다. 빅또리아 할머니는 아르뚜르가 깰까봐 조용조용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엌에서는 토마토페이스트가 든 수프가 냄비 속에서 뭉근히 끓어올랐다.

 

빅또리아 할머니가 김블라지미르를 처음 만난 1996년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구소련이 붕괴되고 5년이나 흐른 시기였지만 1996년의 우즈베키스탄은 여전히 독립의 첫날처럼 어지럽고 불안정했다. 까리모프 대통령의 장기독재가 시작됐고,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권위 속에서 배워야 했다. 새로 바뀐 화폐는 계속해서 그 값어치를 잃었고, 미처 새 화폐로 바꾸지 못한 장롱 속 루블 다발이 어느날 아침 갑자기 종잇조각이 되어 전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불행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학교에서는 러시아어 교과서를 치우고, 우즈벡어로 된 새 교재를 펼쳤다. 이슬람사원에서는 오랜 침묵 끝에 기도가 다시 울려퍼졌으나 도시에는 전기와 빵이 모자랐다. 식료품점에선 설탕, 기름 같은 기본적인 식품조차 줄을 서도 손에 쥘 수 없는 날이 많았다. 사람들은 설탕 없는 차를 마시며, 가난과 불안의 격변기를 견디고 있었다.

빅또리아 할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밭을 갈고 양배추와 수박을 키우면서 그 시절을 견뎠다. 구소련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할머니가 병원을 그만두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소련 붕괴 뒤 흔들린 국가재정 때문에 월급을 돈으로 받지 못하고 밀가루와 기름으로 받게 됐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친척들은 고향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가꾸던 텃밭을 일구라고, 농사를 지으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조언을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붕대와 주사기를 들던 손으로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농작물을 기르는 일은 힘들었지만 할머니에게는 절망할 겨를이 없었다. 몇해 전 할머니는 남편을 폐기흉으로 잃었고,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을 처음 본 건 내가 고향 돌아온 지 몇달 아니 됐을 때였어.”

그는 할머니가 텃밭에 나가 일을 할 때마다 하루에 두번씩 그 앞을 지나던 남자였다. 일용직으로 다른 이들의 농사를 도와주는 댓가로 먹을 만큼의 농작물을 받아다 생계를 유지하는 사내였는데, 오십대 정도 되어 보이는 그 사내는 할머니가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외지인이라 더 눈에 띄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자가 텃밭에 앉아 울고 있던 할머니에게 러시아어로 말을 걸었다.

“무를 양배추 옆에 심지 말아요. 서로 벌레가 붙으면 같이 망치니까. 줄을 한 고랑 띄우고 심으면 피해가 덜해.”

몹시 건조했던 여름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남자는 할머니가 텃밭에 나가 있으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대단한 말은 아니었고, “수박이랑 오이는 같이 놓으면 넝쿨이 엉켜버려요. 딩야2는 모래흙 쪽에 따로 두는 게 더 달게 여물지”라거나 “여기 사람들은 다 같이 한날에 심으려 하는데, 조금씩 늦춰 심으면 장에 나올 때 값이 더 좋을 거요” 같은 말이었다. 농사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육체를 쓰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남자였다. 할머니가 사랑에 빠진 건 그런 말들 때문이 아니라 사내의 두 손 때문이었다. 할머니 옆에 앉아 있을 때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상처투성이의 가늘고 고운 손. 그 두 손이 새처럼 날아들어 할머니의 마음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가족들과 두만강을 건넜던 사내의 아들로, 구소련 시절 농업학을 공부해 국영농장 관리자로 일했던 김블라지미르가 일용직을 전전하며 상처투성이 손으로 입에 풀칠을 해야 했던 것은 모두 역사 탓이었다.

소련이 아직 소련이었을 때, 할머니와 김블라지미르는 모두 고려인 출신의 소련사람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저마다 국경이 세워졌기 때문에 할머니와 블라지미르는 느닷없이 우즈베키스탄 사람과 타지키스탄 사람으로 나뉘게 되었다. 타지키스탄에 내전이 일어난 이후 블라지미르는 그마저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그는 전쟁을 피해 여권 하나를 들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도망쳤지만 우즈베키스탄 경찰들은 그의 붉디붉은 구소련 여권은 이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며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소련 시절의 신분증만을 지닌 소수민족 출신의 난민이란 그들에게 성가신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또 한번 나라를 잃은 이후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던 남자의 아들에게 세상은 창살 없는 감옥이 되었다. 국적을 잃었기에, 그는 우즈베키스탄 밖은커녕 동네 밖으로도 나갈 수 없었다. 합법적으로 일할 수도,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미래를 꿈꿀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남자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자신을 두고 한국으로 떠나는 것을 이해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미래를 꿈꿀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에.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남자를 두고 빅또리아 할머니가 한국으로 떠나던 날, 남자는 흙길을 오래오래 걸어와 할머니에게 곱게 말린 꽃 한송이를 주었다. 그것은 새빨간 장미 한송이였다. 할머니의 할머니가 봇짐 속에 볍씨를 넣어왔듯 빅또리아 할머니는 그 꽃을 소중히 짐 속에 넣은 채 국경을 넘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눈물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알렉싼드르가 국경을 넘었을 때 그의 가방에 들어 있던 것은 볍씨도, 말린 장미도 아닌 라즈베리잼 한병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그가 우리 집 창틀을 고쳐주러 왔던 밤에 들었다. 창틈으로 드는 한기에 처음 잠에서 깨었을 때까지만 해도 알렉싼드르를 부를 생각은 없었다. 붙여둔 테이프가 바람 탓인지 자꾸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잤는데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샤를 불러.”

감기가 걸린 채로 봄밭식당에 갔던 날 목소리가 잠긴 내게 뜨거운 차를 주며 빅또리아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저녁 나는 할머니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혹시 집에 한번 들러줄 수 있어요?

그에게 내가 직접 먼저 연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번 들를게요.

눈이 조금씩 내리다 말다 하던 11월 마지막 주의 어느 저녁 그는 트럭을 끌고 우리 집에 왔다. 시래기를 말렸던 날 이후 해안마을의 대단지 아파트 실내 도장을 하느라 열흘간 떠나 있던 알렉싼드르는 C읍으로 막 되돌아온 참이었다. 고작 세번째 방문이었는데도 그는 잘 아는 집에 온 사람처럼 편해 보였다. 알렉싼드르가 창마다 돌아다니며 라이터를 켜자 몇몇 창 아래에서 불꽃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불꽃이 흔들리고, 불꽃의 잔영이 알렉싼드르의 얼굴 위로 일렁였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창틀과 벽 사이를 실리콘 총으로 쏘고 벌어진 창틈도 보수한 뒤 알렉싼드르는 처음 우리 집 수도를 고쳐줬던 날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가 왔을 때, 우리 집 부엌에는 사과가 있었다. 이른 아침, 산책을 하던 중 수확이 끝난 사과밭에서 주워온 낙과들이었다. 텅 빈 사과밭에는 붉고 탐스러운 사과들이 도로변 쪽 가지에 두어개 빨간 전구처럼 달려 있었다. 어떻게 아직도 매달려 있을 수 있을까 싶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직박구리에게 쪼아 먹히기라도 한 건지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사과나무 아래는 아무도 주워가지 않은 낙과들이 단내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러 발치에 떨어진 사과 중 가장 예쁜 것들을 골라 담았다. 한쪽 면은 좀 상했지만, 반대면은 여전히 매끄럽고 단단했으며, 무엇보다 향기로웠다.

“잼 만들려고요?”

창틀을 고치고 나가려던 알렉싼드르가 싱크대에 놓인 사과들을 발견하고 물었다.

“아, 그냥 아까워서 주웠는데 잼을 만들어도 되겠네요.”

“내 어머니도 이렇게 떨어진 과일들을 주웠어요.”

알렉싼드르가 내게 처음으로 공유해준 그의 소중한 추억은 잼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가 말하길, 그의 어머니는 사과나 살구, 체리 같은 과일들로 잼을 만들어두었다가 추운 겨울에 손님이 오면 사람들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따뜻한 홍차와 함께 내놓곤 했다.

“어머니가 만드는 잼은 러시아식이라 한국 잼처럼 과일이 으깨지지 않고 모양이 살아 있었어요.”

열아홉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한동안 잼을 만들던 기억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고 했다. 그가 부엌 찬장 깊숙한 곳에 있던 어머니의 잼 한병을 발견한 건 몇년 후 한국에 오기로 결심하고 집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유리병에 적힌 어머니의 필체를 보는 순간, 어머니가 불 앞에 서 있던 뒷모습이, 끓어오르던 시럽의 달콤한 냄새와 어머니가 주걱으로 떠서 맛보게 해주었던 갓 만든 잼의 향기로운 맛이 일제히 되살아났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따서 먹는 대신 평생 그대로 간직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국에 올 때도 어머니의 라즈베리잼을 가져왔다. 깨지지 않도록 조심히, 수건으로 감싸서. 그 잼은 여전히 그의 찬장 속에 있었다.

“우리 집에선 홍차를 마실 때 잼을 차에 넣거나 곁들인 빵에 바르지 않고 작은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문 채 뜨거운 차를 마셨어요.” 알렉싼드르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잼 맛이 차와 달콤하게 섞이고 잼 향이 입안에 오래 남아요. 홍차가 있으면 한번 그렇게 먹어봐요. 정말 맛있어요.”

평소엔 과묵한 그가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설탕이랑 향신료를 사러 가야겠어요”라고 말한 건 정말로 잼이 만들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날이 밝으면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려던 그가 잠시 머뭇대더니 내 쪽으로 돌아섰을 때에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랑 지금 같이 갈래요?” 알렉싼드르가 말했다.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상대의 눈을 늘 응시하는 그가 그 말을 할 때는 시선을 떨궜다.

 

그날 밤 그의 제안에 외출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라거나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원래의 나는 누군가에게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으면 거절하는 편인데도 말이다. 지난 수십년간 그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아빠에게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는, 계획을 벗어나거나 안전하지 않은 일을 피하려는 기질과 엄마를 위해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성공에 대한 강박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진로를 정할 때도, 친구를 사귈 때도, 심지어는 연애를 할 때도 나는 한번도 충동적이거나 무모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수줍은 사람처럼 내 눈길을 피하며 “나랑 지금 같이 갈래요?”라고 말했던 그 밤, 나는 급한 일도 아닌데 그의 제안에 “좋아요”라고 답하고 있었다. 내 말에 그의 얼굴이 라이터의 불빛이 일렁일 때처럼 붉어졌다.

우리는 그의 트럭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트럭 안이 생각보다 협소한 탓에 단둘이 앉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자 조금 긴장이 됐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나는 빅또리아 할머니나 말리까 같은 공통의 화젯거리를 찾았다. 그는 내가 말리까나 아르뚜르와 보내는 시간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듯했고, 운전하면서 내 이야기에 집중하는 그의 진지한 얼굴이 좋았다. 나는 눈이 내린 들판을 보며 이곳에 얼마나 머물지 몰라서 차를 사지 않았는데 그 탓에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는 이야기 같은 것도 했다.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준 직후여서 그런지 아니면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탓인지 전보다 그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대화를 나누던 중 신호대기에 걸렸을 때 대시보드 위에 놓여 있던 목장갑을 글러브박스에 넣으려고 그가 팔을 뻗었다. 그의 팔이 내 무릎을 스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다가 피식 웃었다.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남자 때문에 긴장을 하다니. 트럭 안은 히터를 틀어서 따뜻했고, 어둠이 가득한 하늘 위로 설탕 가루 같은 눈발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그의 곁에 앉아 있는 내내 영문을 알 수 없게 가슴이 조용히 떨렸다.

알렉싼드르가 나를 데려간 곳은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식료품점이었다. 거기에선 말리까의 오빠 우미드가 일하고 있었다. 봄밭식당에서 자주 보는 레뾰시까빵과 마르꼬프차 양념, 키릴문자로 쓰인 과자들과 병에 든 체리절임 같은 것들이 놓인 진열대 사이를 거닐며 내가 시나몬과 넛맥, 바닐라빈, 설탕 따위를 찾는 동안 알렉싼드르는 계산대 근처에서 우미드와 이야기를 나눴다. 마주 보고 서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멀리서 보면 둘 중 영락없는 한국사람은 알렉싼드르였다. 하지만 눈이 아니라 귀로 그들을 구분하는 사람에게 둘 중 한국인은 우미드였을 것이다.

내가 계산대로 다가가자 우미드가 “말리까의 과외선생님이시죠?” 하고 알은 척을 했다. ‘과외선생님’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당황했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나는 정정하지 못했다.

“잘 부탁드려요. 말리까는 꼭 대학에 가야 하니까요.”

이제라도 고등학교에 돌아가라는 알렉싼드르의 말에 그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전 글렀어요.”

 

거리에는 이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 묶여 있는 개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꼬리를 흔들었다. 눈이 착하고 털이 아주 많은 개였다. 알렉싼드르는 쭈그리고 앉아 눈이 얇게 쌓인 바닥 위에 배를 드러내며 누운 개를 오래 쓰다듬었다.

“개는 참 사랑스럽죠.”

그렇게 말하며 알렉싼드르가 개를 일으켜 세운 뒤 개의 등에 묻은 눈을 손으로 털어주었다. 그러고 있는 그의 머리 위로 어린 개의 솜털 같은 눈송이가 고요히 내려앉았다.

그날 밤 우리에게는 우산이 하나밖에 없었다. 마트에 들어가 우산을 하나 더 사야 하나 망설이던 내가 어느새 그가 내 쪽으로 기울여 든 우산 아래로 들어간 건 유난을 떨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차피 공영주차장까지는 그리 멀지도 않았으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의 우산을 나눠 쓰고 주차장까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엔 일정한 간격이 있었고, 그의 어깨엔 내 어깨보다 눈이 더 많이 쌓였다.

“조금 더 가까이 와요.”

그의 점퍼 소매 끝을 잡아 내 쪽으로 조금 끌어당겼다. 그러자 내 팔에 그의 팔꿈치가 닿았다.

 

*

 

우산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눈송이들의 기척.

눈을 밟아가며 멀어지는 행인들의 발소리.

흩어지는 투명한 입김.

 

어째서일까.

하나의 우산 아래서는 상대의 숨소리가 증폭되어 들리는 것은.

이렇게 쉽게 수줍어지는 것은.

 

*

 

그가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것은 트럭을 세워둔 공영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는 시동을 걸어 히터를 틀어주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그가 점퍼 안에서 군밤봉지를 꺼냈다.

“손이 빨개서요.”

나는 그제야 장갑을 챙기지 않은 내 손이 조금 빨개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쥐고 있으면 좀 따뜻해질 거예요.”

 

그날 자정 무렵, 그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사과의 상처 난 부분을 도려낸 후 껍질을 벗겼다. 잘게 자른 사과와 설탕, 향신료를 냄비에 넣고 열기에 얼굴이 달아오른 채 불가에 서서 오래오래 주걱으로 저었다. 그런 다음에는 그가 말한 것처럼 홍차를 우려서, 뭉근하게 익었지만 사과의 형태가 남아 있는 잼을 입에 문 뒤 홍차를 마셨다. 뜨겁고 어지럽게 달콤한 맛이 입안에 천천히 퍼졌다. 슬프지도 않은데 울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홍차 탓에 그날 밤엔 잠을 좀처럼 이룰 수가 없었다.

 

*

 

이어지는 며칠 동안 나는 밀린 번역 교정작업을 했고, 일요일에는 말리까의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 봄밭식당에 갔다.

—뭐 하니.

문제집을 풀고 있는 말리까의 가르마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문자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호준이었다.

—그냥 있어.

그냥 있는 건 아니지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전골이 먹고 싶은데 같이 먹으러 가주라.

며칠 전 송아에게 교정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메시지를 보냈다가 호준이 이따금씩 만나자고 연락을 해온다는 이야기를 전했더니 송아는 호준이 내게 작업을 거는 거라고 말했다. 그럴 리가. 우리는 그냥 오랜 친구고 이 나이에 이혼한 사람들은 같이 놀 사람 찾기가 쉽지 않으니 내게 연락하는 걸 거라고 답을 보내자 송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모티콘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연애세포가 다 죽었구만.

잠시 후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재혼은 몰라도 연애는 해야지.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송아의 마지막 메시지 탓인지 호준에게 선뜻 답을 보내기가 조심스러워져 휴대전화를 밀어두었다. 호준과 나는 어린 시절 같이 곤충채집을 하거나, 길을 잃고 손을 잡은 채 동네를 돌아다니던 사이였지만 지금 우리 사이엔 접점이 거의 없었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이따금 만나 그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것뿐이었다. 그가 어떤 이유로 이혼했는지는 몰랐지만 호준에게 아이가 하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이와는 이주일에 한번씩만 만나는 모양이었는데, 호준은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나와 있을 때 아이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개다리춤을 추거나 눈을 감은 채 혀를 내밀고 있는 아이는 호준의 어린 시절을 빼닮아 있었고, 그런 아이를 보여줄 때 호준이 눈은 슬픔과 기쁨으로 번갈아 얼룩졌다.

일이 없을 때, 호준은 차를 끌고 몇번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차 없이는 갈 수 없는 근교의 맛집이나 새로 연 까페에 나를 데려가주었는데, 식당에 갔다가 까페에 가는 것은 S와 연애시절 했던 데이트와 비슷한 루틴이었다. 호젓한 까페에 남자와 단둘이 앉는 건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런 시간들을 데이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송아의 말처럼 호준이 내게 작업을 거는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온실처럼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는 까페나 정원이 아름답게 조성된 까페에 호준과 내가 같이 있을 때, 그는 이따금 어릴 때와 달리 인생엔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투성이라고 한숨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게.”

그러곤 우린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인생이란 건 원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며,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그건 인생이 우리가 쥔 고삐에 순종적으로 묶여 있는 척을 해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된 최초의 순간은 1992년 봄이었다. 아빠가 이민을 계획했을 때 그 속에는 1991년 3월 LA 남부 한인 리커스토어에서 총성이 울려 주스를 사려던 흑인 여자아이가 절도범으로 오인돼 죽는 일도, 1992년 4월 고속도로에서 과속으로 잡힌 흑인 운전자를 무참하게 폭행했던 백인 경찰들이 무죄로 풀려나는 일도 없었지만 그런 사건들은 차례로 일어났으니까. 분노가 극에 달한 흑인들에 의해 한인들이 날마다 쓸고 닦던 가게들이 약탈당하고, 상점들이 불타고, 군인 출신들의 지휘에 따라 한인들이 총으로 무장하던 그 일주일 이후 아빠의 인생은 고삐를 끊고 제멋대로 갈기를 휘날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아빠가 엄마의 반대도 무릅쓰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빚까지 내어 주식에 투자를 한 건 근면하고 성실한 노동이 얼마나 쉽게 잿더미가 되는지를 그때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제 아빠는 볕이 잘 들지 않는 거실에 혼자 앉아 낮이고 밤이고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발언을 일삼는 유튜브를 보는 노인이 되었다. 리커스토어를 부수고 불태우는 흑인들과, 그들이 모든 것을 약탈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개입도 하지 않고 거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백인 경찰들의 망령이 아빠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그 망령들로부터 지켜준 수호신은 제퍼슨 선생님이었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영어를 하지 못해 늘 주눅들어 있는 내게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남들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연습용 바이올린을 빌려주었던 음악선생님. 내게 바이올린 현의 이름을 알려주고, ‘반짝반짝 작은 별’을 영어로는 ‘Twinkle twinkle little star’라 한다는 것을,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갑니다’의 가사가 ‘The itsy bitsy spider went up the water spout’이라는 것을 알려준 제퍼슨 선생님은 내가 알게 된 최초의 흑인이었다. 그녀를 떠올리면, 서양배를 닮은 부드럽고 완만했던 그녀의 몸과 울고 있던 내게 그녀가 건네주었던 후르츠롤업의 새콤달콤함이 생각난다. 함께 놀 친구가 없어 혼자 텅 빈 교실에 앉아 있으면 그녀가 나를 음악실로 불러내어 들려주곤 했던 바이올린 선율도. 그리고 그녀가 매일 나를 보며 지어주었던 벌꿀 같은 미소 덕분에, 내 눈물을 닦아주던 다정한 손길 덕분에, 나는 1992년 이후에도 아빠를 사로잡은 망령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당시 폭동의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이 모두 흑인을 차별한 사람들이었다고 믿지 않듯이, 그 폭동의 난리 중에도 한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함께 싸워준 흑인들도 있었다는 말을 믿는다.

 

*

 

어린 시절 알렉싼드르의 배를 쓸어내리며 “우리는 원동에서 살다가, 카자흐스탄 실려 와서, 카자흐스탄 사람들, 우리를 돌봐주고”3 하고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던 알렉싼드르의 할머니에게 제퍼슨 선생님의 바이올린은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가져다준 빵이었을 것이다. 강제이주 이후 갓 낳은 아이와 함께 우슈또베의 허허벌판에 버려졌던 시절, 집이 없어 땅을 판 뒤 갈대로 얼기설기 엮은 지붕을 얹은 토굴 속에서 겨울을 나던 고려인들을 위해 카자흐스탄인들이 당나귀에 싣고 와 건네준 빵.

한국의 모든 것이 아직 낯설던 시기에, 알렉싼드르를 위한 바이올린과 빵은 파키스탄계 동료 하싼이 건네준 파스 한장이었다.

 

*

 

하싼과 어울리던 그해 알렉싼드르는 한국에 막 도착한 상태였고 포장 이삿짐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국어도 능숙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는 상태로 낯선 나라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원래 육체노동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H2비자를 발급받는 구소련지역 동포들이 보통 그러하듯 육체노동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이삿짐을 나르며 사장이 임차해준 숙소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런 그가 한국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건 하싼이었다. 그가 주로 같이 일하던 동료는 하싼을 포함해 세명이었는데, 알렉싼드르나 다른 몽골인 동료들과 달리 피부가 짙고 눈매가 깊은 하싼은 눈에 띄었다. 그 탓에 고객들은 하싼을 가장 경계했고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그나 몽골인 출신 인부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한국사람과 가까운 건 하싼이었다. 그는 파키스탄 출신이지만 아버지를 따라서 다섯살에 국경을 넘어 한국에 와 20년이나 살았던 것이다.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하싼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빚까지 내어 국경을 넘은 건 조금만 돈을 내면 한국에 가서 큰돈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브로커에게 속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하싼의 아버지는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이미 불법체류자가 되어 있었다.

자라는 내내 무색무취해 보이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 탓에 하싼은 수줍음이 많았고 사람들 앞에서 절대 나서는 법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알렉싼드르는 하싼의 옆에 서기 전까지는 그의 키가 자기보다 큰 줄도 몰랐는데, 그건 하싼이 늘 옹송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누구나 매번 귀를 기울여야 했고, 부당한 일을 겪어도 하싼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그의 성격이 그렇게 된 건 체류 자격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불법체류 사실이 발각되면 추방되니까,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맞아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도 신고를 하면 안 된다던 아버지의 당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싼드르에게 하싼은 사실상 처음 사귄 한국인 친구나 다름이 없었다. 알렉싼드르에게 국물을 먹을 때는 ‘시원하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을, 소주를 따기 전엔 병 뒤를 쳐야 하고, 막걸리를 마실 땐 병을 흔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 하싼이었으니까.

하싼은 일을 끝내면 동료들과 짬뽕 먹으러 가는 걸 좋아했다. 술을 마시면 알렉싼드르가 모르는 한국노래를 흥얼거렸고, 이삿짐을 옮길 때는 창틀을 넘어 사다리차에 올라타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나중에 그들이 친해졌을 때는 일에 익숙해진 알렉싼드르가 사다리차를 타기도 했다. 그가 사다리차에 타서 3층이나 4층 높이의 창까지 오르면, 짐을 받기 위해 창가에 서서 기다리던 하싼은 빗자루나 밀대 따위를 사용해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쿡쿡 찌르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걸곤 했다. 그런 장난을 칠 때, 늘 불 꺼진 창 같던 그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

 

알렉싼드르가 내게 하싼의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건 우리가 사과잼 재료를 같이 사러 시내에 간 날로부터 닷새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과잼을 만들어 따로 한병을 담아두면서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날 때 건네주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어느 오후 그가 언젠가처럼 예고도 없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요.”

검은 점퍼 차림에 회색 목도리를 턱까지 두른 그가 현관 앞에 서서 말했다. 나는 문을 연 채로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지금 가야 볼 수 있는데 같이 갈 수 있어요?”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건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를 따라가기로 결정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코트를 찾아 걸쳤다.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일을 하는 나를 누군가가 본다면 이런저런 말들을 할지도 몰랐지만, 나는 나의 이런 태도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 스스로는, 내 마음은 그렇게 믿으려 했다.

그가 나를 트럭에 태워 데리고 간 곳은 안진시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였다. 산자락이 강을 감싸고 있었고, 강변에는 갈빛 억새들이 무성했다.

“저번에 차가 없어 가본 곳이 별로 없다 했잖아요. 그래서 여기 모를 것 같아서요.”

그는 숨겨놓은 보물을 꺼내 보이는 아이처럼 조금 신나 보였다.

“처음 와봐요.”

그러자 그의 얼굴이 조금 더 의기양양하게 상기됐다.

“여긴 이 시간대가 진짜 아름답거든요.”

우리는 트럭에서 내려 같이 강 쪽으로 걸었다. 도로와 강 사이에는 야트막한 비탈이 있었고 비탈을 따라 내려가면 자갈밭이 이어졌다. 늦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초록빛 풀과 야생화가 지천에 핀다는 비탈에는 얼마 전 내린 눈이 아직 쌓여 있었다. 비탈을 내려가며 내가 머뭇대자, 앞서 가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혹시라도 얼굴이 붉어진 걸 들킬까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여름엔 푸른빛이 넘실거려 캠핑족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했는데 겨울의 강은 고요히 아름다웠다. 사방이 온통 흰빛이었고 청동거울처럼 매끄럽고 검은 강이 흰빛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아름답네요.”

“잠시만 더 기다려봐요.”

그가 내게 보여주고 싶어하던 것은 해질녘의 풍경이었다. 산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하자 겨울의 강이 금빛으로 물들면서 얼어붙은 강의 표면을 따라 아름다운 잔무늬가 생겼다. 하늘과 강의 색은 대칭을 이루며 진초록에서 코발트색으로 점점 번져갔다. 갈빛의 억새들이 석양을 받아 짙푸른 강을 배경으로 반짝였다. 우리는 검은 실루엣으로 남은 산과 나뭇가지 뒤로 석양이 지는 풍경을 숨죽이고 바라봤다.

“눈이 내릴 때까지 이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니 운이 좋네요.”

해가 점점 가라앉는 걸 보다가 나는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예요?”

그가 잠깐 사이를 두고 마치 표정을 들키기 싫은 사람처럼 내 쪽이 아니라 정면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의 말투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그는 그저 이따금씩 나의 집을 고치러 와주는 사람이었고 그게 아니면 친구의 친구일 뿐이었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 속내나 과거를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눈 쌓인 강가의 해질녘이라 그런지 조금은 솔직해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혼하면……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영어학원에…… 취직을 했었어요.”

나는 그가 그랬듯 산자락만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 학원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가르치던 아이들 중에 유난히 날 잘 따르는 아이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간 그 아이가…… 작년에…… 자살을 했어요……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요.”

지금껏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입 밖에 내놓자 한기가 느껴졌다. 내 옆에 서 있는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왜 자꾸 이 사람 앞에서는 진심을 말하게 되는 걸까.

“저랑 공부할 때도…… 아이가 스트레스를 아주 많이 받고 있다는 게 느껴졌었거든요…… 영어학원 말고도 학원을 아주 많이 다녔어요…… 그 아이에겐…… 저랑 하는 수업을 못 따라올 때를 대비해주는 대학생 과외선생님도 있었고요…… 아이의 부모는 프랜차이즈 파스타집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아이를 의대에 보내고 싶어했어요.”

나는 다시 오래전의 영어수업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아이가 “I want to be ant”라고 답을 했던 어느 봄으로. “I want to be an ant”라고 고쳐주자 “I want to be an ant”라고 기계적으로 따라 말하던 아이가 “Why?”라는 나의 질문에 “Because elephant can kill me”라고 눈을 피하며 답을 했던 그 봄. 그때 너는 고작 열살이었는데.

“아이가…… 그렇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그 아이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으면서…… 너무 괴로웠어요. 분명히 아이가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은 알았는데…… 학부모에게 이야기를 해봤자 전혀 듣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몇마디를 하다가 그냥 그만두었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죽었다고 하니까…… 아이들 앞에서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서 있는 게 너무 무서워져 말이 잘 안 나왔어요…… 그래서 여기에 오게 된 거예요. 잠깐 쉬려고…… 그래서 언제까지 있을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상한 충동에 이끌려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막상 끝마치고 나니 내가 느닷없이 줄줄이 쏟아낸 말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왼쪽 팔을 감싸며 최대한 가볍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를 가장해 덧붙였다.

“갑자기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해서 미안해요…… 못 들은 척해줘요.”

어디선가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까치인가. 바람이 제법 찼다. 나는 코트를 여몄다.

“이해해요.”

그때 그가 말했다.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 천천히, 혼잣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죽음이라면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알렉싼드르가 목도리를 풀더니 몸을 돌려 내게 둘러주었다.

“그 형의 이름은 하싼이에요.”

그가 둘러준 목도리에서는 그의 체취가 섞인 겨울의 냄새가 났다.

 

늘 조용하던 하싼이 뜻밖의 말을 꺼낸 건 신도시의 한 아파트로 신혼부부의 이삿짐을 옮겨다주던 어느 봄날이었다. 황사가 심해서 눈이 따가웠고 입안에서는 서걱서걱 모래알이 씹히는 것 같았던 것을 알렉싼드르는 기억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짬뽕을 먹고 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하싼 형이 그러더라고요. 지금 자진 출국하면 불법체류 기록 남지 않게 해주는 특별 기간이라는데 출국하는 게 좋을지 아닐지 모르겠다고요.”

알렉싼드르가 거기까지 말하더니 눈을 발끝으로 툭툭 찼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미등록상태의 아이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유예기간이 끝나 단속의 대상이 됐다. 지금 말리까가 누리고 있는 한시적 구제제도조차 시행되기 전이라 한국에 오래 살았어도, 심지어는 한국에서 태어나 공교육을 받았더라도 불법체류자인 부모를 둔 아이들에게는 합법적으로 체류할 길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키가 아주 크고 조용한 한 파키스탄 출신 남자를 상상해보던 내 머릿속에 문득 알렉싼드르가 우미드와 말리까를 계속 신경 쓰는 건 하싼 때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렇냐고 묻는 대신 그저 조금 낡은 그의 베이지색의 둥근 신발 코를 바라보며 뒷말을 기다렸다.

 

하싼은 날이 갈수록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그즈음 하싼의 마음속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멈추지 못하는 회전문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번갈아 나타났다고 알렉싼드르는 기억했다. 하싼이 제일 바라는 건 물론 어떤 식으로든 한국에 남아 평생을 사는 거였다. 하싼은 파키스탄어도 거의 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다섯살 때 떠난 이후 파키스탄에는 가본 적도 없었으니까. 속아서였다고는 하지만 아버지가 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니 아버지는 잘못이 있다 쳐도, 그는 그저 아버지를 따라왔을 뿐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이 평생 불법체류자로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은 가혹한 일이라고 하싼은 말하곤 했다. 그러니 범죄자 취급받으며 평생 살지 않을 방법이 이것뿐이라면 떠나야 한다고. 하지만 둘만 있게 되었을 때 하싼은 떠나야 하는 것은 알지만 행여나 자진 출국했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알렉싼드르에게 털어놓았다. 한국을 떠나서 평생 낯선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건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그 형이 나라면 어찌하겠냐고 물었어요.”

여기까지 말하더니 그는 고통스럽다는 듯, 기억을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잠시 흔들었다. 사위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주변에서 들려오던 차 소리도 멀어졌다.

“나에게 어떻게 고향을 떠나 한국에 올 용기를 냈느냐고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말하면 하싼은 떠났다. 자기라면 떠났다 돌아오겠다는 알렉싼드르의 말이 그의 출국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은 건 아니었을 거라고 알렉싼드르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송별회 하던 날에도 다들 1, 2년이 지나면 또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말이 느려졌다. “그런데 형은 못 돌아왔어요. 출국할 때 행정적인 실수가 있었는지, 아니면 형이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심사 중에 서류에 불법체류 기록이 남았다고 했어요.”

자신의 체류를 허락해주지 않는 한국만을 집이라고 느꼈기에 파키스탄에 도착해 살게 된 하싼은 고독하고 불행해했다고 알렉싼드르가 말했다. 느닷없이 유배지로 쫓겨난 사람처럼. 버림받은 고아처럼. 그곳에서 적응해보려 애쓰며 하싼은 이따금씩 알렉싼드르에게 소식을 전해왔다. 노새가 끄는 수레와 오토바이가 뒤엉킨 흙먼지 날리는 골목과 그 양옆으로 늘어선 저층의 황토색 벽돌집들을 묘사하며 하싼은 말하곤 했다. “언젠가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긴 할까?” 하싼으로부터 연락이 끊긴 것은 그가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고 1년 정도 흐른 후였다. 알렉싼드르는 몇년 후에야 하싼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만난 옛 동료로부터 전해 들었다.

“하싼 형이 아직 연락을 하던 언젠가, 그곳에선 전력이 비싸 하루에도 몇번씩 정전이 된다고 말했거든요. 한여름에 정전이 되면 선풍기나 냉장고도 멈춰버리고 실내가 45도까지 올라간다고요.” 알렉싼드르가 말했다.

“그래서 너무 덥고 숨이 막혀 밖으로 나가긴 하는데 바깥도 덥고 숨 막히는 건 마찬가지였대요.”

그렇게 말하고 알렉싼드르는 나지막이 덧붙였다. 하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데, 그때 그가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고.

“어쩌면 하싼 형은 자기의 삶도 그렇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숨을 쉬려고 문을 열고 나가고 또 나가도 맞닥뜨리는 건 계속되는 출구 없는 감옥일 뿐이라고요.”

해가 이제 산 너머로 거의 넘어갔고, 물새들이 떼를 지어 수면 위를 달리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여기 처음 와서 혼자 있을 땐 형이 날 참 많이 챙겨줬는데……”

울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목소리가 우는 것처럼 들려 나는 그를 돌아다봤다.

“그러니까 나도 조금은 그 맘을 알아요. 만약 내가 가지 말라 했으면, 숨어서 기다리다보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고 나도 오래 괴로웠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

 

우리 가족이 미국에 살았고 아직 모든 것이 망가지기 전, 엄마 아빠와 샌디에이고에 간 적이 있었다. 큰아빠네 집에서 나와 우리만의 아파트로 이사를 간 직후였거나 엄마 아빠가 리커스토어를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는 미국에 온 이래 처음으로 차를 끌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1월의 샌디에이고는 한국의 봄날처럼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이 온화했다.

샌디에이고에 간 것은 엄마 아빠가 내가 좋아하던 혹등고래를 보여주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샌디에이고에 도착해 주차장에서 집에서 싸 온 김밥을 한줄씩 먹은 후 우리는 보트를 타러 갔다. 인공의 공원이 아니라, 바다에 출몰하는 진짜 혹등고래들을 볼 수 있는 곳까지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이 바다가 동해랑 연결되어 있는 거야.” 관광객들로 붐비는 새하얀 갑판 위에서 그렇게 말했던 건 아빠였던가, 엄마였던가. 이제는 모르겠지만 바다 위에서 바라본 수평선이 아주 멀어 보였고, 광활한 바다의 끝에 한국이 있다는 것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던 기억은 난다. 넘실대며 범람하던 1월의 햇빛과 새파란 바닷물 위를 수놓던 하얀 빛무늬들. 모처럼 즐거워 보였던 엄마 아빠의 얼굴. 엄마는 가장 아끼는 꽃무늬 실크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하얀 거품을 샴페인처럼 터뜨리며 물살을 가르는 배의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고. 떨어질까 걱정하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드넓은 바다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잊고 살았던 그날을 내가 떠올린 건 석양을 보고 알렉싼드르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트럭을 세워둔 도로로 이어진 비탈 앞에서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비탈을 다 오른 뒤에도 내 손을 놓기는커녕 트럭에 도착할 때까지 아플 정도로 세게 쥔 채 성큼성큼 걸었을 때, 굳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운전하는 그와 내가 정적이 흐르는 트럭에 앉아 있을 때, 나는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게 될 커다란 혹등고래가 바다 위에서 우아하게 솟구쳐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황홀한 긴장 속에서 기다리며 온 감각을 집중했던 그날처럼, 나는 그의 작은 기척에도 모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으니까.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고마웠다고 말한 뒤 목도리를 돌려주고 돌아서려는데 내내 침묵하던 알렉싼드르가 “잠깐만요” 하며 나를 부르곤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잠시 망설이던 그의 길고 아름다운 손이 아주 천천히 내 뺨에 살짝 닿았다. “낙엽이 붙어 있어요.”

 

그날 밤 내가 알게 된 것은 차가운 손끝도 때로는 불에 달궈진 듯 뜨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숨결이 내 이마에 닿았을 때 내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뛸 수 있는지를,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끝이 내 뺨에 닿을 때 처음으로 현이 그어진 바이올린처럼 내 안에서 얼마나 낯선 감각이 퍼져나가는지를 나는 알았다.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날 밤 나와 헤어지고 돌아가던 길 트럭 안에서 그가 내게로 되돌아오기 위해 핸들을 꺾으려다 몇번이나 참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 내내 내게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입술을 깨문 탓에 그의 입안에서는 피맛이 났다는 사실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1부 끝. 연재를 마칩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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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동주 「자화상」 부분.
  2. 향이 짙고 단맛이 강한 우즈베키스탄 토종 멜론.
  3. 「머나먼 원동」 가사 부분.
  4. 이후 이야기는 계간 『창작과비평』 홈페이지(magazine.changbi.com)에서 온라인 연재로 이어집니다.